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의 말이 틀렸다. 절대 그녀의 탓이 아니다. 할아버지를 죽인 건 다름 아닌 그였다.지나간 일들을 돌이켜 보던 부승민은 지난날 자신이 한 짓을 용서할 수 없었다.처음부터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온하랑에 대한 감정을 잘못 판단하고, 추서윤에 대한 죄책감을 호감으로 착각해 온하랑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그리하여 온하랑은 임신한 사실을 쉽게 털어놓지 못했다. 혼자 얼떨떨한 심정으로, 임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임신 기간 동안 받아야 할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만약 그가 온하랑이 금방 임신했을 때부터 세심하게 보살폈더라면 이 아이는 지금 온하랑의 배 속에서 건강하게 자랐을 것이고, 이미 태동이 있었을 것이다...만약 그가 추서윤을 데리고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온하랑은 그와 이혼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할아버지도 몇 번이고 그 때문에 속을 태우지 않았을 것이고, 추서윤을 만나러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겉으로는 온하랑을 위해 하신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를 위해서였다. 그가 온하랑과 이혼하면 분명 후회할 거라는 걸 할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다.자신이야말로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이다.결국 또 이렇게 할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드렸다.할아버지가 그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지켜주신 결혼생활은 끝끝내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수술실 문이 열리자 부승민은 담배를 비벼 끄고 곧바로 달려갔다.비상계단 입구에는 담배꽁초와 담뱃재가 널브러져 있었다.수술실에서 제일 먼저 나온 사람은 지난번에 봤던 의사였다. 이 의사도 그 후에야 부승민과 온하랑의 정체를 알았다.부승민이 바람을 피운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태아를 지키기 위해선 온하랑이 앞으로 침대에 누워지내며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약을 제때 먹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달이 날 줄 어찌 알았겠는가!부승민은 온하랑보다는 내연녀에게 정신이 팔린 게 확실해 보였다. 그때 해명하러 나온 건 온하랑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의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
부승민은 못 듣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말했다.“아주머니더러 음식을 해오라고 할게.”“꺼지라고. 내 말 못 알아들어?”온하랑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싸늘했다.“하긴, 그게 아니면 날 방에 가두지도 않았겠지.”자리에 얼어붙은 부승민은 한참을 침묵했다.“그래, 나갈게. 아주머니가 오면 뭐 좀 먹어.”그는 두 눈이 빨개진 채 천천히 병실에서 걸어 나와 문 앞 의자에 앉았다.삐걱,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온하랑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부승민을 마주할 때 그녀는 시트를 그러쥐고 자신을 억제하며 가까스로 이성을 다잡을 수 있었다.부승민을 좋아한 것도, 부승민과 결혼한 것도 이렇게까지 후회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곁에 남아있는 가족이 없었던 온하랑은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나면 혼자 남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부승민과 이혼하더라도 이 아이만은 꼭 낳으려고 했다.이 아이는 그녀의 소중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 소원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고, 그녀의 아이는 끝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그녀는 이제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녀는 결국에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될 것이다.만약 애초에 부승민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절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점심이 다가오자, 아주머니가 삼계탕과 밥을 가지고 왔다. 온하랑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아주머니는 한숨을 토해냈다.“사모님, 점심 드세요.”“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아주머니는 흠칫 놀라더니 문밖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랑 씨, 조금이라도 드세요.”“지금은 입맛이 없으니 저기 두세요.”온하랑은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아주머니는 더 말하고 싶었으나 온하랑이 한마디를 덧붙이는 바람에 말을 삼켰다.“저 혼자 있고 싶어요. 그만 가 주
