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부승호의 사인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부승호가 죽은 후 주식이 어떻게 나누어지는가에 관심이 있었다.BX그룹은 다른 상장 회사들과 달랐다. 가족 기업이어서 회장을 뽑는 것도 그저 형식상의 절차일 뿐, BX그룹 주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회장이 되곤 했다.가족 기억이란 가족이 갖고 있는 주식이 많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의 주식은 그저 30% 정도 된다. 나머지 70% 중 10%는 부광훈한테 있었고 10%는 부선월에게 있었으며 부승민과 부민재가 각각 5%씩 갖고 있었다. 부승호가 갖고 있는 40%의 주식이 누구한테 가는지가 중요했다. 곧 다음 회장을 선거하는 것과 같았다.회장이야말로 그룹의 일인자였다. 회사의 발전 방향과 주주들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사람이다.그리고 대표를 바꾸고 회장이 돌아간 후로 그룹의 주가가 하락세를 겪고 있었다. 아무리 책임자가 나서서 대표가 바뀌는 것은 회사의 전략지책에 큰 영향이 없다고 얘기했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그래서 사람들은 회장을 정해서 주주들의 심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주가 하락을 막았으면 했다.이번 주주총회에 부선월은 영상 통화로 참여하게 된다.영상 통화를 받은 부선월은 바로 부민재를 가리키며 아니꼽게 얘기했다.“일 처리를 참 기가 막히게 하네. 아주 대단해! 회사에서 공식 메일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대표가 바뀐 것도 몰랐을 거야.”부선월에게는 부민재, 부승민, 부현승, 세 명의 조카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선월이 그중에서도 부승민을 가장 아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부승민이 제안하는 것이면 부선월은 두 손 들고 동의할 것이다. 부민재는 그저 담담하게 웃었다.“고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저 다 이사회에서 결정한 거죠.”10분 후, 김정숙과 부승호의 변호사가 회의실에 나타났다.가볍게 몇 마디 나누던 주주들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변호사도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얘기했다.“지금부터 부승호 회장님의 유서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서에는 은행 저금, 건물과 부
부광훈은 그제야 부승호가 회사를 위해 이렇게 한 것임을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다수 주식이 김정숙의 손에 있으니 앞으로 다시 한번 나눠야 할 것이다.부승민은 회사를 위해 많은 일을 했으니 주식을 더 갖는 것도 정상이었다.주주들은 잠깐 놀라더니 이내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부광훈은 자기 프랜차이즈 가게를 운영하느라 바쁘고 회사의 운영에 대해 잘 모르기에 주주들은 그를 회장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부선월도 해외에서 살면서 회사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항상 연구실에만 붙어있는 부현승에게는 주식이 없다.김정숙은 회사 경영을 잘 모른다.결국 회장 자리에 어울리는 건 부승민뿐이었다.다만 동생이 회장을 하고, 형이 대표를 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고승범 이사의 표정은 점점 굳어만 갔다.그가 부승민을 파면시킨 것은 부승호가 오래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승호가 이리도 갑자기 사망할 줄은 몰랐다.그래도 고승범도 부승민이 회장을 맡아야 여러 주주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승범은 부민재를 힐끔 쳐다보았다.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부민재는 차가운 표정으로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부승호가 죽기 전에 이런 유서를 남겨 부승민을 회장 자리로 떠민 것은, 대표가 바뀐 것에 대한 불만이고 부민재에 대한 불만이다. 만약 회장이 일부러 그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만 똑같은 부승호의 손자로서, 부민재도 회사의 임원이었고 많은 프로젝트를 담당해 왔으며 실수를 한 적도 없는데, 왜 부승호는 부승민만 예뻐하는 것일까?아니면 부민재가 부승호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행동은 한 것인가? 부승민이 마침 별장에 돌아왔을 때, 연민우가 주주총회의 결과를 부승민한테 전달했다.온하랑은 이미 밥을 먹고 있었다. 부승민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2층 발코니에 선 부승민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복잡한 심정을 드러냈다.부승민은 이런
