부승민의 눈빛은 초점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떠올리며 그리워하기라도 하는 듯싶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높게 솟은 눈썹뼈가 아이홀 밑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검은 눈동자가 더욱 그윽해 보이게 만들었다.온하랑은 마음속으로 부승민을 변태라 욕보였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부승민을 째려보았다.부승민은 화를 내기는커녕 낮게 웃었다.부승민의 밝은 웃음소리가 오히려 온하랑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그녀는 다급하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시아야, 방학 숙제 있어?”부시아는 고개를 들고 큰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있어요, 근데 다 엄청 간단한 것들이에요.”“알겠어.”“작은 아빠, 저 지금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저도 그 술자리 가고 싶은데.”부시아가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보며 그의 팔을 살살 흔들었다.“시아야, 말 들어야지. 너 집에 데려다주고 작은 아빠가 과자 사줄게.”“저 과자 별로 먹고 싶지 않아요. 저도 술자리 가고 싶다고요.”“안 돼.”“흥, 작은 아빠랑 말 안 할래요!”부시아는 작은 볼에 바람을 넣고 삐진 티를 내며 고개를 온하랑 쪽으로 홱 돌렸다. 그리고는 온하랑을 끌어안고 말했다.“작은 엄마, 저 오늘 밤에도 작은 엄마랑 같이 자고 싶어요.”온하랑은 아이의 부탁에 하마터면 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을뻔했다.그녀는 몇 분 정도 망설이더니 결국 부드럽게 아이의 부탁을 거절했다.“시아야, 오늘 밤에는 작은 엄마가 엄청나게 늦게 돌아갈 것 같은데 혼자 자는 게 어때?”하지만 부시아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기다릴 수 있어요.”“하지만 작은 엄마가 너무 늦게 돌아가면 너를 챙겨줄 수 없을 거야.”“저 스스로 챙길 수 있어요. 혼자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고, 저 혼자 옷도 벗을 수 있어요. 만약 정말 늦게 돌아오시면 저 먼저 자고 있을게요!”“…”온하랑의 침묵을 보던 부시아는 작은 입술을 말아 물며 불쌍한 표정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작은 엄마, 혹시 제가 싫어진
온하랑이 다급하게 손을 빼냈다.“이번 한 번만 봐준다.”그녀는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번에도 거절 실패다. 멀어지기 실패.됐다. 이게 마지막인 걸로 하자.다음엔 무조건 칼같이 거절할 것이다.운전기사가 물었다.“대표님, 차 돌릴까요?”“아뇨, 우선 저택에서 시아 옷이나 몇 벌 챙기고 하랑이네 집으로 가죠.”“네.”차가 단지 앞에 멈춰 서자 온하랑이 차에서 내려 부시아의 옷가지를 담은 가방을 꺼내 직접 부시아를 위층까지 올려주었다.그 시각, 김시연은 한가하게 소파에 누워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온하랑이 돌아온 것을 발견한 김시연이 입을 열었다.“걔 돌려보내…”김시연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하랑의 뒤로 부시아가 보이자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온하랑도 어딘가 민망해져 감히 김시연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가방만 소파 위에 놀려놓은 채 말했다.“시연 씨, 오늘 밤 시아 좀 부탁할게요. 저는 일이 좀 있어서 늦을 것 같아요.”부시아의 앞에서 김시연은 망설임 없이 빠르게 대답했다.“그래요, 얼른 가봐요. 시아야, 오늘은 아줌마랑 같이 밥 먹자!”“네.”부시아도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줌마, 잘 부탁드립니다.”온하랑은 혹시라도 부시아가 심심해할까 아이패드까지 꺼내 부시아에게 전해주며 몇 마디 당부하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엘리베이터를 나서자마자 온하랑의 휴대전화에 카카오톡 메시지 알림음이 떴다.알림을 확인해보니 김시연이 보낸 째려보는 듯한 이모티콘이 떠 있었다.“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보시죠? 왜 아직도 안 돌려보낸 거예요?”온하랑이 몇 초 정도 침묵을 유지하더니 곧이어 말을 꺼냈다.“안심하세요. 이게 정말 마지막이니까.”안심은 개뿔.김시연은 부승민이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부승민은 지금 온하랑이 아이에게 약하다는 것을 이용해 부시아로 그녀를 유혹 중이었다.“확실한 거예요?”“확실해요.”온하랑은 확고하게 대답했다.“좋아요. 믿어줄게요. 아 맞다,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있길
