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잠깐 질끈 감았다 뜬 온하랑은 비서가 두고 간 서류로 손을 뻗으며 최대한 정신을 차려 곧 있을 회의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대표님, 큰일 났습니다.”다급한 발걸음으로 회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연민우의 목소리와 태도에까지 조급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전무님 전화번호와 온갖 개인 SNS 계정들이 모조리 공개되어 버렸습니다!”연민우의 말에 표정이 차갑게 식은 부승민 역시 바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대표님. 전무님께서도 이미 공개된 그 전화번호는 과감히 버리셨으니까요.”“가서 IP 추적부터 해.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수집하고 경찰에 신고 넣어!”화가 제대로 난듯한 부승민이 한 글자, 한 마디에 힘을 실어 얘기했다. 부승민은 주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공권력의 힘을 빌리기보다 자신의 선에서 조용히 끝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는 것의 단점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공권력을 이용한 공개적인 본보기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목숨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함부로 덤벼대는데, 그렇다면 원하던 대로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지 제대로 느끼게 해줘야지!“네, 지금 바로 추적 시작하겠습니다.”부승민도 자리를 뜨려던 그 순간,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부승민은 바로 휴대전화를 들어 수신 버튼을 눌렀다.“부승민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수화기 너머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뭡니까?”“진재용 말입니다. 오상철 부대표님의 먼 친척 되는 사람이던데요. 평소엔 빈둥대며 놀기만 하다가 최근 들어 오진후 군과 부쩍 가까워진 것으로 보입니다.”오진후라면 오상철 부사장의 아들이었다.부승민은 의외의 소식에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그럼, 그 둘 사람 거래 내역은?”“이미 대표님께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오진후는 아마 오미연한테 철저하게 조종당한 걸 거야. 넌 그 두 사람에 대해서 계속 알아봐 줘.”“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기사들이었지만 임직원들은 그 아무도 감히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감히 언급할 자격이 없었다.하지만 이 상무 이사라면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그는 회사의 상무 이사직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의 주주로서 이사회의 멤버였으니 그는 단순히 회사의 주가와 직결되는 일에 관해 얘기한 것뿐이었다.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부승민에게 문제가 있다 해도 감히 부승민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독을 당한 온하랑의 창백한 안색이 더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녀의 속은 이미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었다.“저 하나 때문에 회사 이미지에 손해를 끼친 점, 정말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온하랑의 말은 이내 부승민에 의해 끊겨버렸다.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리에 있는 임직원들을 하나하나 쏘아보며 말했다.“지금 이 얘기를 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요.”여기서 투표를 통해 결정되는 자리는 오직 재무부 부장직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임직원들의 해임권과 부임권은 모두 부승민에게 있었다.고승범 이사가 애써 웃으며 경직된 미소로 말했다.“그렇죠.”누가 봐도 온하랑을 회사에 남겨두려는 부승민의 의도 섞인 말이었다. 여기서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해봤자 부승민의 미움만 살 게 뻔했다.“계속하시죠.”말을 마친 부승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오상철 부대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미 앞에서 다 해주셨네요. 굳이 같은 말을 반복하진 않겠습니다.”“하지만.”아무 말 않고 넘어가려나 싶던 그 순간, 오상철이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며칠 전, 이 감독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감독님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온하랑 전무님께서 요청한 단독 스폰서 자리를 거절하신 것도 모자라 이 감독님의 메신저를 차단까지 하셨다고. 전무님, 이게 사실입니까?”다른 상무 이사가 오상철의 말을 거들었다.“이 감독님? 이 감독님이라면