“보고 싶지, 당연히. 삼촌은 지금 집에 있어.”부승민은 핸드폰을 돌려 주변을 보여주었다.“흥, 안 믿어요! 이제는 아내가 있으면서, 내가 보고 싶을 리가 없잖아요!”그렇게 말하면서 부시아가 부승민의 뒤를 훑어보았다.“삼촌, 숙모는요?”부승민은 그대로 굳어버린 채, 얘기했다.“아파서 병원에 있어.”부시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네? 주사 맞으면 아픈데... 시아는 주사가 제일 무서운데... 숙모는 언제 돌아와요?”“며칠 있다가.”“삼촌, 숙모가 주사 다 맞으면 꼭 케이크 사줘야 해요. 케이크 먹으면 안 아프거든요.”부승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알겠어. 삼촌이 꼭 숙모한테 케이크를 사줄게.”부선월이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시아한테 얘기했다.“시아야, 가서 숙제하자.”로스앤제리너스의 시간은 한국 시간보다 17시간 정도 느렸다. 강남이 점심 12시가 거의 되고 있으니 로스엔제리너스는 전날 저녁일 것이다. 부시아는 저녁을 먹자마자 부승민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그 말을 들은 부시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얘기했다.“삼촌이랑 얘기하고 싶은데...”부선월은 부시아가 숙제를 하기 싫어서 이런다는 것을 알았다.“숙제 안 하면 케이크는 없어.”부시아의 얼굴에 머뭇거림이 드러났다. 삼촌과 케이크 중, 부시아는 결국 케이크를 선택했다. 부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부승민을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삼촌, 난 숙제하러 갈 거예요. 바이바이. 쪽!”“그래, 공부하러 가. 나중에 시간 있으면 보러 갈게.”어느새 부선월만 남았다.그녀는 부승민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요즘 제대로 쉬지 못한 거야? 얼굴이 초췌해 보이는데.”“네.”부승민은 담담하게 대답하면서 담배를 피웠다.“너 언제부터 담배를 피운 거야?”부선월이 깜짝 놀랐다.“최근에요.”“주주총회 결과는 알아? 할아버지는 여전히 널 사랑하셔.”부승민은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알아요.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미안하죠.”“미안할 게 뭐가 있어? 할아버지도 죽기 전에 알게
뒷좌석에서는 두 사람이 내렸는데 한 명은 고승범 이사였고 다른 한 명은 기성윤 이사였다.부승민은 두 사람을 내쫓지 않고 서재로 들여 차를 내어주었다.간단히 대화를 나누다가 고승범이 먼저 주주총회 얘기를 꺼냈다.부승민은 표정 변화 없이 그 얘기를 들으며 우아한 동작으로 두 이사한테 차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잠시 BX그룹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완곡하게 밝혔다.이유는 두 가지였다.하나는 할아버지의 사망과 아내의 유산이 그한테 큰 충격이었기에 잠시동안 안정을 취해야 했다. 그러니 회사의 일을 맡을 여유가 없었다.둘째는 이사회와 이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게다가 부민재가 지금 대표직을 맡고 있으니, 부승민은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고승범과 기성윤은 서로 마주 보다가 차를 마시고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하지만 회장 자리가 공석인 날이 늘어갈수록 주주들은 심란해할 것이다.이후 기성윤 이사가 두 번 더 왔지만 결국 같은 결말이었다.온하랑은 병원에 5일 동안 입원해 있었다. 다섯 번째 날, 김시연이 병원으로 찾아왔다.김시연은 온하랑한테 위로의 말을 건넸다.“아이가 없다고 해서 모든 희망을 버리지 마요. 아이는 그저 우리 인생의 일부분이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까요. 가족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건 확실하지만 우리의 생활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이에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닌, 본인을 위해서 사는 거니까요. 행복하게 살아야 죽어서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어요.”김시연의 부모님이 그녀를 그렇게 가르쳐왔다.김시연은 자기가 꽤 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개방적인 부모를 만난 것에 감사해했다.하지만 김시연은 그녀와 온하랑은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고 성격도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온하랑의 어린 시절을 보면 그녀가 가족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래서 김시연은 온하랑이 자기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러고 보니 부승민 씨와 언제 이혼할지 결정했어요?”온하랑이 대답했다.