온하랑이 옷걸이 쪽으로 걸어갔다.부승민이 그쪽으로 다가가 패딩을 꺼내 그녀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스튜디오를 나서자 뼈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밀려 왔다.“얼른 차 안으로 가자.”부승민은 차가운 온하랑의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빠르게 부승민의 손을 피했다.그는 조금 어색한 듯 빠른 걸음으로 차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부승민은 온하랑을 도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온하랑은 치마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부승민은 바로 차 문을 닫고 다른 한쪽 문으로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는 히터가 틀어져 있어 바깥과는 사뭇 다른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패딩을 벗고 부승민의 뒤를 따랐다.문 앞까지 도착했을 때, 부승민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팔을 살짝 굽히고는 온하랑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손을 들어 부승민의 몸과 팔 사이에 생긴 작은 틈에 밀어 넣고는 로비로 들어섰다.“부승민 대표님.”이번 술자리 주최자가 바로 달려와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이렇게 와주시다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부승민의 수하에 있는 자산이 만만치 않게 많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과학 기술 분야에서 신예로 떠오르고 있는 금영 테크, 첨단산업개발 구역 랜드마크 건물을 인수한 부동산 회사, 그리고 시내 중심의 가장 높은 사무실 건물과 강남 시내를 통틀어 최고의 무역액을 달성한 금정 빌딩까지.따라서 그가 BX 그룹 대표이사직에서 물러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부승민을 추앙했다.“과찬이십니다.”“이쪽은 온하랑 씨, 맞으시죠?”이 씨는 온하랑에게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미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마 전에 금방 이혼한 둘이 지금은 함께 모임에 참석하고 있으니 말이다.그렇다는 건 합의로 진행된, 평화롭게 이루어진 이혼이었겠지?“안녕하세요.”온하랑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안으로 드시죠, 부 대표님.”“네.”부승민과 온하랑은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오랜만입니다, 부 대표님.”“어머, 대표님 동
온하랑이 고개를 들어보니 한 손에 와인잔을 든 민지훈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설마 했는데 정말 누나였네요. 잘못 본 줄 알았어요!”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본 온하랑의 입가의 미소가 번졌다.“지훈 씨가 왜 여기 있어요?”만약 온하랑이 오늘 부승민과 함께 여기에 온 것을 안다면, 아마도… 민지훈의 시선이 굳었다.“민지훈?”“아… 친구가 초대해서요.”황급히 정신을 차린 민지훈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물었다.“누나, 누나는 왜 여기 있어요??”온하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초대장을 받았는데, 시간이 남아서 왔어.”말을 마친 그녀가 지나지 않게 로비를 쓱 훑어보았다.로비에는 서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붐벼 온하랑의 시선을 방해했다.민지훈은 아마도 부승민이 이곳에 있는 것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말했다.“저도 비슷해요. 누나, 뭐 좀 먹을래요? 제가 갖다 드릴게요.”“같이 가요.”온하랑은 몸을 일으켜 민지훈과 함께 음식 코너로 향했다.그녀는 민지훈이 음식 코너로 가던 중 혹시라도 부승민을 마주칠까 봐 겁이 났다. 그러니 같이 가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민지훈의 집중력을 분산시켜야 했다.온하랑은 두 조각의 작은 케이크와 쿠키를 집었다.그녀는 와인 잔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다시 휴대전화로 옮겼다.민지훈은 바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접시를 받아들었다.“누나, 이거 제가 들어 드릴게요.”“고마워요, 지훈 씨는 안 먹어요?”온하랑은 와인 잔을 들고 가볍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잠시 멈칫한 민지훈은 집게로 쿠키 두 조각을 집었다.“같이 담아도 괜찮아요?”“괜찮아요. 같이 담죠.”민지훈은 먹고 싶은 쿠키, 케이크와 초콜릿 몇 조각을 한데 담았다.다시 소파로 돌아가는 길, 온하랑은 몰래 주위를 둘러보며 부승민의 실루엣을 찾아냈다.언제부터인지 그의 근처에는 젊은 여자 한 명이 더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아주 좋은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온하랑은