부승민은 언성을 높여 제지했다.“됐어요, 그만 해요! 오 부대표는 고작 이런 일 따위로 이렇게 심각해져서는 언제까지 언쟁할 건가요?”“저도 회사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그러는 겁니다.”얼굴이 어두워진 오상철이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부승민은 어이없어 코웃음을 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온하랑의 성격상 고객이 지나친 일을 하지 않는 한에는 절대 섣불리 블랙리스트에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때 가만히 지켜보던 임재현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나섰다.“오 부대표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개 프로그램 감독일 뿐인데 뭐가 대수에요. 손을 잡지 않겠다고 하면 내치면 그만이죠. 하랑 씨도 일에 집중하고 이 문제에 대해 신경 쓰지 말아요.” 임재현은 권력 다툼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몇 년 동안 온하랑이 그의 밑에서 MQ 를 아주 잘 이끌어 왔기에, 그는 한가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신경 쓰지 않고도 적지 않은 이익을 분배받을 수 있었다. 이 얼마나 편안한 일이란 말인가!한편 누구도 자기편을 들지 않아 안색이 더욱 어두워진 오상철은 온하랑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시선을 채 거두기도 전에 등줄기가 오싹한 느낌을 받으며 슬쩍 곁눈질한 오상철은 부승민이 싸늘한 눈길로 자신을 흘겨보는 걸 발견했다.그의 서슬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으며 주눅이 들어 버린 오상철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자리에 앉아 침묵으로 일관했다.회의가 끝날 무렵, 부승민은 손에 들린 문서를 정리하며 일부러 자리에 앉아 몇 초 동안 시간을 끌다가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나서야 온하랑에게 말했다.“온 전무, 제 사무실로 왔다 가요.”두 사람이 회의실에서 나오자,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휴게실에서 경찰관 두 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알았어요. 저희가 바로 그쪽으로 갈게요.”‘저희라니?’온하랑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하고 있을 때, 부승민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제가 신고하라고 했어요. 온 전무의 개인 정보를 유출한 사람을 절대 가만 놔둬서는
이번 일만 없었더라면 오미연은 지사에서 잘나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부승민은 절대 오미연을 BX그룹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온하랑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대표님 사람이니, 대표님이 알아서 하세요.”그녀는 처음부터 오미연을 의심했다. 추서윤은 그럴싸한 화제로 관심만 끌었을 뿐, 비방죄에는 해당하지 않았기에 온하랑도 추서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만일 폭로한 결정적 증거만 있어도 부승민이 직접 해명한다면 추서윤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았다.오직 오미연만이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러나 부승민을 좋아하기에 몰래 초점을 강하리에게 맞췄다.천천히 온하랑 앞으로 다가가 멈춰 선 부승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귀밑 잔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미안해.”이번 오미연의 사건에 관해 부승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하랑에게 사과의 한마디를 빚지고 있었다. 애초에 부승민이 온하랑을 믿어주기만 했더라면 아마 이런 일도 뒤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인터넷 곳곳에서 공격받을 일도, 네티즌들의 온갖 욕설을 들을 일도 없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그녀였지만, 마치 시궁창에 살고 있는 생쥐처럼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들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대표님.”만약 부승민이 미안하다는 말을 조금만 더 일찍 했더라면 그녀는 크게 감동받았을지도 모른다.“지금 다른 사람은 없으니까, 그냥 이름 불러도 돼.”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한 온하랑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고 이사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사적인 일로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으니, 저도 책임을 면할 수 없어요. 마음 편히 이 자리에 계속 있을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제가 사직하는 게 맞아요.”부승민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 잡생각 하지 말고 편하게 일해.”온하랑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녀도 잡념을 떨쳐버리고 싶었으나 이런 짓눌리는 환경속에서 가슴이
