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기사들이었지만 임직원들은 그 아무도 감히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감히 언급할 자격이 없었다.하지만 이 상무 이사라면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그는 회사의 상무 이사직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의 주주로서 이사회의 멤버였으니 그는 단순히 회사의 주가와 직결되는 일에 관해 얘기한 것뿐이었다.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부승민에게 문제가 있다 해도 감히 부승민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독을 당한 온하랑의 창백한 안색이 더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녀의 속은 이미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었다.“저 하나 때문에 회사 이미지에 손해를 끼친 점, 정말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온하랑의 말은 이내 부승민에 의해 끊겨버렸다.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리에 있는 임직원들을 하나하나 쏘아보며 말했다.“지금 이 얘기를 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요.”여기서 투표를 통해 결정되는 자리는 오직 재무부 부장직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임직원들의 해임권과 부임권은 모두 부승민에게 있었다.고승범 이사가 애써 웃으며 경직된 미소로 말했다.“그렇죠.”누가 봐도 온하랑을 회사에 남겨두려는 부승민의 의도 섞인 말이었다. 여기서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해봤자 부승민의 미움만 살 게 뻔했다.“계속하시죠.”말을 마친 부승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오상철 부대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미 앞에서 다 해주셨네요. 굳이 같은 말을 반복하진 않겠습니다.”“하지만.”아무 말 않고 넘어가려나 싶던 그 순간, 오상철이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며칠 전, 이 감독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감독님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온하랑 전무님께서 요청한 단독 스폰서 자리를 거절하신 것도 모자라 이 감독님의 메신저를 차단까지 하셨다고. 전무님, 이게 사실입니까?”다른 상무 이사가 오상철의 말을 거들었다.“이 감독님? 이 감독님이라면
부승민은 언성을 높여 제지했다.“됐어요, 그만 해요! 오 부대표는 고작 이런 일 따위로 이렇게 심각해져서는 언제까지 언쟁할 건가요?”“저도 회사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그러는 겁니다.”얼굴이 어두워진 오상철이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부승민은 어이없어 코웃음을 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온하랑의 성격상 고객이 지나친 일을 하지 않는 한에는 절대 섣불리 블랙리스트에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때 가만히 지켜보던 임재현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나섰다.“오 부대표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개 프로그램 감독일 뿐인데 뭐가 대수에요. 손을 잡지 않겠다고 하면 내치면 그만이죠. 하랑 씨도 일에 집중하고 이 문제에 대해 신경 쓰지 말아요.” 임재현은 권력 다툼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몇 년 동안 온하랑이 그의 밑에서 MQ 를 아주 잘 이끌어 왔기에, 그는 한가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신경 쓰지 않고도 적지 않은 이익을 분배받을 수 있었다. 이 얼마나 편안한 일이란 말인가!한편 누구도 자기편을 들지 않아 안색이 더욱 어두워진 오상철은 온하랑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시선을 채 거두기도 전에 등줄기가 오싹한 느낌을 받으며 슬쩍 곁눈질한 오상철은 부승민이 싸늘한 눈길로 자신을 흘겨보는 걸 발견했다.그의 서슬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으며 주눅이 들어 버린 오상철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자리에 앉아 침묵으로 일관했다.회의가 끝날 무렵, 부승민은 손에 들린 문서를 정리하며 일부러 자리에 앉아 몇 초 동안 시간을 끌다가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나서야 온하랑에게 말했다.“온 전무, 제 사무실로 왔다 가요.”두 사람이 회의실에서 나오자,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휴게실에서 경찰관 두 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알았어요. 저희가 바로 그쪽으로 갈게요.”‘저희라니?’온하랑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하고 있을 때, 부승민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제가 신고하라고 했어요. 온 전무의 개인 정보를 유출한 사람을 절대 가만 놔둬서는
