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그냥 같이 해요.”온하랑이 말했다.그녀는 곧바로 샌들을 벗고 해변에 앉아 손을 씻은 후 고기와 해산물을 꼬치에 꽂기 시작했다.가이드는 얇게 썬 빵과 양상추, 소시지 등을 준비했고, 해산물은 옆 동네에서 사 온 것으로, 구워 먹을 수 있는 것은 생선, 새우, 조개 등이 대부분이었다.작게 잘라진 삼겹살은 알아서 꼬치에 꽂으면 되고 해물도 마찬가지였다.직접 준비한 음식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에서 낯선 여행자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바비큐를 먹는 건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년은 자신의 이름은 허명진, 동행자의 이름은 장천수라고 말했다.고기와 해산물을 모두 꼬치에 끼우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 허명진이 제안했다.“누나, 이러면 좀 느린 것 같은데, 구우면서 꼬치에 끼울까요?”“그래.”“그럼 누나들이 꼬치에 끼우면 내가 구울게요. 먹고 싶은 건 많이 끼워요. 내가 다 구워줄게요.”허명진은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새우를 좋아했던 김시연은 그의 말대로 한 접시나 되는 새우를 꼬치에 끼워서 그대로 허명진에게 건넸다.“동생, 난 새우 좋아하니까 많이 구워줘.”“알겠어요. 누나는 뭐 좋아해요?”허명진은 미소를 지으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난 가리는 것 없이 다 먹어.”온하랑이 말했다.“그럼 내가 하나씩 구워줄게요.”음식이 그릴에 올려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숨 막히는 연기 냄새와 함께 요란한 소리가 났다.음식이 하나씩 익자 허명진은 깨끗한 접시를 가져와 온하랑과 김시연 앞에 놓으며 말했다.“누나, 다 구워진 꼬치는 이 접시에 담을 테니까 먹고 싶은 건 가져가세요.”“고마워. 고생이 많네.”허명진은 웃으며 말했다.“고생은요. 예쁜 두 누나를 모시게 되어 영광이죠.”김시연과 온하랑은 서로 마주보다 손에 쥔 꼬챙이를 내려놓고 삼겹살 꼬치를 먼저 먹었다.새우는 익는 속도가 느린 탓에 김시연은 이미 몇 번이나 흘끗 쳐다보았다.온하랑은 먼저 구운 소시지 꼬치를 먹은 뒤 계속해서
“아니, 내가 볼 땐 허명진이 하랑 씨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요. 이혼하고 나니 연애운이 마구 쏟아지네요!”온하랑은 이마를 짚었다.“누구든 지금은 그럴 생각 없어요.”“그래요.”김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아까운 인물인데.”“아까우면 시연 씨가 만나보지 그래요?”“나도 그러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상대가 바라보는 사람은 제가 아니네요.”“만약 잘못 짚은 거면요?”“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를 똑같게 대하는 것 같지만, 말할 때마다 하랑 씨만 봐요.”“...”“참, 민지훈이랑 연락하고 있어요?”“자주는 안 하죠.”민지훈이 자주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드물게 답장을 보냈다. 민지훈도 강남 출신이라 혹시라도 나중에 다시 만날 가능성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민지훈의 연락처를 바로 지워버렸을 것이다.“저기, 하늘에 헬리콥터 있어요!” 한 관광객이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감탄했다.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창밖을 내다봤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상공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보였다.가이드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부러워하지 마세요. 프린스턴 비터버러 구간에 도착하면 우리도 헬기를 타고 십이사도 바위를 구경할 수도 있어요.”십이이사도 바위는 대양로와 빅토리아주 전체를 대표하는 풍경으로, 헬기 투어를 할 수 있는 명소이자 대양로의 주요 명소이기도 했다.해가 지기 전에 그들은 아포르만에 도착했다.오늘 밤 이곳에서 야영할 예정이었다.가이드는 텐트를 나눠주며 텐트 설치 방법을 알려주었다.김시연과 온하랑의 텐트를 허명진이 와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온하랑은 거절했다.“괜찮아. 너희 것만 해. 우리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허명진은 제자리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온하랑이 선 긋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텐트 설치가 끝나자 가이드는 자유 활동 시간을 주었다.온하랑과 김시연은 옆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오트웰 등대를 보러 갔다.푸른 바다 옆 산꼭대기에는 하얀 등대가 우뚝 서 있었고, 등대로 가는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양쪽으로 하얀 난간이