“증거가 이렇게 명확한데 어떻게 오해란 말이죠? 오 부대표님,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진재영과 당신 아들한테 확인해 봐요!”오상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부승민이 이렇게 말하는 건 분명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오상철이 계속 말이 없자 부승민은 이어서 말했다.“고 이사님 말씀대로 이번 뉴스로 회사 명예와 주식이 크게 영향을 받고 막대한 손실을 끼쳤으니, 저와 회사의 명의로 진재영과 오진후에게 명예 훼손과 비방으로 민사와 형사 소송을 제기할 겁니다. 오 부대표는 항상 회사에 충성하는 분이시니 회사의 결정에 따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BX 그룹의 법무부는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거기에 더해 이번 뉴스가 확실히 큰 영향을 미치고 악질적이었던 만큼, 부승민과 회사가 승소한다면 진재영과 오진후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할 것이다. 집이 망하는 건 물론이고 여차하면 감옥살이까지 해야 할 것이다.게다가 명예 훼손과 비방은 소송감이었다. 오진후가 저지른 일의 배후가 오미연이라는 걸 오상철이 안다고 하더라도 부승민이 오미연을 고소하지 않거나 오미연과 합의를 한다면 그 책임은 모두 오진후가 떠안아야 한다.지금 이 순간 오상철은 오미연 같은 인간을 도왔다는 사실이 무척 후회스러웠다.오미연은 이미 이성을 잃을 정도로 미쳐있었다. 오상철이 자신을 포기할까 봐 일부러 오진후를 끌어들인 것이다.평정심을 되찾은 오상철이 반문했다.“정 그러시다면 우리 툭 터놓고 얘기하죠. 대표님과 온하랑 씨가 밀접한 사이라는 건 사실이 아닌가요? 대표님은 무조건 승소할 거라고 확신하나요?”소파에 등을 기대앉은 부승민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드러났다.“오 부대표가 믿지 못하겠다면 시도해 보던가요!”오상철은 침묵했다. 아마도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는 것 같았다.“당신 앞에 지금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패소하는 데 베팅하는 거죠. 위험도는 높지만, 수익은 클 겁니다. 베팅에 실패한다면 오진후는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것은 물론 감옥에 들어가야 하죠. 이미 오
문자 내용을 한 번 쭉 훑어보니 전부 입에 담지도 못할 각종 욕설과 저주, 인신공격으로 뒤덮여 있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부승민의 얼굴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음침해졌다. 마음속에서는 부아가 치밀었다.그는 화면을 빼곡히 채운 욕설을 보며 온하랑이 무슨 심정이었을지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온하랑이 혼자서 이런 것들을 묵인하고 억울함을 감내하며 묵묵히 일했을 생각을 하니, 부승민의 가슴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다.그리고 그가 전원을 켠 짧은 시간 안에도 계속 새로운 테러 전화와 저주 문자가 잇따랐다.부승민은 카톡을 열고 채팅창을 찾아봤지만, 이 감독과의 대화는 없었다. 아마도 온하랑이 이 감독을 차단하면서 대화창도 삭제한 모양이다.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부승민은 휴대폰 갤러리로 들어가 캡처 화면을 이리저리 뒤져보았다. 역시나 온하랑이 저장해 놓은 증거가 있었다.두 사람의 대화 기록 제일 밑부분에 있는 건 이 감독의 메시지였다.[내 손에 있는 프로그램 다음 시즌 타이틀 스폰서십을 줄 테니, 오늘 밤 포시즌 호텔에 갈까요?]눈빛이 싸늘하게 변한 부승민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탕, 내려놓고는 어딘가로 전화했다.“부 대표님께서 어쩐 일로 저에게 전화를 다 주셨나요?”휴대폰 너머의 사람은 믿어지지 않는 듯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듣기로 이 감독한테 아주 인기가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다면서요?”“네, 네! 투자하시려고요? 그렇지만 전 그 프로그램을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여기저기가 지뢰밭이라서 방송국에서 제한하고 있거든요. 아마 조만간 조기종영 할 겁니다.”“조기종영 할 거라고요? 그럼 크게 터뜨려서 이 감독이 다시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봐요! 일 처리를 제대로 하면 당신이 맡은 프로그램 투자에 대해 고려해 보죠.”휴대폰 너머의 사람은 흥분에 겨워 재차 다짐했다.“부 대표님, 안심하고 지켜보세요!”저녁, 부승민은 접대 자리가 있었다.룸에서 나오자 벌써 시간이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다.파트너 측은 아주
