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도록 돌아오지 않은 탓에 방 이곳저곳에는 먼지가 내려앉았다. 주방의 조리 기구들도 다 설거지가 필요해 보였다.하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는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소파에 한참을 누워 쉬던 김시연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물었다.“뭐 좀 먹을래요?”온하랑은 김시연이 배달을 시키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입맛을 다시며 함께 배달 앱을 켰다.“전 오리고기 시킬래요.”“그럼 전 치킨 시킵니다... 치느님은 언제나 옳으니까요.”“...”두 사람이 시킨 배달 음식이 순서대로 도착했다.연휴 전에 개봉했던 국내 영화들이 이미 오티티 어플에 들어와 있었다.마침 김시연의 저택에는 작은 영화 상영실이 있었다.두 사람은 배달 음식을 들고 영화 상영실 안으로 들어가 영화를 보며 배달음식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은 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영화를 감상했다.온하랑이 갑자기 다리를 꼬더니 말했다.“너무 좋은데요. 저도 이런 저택 하나 사서 시원하게 혼자 살고 싶네요.”그녀는 김시연의 저택에 계속 머물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더원파크힐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집을 마련해 혼자 사는 것밖에는 없었다.김시연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제가 여기 절반을 팔게요. 그리고 같이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말을 마치자 김시연은 정말 가능성이 보였는지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동쪽에 있는 저쪽 침실 드릴게요. 다른 건 차차 같이 생각해 봅시다. 영화 상영실이랑 헬스장, 주방 같은 공용구역은 같이 쓰고요. 두 명이니까 룸메이트로도 딱 맞네요!”김시연은 온하랑이 이곳에서 사는 것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다만 돈을 안 받는다면 온하랑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것 같아서 해본 말이었다.온하랑이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고양이 키워도 괜찮겠어요?”“괜찮아요! 우리 같이 키워요!”“오케이!”온하랑은 망설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얼마면 될까요?”“깔끔하게 2억만 주세요.”“
온하랑의 차가 더원파크힐로 향했다.근처 도로까지 진입하자 그녀의 운전 속도는 현저하게 느려졌다.어딘가 모르게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온하랑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차가 더원파크힐 대문에 멈춰 섰다.다행히 그녀의 차가 아직 경비실 시스템에 입력되어 있던 상태라 대문을 가로막고 있던 펜스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악셀을 힘껏 밟아 안으로 들어선 뒤 자신이 살던 별장 앞에 차를 주차했다.마당 청소를 하고 있던 아주머니가 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온하랑을 마주치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맞이했다.“사모님, 이제 돌아오신 거예요?”온하랑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아주머니, 저 이미 그이랑 이혼까지 했잖아요. 더는 사모님이라고 부르실 필요 없어요. 오늘은 송이 데리러 온 거예요.”아주머니가 안타까운 듯 “아이고” 하는 탄식을 내뱉더니 답했다.“아가씨, 송이 지금 여기 없어요.”온하랑이 크게 놀라며 물었다“송이가 여기 없다고요?”“네.”아주머니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다 제 탓이에요. 애가 면역력이 너무 약했던 건지 아니면 정원이 너무 습했던 건지 애한테 염증이 생긴 모양이에요. 피부에 자꾸 뭐가 돋더라고... 그래서 대표님께서 송이 동물병원에 입원시키셨어요.”간단한 염증이라면 생명에 위험한 병은 아니었다. 다만 염증 부위의 털이 계속 빠질 것이다. 심할 경우에는 온몸의 털이 다 빠질 수도 있고 완치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더 심할 땐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 게다가 송이 같은 작은 종의 고양이들은 약물복용으로 간에 무리를 줄 수도 있었다.온하랑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그럼 송이가 어느 동물병원으로 갔는지는 아세요?”“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아주머니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대표님께서 어느 병원으로 가신다는 것까지는 얘기 안 해주셔서요.”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대표님은
수화기 너머의 연민우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대표님?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하고 먼저 끊겠습니다.”부승민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책상에 다시 올려놓은 부승민은 여전히 온하랑의 얼굴에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그 눈빛은 그녀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했다.연민우의 머릿속에는 물음표 3개가 띄워져 있었다.‘지금 사는 저택을 팔 생각인 건가?’온하랑은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보아하니 부승민은 이미 생각 정리가 완전히 끝난 모양이었다. 3년간의 결혼생활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부승민은 이제 추서윤과 혼인신고를 할 것이다.마침 온하랑이 원했던 결말이지 않나?그녀도 이 별장을 팔아버리고 싶어 하지 않았나?하지만 왜인지 이 소식을 들은 그녀의 마음은 어딘가 텅 비어버린 듯 공허했다.아마 적응이 덜 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괜찮아질 것이다.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온하랑이 물었다.“이 집, 팔 거야?”부승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온하랑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계획이야.”“그래도 나쁘진 않겠다. 이미 이혼까지 한 마당에 남겨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온하랑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맞다, 방금 무슨 말 하려고 불러 세운 거야?”온하랑의 침착한 태도에 부승민은 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눈빛이 점점 험악하게 돌변하더니 생각도 거치지 않은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오주는 어땠어? 허명진이 잘 해줬나 봐?”온하랑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꼭 이 말을 해야겠어? 그래 관심 가져줘서 고맙네. 역시 젊은 사람 아니랄까 봐 체력 장난 아니더라. 너무 좋았어, 나는!”부승민이 어두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온하랑에게 걸어갔다. 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얘기했다.“너, 무, 좋, 았, 어?”“어.”온하랑이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답했다