등대에서 돌아와 숲속 캠핑장에 도착하니 가이드는 이미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한쪽에 자리를 내고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온하랑과 김시연은 따로 챙겨온 도시락을 꺼냈다. 반찬은 간단하게 스팸구이와 불고기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열악한 야외조건에서 이 정도면 정말 만족스러운 한 끼 식사였다.허명진은 가이드를 도와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있었다.“아가씨들, 커피 드세요.”그는 두 잔의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오더니 김시연과 온하랑에게 건네며 말했다.“더 필요하면 저쪽 가서 받아요.”“네, 감사합니다.”온하랑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가볍게 한모금 마시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그 모습을 보던 허명진의 눈빛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평소 신경이 쇠약한 탓에 장천수는 집을 나서기 전 꼭 수면제를 챙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행을 온 지금은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이 잘 왔다. 장천수는 수면제를 괜히 챙겨 짐만 더 만든 듯한 기분이라며 불평했다.어쨌든 도움은 된 거 아닌가?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조금 전 받았던 커피잔을 손에 들고 다시 한 모급 들이켰다.가이드는 차에서 몇 병의 맥주병을 꺼내더니 모닥불 근처에 앉아읶던 관광객들에게 물었다.“여기 맥주도 있는데, 마실래요?”맥주를 마시겠다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알다. 기껏해야 대여섯명 정도만 가이드의 말에 대답을 했다.가이드는 그들에게 맥주 한 병씩 건넨 뒤, 또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다들 한 잔씩 안 하실 거에요? 이 달빛에 이 야경인데도요?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 맥주 한 병이 무슨 술입니까, 그냥 음료수죠. 마셔도 안 취해요.”가이드의 말이 끝나자 또 몇 명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 병씩 달라며 입을 열었다. 그 중에는 김시연도 포함이었다. 그녀는 맥주 두 병을 받아와 한 병은 온하랑에게 던져주며 말했다.“이런 기회 흔한 거 아니에요, 한 잔 하죠?”맥주병을 받아든 온하랑은 병마개를 돌려땄다.이국 땅의 야외에서, 익숙한 얼굴의 이방인들이 함께 모
온하랑이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허명진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온하랑의 옷을 벗겨냈다.그도 이런 짓은 처음이었다. 허명진의 두 손은 쉴 새 없이 떨려왔다.“더워…”온하랑이 낮게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이마 위를 쓱 훑었다. 하지만 이마에는 땀이라고는 맺혀있지 않았다.몸속의 열기를 배출해내지 못하니 온하랑은 그야말로 불편해 죽을 맛이었다.온하랑의 반응에 허명진은 혹시라도 그녀가 깨어날까 두려워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약효가 돌기 시작한 걸까?아포르만 근처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번화한 작은 마을이 있었다. 커플들이 여행으로 많이 찾는 곳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해외의 오픈마인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을에는 큰 성인용품점이 있었다. 허명진은 바로 등대에서 돌아오던 도중 그 가게에 들렸다.온하랑이 이마에 올려두었던 손을 거두던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허명진의 팔을 스쳤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에 차디찬 공기가 맞닿았다.그녀는 이미 어지러운 머리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조금 전, 자신을 스쳤던 그 차가운 공기의 출처를 찾기 위해 손을 뻗었다.그런 온하랑을 확인한 허명진은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내뻗었다.허명진의 손을 잡은 온하랑은 본능적으로 그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고는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 했다.허명진의 얼굴이 화색이 돌더니 갑자기 용기가 생긴 듯 작게 속삭였다.“아가씨, 너무 급해 하지 마. 조금만 기다리면 바로 해줄 테니까.”그가 온하랑의 옷을 계속 벗기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 하던 그때였다. 순간 텐트 밖에서 의문의 발소리가 들려 왔다.허명진은 깜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설마 김시연이 돌아온 건가?어떡하지? 어떡하지?그는 재빨리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는 텐트를 잘못 찾아온 척 위장했다.만약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이 장면을 발견한 사람이 김시연이어도 둘러대기 가장 좋은 핑계였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텐트 앞에
