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집에 돌아온 뒤 거실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하지만 송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엎드려 테이블 아래를 봤을 때, 아니나 다를까 그 동글동글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온하랑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온하랑을 보고 나서야 송이는 안심된 듯 테이블 밑에서 나왔다.“야옹-”온하랑은 허리를 굽혀 송이를 품에 안은 뒤 어루만져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소파 위에 앉아 한쪽으로는 송이를 쓰다듬어주며 한쪽으로 핸드폰을 꺼내 본가에 전화를 걸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전화는 연결되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가사도우미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하랑 아가씨?”“아주머니, 할머니 집에 계세요?”“네. 바꿔드릴게요.”가사도우미는 옆에 일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부승민을 힐긋 쳐다보고는 전화를 할머니한테 넘겼다.“하랑이니? 귀국한 거냐? 해외는 어땠어? 재밌었어? 할미한텐 어쩐 일이냐?”할머니는 전화를 받고 부승민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할머니, 아무 일 없어요. 할머니 보러 가고 싶은데 집에 안 계실까 미리 전화해 여쭌 거예요.”“이 할미 집에 있으니까 얼른 오렴. 나도 보고 싶단다.”부승민은 그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온하랑의 목소리는 못 들었지만 온하랑이 무슨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온하랑이 묻고 싶은 건 할머니가 집에 계시느냐가 아니라 부승민이 집에 있느냐 없느냐였다.“맞다, 할머니. 집에 또 누구 다른 사람 있어요?”온하랑은 명백한 의도를 갖고 물었다. 이 다른 사람이 누구를 뜻하는지 할머니는 제꺽 눈치챘다. 할머니는 부승민을 한 번 쏘아보고는 칼 같이 말했다.“없지, 당연히! 나랑 아줌마만 있어.”“알겠어요. 저 지금 갈게요.”온하랑은 전화를 끊고 송이한테 밥을 준 뒤 집을 나서 운전대를 잡았다.그 시각 본가, 할머니는 전화를 내려놓고 부승민을 째려보며 말했다.“너 아직도 안 가고 뭐 하니?”부승민은 어이가 없었다.“할머니...”“나 불러도 소용없어. 난 네가 하랑이 괴롭히
스캔들이 터지고 난 뒤 온하랑의 계정은 많은 팔로워가 생겼다. 그 전에 게시했던 이혼확인서 사진 아래 댓글 창에는 많은 사람이 그녀를 오해하고 안타까워하고 응원했다.사실 온하랑은 다시는 이 계정으로 로그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이 너무 발달한 이 세계에서는 아주 사소한 일까지 인터넷에 널리 퍼졌고 심지어는 “인스타 수사”라는 말까지 생기고 있었다.온하랑은 아직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배후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암암리에 조사했다가 들통나면 아버지와 같은 꼴이 될까 봐 걱정됐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자신을 언론에 노출해 퇴로를 마련해야 했다. 만약 자신이 죽어도 사실이 언론에 알려질 수 있게.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서우현이 뭔가를 알아냈는데 프로그램 문제라든가 내부 스파이의 방해라든가 이러한 것들 때문에 재심이 수리가 안 된다고 했을 때, 그녀의 유명세를 이용해 유관 부문에 압력을 넣어 재심 처리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인터넷은 한마디로 양날의 검이었다.유명세는 계속 유지했어야 했다. 그게 바로 온하랑이 계정을 로그인하기 싫으면서도 다시 계정을 운영하기로 한 이유였다. 송이 사진을 두 장 올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많은 이들이 송이가 귀엽다고 칭찬했고 예전 일을 언급하며 위로하는 이들도 있었다.많은 댓글 중 누군가 오주 여행 공략을 물어왔다. 아마 김시연 쪽에서 이미 온하랑 삼인방이 여행을 다녀왔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 온하랑은 잠시 고뇌하다 그녀와 김시연의 오주 여행기를 정성 들여 작성해 게시했다. 그때 찍은 사진들도 도시의 명승지에 따라 나열해 같이 게시했더니 또 많은 좋아요가 달렸다....이튿날 아침 여섯 시 이십 분, 검은색 카이엔이 공항 주차장에 들어섰다.부승민은 차에서 내려 터미널로 들어가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길게 쭉 뻗은 몸매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부선월은 직접 부시아가 비행기에 오르는 데까지 배웅한 뒤 그에게 문