온하랑은 송이의 사료, 고양이 모래와 간식들을 차 트렁크에 실었다.혹시나 싶어 뒤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부승민이 쫓아 오지는 않았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딘가 실망스러운 듯한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운전석에 올라탄 온하랑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연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연민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그는 조심스레 수신 버튼을 눌러서 전화를 받았다.“네, 여보세요. 온하랑 씨?”“연 비서님, 송이 지금 어느 동물병원에 있는지 알고 계세요?”‘송이가 누군데?’‘온하랑은 왜 이걸 나한테 묻고 있는 건데?’연민우는 조금 전 부승민이 했던 그 이상한 말을 떠올렸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온하랑 씨.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송이는 다른 비서님께 맡겼거든요. 그래서 송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잘...”“...”온하랑은 어이가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설마 송이가 죽어서 부승민이 이토록 질질 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연민우가 말을 이었다.“제가 그 비서님한테 대신 여쭈어보고 다시 전화 드릴게요.”말을 마친 연민우가 전화를 끊고 다급하게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부승민의 지시를 받은 연민우는 꽤 빨리 온하랑에게 연락했다.전화를 받은 온하랑이 물었다.“송이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온하랑 씨,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그 비서님이 연락이 안 되어서요. 연락 닿는 대로 빠르게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온하랑은 결국 송이를 데려오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차를 몰고 더원파크힐을 벗어나 김시연에게 계좌이체를 해주기 위해 은행으로 향했다.2억이라는 금액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에 은행 직원은 온하랑을 데리고 VIP 휴게실로 이동했다. 은행 지점장까지 나서 그녀에게 차를 대접하고 있었다.온하랑은 건네받은 차를 한 모금
[만약 진지하게 연구 개발에만 집중하고 싶다면 나는 두 회사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랑 네 전공이 맞아떨어지는지를 고려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회사 이념이랑 네 이념이 맞아떨어지는지도 생각해 봐야 하고. 오랫동안 일하고 싶다면 BX를 추천하고 승진을 빨리하고 싶다면 금영을 추천할게.][솔직히 말하면 저는 BX가 더 끌리는 것 같아요. BX의 연구 이념이 저랑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전 대표로 계셨던 부승민 대표님도 수학 계열 전공이셨잖아요. 그분도 소프트웨어 개발해 보셨고.][그 사람은 수학과랑 금융학과 복수전공이었는데.][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전에 그분께서 해외에 계실 때 했던 인터뷰를 본 적이 있거든요. 진심으로 존경스럽더라고요. 누나는 그분 알아요?]“...”[알아.][내 전남편이야.]사실 온하랑은 이 말을 할 기회만 계속 엿 보고 있었다.온하랑이 이미 결혼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민지훈도 더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민지훈이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이혼 사실을 밝히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이 사실은 민지훈에게 꽤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휴대전화 화면 너머의 상대는 오랫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민지훈이 충격을 받은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는 여태껏 온하랑이 유부녀였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온하랑은 어려 보였다.그는 일전 김시연의 입에서 “전남편”이라는 세 글자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남편”이라는 사람이 단순히 온하랑의 전 남자 친구였을 것이라 생각했지 전남편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게다가 맥락으로 따지고 보면 잘못을 저지른 쪽은 부승민 같았다.몇 분 정도 흐르자 민지훈에게서 답장이 왔다.[누나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누나랑 이혼한 그 사람만 손해죠.][우리가 이혼한 이유가 뭐가 됐든 일에 있어서만큼은 책임감이 정말 강한 사람이야. 직원들한테도 친절하
일전 온하랑은 이미 자신의 짐들을 전부 김시연과 함께 등원하는 저택으로 옮긴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옷들만 챙겨 노르빈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캐리어는 여전히 방에 쌓여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이미 이곳에 살기로 했으니 온하랑은 자신의 짐을 제대로 한 번 정리해 보고 싶었다.자신의 모든 옷가지와 생필품들을 정리하니 아버지의 유품만이 남아 있었다.새해 첫 연휴 기간이 지나고 곧 있으면 새로운 한 해인 설날이었다. 이렇게 또 1년이 지나간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 또 1년이 지나갔다.트럭 운전기사는 이미 석방되어 편한 나날들을 보내고 모아놓은 돈으로 해외여행까지 다니고 있다.그에 반해 아버지는 온하랑의 곁을 떠나 차디찬 땅속에 묻혀 영원한 잠에 들었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온하랑은 마음속 한구석이 시큰해지기 시작하더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졌다.그녀는 조심스레 아버지의 노트를 꺼냈다.