그녀가 이주혁을 좋아하니 이주혁이 오면 조금은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그 말에 전화기 너머에 일순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이주혁의 질책이 쏟아졌다.“부승민 씨, 다 당신 때문이에요! 대체 왜 하랑이를 놓아주지 않는 거예요!”이윽고 이주혁이 물었다.“어느 병원이에요? 병실은요?”부승민이 주소를 말했다.“바로 갈게요.”말을 마친 이주혁은 전화를 끊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반 시간 뒤 이주혁이 병실 앞으로 달려왔다. 부승민의 초췌한 모습을 본 이주혁은 그 이유가 온하랑 때문이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 부승호 회장님이 돌아가신 이유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부승민을 향해 콧방귀를 끼고 병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병실로 들어온 사람이 이번에도 부승민일 거라 생각한 온하랑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 다가간 이주혁은 침대에 걸터앉아 나지막이 말했다.“하랑아, 나야.”목소리를 들은 온하랑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뜨고 이주혁을 바라보았다.“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널 보러 왔지.”이주혁은 테이블에 놓인 아침 식사를 보며 물었다.“아침은 먹었어? 내가 먹여줄까?”“지금 입맛이 없어.”온하랑은 고개를 저었다.“하랑아, 네가 아이를 잃어 괴롭고 받아들이기 힘든 거 알아. 하지만 내 입장에서, 너를 걱정하는 친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아이가 없어서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해. 내가 직설적으로 말한다고 상처받지 마. 하지만 생각해 봐. 만약 이 아이가 태어나면 넌 영원히 부승민한테서 벗어나지 못해. 너 부 회장님의 은혜 때문에 부승민과 결혼한 거잖아? 이제 부 회장님도 안 계시고 아이도 없으니까 부승민이랑 이혼하고 네 삶을 되찾을 수 있어. 부승민은 그저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재벌 집 도련님일 뿐이야. 이런 사람한테 네 에너지를 낭비할 가치가 없어.”천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라보는 온하랑의 고요한 눈동자에는 아무런 생기도 담겨있지 않았다.맞다, 그녀는 부승민과 이혼해야 한다.하지만 이혼 후에는?그녀는 마치 삶의 원동력을 잃어버린 것
그런데 이때, 갑자기 죽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온하랑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쓰레기통에 대고 구역질을 했다.깜짝 놀란 부승민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와 얼른 온하랑의 옆으로 가서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금방 먹은 얼마 안 되는 죽을 모두 토해낸 온하랑은 화장실에 가서 양치하려고 했지만, 부승민이 곧바로 그녀를 안아 다시 침대에 올려놨다.“움직이지 마.”말을 마친 부승민은 이내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 협탁에 올려두고 쓰레기통을 들고 왔다.온하랑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컵을 들어 물로 입을 가시고 쓰레기통에 뱉었다. 그리고 다시 죽그릇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부승민은 입을 꾹 다물고 멀찍이 서서 온하랑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하지만 온하랑은 몇 입 먹고는 다시 그릇을 내려놓고 침대 옆에 엎드려 토했다. 신물이 다 나오고 눈에서는 생리적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다급히 다가온 부승민은 미간을 찡그리고 온하랑의 등을 두드리며 그릇을 멀리 치워버렸다.“일단 먹지 마. 내가 가서 의사를 불러올게.”성큼성큼 걸어 나간 부승민은 곧 의사를 데리고 돌아왔다.의사는 온하랑에게 신체적 느낌에 대해 묻고 청진기를 사용하여 온하랑의 위장부위에 대고 귀를 기울였다.이윽고 청진기를 귀에서 빼낸 의사는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부승민은 의사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왔다.“의사 선생님, 왜 저러죠? 왜 먹기만 하면 토하나요?” “환자분의 설명과 제가 진찰한 바에 따르면 위장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아마도 심리적인 요인 때문일 거라 의심됩니다만. 많은 여성이 유산하거나 출산 후 경증이든 중증이든 심리 장애를 겪습니다. 사람마다 가정 상황이 다르고 이유도 다양하다 보니 정신과 의사를 찾아 상담받는 걸 추천합니다.”이 말을 들은 부승민은 잠시 멈칫하더니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억지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별말씀을요.”의사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부승민은