“네.”부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강남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지 내내 두리번거렸다. 터미널을 나서자 부시아가 버둥거렸다.“삼촌, 내려줘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삼촌한테 안기기 싫어? 예전에 삼촌한테 안기기 좋아했잖아.”부시아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옷 너무 두꺼워서 안겨있는 게 불편해요.”부승민은 아이를 바닥에 내려주고 가방을 벗겨냈다.“내가 들어줄게.”부시아는 가방을 벗어 부승민에게 건넸고 그의 새끼손가락을 잡은 채 폴짝폴짝 앞으로 뛰어갔다. 차에 도착하자 부승민은 뒷좌석 문을 열어 부시아를 안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문을 닫고 반대편으로 돌아가 뒷좌석에 앉았다. 부시아는 운전석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열성스레 웃으며 인사했다.“기사 아저씨 안녕하세요!”“꼬마 아가씨, 안녕하세요~”기사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갑시다.”부승민이 차 문을 닫았다. 기사는 시동을 걸며 농담조로 말했다.“부 대표님, 정말 이런 우연이. 작은 아가씨께서 대표님을 조금 닮으셨습니다. 누가 보면 정말 대표님 딸인 줄 알겠어요!”부승민은 참지 못하고 부시아를 바라봤다. 아이는 짤막한 두 다리를 흔들며 사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부승민이 몇 번 더 바라봤을 때 아이의 얼굴에서는 온하랑의 얼굴도 살짝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부승민은 어이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았다. 고모는 분명 부시아를 보육원에서 입양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부승민은 부시아가 자기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온하랑 사이에서 낳은 딸. 그러면 아이를 봐서라도 온하랑은 마음이 약해져 그와 이혼하지 않았을 수도....아이는 강남 시가 신기했는지 창문에 기대 눈을 팽글팽글 돌리며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무언가 이상한 걸 보면 속속들이 캐물었다.“우와! 저기 개구리맨이 있어요!”부시아는 저 멀리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부승민이 고개를 돌려봤을 때 광장 옆에서 어떤 사람이 개구리 탈을 쓰고
“할머니가 얘기하는 걸 들은 적 있어요. 할머니 울기도 했어요. 내가 울지 말라고 위로해 줬고요.”“시아 잘했네.”부승민은 부시아를 칭찬했다.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는 바람에 부승민조차도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어차피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못 볼 것이 뻔하니 부선월은 돌아오지도 않았다. 아마 그녀는 설이나 되어야 돌아올 것이다.“그럼 삼촌이랑 숙모는 같이 살겠네요!”부시아는 부승민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부승민의 안색이 굳어졌다.“시아야. 지금 삼촌이랑 숙모 같이 안 살아.”“왜요? 부부는 같이 사는 거 아니에요? 증조할아버지랑 증조할머니처럼요.”부시아의 눈에 의혹이 가득했다.“삼촌이랑 숙모가 이혼했거든. 시아는 이혼이 뭔지 알아? 그러니까 삼촌과 숙모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닌 거야.”부시아의 주먹만 한 얼굴에 망연한 표정이 떠올랐다.“숙모 그렇게 예쁜데 삼촌은 왜 숙모랑 이혼한 거예요? 삼촌 혹시 다른 아줌마랑 결혼하려고 그래요?”다른 아줌마란 추서윤을 뜻했다. 그리고 추서윤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아니야, 삼촌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은 마음 없어. 삼촌도 숙모랑 헤어지기 싫어, 숙모가 삼촌이랑 헤어지고 싶어 하는 거야.”“정말이에요?”아이는 안 믿긴다는 얼굴로 입을 뿌죽 내밀었다.“잘생긴 남자들은 다 카사노바라니까. 안 믿어요.”“...”“삼촌이 하는 말 다 진짜야.”아이는 눈을 찡그린 채 그를 바라보고는 말했다.“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요. 할머니가 다른 아줌마를 좋아하고 숙모을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리고 할머니가 삼촌이 다른 아줌마 좋아한다고 그랬어요.”어...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시아야, 그건 할머니가 오해하신 거야. 삼촌이 좋아하는 건 숙모야. 삼촌이 왜 널 속이겠어?”부시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맞아, 삼촌이 날 속일 리 없지. 부시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오, 알겠어요. 숙모가 삼촌 안 좋아하는 거구나!”아이는 작게 한숨 내쉬고는 어른처럼 수심
