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몽롱한 기분으로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병실의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현실성이 없어 마치 한 차례의 꿈을 꾸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거칠면서도 부드러운듯한 거즈가 만져졌다.“하랑아, 깨어났구나!”병상의 인기척을 느낀 부승민이 다급하게 병상 옆 간이의자로 달려가 앉으며 물었다.“지금 좀 어떤 것 같아?”온하랑의 귓가에는 윙윙 거리는 소음만 들릴 뿐, 부승민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분명 부승민의 입가가 움직이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부승민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입을 여는 순간 한껏 갈라진 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온하랑은 목에서 수십 개의 칼날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부승민은 바로 탁자 위에 있던 컵에 물을 따랐다. 온하랑의 등을 받쳐 가볍게 몸을 일으킨 부승민은 물이 담긴 컵을 들어 조심스레 온하랑의 입으로 몇 방울 흘려보냈다.“지금 상태가 어떤 것 같은지 물어보는 거야.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부승민이 탁자 위에 컵을 내려놓으며 온하랑에게 귓가로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괜찮아, 근데 꼭 이렇게 가까이서 얘기해야 해?”“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너 지금 외상 때문에 고막에까지 문제 생겨서 당분간은 청력이 떨어질 거래. 그래도 조금만 지나면 금방 다시 회복된다고 하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아, 우리 아빠 유골은...”온하랑은 부승민을 바라보며 다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걱정하지 마, 이미 장인어른 유골함은 새 걸로 바꿔서 다시 잘 모셔뒀어.”“다행이네, 그럼. 퇴원하면 바로 아빠 만나러 가야겠다.”온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응, 나랑 같이 가자.”“... 혹시 거울 있어?”부승민은 온하랑의 뜻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가볍게 그녀의 뺨을 문지르며 거즈에 끼어있던 머리
사모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더라고요...그제야 부승민은 완전히 깨달았다. 온하랑은 진작에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임신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과의 이혼을 고집하며 이주혁과 기어코 출국까지 하려고 했다는 거다.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휴대전화를 쥔 부승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휴대전화 없이 그저 밑으로 드리워진 손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가 주먹을 꽉 쥐었다.수화기 너머로 부승민의 답변이 들려오지 않자 도우미 아주머니가 말을 얹었다.“사모님을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사모님도 마음고생 정말 심하셨어요...”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던 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저도 압니다.”온하랑은 부승민에게 진심으로 실망하고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게 분명했다. 오죽했으면 아이까지 데리고 부승민의 곁을 떠날 생각을 했을까.아이를 가진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온하랑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임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으며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삼켜내야 했을까.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아이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했다...병실로 돌아온 부승민은 다시 병상 끝에 살며시 앉아 몸을 숙여 온하랑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다시는 온하랑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아이가 이주혁에게 아버지라 부르는 모습을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절대....병원 내부.“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병실 이곳저곳에 튀었다.두 남자가 추서윤을 병실 밖으로 끌어내려 애쓰고 있었고 추서윤은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병상 받침대라도 잡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의료진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감히 나설 수는 없었다.소란스럽기 그지없는 난동이었지만 높고 귀하신 분들만이 입원해 있다는 개인 VIP 병실들도 암묵적인 룰을 지키기라도 하듯 모두 병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이거 놔. 부승민한테 전화 한 통만