그 소식에 허명진은 완전히 잠에서 깼다.그럼 온하랑을 텐트 밖으로 데리고 나갔던 사람이 김시연이 아니었다는 소리야?허명진의 마음속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온하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줄이야!그 늦은 시각에 온하랑의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부터 절대 좋은 마음을 품고 들어온 것은 아닐 터였다. 어쩌면 허명진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허명진이 한 모든 것들이 다 남 좋은 일만 한 게 되어버렸다.만약 허명진이 그 사람을 막아섰다면, 자신이 먹였던 약까지 그 사람이 한 짓이라고 누명을 씌워버리면 허명진에게 감동한 온하랑이 허명진과 함께 미래를 그려나갈 결정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허명진은 깊은 후회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가이드는 활짝 열린 지퍼 속으로 텅 빈 텐트 안을 둘러보더니 물었다.“휴대폰은 챙겼나요?”“아니요!”온하랑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텐트 안에 고이 놓여 있었다.“숲속에 있는 화장실로 간 건 아닐까요?”가이드가 추측했다.운전기사 몇 명도 다가와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한 아저씨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우선 너무 불안해하지는 말고요. 여기서 기다려보죠. 10분 정도만 기다려보고 그래도 안 오면 본격적으로 찾아보도록 하죠.”그 순간, 허명진이 걸어와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휴대폰도 여기 있는데, 화장실 갔다가 텐트 잘못 찾아간 거 아닐까요?”온하랑을 데리고 간 사람은 분명 패키지여행에 참여한 관광객 중 한 명일 것이다. 허명진이 조금 전 대충 인원수를 체크해 보았을 때 있을 만한 사람들은 자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온하랑은 지금쯤 누군가에 의해 다른 텐트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허명진의 말에 가이드가 말했다.“정말 텐트를 잘못 찾아간 것일 수도 있으니 우선 텐트부터 찾아보죠.”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흩어져 자신들의 텐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 바퀴 쭉 둘러보았지만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온하랑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의사를 전했다.
바닷가에는 관광객들이 아주 많았다. 바닷가의 마을마다 관광객 센터들이 하나씩 들어서 있었다.아포르만의 관광객 센터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한편, 헬기에 올라탄 온하랑은 부승민의 품속에 연체동물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더워...”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며 한 손을 부승민의 셔츠 속으로 집어넣더니 그의 단단한 근육을 매만졌다.‘응... 좋아... 근데 아직 부족해.’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부승민의 셔츠를 잡아당기더니 목덜미 쪽의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치고는 그 맨몸 위로 얼굴을 갖다 댔다.그렇게 마음속으로 그리워 마지않던 사람이 자신의 품속에서 아리따운 몸매를 이리저리 흔드는 것을 바라보는 부승민은 몸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흑심을 참기가 힘에 부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온하랑의 욕구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하지만 어젯밤 온하랑의 눈물 어린 원망을 떠올리자 의식도 없는 그녀를 상대로 감히 어떤 짓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승민은 자신이 온하랑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고 그녀가 자신을 원망할까 두려웠다.조금 전, 텐트 속의 그 장면을 목격했을 때도 부승민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만약 약에 취한 온하랑이 정신을 놓은 채 자신의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면 부승민은 그 자리에서 허명진을 찢어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조금 염치는 없지만 부승민이 온하랑을 계속 따라다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온하랑의 손이 또다시 부승민의 몸 이리저리를 만져댔다.부승민의 것이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부승민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참아내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었다. 피어오르는 욕구를 억누르던 부승민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서더니 인내를 위한 감정이 그의 눈빛을 스쳐 지나갔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팔을 잡고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하랑아, 착하지. 조금만 있으면 병원 도착이야.”부승민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온하랑의 새하얗고 고운 손이 부승민의