이번 일만 없었더라면 오미연은 지사에서 잘나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부승민은 절대 오미연을 BX그룹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온하랑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대표님 사람이니, 대표님이 알아서 하세요.”그녀는 처음부터 오미연을 의심했다. 추서윤은 그럴싸한 화제로 관심만 끌었을 뿐, 비방죄에는 해당하지 않았기에 온하랑도 추서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만일 폭로한 결정적 증거만 있어도 부승민이 직접 해명한다면 추서윤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았다.오직 오미연만이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러나 부승민을 좋아하기에 몰래 초점을 강하리에게 맞췄다.천천히 온하랑 앞으로 다가가 멈춰 선 부승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귀밑 잔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미안해.”이번 오미연의 사건에 관해 부승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하랑에게 사과의 한마디를 빚지고 있었다. 애초에 부승민이 온하랑을 믿어주기만 했더라면 아마 이런 일도 뒤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인터넷 곳곳에서 공격받을 일도, 네티즌들의 온갖 욕설을 들을 일도 없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그녀였지만, 마치 시궁창에 살고 있는 생쥐처럼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들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대표님.”만약 부승민이 미안하다는 말을 조금만 더 일찍 했더라면 그녀는 크게 감동받았을지도 모른다.“지금 다른 사람은 없으니까, 그냥 이름 불러도 돼.”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한 온하랑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고 이사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사적인 일로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으니, 저도 책임을 면할 수 없어요. 마음 편히 이 자리에 계속 있을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제가 사직하는 게 맞아요.”부승민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 잡생각 하지 말고 편하게 일해.”온하랑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녀도 잡념을 떨쳐버리고 싶었으나 이런 짓눌리는 환경속에서 가슴이
“증거가 이렇게 명확한데 어떻게 오해란 말이죠? 오 부대표님,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진재영과 당신 아들한테 확인해 봐요!”오상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부승민이 이렇게 말하는 건 분명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오상철이 계속 말이 없자 부승민은 이어서 말했다.“고 이사님 말씀대로 이번 뉴스로 회사 명예와 주식이 크게 영향을 받고 막대한 손실을 끼쳤으니, 저와 회사의 명의로 진재영과 오진후에게 명예 훼손과 비방으로 민사와 형사 소송을 제기할 겁니다. 오 부대표는 항상 회사에 충성하는 분이시니 회사의 결정에 따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BX 그룹의 법무부는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거기에 더해 이번 뉴스가 확실히 큰 영향을 미치고 악질적이었던 만큼, 부승민과 회사가 승소한다면 진재영과 오진후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할 것이다. 집이 망하는 건 물론이고 여차하면 감옥살이까지 해야 할 것이다.게다가 명예 훼손과 비방은 소송감이었다. 오진후가 저지른 일의 배후가 오미연이라는 걸 오상철이 안다고 하더라도 부승민이 오미연을 고소하지 않거나 오미연과 합의를 한다면 그 책임은 모두 오진후가 떠안아야 한다.지금 이 순간 오상철은 오미연 같은 인간을 도왔다는 사실이 무척 후회스러웠다.오미연은 이미 이성을 잃을 정도로 미쳐있었다. 오상철이 자신을 포기할까 봐 일부러 오진후를 끌어들인 것이다.평정심을 되찾은 오상철이 반문했다.“정 그러시다면 우리 툭 터놓고 얘기하죠. 대표님과 온하랑 씨가 밀접한 사이라는 건 사실이 아닌가요? 대표님은 무조건 승소할 거라고 확신하나요?”소파에 등을 기대앉은 부승민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드러났다.“오 부대표가 믿지 못하겠다면 시도해 보던가요!”오상철은 침묵했다. 아마도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는 것 같았다.“당신 앞에 지금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패소하는 데 베팅하는 거죠. 위험도는 높지만, 수익은 클 겁니다. 베팅에 실패한다면 오진후는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것은 물론 감옥에 들어가야 하죠. 이미 오