온하랑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그럼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봐요. 이혼하면 일단 같이 여행이라도 하면서 기분 전환해요.”“같이요?”“네.”김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얘기했다.“같이요. 나랑 하랑 씨랑. 주현 씨도 시간 되는지 물어볼게요.”온하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혼 후에 뭘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대답했다.“네.”“그럼 돌아가서 계획 짜고 있을게요. 겨울에 어디로 여행 가면 좋을지 한 번 보자고요.”...여섯 번째 날, 온하랑은 집으로 돌아와 몸이 회복될 때까지 쉬었다. 아주머니는 온하랑을 극진히 챙겨주었다.부승민은 여전히 별장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장 가깝게 지내던 부부가 지금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부승민은 온하랑 앞에 나타나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다.온하랑은 침실 발코니에 앉아 햇볕을 쬐는 것을 즐겼다. 가끔 하루 종일 햇볕을 쬐기도 했다.겨울의 태양은 따갑지 않고 따스해서 아주 편했다.저녁에 돌아온 부승민은 온하랑이 발코니에 앉아 먼 곳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아이가 사라진 후, 온하랑은 말을 아끼게 되었다.이튿날 아침, 온하랑은 동물의 울음소리에 깨어났다. 그 울음소리는 고양이인지 강아지인지도 모를 울음소리였다.침대에서 일어난 온하랑이 문을 열자 금색과 흰색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고픔에 울고 있었다.마음이 약해진 온하랑은 고양이를 데리고 먹을 것을 찾으려고 했지만 고양이는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어쩔 수 없이 걸어가 새끼 고양이를 안고 가려는데 마침 주방에서 나오는 도우미가 보였다.“아주머니, 고양이 사료는 어디 있어요?”온하랑은 부승민이 고양이를 데리고 온 걸 바로 알아차렸다. 준비성이 철저한 부승민이니 사료도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사모님, 왜 일어나셨어요?”“전 괜찮아요. 고양이가 배고파하는 것 같아요.”“어머? 어디서
늦은 밤.침실의 문이 약간 열렸다.술 냄새가 약간 나는 부승민은 조용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야옹.”온하랑의 작은 룸메이트가 그를 발견하고 소리를 내었다.“쉿.”부승민은 준비한 참치 캔을 온하랑 룸메이트 옆에 놓아주었다.그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부승민은 송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침대 옆으로 왔다.달빛 아래 온하랑은 깊은 잠에 들어 편하게 자고 있었다.부승민은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침대 곁에 앉은 그는 깃털로 온하랑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오직 이 시간에야 온하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차갑고 증오스러운 눈길을 피할 수 있다.부승민은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두려웠다.사업을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부승민도, 항상 자신 있고 여유로운 부승민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다.예전의 그는 이런 말을 들으면 신경 쓰지도 않고 웃어넘길 것이다.하지만 자기 마음을 깨달은 그 순간, 그제야 깨달았다. 온하랑을 향한 미련의 끈이 그의 온몸을 묶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두 사람은 담담하게 2년의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 또한 이 침대에서 서로 뒹굴기도 했다. 도우미의 눈에는 잉꼬부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는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모두 예전의 그가 너무 자만했던 것이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영운사에서 돌아오면, 온하랑은 더 이상 부승민의 아내가 아니다.두 사람은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다.이혼하면 그녀는 아마 이주혁과 함께할 것이다.그 생각에 부승민은 이주혁을 향한 질투심이 활활 타올라 죽을 것만 같았다.부승민의 시선은 온하랑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눈빛이 어두워진 그는 그대로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부드럽고 따스하고 달콤했다. 예전의 추억에 빠진 그는 하마터면 헤어 나오지 못할 뻔했다.이 키스도 이젠 마지막이다.부승민은 눈을 감고 마지막 일탈을 했다.얼마 지나 고