“응...”온하랑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참기 힘들다는 듯 부승민의 목덜미를 잡아 열정적으로 부승민을 받아냈다.둘의 타액이 뒤섞이더니 부승민의 입술이 천천히 온하랑에게서 멀어졌다. 둘 사이에 투명한 실이 늘어지다가 끊겼다.그는 인내심 어린 표정으로 눈썹을 낮게 내리깐 채 온하랑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며 손의 리듬을 조절했다.온하랑은 실눈을 뜬 채 풀린 눈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불그스름한 입술을 달싹이며 야릇한 신음을 내뱉었다.부승민의 손이 온하랑의 입술 위에 포개져 아직 채 내뱉지 못한 그녀의 신음을 막았다.온하랑의 어여쁜 미간에 주름이 졌다.그녀는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참기 힘든 듯한 낮은 신음을 내었다.그 순간, 온하랑의 몸에 힘이 들어가더니 두 눈을 꼭 감았다. 쾌락의 절정에 다다른 그녀의 얼굴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온몸에 힘이 빠진 그녀는 부승민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도 힘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부승민은 바닥으로 고꾸라지려는 그녀를 재빨리 붙잡고 온하랑의 몸속을 헤집고 있던 자신의 손가락을 빼내 그 위에 묻어 있던 그녀의 애액을 온하랑의 치마에 대충 닦아냈다. 부승민은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온하랑에게 물었다.“하랑아, 좀 괜찮아졌어?”부승민의 가슴팍에 축 늘어진 채 누워있던 온하랑은 두 눈을 꼭 감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잠에 든 모양이다.잠이 든 모습을 보아하니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듯싶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세로 잘 수 있게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었다.헬기가 절룽 병원 근처 옥상에 착륙하자 부승민은 온하랑의 옷매무시를 대충 정리해 주고는 그녀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 아침이 밝았을 때였다.밝은 햇볕이 그녀가 베고 있던 베개를 비추었다.밝은 빛에 눈을 뜬 온하랑의 눈에 하얀 천장이 들어왔다.창밖으로는 청아한 새소리가 들려오며 생기 넘치는 아침을 알렸다.그녀는 자신이 누워있던 방 구조를 둘러보며 이곳이 어디인지를
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부승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좋아해. 젊고 잘 생겼잖아. 누나 누나 거리면서 쫓아 오는 것도 귀엽고... 같이 있으면 젊어지는 기분이야.”“그래서 지금 내가 헛수고를 했다는 거지? 너 좋을 뻔했던 일인데 내가 망쳤다는 거야?”부승민은 분노를 억누르며 간신히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글쎄, 딱히 그런 것도 아니야. 나중에 정식으로 약속 잡으면 되니까. 다만 내가 얘기해주고 싶은 건, 네가 지금 날 위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행동이 사실은 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라는 거야. 넌 네가 날 구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별일 아니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제발 더는 나 쫓아 오지 마, 알겠어?”나중에 정식으로 약속 잡는다는 말에 부승민은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기분이 들었다.사실 별일 아니었다고?부승민을 떼어놓기 위해 온하랑은 “제발”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말을 꺼냈다.부승민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온하랑! 너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김시연이랑 같이 여행 간다고 했을 때부터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새 안 좋은 것만 배워선.”부승민이 김시연을 공격하자 온하랑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부승민을 쏘아보며 말했다.“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몰랐어? 나 교환 갔을 땐 지금보다 더 막 놀았던 사람이야.”“입 다물어!“부승민은 분노에 가득 찬 나머지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전에 보았던 온하랑의 병원 기록과 조사 결과들이 떠올랐다.유학생들이 해외에서 문란하게 변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온하랑의 말이 끝나자 부승민은 순간적으로 그 아이가 온하랑이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있던 때 몰래 가진 아이라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자궁벽도 여러 번의 유산을 거쳐 그렇게 손상된 것이 아니었을까?부승민은 몸을 일으켜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온하랑을 내려다보았다.“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이유가 혹시 날 떼어놓기 위해서인 거니? 다시 한번 물을게. 그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