문자 내용을 한 번 쭉 훑어보니 전부 입에 담지도 못할 각종 욕설과 저주, 인신공격으로 뒤덮여 있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부승민의 얼굴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음침해졌다. 마음속에서는 부아가 치밀었다.그는 화면을 빼곡히 채운 욕설을 보며 온하랑이 무슨 심정이었을지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온하랑이 혼자서 이런 것들을 묵인하고 억울함을 감내하며 묵묵히 일했을 생각을 하니, 부승민의 가슴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다.그리고 그가 전원을 켠 짧은 시간 안에도 계속 새로운 테러 전화와 저주 문자가 잇따랐다.부승민은 카톡을 열고 채팅창을 찾아봤지만, 이 감독과의 대화는 없었다. 아마도 온하랑이 이 감독을 차단하면서 대화창도 삭제한 모양이다.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부승민은 휴대폰 갤러리로 들어가 캡처 화면을 이리저리 뒤져보았다. 역시나 온하랑이 저장해 놓은 증거가 있었다.두 사람의 대화 기록 제일 밑부분에 있는 건 이 감독의 메시지였다.[내 손에 있는 프로그램 다음 시즌 타이틀 스폰서십을 줄 테니, 오늘 밤 포시즌 호텔에 갈까요?]눈빛이 싸늘하게 변한 부승민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탕, 내려놓고는 어딘가로 전화했다.“부 대표님께서 어쩐 일로 저에게 전화를 다 주셨나요?”휴대폰 너머의 사람은 믿어지지 않는 듯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듣기로 이 감독한테 아주 인기가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다면서요?”“네, 네! 투자하시려고요? 그렇지만 전 그 프로그램을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여기저기가 지뢰밭이라서 방송국에서 제한하고 있거든요. 아마 조만간 조기종영 할 겁니다.”“조기종영 할 거라고요? 그럼 크게 터뜨려서 이 감독이 다시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봐요! 일 처리를 제대로 하면 당신이 맡은 프로그램 투자에 대해 고려해 보죠.”휴대폰 너머의 사람은 흥분에 겨워 재차 다짐했다.“부 대표님, 안심하고 지켜보세요!”저녁, 부승민은 접대 자리가 있었다.룸에서 나오자 벌써 시간이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다.파트너 측은 아주
그러나 그 뉴스가 터져 나온 이후로 이주혁이 부승민을 대하는 태도는 180도로 돌변했다. 그의 눈에 부승민은 그저 양다리를 걸치는 아주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바람둥이로 낙인찍혔다. 온하랑에게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인간!두 사람의 관계를 놓고 보자면 분명 부승민이 강제로 온하랑을 압박했을 터였다.어르신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가며 부승민도 서서히 본성을 드러냈을 거고, 온하랑은 눈칫밥을 먹으며 어르신이 노년에 그녀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와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우려하여 어쩔 수 없이 부승민을 따랐을 거다. 분명 그럴 것이다!“그래서 그 말은 당신이 루머를 퍼뜨려 온하랑에게 집중된 비난의 화살을 당신 쪽으로 돌리겠다는 의미인가요?”이주혁은 부승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제가 왜 사람을 때렸는지 아세요?”부승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주혁은 바로 휴대폰에 저장된 녹음 파일을 열었다.직접 들어보세요.휴대폰에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딱 봐도 음란한 여자네 뭐.”“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직접 봤어?”“그때 내가 자세히 봤거든. 그 엉덩이와 허리는 진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 혼을 쏙 빼놓더라고...”“나라면 이 여자를 하룻밤 내내 기분 좋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고객이 그렇게 많은데 네 차례가 오기나 할 것 같아?”여러 비속한 말들이 오간 뒤로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도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았다.“이주혁 씨, 당신 아무리 팬이 많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되죠.”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그 뒤에 이어진 말들은 더욱 귀에 거슬렸다.“그러고 보니 온하랑이 당신 촬영 현장에 보러 온 적이 있었지. 혹시 당신도 그 여자 고객인 거야? 이렇게 싸고도는 걸 보니, 그 여자가 끝내주게 해줬나 봐... 더러운 년, 쪽팔린 줄도 모르고. 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건 두렵대?”부승민은 무릎 위에 내려놓은 손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손등에는 시퍼런 핏줄이 튀어나오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하얗게