“시아 안녕? 착하지. 얼른 와서 앉아.”할머님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리 준비한 어린이 스마트워치를 부시아에게 건넸다.“이건 증조할머니가 주는 만남 선물.”아이는 조금도 낯을 가리지 않는지 소파에 책가방을 벗어두고 할머님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았다. 그리고 아이는 책가방을 열면서 말했다.“고마워요, 증조할머니. 저도 증조할머니한테 드릴 선물을 준비했어요!”말과 동시에 부시아는 가방 안에서 작은 철제 함을 꺼냈다.“자, 증조할머니. 이건 제가 직접 만든 쿠키예요. 얼른 드셔보세요!”“아이고, 우리 시아 이렇게 어린데 벌써 쿠키도 만들 줄 아는 거야? 장해라!”할머님은 철제 함을 열었다. 안에는 금빛이 감도는 작은 쿠키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는데 모양틀로 찍어낸 걸 보아낼 수 있었다. 토끼 모양도 있었고 고양이 모양도 있었는가 하면 원형이나 숫자 1 같은 여러 가지 모양들이 있었다. 할머님은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넣었는데 너무나도 단단해 하마터면 인공치아가 부서질 뻔했다.“너무 맛있죠?”부아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눈은 크고 동글동글 세상 순수해 보였다. 할머님도 아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너무 맛있구나, 시아야. 정말 대단해. 그런데 증조할머니는 과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삼촌한테 먹어보라고 갖다주렴.”“네!”부시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짤막한 다리를 부지런히 놀리며 철제 함을 들고 일인용 소파 앞에 뛰어와 부승민에게 건넸다.“삼촌 쿠키 드세요.”“고마워.”부승민은 쿠키를 건네받아 입에 넣었다. 씹던 그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지만 그는 티 내지 않고 할머님을 흘깃 쳐다봤다.할머님은 웃으면서 부시아의 로스앤 생활에 관해 묻고 있었고 부시아는 열성스레 대답하고 있었다. 부시아는 고작 네 살밖에 되지 않았어도 말주변이 좋고 사유가 민첩해 말하는 게 청산유수요, 매우 조리가 있어 많은 이들의 귀염을 받았다.할머님은 또 부시아한테 물었다.“시아야, 올 때 가방 이거 하나만 들고 왔어?”“네네.”부시아는
아이는 부승민의 목을 끌어안으며 흥분에 겨워 칭찬했다.“와! 삼촌 진짜 대단해요! 정말 좋아!”“삼촌이 한 손으로 널 안아서 그래?”“네! 허웅이네 아빠가 맨날 걔를 한 손으로 안아 들었거든요! 시아는 아빠가 없어서 삼촌이 이렇게 안아주니까 아빠 같아요!”그 말을 듣고 부승민은 가슴이 아팠다. 눈앞의 이 꼬마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 생각 없어 보여도 사실 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귀여운 꼬마를, 이 아이의 부모는 어찌 아이를 버리고 떠났을까. 정말 부모로서 자격도 없는 인간들이었다.그 순간, 부승민은 부시아를 입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는 그저 온하랑과 같이 있으려는 마음뿐이었지만 어쨌든 둘 사이에 더 이상 아이가 생기기 어려우니 부시아를 입양하는 건 어쩌면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는 지금 쉬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적어도 온하랑의 마음을 다시 돌린 후에 온하랑의 의견을 물어야 했으니까.두 사람은 본가에 와 점심을 먹었다. 아이는 많이 지쳤는지 졸려서 눈도 똑바로 못 뜨고 있었다. 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시아야, 삼촌이 사는 데로 가자. 먼저 차에서 좀 자고 도착해서 푹 잘래?”“네.”그렇게 부승민은 시아를 데리고 더원파크힐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시아는 제대로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파크힐에 도착했을 때 시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만약 부승민이 미리 게스트룸을 치워두라 하지 않았으면 도우미는 부시아를 봤을 때 하마터면 부승민이 밖에서 데리고 온 사생아라 여길 뻔했다. 부시아는 자신이 지내게 될 방을 확인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이건 뭐예요?”부시아는 어디에서 꺼내왔는지 모르는 고양이 장난감을 들고 와서 도우미한테 물었다.“이건 고양이 장난감이에요. 고양이랑 놀아주는 거.”“고양이 장난감? 고양이? 고양이는 어디 있어요?”“고양이는 사모님한테... 그러니까 숙모한테 있어요.”부시아의 눈이 반짝였다.“저 내일 숙모한테 가서 고양이랑 놀래요!”부승민은 원래 미리 온하랑에게 얘기를 하고 방문하려 했다. 하
