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내가 볼 땐 허명진이 하랑 씨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요. 이혼하고 나니 연애운이 마구 쏟아지네요!”온하랑은 이마를 짚었다.“누구든 지금은 그럴 생각 없어요.”“그래요.”김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아까운 인물인데.”“아까우면 시연 씨가 만나보지 그래요?”“나도 그러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상대가 바라보는 사람은 제가 아니네요.”“만약 잘못 짚은 거면요?”“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를 똑같게 대하는 것 같지만, 말할 때마다 하랑 씨만 봐요.”“...”“참, 민지훈이랑 연락하고 있어요?”“자주는 안 하죠.”민지훈이 자주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드물게 답장을 보냈다. 민지훈도 강남 출신이라 혹시라도 나중에 다시 만날 가능성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민지훈의 연락처를 바로 지워버렸을 것이다.“저기, 하늘에 헬리콥터 있어요!” 한 관광객이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감탄했다.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창밖을 내다봤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상공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보였다.가이드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부러워하지 마세요. 프린스턴 비터버러 구간에 도착하면 우리도 헬기를 타고 십이사도 바위를 구경할 수도 있어요.”십이이사도 바위는 대양로와 빅토리아주 전체를 대표하는 풍경으로, 헬기 투어를 할 수 있는 명소이자 대양로의 주요 명소이기도 했다.해가 지기 전에 그들은 아포르만에 도착했다.오늘 밤 이곳에서 야영할 예정이었다.가이드는 텐트를 나눠주며 텐트 설치 방법을 알려주었다.김시연과 온하랑의 텐트를 허명진이 와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온하랑은 거절했다.“괜찮아. 너희 것만 해. 우리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허명진은 제자리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온하랑이 선 긋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텐트 설치가 끝나자 가이드는 자유 활동 시간을 주었다.온하랑과 김시연은 옆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오트웰 등대를 보러 갔다.푸른 바다 옆 산꼭대기에는 하얀 등대가 우뚝 서 있었고, 등대로 가는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양쪽으로 하얀 난간이
등대에서 돌아와 숲속 캠핑장에 도착하니 가이드는 이미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한쪽에 자리를 내고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온하랑과 김시연은 따로 챙겨온 도시락을 꺼냈다. 반찬은 간단하게 스팸구이와 불고기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열악한 야외조건에서 이 정도면 정말 만족스러운 한 끼 식사였다.허명진은 가이드를 도와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있었다.“아가씨들, 커피 드세요.”그는 두 잔의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오더니 김시연과 온하랑에게 건네며 말했다.“더 필요하면 저쪽 가서 받아요.”“네, 감사합니다.”온하랑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가볍게 한모금 마시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그 모습을 보던 허명진의 눈빛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평소 신경이 쇠약한 탓에 장천수는 집을 나서기 전 꼭 수면제를 챙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행을 온 지금은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이 잘 왔다. 장천수는 수면제를 괜히 챙겨 짐만 더 만든 듯한 기분이라며 불평했다.어쨌든 도움은 된 거 아닌가?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조금 전 받았던 커피잔을 손에 들고 다시 한 모급 들이켰다.가이드는 차에서 몇 병의 맥주병을 꺼내더니 모닥불 근처에 앉아읶던 관광객들에게 물었다.“여기 맥주도 있는데, 마실래요?”맥주를 마시겠다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알다. 기껏해야 대여섯명 정도만 가이드의 말에 대답을 했다.가이드는 그들에게 맥주 한 병씩 건넨 뒤, 또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다들 한 잔씩 안 하실 거에요? 이 달빛에 이 야경인데도요?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 맥주 한 병이 무슨 술입니까, 그냥 음료수죠. 마셔도 안 취해요.”가이드의 말이 끝나자 또 몇 명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 병씩 달라며 입을 열었다. 그 중에는 김시연도 포함이었다. 그녀는 맥주 두 병을 받아와 한 병은 온하랑에게 던져주며 말했다.“이런 기회 흔한 거 아니에요, 한 잔 하죠?”맥주병을 받아든 온하랑은 병마개를 돌려땄다.이국 땅의 야외에서, 익숙한 얼굴의 이방인들이 함께 모