온하랑은 몽롱한 기분으로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병실의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현실성이 없어 마치 한 차례의 꿈을 꾸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거칠면서도 부드러운듯한 거즈가 만져졌다.“하랑아, 깨어났구나!”병상의 인기척을 느낀 부승민이 다급하게 병상 옆 간이의자로 달려가 앉으며 물었다.“지금 좀 어떤 것 같아?”온하랑의 귓가에는 윙윙 거리는 소음만 들릴 뿐, 부승민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분명 부승민의 입가가 움직이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부승민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입을 여는 순간 한껏 갈라진 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온하랑은 목에서 수십 개의 칼날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부승민은 바로 탁자 위에 있던 컵에 물을 따랐다. 온하랑의 등을 받쳐 가볍게 몸을 일으킨 부승민은 물이 담긴 컵을 들어 조심스레 온하랑의 입으로 몇 방울 흘려보냈다.“지금 상태가 어떤 것 같은지 물어보는 거야.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부승민이 탁자 위에 컵을 내려놓으며 온하랑에게 귓가로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괜찮아, 근데 꼭 이렇게 가까이서 얘기해야 해?”“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너 지금 외상 때문에 고막에까지 문제 생겨서 당분간은 청력이 떨어질 거래. 그래도 조금만 지나면 금방 다시 회복된다고 하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아, 우리 아빠 유골은...”온하랑은 부승민을 바라보며 다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걱정하지 마, 이미 장인어른 유골함은 새 걸로 바꿔서 다시 잘 모셔뒀어.”“다행이네, 그럼. 퇴원하면 바로 아빠 만나러 가야겠다.”온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응, 나랑 같이 가자.”“... 혹시 거울 있어?”부승민은 온하랑의 뜻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가볍게 그녀의 뺨을 문지르며 거즈에 끼어있던 머리
부승민은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했다. 목울대에서는 어딘가 모를 감정들이 울컥 치밀어 오르며 후회가 물 밀듯 밀려왔다.그날의 기억이 부승민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모진 말을 내뱉던 자신의 모습을.“그럴 일은 없어.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절대 못 낳게 할 거야.”부승민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온하랑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분명 크게 실망하고 어찌할 도리를 몰라 불안했겠지.그래서 여태껏 숨겨왔던 것일지도 모른다.온하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사실 그래도 난 이 정도면 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 임신 사실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어제 그 사람들, 분명 아이부터 없애려고 했을 거야.”그녀는 부승민에게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철저히 숨긴 게 아니었다. 추서윤의 엄마도 온하랑의 임신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만약 심은혜가 온하랑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절대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다.온하랑의 덤덤한 말에 부승민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랑아, 내가 약속 하나 할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이혼은...”“하랑아, 아이를 봐서라도 제발 한 번만 나한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이럴 줄 알았다.하지만 부승민도 지금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지금 온하랑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단순한 책임감인지.그것도 아니라면 부승민의 얼마 안 되는 그 죄책감 때문일까? 사랑 없는 감정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눈을 질끈 감은 온하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추서윤 씨...”“어제 공항으로 데려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대. 지금은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받는 중이야. 앞으로는 걔 언급도 하지 마. 추서윤이 어떻게 되든 우리랑은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부승민을 바라보는 온하랑은 어딘가 모르게 서늘함을 느꼈다. 이 남자, 대체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걸까....도우미 아주머니가 아침부터 이것저것
3일 후, 온하랑은 정식으로 퇴원 절차를 밟고 병원을 벗어났다.부승민은 온하랑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차에 올라탔다. 병원을 벗어나 별장에 도착한 뒤에도 부승민은 여전히 온하랑을 소중히 들어 올려 안방 침대까지 데려다주었다. 병원에서부터 별장 안방까지 오는 내내 온하랑의 발은 단 한순간도 바닥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그 상태로 이틀이 더 지나자 온하랑은 그제야 얼굴에 거추장스럽게 붙이고 있던 거즈를 떼어낼 수 있었다.얼굴의 부기는 진작에 빠져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엉망진창이던 온하랑의 얼굴에 있던 세 개의 상처에는 딱지가 들어앉았다.그중 한 상처는 광대뼈에 있었다. 하마터면 눈까지 다칠 뻔했던 위험한 상황이었음을 잘 알 수 있는 상처였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작은 얼굴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다정하고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괜찮아, 흉 지는 일은 없을 거야.”부승민은 온하랑을 위해 어떻게든 효과적인 흉터 연고와 의료기기들을 마련해줄 심산이었다.