그러나 그 뉴스가 터져 나온 이후로 이주혁이 부승민을 대하는 태도는 180도로 돌변했다. 그의 눈에 부승민은 그저 양다리를 걸치는 아주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바람둥이로 낙인찍혔다. 온하랑에게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인간!두 사람의 관계를 놓고 보자면 분명 부승민이 강제로 온하랑을 압박했을 터였다.어르신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가며 부승민도 서서히 본성을 드러냈을 거고, 온하랑은 눈칫밥을 먹으며 어르신이 노년에 그녀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와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우려하여 어쩔 수 없이 부승민을 따랐을 거다. 분명 그럴 것이다!“그래서 그 말은 당신이 루머를 퍼뜨려 온하랑에게 집중된 비난의 화살을 당신 쪽으로 돌리겠다는 의미인가요?”이주혁은 부승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제가 왜 사람을 때렸는지 아세요?”부승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주혁은 바로 휴대폰에 저장된 녹음 파일을 열었다.직접 들어보세요.휴대폰에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딱 봐도 음란한 여자네 뭐.”“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직접 봤어?”“그때 내가 자세히 봤거든. 그 엉덩이와 허리는 진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 혼을 쏙 빼놓더라고...”“나라면 이 여자를 하룻밤 내내 기분 좋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고객이 그렇게 많은데 네 차례가 오기나 할 것 같아?”여러 비속한 말들이 오간 뒤로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도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았다.“이주혁 씨, 당신 아무리 팬이 많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되죠.”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그 뒤에 이어진 말들은 더욱 귀에 거슬렸다.“그러고 보니 온하랑이 당신 촬영 현장에 보러 온 적이 있었지. 혹시 당신도 그 여자 고객인 거야? 이렇게 싸고도는 걸 보니, 그 여자가 끝내주게 해줬나 봐... 더러운 년, 쪽팔린 줄도 모르고. 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건 두렵대?”부승민은 무릎 위에 내려놓은 손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손등에는 시퍼런 핏줄이 튀어나오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하얗게
차가 별장 정원에 이르자 부승민은 차에서 내렸다.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안방 등이 꺼져 있었다.거실로 들어온 부승민은 등을 켜고 일부러 서랍 앞으로 가서 확인했다. 안방 비상 열쇠가 도로 들어있었다. 이윽고 부승민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 몇 가닥의 은은한 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와 침대 머리에 쏟아져 내리며 베개 위에 가지런히 놓인 그녀의 머리칼이 어렴풋이 보였다.침대 중간에 볼록 튀어나온 작은 몸집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왜소하고 가냘파 보였다.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그녀의 반쪽 얼굴은 이불에 가려져 있었다.조용히 침대 옆으로 가서 앉은 부승민은 천천히 이불 한쪽 끝을 내리고, 희미한 달빛을 빌어 깊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부승민은 그제야 그녀의 미간에 나타난 깊은 주름을 발견했다. 머리가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악몽이라도 꾸는지 잠꼬대를 하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때 꿈속에 공포스러운 장면이 나타났는지 불현듯 그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며 가빠지더니, 꽉 움켜쥔 손가락에 의해 시트에 몇 겹의 주름이 잡혔다. 몸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구슬 같은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부승민은 몸을 숙이고 간간이 들려오는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그런 적 없어...”그녀의 눈가에 서서히 눈물방울이 맺히더니 애처로운 목소리와 함께 주르륵 흘러내려 베개에 스며들었다.순간 부승민의 가슴은 칼로 에는 듯 아팠다. 이윽고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손을 들어 부드럽게 온하랑의 등을 토닥여주던 부승민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자. 너한테 상처 준 사람들 전부 가만두지 않을 거야.”“너무 보고 싶어, 아빠. 제발 날 집에 데려가면 안 돼...”온하랑은 또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어릴 적, 넓고 듬직한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