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더라고요...그제야 부승민은 완전히 깨달았다. 온하랑은 진작에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임신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과의 이혼을 고집하며 이주혁과 기어코 출국까지 하려고 했다는 거다.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휴대전화를 쥔 부승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휴대전화 없이 그저 밑으로 드리워진 손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가 주먹을 꽉 쥐었다.수화기 너머로 부승민의 답변이 들려오지 않자 도우미 아주머니가 말을 얹었다.“사모님을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사모님도 마음고생 정말 심하셨어요...”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던 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저도 압니다.”온하랑은 부승민에게 진심으로 실망하고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게 분명했다. 오죽했으면 아이까지 데리고 부승민의 곁을 떠날 생각을 했을까.아이를 가진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온하랑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임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으며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삼켜내야 했을까.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아이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했다...병실로 돌아온 부승민은 다시 병상 끝에 살며시 앉아 몸을 숙여 온하랑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다시는 온하랑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아이가 이주혁에게 아버지라 부르는 모습을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절대....병원 내부.“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병실 이곳저곳에 튀었다.두 남자가 추서윤을 병실 밖으로 끌어내려 애쓰고 있었고 추서윤은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병상 받침대라도 잡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의료진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감히 나설 수는 없었다.소란스럽기 그지없는 난동이었지만 높고 귀하신 분들만이 입원해 있다는 개인 VIP 병실들도 암묵적인 룰을 지키기라도 하듯 모두 병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이거 놔. 부승민한테 전화 한 통만
온하랑은 몽롱한 기분으로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병실의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현실성이 없어 마치 한 차례의 꿈을 꾸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거칠면서도 부드러운듯한 거즈가 만져졌다.“하랑아, 깨어났구나!”병상의 인기척을 느낀 부승민이 다급하게 병상 옆 간이의자로 달려가 앉으며 물었다.“지금 좀 어떤 것 같아?”온하랑의 귓가에는 윙윙 거리는 소음만 들릴 뿐, 부승민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분명 부승민의 입가가 움직이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부승민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입을 여는 순간 한껏 갈라진 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온하랑은 목에서 수십 개의 칼날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부승민은 바로 탁자 위에 있던 컵에 물을 따랐다. 온하랑의 등을 받쳐 가볍게 몸을 일으킨 부승민은 물이 담긴 컵을 들어 조심스레 온하랑의 입으로 몇 방울 흘려보냈다.“지금 상태가 어떤 것 같은지 물어보는 거야.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부승민이 탁자 위에 컵을 내려놓으며 온하랑에게 귓가로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괜찮아, 근데 꼭 이렇게 가까이서 얘기해야 해?”“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너 지금 외상 때문에 고막에까지 문제 생겨서 당분간은 청력이 떨어질 거래. 그래도 조금만 지나면 금방 다시 회복된다고 하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아, 우리 아빠 유골은...”온하랑은 부승민을 바라보며 다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걱정하지 마, 이미 장인어른 유골함은 새 걸로 바꿔서 다시 잘 모셔뒀어.”“다행이네, 그럼. 퇴원하면 바로 아빠 만나러 가야겠다.”온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응, 나랑 같이 가자.”“... 혹시 거울 있어?”부승민은 온하랑의 뜻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가볍게 그녀의 뺨을 문지르며 거즈에 끼어있던 머리
부승민은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했다. 목울대에서는 어딘가 모를 감정들이 울컥 치밀어 오르며 후회가 물 밀듯 밀려왔다.그날의 기억이 부승민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모진 말을 내뱉던 자신의 모습을.“그럴 일은 없어.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절대 못 낳게 할 거야.”부승민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온하랑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분명 크게 실망하고 어찌할 도리를 몰라 불안했겠지.그래서 여태껏 숨겨왔던 것일지도 모른다.온하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사실 그래도 난 이 정도면 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 임신 사실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어제 그 사람들, 분명 아이부터 없애려고 했을 거야.”그녀는 부승민에게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철저히 숨긴 게 아니었다. 추서윤의 엄마도 온하랑의 임신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만약 심은혜가 온하랑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절대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다.온하랑의 덤덤한 말에 부승민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랑아, 내가 약속 하나 할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이혼은...”“하랑아, 아이를 봐서라도 제발 한 번만 나한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이럴 줄 알았다.하지만 부승민도 지금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지금 온하랑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단순한 책임감인지.그것도 아니라면 부승민의 얼마 안 되는 그 죄책감 때문일까? 사랑 없는 감정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눈을 질끈 감은 온하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추서윤 씨...”“어제 공항으로 데려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대. 지금은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받는 중이야. 앞으로는 걔 언급도 하지 마. 추서윤이 어떻게 되든 우리랑은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부승민을 바라보는 온하랑은 어딘가 모르게 서늘함을 느꼈다. 이 남자, 대체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걸까....도우미 아주머니가 아침부터 이것저것