“네... 알겠습니다.”정신과 의사가 떠나는 걸 지켜보던 부승민은 한참을 제자리에 서있었다. 멀리 앞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바로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퍼뜩 정신을 차린 부승민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연민우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연민우는 BX 그룹의 직원이었지만, 이제 부승민의 개인 비서나 다를 바 없었다.부승민이 BX 그룹에서 퇴임한 후 그도 퇴사하고 부승민의 옆에 남아 다른 투자와 사업 처리를 도왔다.“왜, 무슨 일이야?”부승민은 다소 조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연민우는 바로 알아듣고 되도록 짧게 말했다.“대표님, 회장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유언장을 남기셨어요. 이제 장례도 치르셨고 변호사가 유언장을 발표할 거예요. 그룹에서 주주총회를 소집하려고 하는데 큰 사모님께서 대표님더러 회사로 와달라고 하셨어요!”큰 사모님은 바로 김정숙을 말하는데, 부승민을 회사로 부른 목적은 매우 뚜렷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손에 있던 주식을 자손들에게 나눠줘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가 됐든 당연히 부승민의 몫도 있었다.그리고 부영훈이 가지고 있던 주식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할아버지가 부승민과 부민재에게 나눠줬다.부승민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그룹의 주주이기에 마땅히 주총에 참석해야 한다. 그러나 참석할 여유가 없었다.“나 바빠서 못 가니까 임 비서가 아무 이유나 찾아서 말해. 할머니께 내가 병원에 있단 말은 하지 말고.”온하랑이 유산한 일을 부승민은 아직 김정숙에게 말하지 않았다.이제 막 남편을 잃은 아픔을 겪은 김정숙이 견디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저...”연민우가 다른 말을 하려 하자 부승민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걱정 마세요, 대표님. 영운사에 이미 연락했습니다. 아무때나 가셔도 됩니다.”“그래.”전화를 끊은 부승민은 확고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부승민은 문을 밀고 병실로 들어가 침대에서 1미터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기억해.”부승민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온하랑이 처음 내연녀로 소문났을 때, 부승민은 해명하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눈을 다친 온하랑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온하랑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었다.“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온하랑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슬퍼했다.“난 그때, 우리는 언젠가는 헤어질 거고, 내 임신 사실도 감추지 못할 거니까 오빠가 양육권을 포기하길 바랐어. 난 이 아이를 낳을 거야! 그래서 이혼하고 싶을 때도 그 소원권을 쓰지 않았는데... 그런데...”온하랑은 울면서 마지막 말을 꺼내지 못했다.이 소원권은 이제 더는 쓸 수 없다.온하랑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부승민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찔렀다. 몇 번이고 그에게 기회를 줬었지만, 그는 여태까지 뭘 했는가.온하랑은 이미 그때부터 그녀와 아이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하지만 부승민은 추서윤의 사업을 도와주느라 온하랑의 억울함도 몰라주었다,부승민이 말하기 전에 온하랑이 또 얘기했다.“내가 내연녀라고 욕먹을 때, 추서윤 팬이 뭐라고 한 줄 알아? 영원히 애를 못 낳을 거라고 저주했어. 이제 그 저주가 현실이 됐네... 하하하... 그래, 내 탓이야. 오빠를 탐내지 말았어야 해. 추서윤이 데었던 날, 나랑 헤어지는 걸 결심하고서도 추서윤을 만나러 갔잖아. 나는 강도까지 만나서 아이를 잃을 뻔했어. 그게 하늘의 경고였어. 그때 오빠를 포기했어야 하는데 내가 괜히 고집을 부려서 저주에 걸린 거야!”온하랑은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웃었다.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그런 온하랑을 보는 부승민의 가슴에서는 피가 흐르는 기분이었다.그때 부승민이 심한 말을 내뱉고 떠난 후, 강도까지 만났다니. 하지만 온하랑은 이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어떻게 아무 도움도 없이 이 모든 것을 견뎌왔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온하랑이 겪은 모든 건 다 부승민 탓이었다.만약 그가 오미연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그와 추서윤의 과거를 밝혔다면 온하랑은 내연녀