온하랑이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허명진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온하랑의 옷을 벗겨냈다.그도 이런 짓은 처음이었다. 허명진의 두 손은 쉴 새 없이 떨려왔다.“더워…”온하랑이 낮게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이마 위를 쓱 훑었다. 하지만 이마에는 땀이라고는 맺혀있지 않았다.몸속의 열기를 배출해내지 못하니 온하랑은 그야말로 불편해 죽을 맛이었다.온하랑의 반응에 허명진은 혹시라도 그녀가 깨어날까 두려워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약효가 돌기 시작한 걸까?아포르만 근처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번화한 작은 마을이 있었다. 커플들이 여행으로 많이 찾는 곳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해외의 오픈마인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을에는 큰 성인용품점이 있었다. 허명진은 바로 등대에서 돌아오던 도중 그 가게에 들렸다.온하랑이 이마에 올려두었던 손을 거두던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허명진의 팔을 스쳤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에 차디찬 공기가 맞닿았다.그녀는 이미 어지러운 머리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조금 전, 자신을 스쳤던 그 차가운 공기의 출처를 찾기 위해 손을 뻗었다.그런 온하랑을 확인한 허명진은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내뻗었다.허명진의 손을 잡은 온하랑은 본능적으로 그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고는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 했다.허명진의 얼굴이 화색이 돌더니 갑자기 용기가 생긴 듯 작게 속삭였다.“아가씨, 너무 급해 하지 마. 조금만 기다리면 바로 해줄 테니까.”그가 온하랑의 옷을 계속 벗기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 하던 그때였다. 순간 텐트 밖에서 의문의 발소리가 들려 왔다.허명진은 깜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설마 김시연이 돌아온 건가?어떡하지? 어떡하지?그는 재빨리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는 텐트를 잘못 찾아온 척 위장했다.만약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이 장면을 발견한 사람이 김시연이어도 둘러대기 가장 좋은 핑계였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텐트 앞에
그 소식에 허명진은 완전히 잠에서 깼다.그럼 온하랑을 텐트 밖으로 데리고 나갔던 사람이 김시연이 아니었다는 소리야?허명진의 마음속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온하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줄이야!그 늦은 시각에 온하랑의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부터 절대 좋은 마음을 품고 들어온 것은 아닐 터였다. 어쩌면 허명진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허명진이 한 모든 것들이 다 남 좋은 일만 한 게 되어버렸다.만약 허명진이 그 사람을 막아섰다면, 자신이 먹였던 약까지 그 사람이 한 짓이라고 누명을 씌워버리면 허명진에게 감동한 온하랑이 허명진과 함께 미래를 그려나갈 결정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허명진은 깊은 후회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가이드는 활짝 열린 지퍼 속으로 텅 빈 텐트 안을 둘러보더니 물었다.“휴대폰은 챙겼나요?”“아니요!”온하랑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텐트 안에 고이 놓여 있었다.“숲속에 있는 화장실로 간 건 아닐까요?”가이드가 추측했다.운전기사 몇 명도 다가와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한 아저씨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우선 너무 불안해하지는 말고요. 여기서 기다려보죠. 10분 정도만 기다려보고 그래도 안 오면 본격적으로 찾아보도록 하죠.”그 순간, 허명진이 걸어와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휴대폰도 여기 있는데, 화장실 갔다가 텐트 잘못 찾아간 거 아닐까요?”온하랑을 데리고 간 사람은 분명 패키지여행에 참여한 관광객 중 한 명일 것이다. 허명진이 조금 전 대충 인원수를 체크해 보았을 때 있을 만한 사람들은 자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온하랑은 지금쯤 누군가에 의해 다른 텐트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허명진의 말에 가이드가 말했다.“정말 텐트를 잘못 찾아간 것일 수도 있으니 우선 텐트부터 찾아보죠.”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흩어져 자신들의 텐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 바퀴 쭉 둘러보았지만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온하랑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의사를 전했다.
