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별장 정원에 이르자 부승민은 차에서 내렸다.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안방 등이 꺼져 있었다.거실로 들어온 부승민은 등을 켜고 일부러 서랍 앞으로 가서 확인했다. 안방 비상 열쇠가 도로 들어있었다. 이윽고 부승민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 몇 가닥의 은은한 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와 침대 머리에 쏟아져 내리며 베개 위에 가지런히 놓인 그녀의 머리칼이 어렴풋이 보였다.침대 중간에 볼록 튀어나온 작은 몸집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왜소하고 가냘파 보였다.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그녀의 반쪽 얼굴은 이불에 가려져 있었다.조용히 침대 옆으로 가서 앉은 부승민은 천천히 이불 한쪽 끝을 내리고, 희미한 달빛을 빌어 깊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부승민은 그제야 그녀의 미간에 나타난 깊은 주름을 발견했다. 머리가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악몽이라도 꾸는지 잠꼬대를 하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때 꿈속에 공포스러운 장면이 나타났는지 불현듯 그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며 가빠지더니, 꽉 움켜쥔 손가락에 의해 시트에 몇 겹의 주름이 잡혔다. 몸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구슬 같은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부승민은 몸을 숙이고 간간이 들려오는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그런 적 없어...”그녀의 눈가에 서서히 눈물방울이 맺히더니 애처로운 목소리와 함께 주르륵 흘러내려 베개에 스며들었다.순간 부승민의 가슴은 칼로 에는 듯 아팠다. 이윽고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손을 들어 부드럽게 온하랑의 등을 토닥여주던 부승민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자. 너한테 상처 준 사람들 전부 가만두지 않을 거야.”“너무 보고 싶어, 아빠. 제발 날 집에 데려가면 안 돼...”온하랑은 또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어릴 적, 넓고 듬직한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할아버지의 탄식, 동료들의 경멸 어린 시선, 부민재의 위로, 선배의 도움 이 모든 건 그때의 부승민에게는 한없이 무겁게만 다가왔다.그는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그저 최선을 다해 데이터 유출로 뒤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한편 추서윤은 사고 후 트라우마를 겪으며 그에게 유난히 의지했다.부승민도 더는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추서윤을 대할 때 그가 느끼는 감정은 대부분 어쩔 수 없는 마음과 만회하는 마음, 수용하는 마음이었다.한 번도 오늘과 같은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쿡쿡 쑤시는 것 같은 느낌.계단에서 멈춰 선 부승민은 휴대폰을 꺼내 연민우에게 전화했다.“연 비서.”“네, 대표님. 말씀하세요.”연민우는 부승민이 오늘 밤에 있는 협력안에 대해 추가로 분부하려는 줄 알았다.“전에 경제 채널에서 계속 나에게 특별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네?”연민우는 자신이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부승민은 항상 매체에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는 걸 꺼렸기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발표할 때의 동영상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었다. SNS 계정도 없었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대표님, 제대로 생각하신 거 맞으시죠?”온하랑이 안타까워 부승민이 직접 해명에 나서려고 한다는 걸 연민우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 그쪽에 연락해서 시간과 질문을 잘 조정해 봐.”“네, 알겠습니다.”...토요일 오전 부승민과 온하랑은 본가로 향했다.“삼촌! 숙모!”네 살이 된 부윤민은 거실에서 깡충깡충 뛰어나와 그들을 맞이했다.“일찍 왔네, 윤민이.”온하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거실로 들어갔다.부윤민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날 데리고 등산하러 갈 거래요. 삼촌이랑 숙모도 같이 갈래요?”부윤민이 말하는 등산은 아마도 성묘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부씨 일가는 공원 묘원을 소유하고 있
예전의 관례에 따라 그들은 본가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교외에 있는 공원 묘원으로 향했다.다함께 테이블에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풍성한 점심을 먹었다. 어린 부윤민의 엉뚱한 소리에 그들은 이따금 함박웃음을 터뜨렸다.부유민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눈가에 웃음기가 어렸다.배 속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부윤민처럼 사랑스럽고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아이로 커가길 바랐다.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부승민은 넋 놓고 온하랑의 고운 미소를 바라보았다.얼떨결에 부승민과 눈이 마주친 온하랑은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금세 표정이 굳어버렸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손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누군가 문 앞에 서있었다.위에는 진회색 코트를 걸치고 그 안에는 셔츠를, 아래에는 정장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은 뒷모습은 아주 곧고 듬직해 보였다.