3일 후, 온하랑은 정식으로 퇴원 절차를 밟고 병원을 벗어났다.부승민은 온하랑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차에 올라탔다. 병원을 벗어나 별장에 도착한 뒤에도 부승민은 여전히 온하랑을 소중히 들어 올려 안방 침대까지 데려다주었다. 병원에서부터 별장 안방까지 오는 내내 온하랑의 발은 단 한순간도 바닥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그 상태로 이틀이 더 지나자 온하랑은 그제야 얼굴에 거추장스럽게 붙이고 있던 거즈를 떼어낼 수 있었다.얼굴의 부기는 진작에 빠져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엉망진창이던 온하랑의 얼굴에 있던 세 개의 상처에는 딱지가 들어앉았다.그중 한 상처는 광대뼈에 있었다. 하마터면 눈까지 다칠 뻔했던 위험한 상황이었음을 잘 알 수 있는 상처였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작은 얼굴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다정하고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괜찮아, 흉 지는 일은 없을 거야.”부승민은 온하랑을 위해 어떻게든 효과적인 흉터 연고와 의료기기들을 마련해줄 심산이었다.온하랑의 표정은 부승민의 반응과 달리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얼굴에 흉이 남든 안 남든 딱히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렇다고 온하랑이 아름다움에 별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체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온하랑은 선천적으로 상처가 생겨도 흉이 잘 지지 않는 체질이었다. 상처에 진 딱지가 떨어지고 돋아나는 새 살은 주위의 살보다 조금 더 연하고 밝을 뿐, 그 정도는 간단한 화장만으로도 쉽게 가릴 수 있었다.“나 아빠 보러 가고 싶어.”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부승민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 나랑 같이 가자.”밖을 나서기 전, 온하랑은 마스크로 자신의 얼굴을 철저하게 가렸다.부승민은 또다시 온하랑을 들어 올려 차에 태웠다. 묘지 입구까지 도착하자 부승민은 재빨리 운전석에서 내려 차 트렁크에 실려있던 휠체어를 꺼내 그 위로 온하랑을 앉혔다. 그는 온하랑이 올라탄 휠체어를 이끌고 묘지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여러 묘비를 지나 ‘온
정신을 차린 후에는 온하랑 혼자만이 남아있었다.사고 발생 이후, 기자들은 앞다투어 기사들을 써내기 시작했다. 부승호 회장과 여러 인사들의 도움으로 온하랑은 무사히 아버지의 장례와 추도회를 치를 수 있었다.그 시간 동안 온하랑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넋 나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멍해 있었다.너무 한순간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탓에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온하랑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아버지가 세상을 뜬지 한참이나 지나버린 어느 금요일 저녁,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온하랑은 한 생선요리 전문점을 지나치고 있었다. 탁 트인 가게의 창문 너머로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정말 일상적인 장면이었지만 가게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후였다.그제야 온하랑은 아버지가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그것도 영원히.부씨 일가에 입양된 후에도 온하랑은 꾸준히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찾아가 옛 추억에 잠겨 아버지를 그리워했다.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집을 허물게 될 때도 온하랑은 아버지가 남긴 유품들을 챙겨왔다.유품 중 아버지의 옷가지들은 전부 불태우고 평소에 자주 쓰던 일용품, 책과 노트 같은 것들만 챙겨왔다.그 모든 유품에서 온하랑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듯했다.금속으로 된 라이터도 온하랑이 들고 온 아버지의 유품 중 하나였다.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라이터였지만 살아생전 아버지는 늦은 밤중까지 원고를 쓸 때마다 그 라이터로 담뱃불을 지피고는 했다.그리고 이 카메라는 SE 브랜드의 기본 카메라였다. 매번 현장으로 취재를 하러 갈 때마다 아버지는 이 카메라로 현장 사진을 담았다.하나하나 이어붙인 이 잡지와 서류철에 차곡차곡 보관해놓은 이 신문들에는 아버지가 발표한 기사들이 실려있었다. 그 밑에 함께 보관되어있는 필름들과 사진들까지 모두 아버지가 이때까지 취재에 참여했던 기록들이었다
그날 아침, 부승민은 온하랑이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본 후에야 회사로 향했다.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온하랑이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독서를 하고 있을 때였다.그녀 역시 자신과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임신과 육아에 관련된 책들을 구매해두었다.전에는 부승민에게 임신 사실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감히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부승민이 온하랑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지극정성으로 돌보게 된 지금, 그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아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벨 소리가 울리고 있던 온하랑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일련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온하랑은 새 휴대전화로 바꾼 이후, 전 휴대전화에 있던 연락처를 옮겨오지 않았던 상태라 아무 의심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통화 수락 버튼을 누르자 이내 전화가 걸렸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에서 한 여자의 자조적인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야, 온하랑. 