거대한 그림자가 온하랑을 덮치자 엄청난 압박감이 몰려왔다.남자의 몸에서는 짙은 알코올 냄새가 풍겨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숨을 참았다.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데도 온하랑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선수를 쳐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당당하게 맞섰다.“부승민, 너 미쳤어? 날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뭘 하려는 거야?”부승민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블랙홀처럼 깊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부승민에 의해 두려움을 느낀 온하랑이 있는 힘껏 그를 밀어내 보았지만 어떻게 하든 절대 밀리지 않았다.부승민은 얇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음 섞인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모른다고? 그럼 나 왜 피한 건데?”온하랑은 부승민의 동공을 똑바로 응시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고 대꾸했다.“내가 언제 피했는데?”“아, 안 피하셨다?”부승민이 재밌다는 듯 쳐다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의 섹시한 목울대가 위아래로 울렁거렸다.온하랑은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안 피했어.”부승민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그럼 이렇게 된 김에 민지훈 얘기나 좀 해보자. 그런 인재라면 분명 금영에서도 탐내고 있을 거야. 나한테 추천해 보는 게 어때?”부승민의 말에 온하랑은 2초 정도의 침묵을 유지했다.“걘 금영 테크에서도 캐스팅을 받았어. 하지만 결국 선택한 게 BX였을 뿐이야. BX한테 더 마음이 갔다는 증거 아니겠어? 지금 찾아가봤자 소용없을걸?”“네가 날 도와줄 생각이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네. 내가 직접 찾아가야지.”말을 마친 부승민은 곧바로 문손잡이를 잡더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갈 기세였다.온하랑의 낯빛이 변하더니 다급하게 부승민을 붙잡았다.“부승민!”부승민이 눈을 내리깔더니 온하랑을 흘겨보았다.“왜?”온하랑이 한참이나 머뭇거렸다.부시아는 단순히 어린 아이일 뿐이니 민지훈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부승민이라면 얘기가 달랐다.만약 민지훈이 그녀가 부승민과 함께
부승민도 자신의 손이 이미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그는 꽉 잡고 있던 온하랑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온하랑은 드디어 부승민이 자신을 놓아주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가슴께가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승민이 온하랑의 일자넥으로 된 하이엔드 드레스의 옷깃을 손으로 잡아 찢어버렸다. 그는 큰 손으로 온하랑의 가슴을 주물렀다.정말 말랑하네.“… 읍, 으응…”막아낼 틈도 없이 들어온 손길에 온하랑의 목에서는 의도치 않은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분위기가 점점 달아올랐다.그 순간,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화장실 문 앞에 멈춰 섰다.문고리를 잡아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밖의 남자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안에 사람 있나요? 문 좀 열어주세요.”부승민의 어깨를 밀어내던 온하랑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고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부승민 역시 동작을 멈추더니 끊겼던 이성을 빠르게 되찾았다.그는 다급히 눈을 떠 온하랑과 눈을 마주쳤다.맑게 빛나던 그녀의 진한 눈동자는 물속에 잠겨있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포개어지고 호흡이 뒤섞였지만 둘 중 그 아무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문밖의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자 포기하고 돌아섰다.부승민이 곧바로 고개를 들어 온하랑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해,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어.”온하랑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고개만 숙였다.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부승민은 온하랑의 시선 끝에 자신의 큰 손이 있어서는 안 될 위치에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그는 데이기라도 한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떼어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온하랑에게서 등을 돌렸다.“우선 너 옷 정리부터 해.”온하랑은 부승민이 흐트러트린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문의 잠금장치를 풀어 밖으로 나갔다.화장실에 남겨진 부승민은 몸에 남아있는