만약 남자가 손에 피다 만 담배를 들고 있지 않았다면 온하랑은 그 사람을 부승민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부민재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아주버니.”온하랑은 웃으며 부민재에게 인사했다.“숨어서 담배 피우시는 거예요?”부민재는 힘없이 웃으며 담배를 꺼버렸다.“집에서는 와이프가 못 피게 하니까.”“형님도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그래. 나도 어쩌다 가끔 한 대 피우는 거니까, 절대 말해면 안 돼.”“네, 못 본 척 해드릴게요.”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 부민재 부부 사이에 온하랑은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그럼 전 먼저 돌아가 볼게요.”“잠시만!”부민재가 온하랑을 불러세웠다.“왜 그러세요, 아주버니?”“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소식을 봤어.”이 말을 들은 온하랑은 마음이 불편해져 눈을 내리깔았다.김정숙과 소청하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에 그녀도 괜찮은 척하며 표정 관리를 할 수 있었지만, 결국 부민재가 찔러 버리고 말았다.“네 잘못이 아닌 거 알아. 이건 승민이 잘
부영훈 부부가 부승민 때문에 다투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갔으니, 그는 그 책임을 전부 자신 탓으로 돌린 건 아닐까. 그들을 간접적으로 살해했다고 생각하며 부민재가 하룻밤 사이에 부모를 잃게 만든 범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이어진 부민재의 말은 그녀의 생각을 증명해 주었다.“그때 나는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모든 것을 승민이 탓으로 돌렸어. 뒤에서 몰래 승민이를 괴롭히고 할아버지에게 이르지 말라고 협박했어.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알게 될까 봐 무섭고 두려웠지만 나중에야 승민이가 나를 도와 일부러 할아버지 앞에서 숨긴다는 걸 알았어. 그러다가 할아버지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거야... 다른 집에는 보통 형이 동생한테 양보하는데, 반대로 승민이는 항상 나에게 양보했거든. 승민이가 부모님 일로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보상하려고 한다는 걸, 나도 그때야 알았어.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마음속에 강박 관념으로 자리 잡았을 거야. 추서윤한테도 마찬가지일 테고.”“그래요?”온하랑이 중얼거렸다“승민이가 너한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았어?”부민재가 추서윤에게 발생한 일을 말한다는 걸 온하랑은 자연스럽게 알았다. 그녀는 강민에게서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사정은 몰랐다.부민재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창밖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그때 승민이가 회사로 들어와 인턴으로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야. 학업과 업무로 바쁘다 보니 추서윤을 소홀히 했었나 봐. 둘은 말다툼을 했고 화가 난 추서윤이 울며 뛰쳐나갔거든. 승민이는 쫓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추서윤 친구의 전화를 받고서야 추서윤이 실종된 사실을 알았어. 곧 납치범들이 몸값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납치범들은 원래 승민이를 겨냥했기 때문에 순순히 몸값만 줬다면 추서윤은 무사했을 테지만, 너도 승민이의 성격을 알다시피 다른 사람에게 협박당하는 게 싫어서 경찰에 신고를 했어. 납치범들이 어떻게 알았는지...”그래서 납치범들은 추
온하랑은 밑으로 떨어트린 손을 꼭 움켜쥐었다.부민재는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걱정 마, 할아버지께서는 고집스러운 분이 아니셔. 무엇보다도 네가 행복하길 바라실 거야. 나도 할아버지를 설득할게...”“난...”온하랑이 말하려고 할 때 뒤에서 발소리와 함께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랑아,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어, 형도 있었네요.”부민재는 부승민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처제랑 좀 얘기하고 있었어.”부민재는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 온하랑은 본가에서 살 때 오히려 부민재와 사이가 더 좋았다.부승민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온하랑에게 말했다.“아까 많이 안 먹었잖아. 가서 좀 더 먹어.”“네.”온하랑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부민재의 시선이 그들 사이에서 몇 초간 맴돌다가 입을 열었다.“나도 돌아갈게. 아니면 너희 형수가 내가 또 밖에서 담배 피웠다고 의심할 거야.”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보고 부승민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부민재는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절대 형수에게 말하지 마.”“몸에서 담배 냄새나요.”부승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부민재는 발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이며 힘없이 말했다.“밖에 나가서 한바퀴 돌다가 와야겠다.”...점심을 먹고 두 대의 차가 본가를 빠져나와 공원묘원 산 아래에 가서 멈춰 섰다.공원묘원으로 출발할 때부터 부승민은 계속 침묵했다. 예년에도 마찬가지였다.예전 온하랑은 몹시 의아했었다. 부승민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아버지와의 유대감도 깊지 않을 테고, 게다가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이렇게 그리워한다는 사실이.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모든 게 이해됐다.“아버지, 어머니, 저희가 뵈러 왔어요. 윤민아 와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드려.”부윤민은 눈앞에 비석을 보며 어리둥절했지만, 순순히 따랐다.“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그러나 부승민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며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감정이 없어서 차가운