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랜 속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적힌 익숙한 글씨체는 이미 수도 없이 문질러왔다.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갑자기 그 안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아마도 그 당시 일어났던 납치 사건과 관련된 사진처럼 보였다.온하랑은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그 사진을 줍고는 다시 노트 안으로 집어넣었다.하지만 그녀의 뇌리를 순간적으로 스치는 무언가가 떠올라 넣어두었던 사진을 다시 꺼내 자세히 살펴보았다.사진의 각도가 이상했다. 마치 어느 기둥 뒤에 숨어 몰래 찍은 듯 사진의 한쪽 귀퉁이가 기둥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사진 속에는 두 사람이 찍혀있었는데 한 사람은 옆모습만 찍혀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45도 각도의 옆모습이 찍혀있었다.멀리서 찍은 사진이라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충 구분은 가능한 정도였다.온하랑은 여전히 그 45도 각도의 옆모습에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전에 이 사진을 봤을 때는 못 느꼈던 감정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인질을 구조할 때, 그곳에 기자가 있어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그렇다면 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납치범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걸까?연락을 받은 아버지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현장 근처에 잠입해 몰래 사진을 찍었다는 건가?이건 아버지가 할 만한 짓이긴 했다. 애초에 그 식품 첨가제 사건도 아버지가 스스로 공장에 취직해 간첩 노릇을 한 덕에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아마도 아버지가 몰래 사진을 찍을 때 발각된 것이 분명했다. 그때 납치범에게 단단히 찍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라.아버지는 그때 이미 보도가 가능할 수준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답은 둘 중 하나였다. 인질이 풀려났거나, 죽었거나.노트에 적힌 아버지의 채 완성되지 않은 원고에서알 수 있는 것은 납치 사건 발생 날짜였다. 그 연도의 4월 12일, 그리고 아버지의 기일은 4월 18일이었다.여기서 알 수 있는 건 바로 납치범은 사건이 알려진 후 곧바로 체포된 것이 아닌,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도 여전히 밖에서 자유롭게 활보했다는 사실이다. 그게 아니라면 트럭 운전기사는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인질의 생사, 그리고 납치범의 체포 여부에 대해서 온하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그 시절, 온하랑은 아버지의 사고와 이 사건을 연관 지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아버지가 살인을 당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한다 해도 일전 아버지의 정의적인 보도로 인해 피해를 본 누군가의 소행일 것이라고만 예상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몇 초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더니 아버지의 노트와 사진만 따로 빼두었다.아버지의 사고는 이미 교통사고 법률에 따라 트럭 운전기사가 징역살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순전히 그녀의 추측만으로 경찰에게 수사 요청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시간에 대해서는 그녀 혼자 따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아버지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큰 반응을 불러왔던 만큼 경찰 역시 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
문밖에서 김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랑 씨, 점심은 직접 해 먹을 거예요, 아니면 또 배달시킬 거예요?”온하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노트북을 덮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김시연의 말에 대답했다.“다 괜찮아요.”김시연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배달시키죠.”“좋아요.”온하랑도 요리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김시연과 함께 배달 어플을 보며 점심 메뉴를 정한 후 소파에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납치범에게 이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납치된 그 인질도 보통 인물은 아닐 게 분명했다.온하랑이 정말 이 사건에 대해 깊게 파고들 생각이라면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요?”김시연이 생각에 잠긴 온하랑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정신을 차린 온하랑이 뒤늦게 웃어 보였다.“맞다, 시연 씨. 강남에 아는 사립 탐정 있어요?”“사립 탐정이요? 갑자기 탐정은 왜요?”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김시연이 물었다.“누구 뒷조사라도 하려고요?”온하랑은 절반 정도의 진실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아버지를 죽은 그 트럭 운전사의 뒤를 좀 캐고 싶어서요.”온하랑의 별다른 부가 설명은 없었지만 김시연은 온하랑의 뜻은 이해한 듯했다.부씨 가문에 입양된 후 온하랑에게는 사회로부터 받은 기부금, 온강호가 모아두었던 재산, 그리고 그녀 스스로 노력해서 받아낸 장학금과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며 신청했던 지원금까지 있던 상태라 그녀에게는 돈이라면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니 돈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온하랑은 오직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그 트럭 운전사가 마땅한 대가를 치르기만 바라고 있었다.트럭 운전사에게는 이미 무거운 형량이 내려진 후였지만 온하랑에게 있어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은 몇 년간의 교도소 생활만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큰 죄였다. 그녀가 불만을 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온하랑은 자신의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