온하랑은 유골함을 꼭 안고 차에서 내렸다.부승민이 미리 얘기를 해두었기에 승려 한 명이 나와 그들을 데리고 뒤에 있는 절로 데리고 갔다. 고개를 든 온하랑은 절에 적힌 글자를 발견했다.[전생당]들어가자 한쪽 벽에 선반이 있었고 그 위에는 유골함이 놓여 있었다.전생당은 유골함의 위치에도 규칙이 있었다.보통 시민의 유골은 1층에 안치되고 도를 닦는 승려들의 유골은 2층, 그리고 낙태된 아기의 유골은 3층에 안치된다. 다른 곳에는 또 덕을 쌓은 스님들의 유골을 안치하는 곳도 있었다.승려의 인도하에 온하랑은 직접 유골함을 선반에 넣고 자물쇠를 잠갔다.그리고 승려는 그들을 데리고 서쪽에 있는 전생절에 갔다.전생전으로 가는 길에는 높은 계단이 수두룩했다.계단은 모두 81개였는데 모두 81개의 고난을 뜻한다. 그래서 그 고난을 모두 이겨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기도 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절에서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었다.온하랑은 승려를 따라 벽을 넘어갔다. 그러자 벽 뒤에 있는 노란색 패쪽들이 보였다.승려는 온하랑에게 설명했다.“이 패쪽은 우리 불교인에게 있어서는 극락으로 가는 통행증입니다. 노란 패쪽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패쪽을 세워주어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이죠. 아이의 영혼을 위해 패쪽을 세워 오랜 기간 덕을 쌓게 하면 빠르게 극락으로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부모님의 문제도 풀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럼 아이를 위해 패쪽을 하나 세울까?”의문형이지만 부승민의 말투에서는 단호함이 엿보였다.“응.”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패쪽에는 패쪽 주인의 이름이 있어야 하니 두 분께서 이름을 지어주세요.”승려가 얘기했다.그러자 부승민과 온하랑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부승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가 지어.”온하랑은 절에서 향 냄새를 맡으며 얘기했다.“원녕이라고 하자.
절에서 나오자 차가운 바람에 하얀 눈송이가 섞여 불어왔다.눈이 내리고 있었다.온하랑은 하늘을 쳐다보았다.부승민은 온하랑을 보면서 물었다.“지금 돌아갈래?”온하랑은 날씨를 봤다. 눈은 점점 더 크게 내릴 것이다. 이 상황에서 고속도로로 돌아가는 건 위험하다.“여기서 하룻밤 묵고 내일 눈이 그치면 가자.”“그래.”부승민은 자기 코트를 온하랑 어깨에 걸쳐주었다. 온하랑이 거절하려고 하는데 부승민이 얘기했다.“몸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조심해야지.”“고마워.”“고마워할 필요 없어.”원래는 아내라서 고마워할 필요 없다고 얘기하려고 했다.다만 그 말은 꺼낼 수 없었다.결혼한 3년 동안, 그는 온하랑을 여보나 아내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아주 많았다.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이제는 그럴 기회도 없을 것이다.부승민은 이 눈이 영원히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그렇다면 두 사람은 영원히 여기에 머무를 수 있고 그녀에게 아픈 기억만 남겼던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혼하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부승민의 바램일 뿐이었다.눈은 저녁에 멈추었다.이튿날, 그들은 강남으로 돌아갔다.고속도로에서 내릴 때, 온하랑이 얘기했다.“돌아가서 필요한 서류 챙겨서 동사무소로 가자.”온하랑은 시계를 확인하면서 얘기했다.“아직 한 시간 있으니까 시간이 될 거야.”그녀의 마음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말을 들으니 부승민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무거운 바위가 그의 심장을 꾹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기도 했다.부승민의 심정은 마치 밖의 날씨처럼 차갑고 처량했다.그는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았다. 목에는 마치 모래가 가득 찬 것처럼 꽉 막히고 아팠다.“그래.”별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필요한 서류들을 챙기고 차에 다시 탔다.부승민은 천천히 운전해서 동사무소로 갔다.차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창밖의 풍경을 쳐다보다 보니 3년간의 추억이 파노라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