넌 지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부승민이 미디어에 너희 둘 사이 다 까발리고 이제 넌 임신까지 한 몸이니, 넌 지금 네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겠네?”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오미연이었다.부승민은 이미 오미연에게 정식으로 소송을 걸고 회사에서도 정리해고를 통보한 상태였다.다만 소송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관계로 오미연은 아직도 법의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자유의 몸으로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온하랑이 퇴원하는 그 날, 오미연도 병원에 있었다. 그녀는 부승민이 온하랑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레 끌어안은 채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 둘의 모습은 오미연의 눈에는 꼴사납기 그지없었다.쟤가 뭔데?대체 온하랑 같은 촌년이 뭐길래 부승민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거냐고? 쟤는 어울리지 않아, 자격이 없다고! 온하랑은 갑자기 걸려온 오미연의 전화에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고는 일부러 오미연의 화를 더 돋울 심산으로 대답했다.“그러게, 난 오히려 너한테 고마워해야지. 만약 네 스캔들만 아니었다면 부승민
당당한 온하랑의 대답에 수화기 너머의 오미연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그녀는 바로 욕부터 내뱉기 시작했다.“이런 빌어먹을. 그래 계속 그렇게 센 척 해봐. 언제까지 그렇게 당당할 수 있나 두고 봐!”오미연은 온하랑의 말을 죽었다 깨어나도 믿지 않을 듯싶었다.분명 온하랑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천하의 부승민이 어떻게 고작 온하랑 하나 때문에 BX 그룹 대표 자리를 버린다고?부승민은 젊은 나이에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손에 이토록 막강한 권력을 쥐기까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부승민이 이 눈부신 순간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는지 오미연은 잘 알고 있었다.그런 자리를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있나?전화가 끊긴 후, 온하랑은 침대 위에 앉아 오미연이 했던 말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만약 오미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임원들의 눈에 들어온 차기 대표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 걸까? 경영 매니저일 리는 절대 없었다. 그런 직업군의 사람들은 믿을 게 못 되니까.그럼 그나마 가능성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둘째 삼촌인가?둘째 삼촌이라면 지금 회사의 회장직을 꿰차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정작 회사 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의 프랜차이즈 사업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일전 둘째 이모와의 만남을 잠깐 가졌을 때도 둘째 삼촌 부광훈은 지금 B 시에서 운영 중인 프랜차이즈에 문제가 생겨 그쪽으로 출장을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그렇다고 사촌 동생일 리도 없었다.부승민이 사촌 동생에게 승진을 권유했을 때 이미 한 번 매몰차게 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연구센터에만 머물며 연구개발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굳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책임지며 사는 것은 사촌 동생의 성격에도 맞지는 않았다.그럼 남은 사람은 단 한 명, 부민재 밖에 없었다.부민재는 워낙 천성이 온순하고 다정한 사람인지라 분명 임원들이 좋아할 스타일이었다.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던
고승범 이사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흘렀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엄청난 긴장감을 조성했다.임원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아무도 먼저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누군가는 서로 귓속말을 나누며 수군대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척 모르쇠를 시전했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임원들도 있었다.고승범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저도 당연히 부승민 대표가 회사를 위해 이뤄낸 업적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공로들이 부승민 대표 해임의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적이 있는 장군이라고 해도 단 한 번의 실수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도리이니까요. 게다가 이때까지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던 그 일들은 모두 부승민 대표의 사생활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닙니까? 앉아 계신 여러분들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부승민 대표의 위치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회사를 대표할 수 있다는 걸 자각하고 항상 처신을 똑바로 했었어야 합니다. 그 간단한 회사 이미지도 지켜내지 못한 대표가 저희 임원진들과 주주들은 지켜낼 수 있을까요?”고승범 이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임원이 머뭇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맞받아쳤다.“하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대표이사를 교체해버리면, 주주들이 새로운 대표이사를 믿을 수 있을까요?”“적어도 주주들에게 저희의 진심 어린 태도는 보여드릴 수 있겠죠. 주주들이 원하던 해명을 대신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주들이 우리 회사 주식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걸 보고만 있을 겁니까?”고승범 이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질문에 대답했다.“최근 들어 업무에 사적인 감정을 끌어들이는 일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전 누가 MQ 전무 교체를 제안했을 때도 빗발치는 언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승민 대표는 자신의 아내인 온하랑을 지키기 위해 본사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