온하랑의 표정은 부승민의 반응과 달리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얼굴에 흉이 남든 안 남든 딱히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렇다고 온하랑이 아름다움에 별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체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온하랑은 선천적으로 상처가 생겨도 흉이 잘 지지 않는 체질이었다. 상처에 진 딱지가 떨어지고 돋아나는 새 살은 주위의 살보다 조금 더 연하고 밝을 뿐, 그 정도는 간단한 화장만으로도 쉽게 가릴 수 있었다.“나 아빠 보러 가고 싶어.”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부승민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 나랑 같이 가자.”밖을 나서기 전, 온하랑은 마스크로 자신의 얼굴을 철저하게 가렸다.부승민은 또다시 온하랑을 들어 올려 차에 태웠다. 묘지 입구까지 도착하자 부승민은 재빨리 운전석에서 내려 차 트렁크에 실려있던 휠체어를 꺼내 그 위로 온하랑을 앉혔다. 그는 온하랑이 올라탄 휠체어를 이끌고 묘지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여러 묘비를 지나 ‘온
정신을 차린 후에는 온하랑 혼자만이 남아있었다.사고 발생 이후, 기자들은 앞다투어 기사들을 써내기 시작했다. 부승호 회장과 여러 인사들의 도움으로 온하랑은 무사히 아버지의 장례와 추도회를 치를 수 있었다.그 시간 동안 온하랑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넋 나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멍해 있었다.너무 한순간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탓에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온하랑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아버지가 세상을 뜬지 한참이나 지나버린 어느 금요일 저녁,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온하랑은 한 생선요리 전문점을 지나치고 있었다. 탁 트인 가게의 창문 너머로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정말 일상적인 장면이었지만 가게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후였다.그제야 온하랑은 아버지가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그것도 영원히.부씨 일가에 입양된 후에도 온하랑은 꾸준히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찾아가 옛 추억에 잠겨 아버지를 그리워했다.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집을 허물게 될 때도 온하랑은 아버지가 남긴 유품들을 챙겨왔다.유품 중 아버지의 옷가지들은 전부 불태우고 평소에 자주 쓰던 일용품, 책과 노트 같은 것들만 챙겨왔다.그 모든 유품에서 온하랑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듯했다.금속으로 된 라이터도 온하랑이 들고 온 아버지의 유품 중 하나였다.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라이터였지만 살아생전 아버지는 늦은 밤중까지 원고를 쓸 때마다 그 라이터로 담뱃불을 지피고는 했다.그리고 이 카메라는 SE 브랜드의 기본 카메라였다. 매번 현장으로 취재를 하러 갈 때마다 아버지는 이 카메라로 현장 사진을 담았다.하나하나 이어붙인 이 잡지와 서류철에 차곡차곡 보관해놓은 이 신문들에는 아버지가 발표한 기사들이 실려있었다. 그 밑에 함께 보관되어있는 필름들과 사진들까지 모두 아버지가 이때까지 취재에 참여했던 기록들이었다
그날 아침, 부승민은 온하랑이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본 후에야 회사로 향했다.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온하랑이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독서를 하고 있을 때였다.그녀 역시 자신과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임신과 육아에 관련된 책들을 구매해두었다.전에는 부승민에게 임신 사실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감히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부승민이 온하랑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지극정성으로 돌보게 된 지금, 그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아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벨 소리가 울리고 있던 온하랑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일련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온하랑은 새 휴대전화로 바꾼 이후, 전 휴대전화에 있던 연락처를 옮겨오지 않았던 상태라 아무 의심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통화 수락 버튼을 누르자 이내 전화가 걸렸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에서 한 여자의 자조적인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야, 온하랑. 넌 지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부승민이 미디어에 너희 둘 사이 다 까발리고 이제 넌 임신까지 한 몸이니, 넌 지금 네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겠네?”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오미연이었다.부승민은 이미 오미연에게 정식으로 소송을 걸고 회사에서도 정리해고를 통보한 상태였다.다만 소송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관계로 오미연은 아직도 법의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자유의 몸으로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온하랑이 퇴원하는 그 날, 오미연도 병원에 있었다. 그녀는 부승민이 온하랑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레 끌어안은 채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 둘의 모습은 오미연의 눈에는 꼴사납기 그지없었다.쟤가 뭔데?대체 온하랑 같은 촌년이 뭐길래 부승민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거냐고? 쟤는 어울리지 않아, 자격이 없다고! 온하랑은 갑자기 걸려온 오미연의 전화에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고는 일부러 오미연의 화를 더 돋울 심산으로 대답했다.“그러게, 난 오히려 너한테 고마워해야지. 만약 네 스캔들만 아니었다면 부승민