바닷가에는 관광객들이 아주 많았다. 바닷가의 마을마다 관광객 센터들이 하나씩 들어서 있었다.아포르만의 관광객 센터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한편, 헬기에 올라탄 온하랑은 부승민의 품속에 연체동물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더워...”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며 한 손을 부승민의 셔츠 속으로 집어넣더니 그의 단단한 근육을 매만졌다.‘응... 좋아... 근데 아직 부족해.’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부승민의 셔츠를 잡아당기더니 목덜미 쪽의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치고는 그 맨몸 위로 얼굴을 갖다 댔다.그렇게 마음속으로 그리워 마지않던 사람이 자신의 품속에서 아리따운 몸매를 이리저리 흔드는 것을 바라보는 부승민은 몸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흑심을 참기가 힘에 부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온하랑의 욕구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하지만 어젯밤 온하랑의 눈물 어린 원망을 떠올리자 의식도 없는 그녀를 상대로 감히 어떤 짓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승민은 자신이 온하랑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고 그녀가 자신을 원망할까 두려웠다.조금 전, 텐트 속의 그 장면을 목격했을 때도 부승민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만약 약에 취한 온하랑이 정신을 놓은 채 자신의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면 부승민은 그 자리에서 허명진을 찢어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조금 염치는 없지만 부승민이 온하랑을 계속 따라다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온하랑의 손이 또다시 부승민의 몸 이리저리를 만져댔다.부승민의 것이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부승민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참아내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었다. 피어오르는 욕구를 억누르던 부승민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서더니 인내를 위한 감정이 그의 눈빛을 스쳐 지나갔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팔을 잡고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하랑아, 착하지. 조금만 있으면 병원 도착이야.”부승민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온하랑의 새하얗고 고운 손이 부승민의
“응...”온하랑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참기 힘들다는 듯 부승민의 목덜미를 잡아 열정적으로 부승민을 받아냈다.둘의 타액이 뒤섞이더니 부승민의 입술이 천천히 온하랑에게서 멀어졌다. 둘 사이에 투명한 실이 늘어지다가 끊겼다.그는 인내심 어린 표정으로 눈썹을 낮게 내리깐 채 온하랑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며 손의 리듬을 조절했다.온하랑은 실눈을 뜬 채 풀린 눈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불그스름한 입술을 달싹이며 야릇한 신음을 내뱉었다.부승민의 손이 온하랑의 입술 위에 포개져 아직 채 내뱉지 못한 그녀의 신음을 막았다.온하랑의 어여쁜 미간에 주름이 졌다.그녀는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참기 힘든 듯한 낮은 신음을 내었다.그 순간, 온하랑의 몸에 힘이 들어가더니 두 눈을 꼭 감았다. 쾌락의 절정에 다다른 그녀의 얼굴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온몸에 힘이 빠진 그녀는 부승민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도 힘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부승민은 바닥으로 고꾸라지려는 그녀를 재빨리 붙잡고 온하랑의 몸속을 헤집고 있던 자신의 손가락을 빼내 그 위에 묻어 있던 그녀의 애액을 온하랑의 치마에 대충 닦아냈다. 부승민은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온하랑에게 물었다.“하랑아, 좀 괜찮아졌어?”부승민의 가슴팍에 축 늘어진 채 누워있던 온하랑은 두 눈을 꼭 감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잠에 든 모양이다.잠이 든 모습을 보아하니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듯싶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세로 잘 수 있게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었다.헬기가 절룽 병원 근처 옥상에 착륙하자 부승민은 온하랑의 옷매무시를 대충 정리해 주고는 그녀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 아침이 밝았을 때였다.밝은 햇볕이 그녀가 베고 있던 베개를 비추었다.밝은 빛에 눈을 뜬 온하랑의 눈에 하얀 천장이 들어왔다.창밖으로는 청아한 새소리가 들려오며 생기 넘치는 아침을 알렸다.그녀는 자신이 누워있던 방 구조를 둘러보며 이곳이 어디인지를