“시아야.”온하랑은 미소를 띤 채 허리를 굽혀 부시아를 안았다, 그리고 애틋하게 시아의 볼을 꼬집으면서 물었다.“강남에는 무슨 일로 왔어?”부시아는 온하랑의 얼굴에 뽀뽀를 쪽 하고 턱을 세우고 말했다.“저 방학했어요. 할머니가 일이 있으셔서 저 못 돌보신대요.”부시아는 손에 들린 투명한 상자를 온하랑에게 건넸다.“숙모, 이건 숙모한테 주는 선물이에요.”부시아의 포도알 같은 눈은 테이블 밑에 숨은 송이를 떠올리게 해 온하랑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선물 고마워, 시아야. 숙모랑 올라가서 놀까?”왜인지는 몰라도 부시아를 대할 때 말 못할 친근감이 느껴졌다. 만약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면 시아처럼 귀엽지 않았을까?부시아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네!”“가자, 가서 놀자.”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부승민은 자신이 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거에 머쓱해져 코를 만지며 뒤에서 묵묵히 따라 들어갔다. 온하랑이 두 발짝 걷고 제자리에 멈춰서고는 고개를 돌려 부승민을 바라봤다. 부승민도 우뚝 멈춰 섰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온하랑은 머리를 숙여 부시아한테 말했다.“시아야, 오늘은 하루 종일 숙모랑 놀까?”부시아는 부승민을 곁눈질하더니 두 식지의 끝을 부딪치며 말했다.“삼촌이랑도 놀면 안 돼요? 시아는 삼촌이랑 숙모랑 다 같이 놀고 싶어요.”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기대가 가득 담긴 눈으로 온하랑을 쳐다봤다.“하랑아...”온하랑은 허리를 굽히고 부시아한테 해석했다.“시아야, 삼촌이랑 숙모는 이미 이혼했어. 삼촌은 이후에 자기만의 가정이 있게 될 거야. 그래서 삼촌은 숙모랑 같이 있으면 안 돼. 안 그러면 시아 새 숙모가 기분이 안 좋을 거야.”부승민이 뭔가를 설명하려는 때 온하랑이 그를 째려봤다. 그런데 누가 부시아가 이런 말을 할 줄 알았겠는가.“삼촌, 진짜 새 숙모 데려올 거예요? 숙모는 삼촌이 애지중지 여기는 귀염둥이고 삼촌은 평생 숙모 한 사람만 좋아할 거라면서요? 다 거짓말이었네
“삼촌이 말해줬는데 숙모네 집에 고양이가 있다면서요? 저도 고양이 좋아해요!”“고양이가 있긴 한데 지금 링웜에 감염됐어. 사람한테도 전염될 수 있거든. 시아는 아직 너무 어리니까 고양이와 닿으면 감염될 수 있어.”“링웜이 뭔데요?”여자아이는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의아해서 물었다.“그건 말이지. 피부병의 일종이야.”온하랑은 휴대폰을 열어 인터넷에서 링웜 사진을 검색해 부시아에게 보여줬다.“이거 봐. 이게 바로 링웜이야.”면역력이 강한 어른이라면 전염될 확률이 낮지만, 부시아는 아직 너무 어린아이인지라 온하랑은 괜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링웜이 아무리 치료 가능한 피부 질병이라고는 하지만 부시아가 자기 아이도 아닌데 만약 링웜에 감염되기라도 한다면 부선월의 질책을 피할 수 없었다. 링웜에 감염된 고양이 사진을 본 어린아이는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윽, 너무 징그러워요. 나을 수는 있어요?”“그렇긴 한데 발진 부위가 조금 간지러울 거야”그 말을 들은 부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을 입에 물고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고양이와 놀고 싶은데 어쩌면 좋죠?”온하랑은 빙긋 웃었다.“그럼 놀면 되지. 놀고 나서 목욕하고 소독하면 아마 괜찮을 거야.”부시아는 건강한 아이라 어쩌면 링웜에 감염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시아는 온하랑의 말을 듣고 두 눈이 반짝 빛났다.“좋아요!”부시아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온하랑은 버튼을 눌렀다. 아파트는 제일 위층에 근접해 있었고, 층수가 매우 높았다. 수다쟁이 꼬마는 신나서 떠들었다.“와, 숙모네 집 엄청나게 높아요.”잠시 고민하던 온하랑이 부시아에게 일러줬다.“시아야, 삼촌이랑 난 이미 이혼했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는 숙모 말고 고모라고 부를래?”부시아는 어리둥절해서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고모요?”“그래.”“그럼 앞으로 저한테 고모부가 생기나요?”꼬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이 꼬마는 지나치게 조숙했다.“음...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온하랑이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