당당한 온하랑의 대답에 수화기 너머의 오미연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그녀는 바로 욕부터 내뱉기 시작했다.“이런 빌어먹을. 그래 계속 그렇게 센 척 해봐. 언제까지 그렇게 당당할 수 있나 두고 봐!”오미연은 온하랑의 말을 죽었다 깨어나도 믿지 않을 듯싶었다.분명 온하랑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천하의 부승민이 어떻게 고작 온하랑 하나 때문에 BX 그룹 대표 자리를 버린다고?부승민은 젊은 나이에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손에 이토록 막강한 권력을 쥐기까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부승민이 이 눈부신 순간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는지 오미연은 잘 알고 있었다.그런 자리를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있나?전화가 끊긴 후, 온하랑은 침대 위에 앉아 오미연이 했던 말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만약 오미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임원들의 눈에 들어온 차기 대표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 걸까? 경영 매니저일 리는 절대 없었다. 그런 직업군의 사람들은 믿을 게 못 되니까.그럼 그나마 가능성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둘째 삼촌인가?둘째 삼촌이라면 지금 회사의 회장직을 꿰차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정작 회사 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의 프랜차이즈 사업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일전 둘째 이모와의 만남을 잠깐 가졌을 때도 둘째 삼촌 부광훈은 지금 B 시에서 운영 중인 프랜차이즈에 문제가 생겨 그쪽으로 출장을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그렇다고 사촌 동생일 리도 없었다.부승민이 사촌 동생에게 승진을 권유했을 때 이미 한 번 매몰차게 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연구센터에만 머물며 연구개발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굳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책임지며 사는 것은 사촌 동생의 성격에도 맞지는 않았다.그럼 남은 사람은 단 한 명, 부민재 밖에 없었다.부민재는 워낙 천성이 온순하고 다정한 사람인지라 분명 임원들이 좋아할 스타일이었다.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던
온하랑은 쪼그리고 앉아 메이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메이슨은 경주에 집이 있기에 낯선 강남시에 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도 이곳은 낯선 곳이야, 엄마의 집은 강남시에 있어.”슬퍼하는 메이슨을 온하랑은 계속 달래주었다.“앞으로 엄마가 메이슨 보러 자주 올게. 메이슨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강남시에 찾아와도 돼.”그녀가 조산을 앞두고 있을 당시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한발 늦은 탓에 먼저 메이슨을 데려간 최동철이 각종 절차를 밟아 양육권을 가졌고 그 사이 메이슨도 이미 이곳에 적응해 버렸다.최동철은 온갖 정성을 쏟아서 메이슨을 돌봤으며 마음이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생활환경을 자주 바꿀 수 없으므로 여기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메이슨은 의기소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그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이모가 만들었던 쿠키를 기억해? 엄마가 메이슨이 도움이 필요한데 함께 만들 수 있을까? 아빠가 돌아오시면 메이슨의 솜씨가 어떤지 맛보라고 하자.”기분이 언짢았던 메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쿠키를 만들기 시작하자 곰돌이 모양의 틀로 반죽을 찍던 그는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쿠키를 만들던 중 온하랑은 부승민의 전화를 받았다.그가 물었다.“출발했어?”“아니, 깜빡했어. 아까 최 회장님 다녀가셨는데 동철 오빠의 소식이 있다고 하셨어.이틀 더 머물다 그가 돌아오면 돌아갈게.”부승민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그가 기분이 언짢다고만 생각한 온하랑은 웃으면서 말했다.“며칠인데 못 기다리겠어?”“아니.”부승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우현 씨 핸드폰을 훔쳤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응, 기억해.”바로 서우현이 그 남자를 찾았고 그의 입에서 메이슨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온하랑은 식탁에서 쿠키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메이슨을 바라보았다.“그가 왜?”“줄곧 그가 나타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사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으라고 했는데 며칠 전 그를 찾아서 잡고 심문하니 진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