그들은 부승호의 사인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부승호가 죽은 후 주식이 어떻게 나누어지는가에 관심이 있었다.BX그룹은 다른 상장 회사들과 달랐다. 가족 기업이어서 회장을 뽑는 것도 그저 형식상의 절차일 뿐, BX그룹 주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회장이 되곤 했다.가족 기억이란 가족이 갖고 있는 주식이 많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의 주식은 그저 30% 정도 된다. 나머지 70% 중 10%는 부광훈한테 있었고 10%는 부선월에게 있었으며 부승민과 부민재가 각각 5%씩 갖고 있었다. 부승호가 갖고 있는 40%의 주식이 누구한테 가는지가 중요했다. 곧 다음 회장을 선거하는 것과 같았다.회장이야말로 그룹의 일인자였다. 회사의 발전 방향과 주주들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사람이다.그리고 대표를 바꾸고 회장이 돌아간 후로 그룹의 주가가 하락세를 겪고 있었다. 아무리 책임자가 나서서 대표가 바뀌는 것은 회사의 전략지책에 큰 영향이 없다고 얘기했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그래서 사람들은 회장을 정해서 주주들의 심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주가 하락을 막았으면 했다.이번 주주총회에 부선월은 영상 통화로 참여하게 된다.영상 통화를 받은 부선월은 바로 부민재를 가리키며 아니꼽게 얘기했다.“일 처리를 참 기가 막히게 하네. 아주 대단해! 회사에서 공식 메일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대표가 바뀐 것도 몰랐을 거야.”부선월에게는 부민재, 부승민, 부현승, 세 명의 조카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선월이 그중에서도 부승민을 가장 아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부승민이 제안하는 것이면 부선월은 두 손 들고 동의할 것이다. 부민재는 그저 담담하게 웃었다.“고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저 다 이사회에서 결정한 거죠.”10분 후, 김정숙과 부승호의 변호사가 회의실에 나타났다.가볍게 몇 마디 나누던 주주들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변호사도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얘기했다.“지금부터 부승호 회장님의 유서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서에는 은행 저금, 건물과 부
부광훈은 그제야 부승호가 회사를 위해 이렇게 한 것임을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다수 주식이 김정숙의 손에 있으니 앞으로 다시 한번 나눠야 할 것이다.부승민은 회사를 위해 많은 일을 했으니 주식을 더 갖는 것도 정상이었다.주주들은 잠깐 놀라더니 이내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부광훈은 자기 프랜차이즈 가게를 운영하느라 바쁘고 회사의 운영에 대해 잘 모르기에 주주들은 그를 회장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부선월도 해외에서 살면서 회사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항상 연구실에만 붙어있는 부현승에게는 주식이 없다.김정숙은 회사 경영을 잘 모른다.결국 회장 자리에 어울리는 건 부승민뿐이었다.다만 동생이 회장을 하고, 형이 대표를 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고승범 이사의 표정은 점점 굳어만 갔다.그가 부승민을 파면시킨 것은 부승호가 오래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승호가 이리도 갑자기 사망할 줄은 몰랐다.그래도 고승범도 부승민이 회장을 맡아야 여러 주주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승범은 부민재를 힐끔 쳐다보았다.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부민재는 차가운 표정으로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부승호가 죽기 전에 이런 유서를 남겨 부승민을 회장 자리로 떠민 것은, 대표가 바뀐 것에 대한 불만이고 부민재에 대한 불만이다. 만약 회장이 일부러 그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만 똑같은 부승호의 손자로서, 부민재도 회사의 임원이었고 많은 프로젝트를 담당해 왔으며 실수를 한 적도 없는데, 왜 부승호는 부승민만 예뻐하는 것일까?아니면 부민재가 부승호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행동은 한 것인가? 부승민이 마침 별장에 돌아왔을 때, 연민우가 주주총회의 결과를 부승민한테 전달했다.온하랑은 이미 밥을 먹고 있었다. 부승민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2층 발코니에 선 부승민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복잡한 심정을 드러냈다.부승민은 이런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