차가 별장 정원에 이르자 부승민은 차에서 내렸다.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안방 등이 꺼져 있었다.거실로 들어온 부승민은 등을 켜고 일부러 서랍 앞으로 가서 확인했다. 안방 비상 열쇠가 도로 들어있었다. 이윽고 부승민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 몇 가닥의 은은한 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와 침대 머리에 쏟아져 내리며 베개 위에 가지런히 놓인 그녀의 머리칼이 어렴풋이 보였다.침대 중간에 볼록 튀어나온 작은 몸집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왜소하고 가냘파 보였다.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그녀의 반쪽 얼굴은 이불에 가려져 있었다.조용히 침대 옆으로 가서 앉은 부승민은 천천히 이불 한쪽 끝을 내리고, 희미한 달빛을 빌어 깊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부승민은 그제야 그녀의 미간에 나타난 깊은 주름을 발견했다. 머리가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악몽이라도 꾸는지 잠꼬대를 하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때 꿈속에 공포스러운 장면이 나타났는지 불현듯 그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며 가빠지더니, 꽉 움켜쥔 손가락에 의해 시트에 몇 겹의 주름이 잡혔다. 몸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구슬 같은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부승민은 몸을 숙이고 간간이 들려오는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그런 적 없어...”그녀의 눈가에 서서히 눈물방울이 맺히더니 애처로운 목소리와 함께 주르륵 흘러내려 베개에 스며들었다.순간 부승민의 가슴은 칼로 에는 듯 아팠다. 이윽고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손을 들어 부드럽게 온하랑의 등을 토닥여주던 부승민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자. 너한테 상처 준 사람들 전부 가만두지 않을 거야.”“너무 보고 싶어, 아빠. 제발 날 집에 데려가면 안 돼...”온하랑은 또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어릴 적, 넓고 듬직한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할아버지의 탄식, 동료들의 경멸 어린 시선, 부민재의 위로, 선배의 도움 이 모든 건 그때의 부승민에게는 한없이 무겁게만 다가왔다.그는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그저 최선을 다해 데이터 유출로 뒤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한편 추서윤은 사고 후 트라우마를 겪으며 그에게 유난히 의지했다.부승민도 더는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추서윤을 대할 때 그가 느끼는 감정은 대부분 어쩔 수 없는 마음과 만회하는 마음, 수용하는 마음이었다.한 번도 오늘과 같은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쿡쿡 쑤시는 것 같은 느낌.계단에서 멈춰 선 부승민은 휴대폰을 꺼내 연민우에게 전화했다.“연 비서.”“네, 대표님. 말씀하세요.”연민우는 부승민이 오늘 밤에 있는 협력안에 대해 추가로 분부하려는 줄 알았다.“전에 경제 채널에서 계속 나에게 특별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네?”연민우는 자신이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부승민은 항상 매체에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는 걸 꺼렸기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발표할 때의 동영상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었다. SNS 계정도 없었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대표님, 제대로 생각하신 거 맞으시죠?”온하랑이 안타까워 부승민이 직접 해명에 나서려고 한다는 걸 연민우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 그쪽에 연락해서 시간과 질문을 잘 조정해 봐.”“네, 알겠습니다.”...토요일 오전 부승민과 온하랑은 본가로 향했다.“삼촌! 숙모!”네 살이 된 부윤민은 거실에서 깡충깡충 뛰어나와 그들을 맞이했다.“일찍 왔네, 윤민이.”온하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거실로 들어갔다.부윤민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날 데리고 등산하러 갈 거래요. 삼촌이랑 숙모도 같이 갈래요?”부윤민이 말하는 등산은 아마도 성묘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부씨 일가는 공원 묘원을 소유하고 있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