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부승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좋아해. 젊고 잘 생겼잖아. 누나 누나 거리면서 쫓아 오는 것도 귀엽고... 같이 있으면 젊어지는 기분이야.”“그래서 지금 내가 헛수고를 했다는 거지? 너 좋을 뻔했던 일인데 내가 망쳤다는 거야?”부승민은 분노를 억누르며 간신히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글쎄, 딱히 그런 것도 아니야. 나중에 정식으로 약속 잡으면 되니까. 다만 내가 얘기해주고 싶은 건, 네가 지금 날 위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행동이 사실은 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라는 거야. 넌 네가 날 구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별일 아니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제발 더는 나 쫓아 오지 마, 알겠어?”나중에 정식으로 약속 잡는다는 말에 부승민은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기분이 들었다.사실 별일 아니었다고?부승민을 떼어놓기 위해 온하랑은 “제발”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말을 꺼냈다.부승민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온하랑! 너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김시연이랑 같이 여행 간다고 했을 때부터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새 안 좋은 것만 배워선.”부승민이 김시연을 공격하자 온하랑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부승민을 쏘아보며 말했다.“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몰랐어? 나 교환 갔을 땐 지금보다 더 막 놀았던 사람이야.”“입 다물어!“부승민은 분노에 가득 찬 나머지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전에 보았던 온하랑의 병원 기록과 조사 결과들이 떠올랐다.유학생들이 해외에서 문란하게 변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온하랑의 말이 끝나자 부승민은 순간적으로 그 아이가 온하랑이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있던 때 몰래 가진 아이라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자궁벽도 여러 번의 유산을 거쳐 그렇게 손상된 것이 아니었을까?부승민은 몸을 일으켜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온하랑을 내려다보았다.“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이유가 혹시 날 떼어놓기 위해서인 거니? 다시 한번 물을게. 그
온하랑은 김시연에게 연락했다.김시연이 전한 데 따르면 텐트에서 허명진의 지문이 발견됐고 가이드와 많은 관광객이 허명진이 온하랑의 컵에 손을 대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장천수 역시 자신의 수면제 한 알이 사라졌다는 증언을 했고 마을 성인용품점의 점주도 증언해 준 덕에 허명진은 체포되었다.하지만 가장 아쉬웠던 점은 바닷가에서의 이틀을 통째로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그녀들을 포함한 많은 관광객은 아포르만에서 출발해 헬기를 타고 캥거루를 만날 기회를 놓쳐버렸다.오직 시간이 넉넉한 몇몇 관광객들만이 무료로 가이드와 함께 다음 패키지여행을 함께 할 수 있었다.다음 패키지여행을 함께 할 수 없게 된 관광객들에게 가이드는 절반 정도의 비용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게 가이드가 관광객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을 지도 모른다.김시연이 온하랑의 의견을 묻자 온하랑이 되물었다.“다음 패키지가 언제인데요?”“3일 뒤요.”“그럼 우린 다음 패키지로 따라가죠.”“알겠어요, 그럼 제가 가이드한테 따로 얘기해 놓을게요.”남은 3일 동안 온하랑과 김시연은 케인스로 가서 배를 타고 대부초로 간 다음 헬기 관광도 하고 바다로 나가 스노클링까지 하며 대부초의 아름다움과 낭만을 제대로 즐겼다.지독하게 따라붙던 누군가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부승민이 정말 떠났다.온하랑은 굳이 그를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그 시간 동안 김시연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날 저녁 부승민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려 시도했지만 매번 온하랑에 의해 가로막혔다.김시연이 낮게 중얼거렸다.“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부승민 씨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온하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바람피운 건 사실이니까, 그건 부승민 씨 잘못이 맞죠!”“...”케인스를 떠나 온하랑과 김시연은 다시 절룽으로 돌아와 패키지여행을 시작했다.3일 후, 그녀들은 실버코스트에서 시테니로 돌아와 1월 1일 연휴가 끝나던 날 귀국을 준비했다.그녀들이 예매한 항공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