온하랑은 화장실로 가 온 매무새를 정리하려 했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이런 장면이 펼쳐질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운도 없지.온하랑은 마음속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며 자리를 떴다.온하랑의 뒷모습을 보자 부승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뒤따라 갔다. “부승민!”오미연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부승민의 팔을 다급하게 잡았지만 이내 매정하게 내팽개쳐졌다.…“누나, 돌아오셨군요.”로비 휴게실에 있던 민지훈은 온하랑의 실루엣을 보자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온하랑은 입꼬리를 내리며 말했다.“미안해요,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데리러 올 사람 있어요?”“아니요.”민지훈이 몸을 일으키고는 말을 이어나갔다.“그럼 누나, 제가 데려다드릴까요?”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하려 했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긍정의 의사였다.“좋아요.”민지훈은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제가 가서 직원분한테 차 좀 보내 달라고 얘기해볼게요.”“응.”부승민이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목격한 것은 바로 온하랑과 민지훈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연회장을 나가는 모습이었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승민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주위에 서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부승민의 새카만 눈동자가 공허해지더니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으드득 소리를 내었다.“고작 민지훈 주제에 감히 내 것에 손을 대?”…차가 동네 입구에 도착했다.패딩으로 몸을 감싼 온하랑이 차에서 내렸다.온하랑과 함께 민지훈도 차에서 내렸다.“누나, 같이 올라갈까요?”온하랑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음에요, 지훈 씨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요. 직원분도 얼른 퇴근하셔야죠.”민지훈이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차에 올라탔다.“그럼 저도 먼저 가보겠습니다.”민지훈은 차에 올라타며 빨리 차 한 대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잘 가요.”온하랑이 손을 흔들고는 동네 안으로 들어섰다.1월의 차가운 밤공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온하랑
“손놔!”온하랑은 그의 손가락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하랑아, 사랑해. 정말 너무너무 사랑해. 네가 다른 남자와 함께 가는 걸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넌 모를 거야...”온하랑은 가볍게 비웃었다.“부승민, 재밌어? 사랑이 뭔지는 알아? 사랑은 헌신이야. 점유욕이 아니라! 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곧 새로운 삶을 살 거야. 그러니까 날 좀 놔주면 안 돼? 내가 재결합하지 않겠다고 하면 영원히 이렇게 매달릴 거야?”부승민은 그대로 굳었다. 마치 심장에 비수가 꽂혀 피가 흐르는 기분이었다.그는 시선을 내려 슬픔 가득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쳐다보았다. 목에는 모래가 가득 찬 것같이 먹먹했다.“민지훈이야?”그녀가 민지훈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민지훈은 그녀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맞아.”부승민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드러냈다. 낮게 깐 목소리에는 불쌍함이 가득했다.“하랑아, 제발 날 속이지 말아줘. 네가 민지훈을 좋아한다니.”“하.”온하랑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부승민 씨,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난 민지훈을 좋아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젊고 밝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안 될 일이라도 있나요?”부승민은 심장이 그대로 깨지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그 사람이 허명진 같은 사람이면...”“아니. 해외에서 살아온 사람이라서 내 신분을 전혀 모른 채로 나랑 만난 거야.”“전에 물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지금은 마음이 변한 거야?”그의 말투에서 조급함이 드러났다.“말했었지. 내가 왜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매달려야 하냐고.”“하지만 민지훈은 너랑 전혀 어울리지 않아.”“내가 좋아하면 되는 거야. 민지훈한테 날 먹여 살릴 돈이 없다고 해도 내 전남편은 통이 커서 이혼할 때 많은 돈을 줬거든. 그 돈을 쓰면 되지.”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물었다.“하랑아, 일부러 날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