부승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오늘 밤에도 바빠?”온하랑이 돌연 물었다.“왜?”“할말이 있어서.”“지금 말하면 안돼?”온하랑은 눈앞에 오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그냥 집에 가서 말할게.”그녀는 부영훈 부부와 같은 참극이 벌어질까 두려웠다.더윈파크힐로 돌아 와 차 키를 테이블에 올려둔 부승민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고 물 두 잔을 따르며 물었다.“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오빠, 우리 이혼하자.”온하랑은 차분히 말했다.그 말을 들은 부승민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물을 따르며 어안이 벙벙해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뭐라고?”잔이 채워진 줄도 모르고 물을 계속 따랐다.“우리 이혼 하자고.”온하랑은 부승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그 순간 부승민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눈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이 물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흘러넘쳐 나온 뜨거운 물이 그의 손가락을 빨갛게 데우고 옷소매를 적셨다.그가 말이 없자 온하랑이 이어서 말했다.“일단 할아버지께는 비밀로 하고 이혼신청서부터 발급받자. 이혼 사실은 감출 수 있을 때까지 감추고.”부승민은 온하랑은 바라보며 여전히 침묵했다.“어머, 대표님. 물이 흘러넘쳐요.”도우미 아주머니가 방에서 나오며 부승민이 바닥에 물을 붓는 걸 보고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잔과 주전자를 빼앗았다.“데인 거 아니예요? 가서 연고를 가져올게요.”“괜찮습니다! 들어 가세요.”부승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싸늘했다.부승민의 분노를 눈치챈 안씨 아주머니는 흠칫 놀라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아는 아주머니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대표님,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하세요. 절대 손대지 마시고.”안씨 아주머니의 방문이 닫히자 부승민은 어두운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인터뷰 영상이 대중에게 공개된 건 일요일 경제 채널 오전 뉴스에서였다. 그리고 동일 시간대에 공식 사이트와 앱 계정, 공식 블로그에도 발표했다.일요일 온하랑은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부승민과 온하랑이 다툰 이유를 알고 있는 안씨 아주머니는 노파심에 온하랑더러 임신 사실을 부승민에게 알려주라고 말했지만, 온하랑은 한사코 거부했다.온하랑은 문득 어젯밤 부승민이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만약 여기에 우리 아이가 있어도, 이혼할 거야?”그녀는 부승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전에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오빠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 안 나?”그때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고 그에게 물었다.“... 만약 우리에게 애가 있대도 오빠는 끝까지 이혼할 생각이야?”이제 시간이 꽤 지났다고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의 대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만약이란 건 없어. 있다고 해도 그 아이가 태어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부승민도 그 일이 생각났는지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온하랑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오빠 말이 맞아. 만약이란 건 없어. 있다고 해도 안 낳을 거야.”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지고 가빠지더니, 부승민은 온하랑을 똑바로 응시했다. 얼굴이 굳은 채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말하려던 부승민은 결국 말을 잊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오늘 점심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온하랑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관심이 없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졸리면 자고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점심 식사 시간이 되자 안씨 아주머니가 떠보듯이 물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 하실래요? 전화해서 여쭤보실래요?”“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밖에서 굶어 죽지는 않을 거니까요.”안씨 아주머니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대표님, 행운을 빌어요. 저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요.’온하랑이 한참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김시연에게서 카톡이 왔다.캔디
인터뷰가 진행된 지 20분이 지났다.진행자는 잠시 줄거리를 요약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사실 시청자분들 모두가 부승민 씨의 연애사에 관심이 아주 많으실 텐데요. 부승민 씨도 아시다시피 최근 인터넷에 당신과 온하랑 씨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온하랑 씨와의 관계에 대해 공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솔직히 경제 채널 관계자도 부승민이 인터뷰에 응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방송국 경영진은 이를 중시하고 특별히 베테랑 진행자를 파견해 사회를 보게 했다. 그리고 인터뷰 진행 과정에서 불쾌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민우에게 미리 질문 목록을 보내 가능한 질문들을 추리도록 했다.최근 부승민의 소식이 화제가 되면서 방송국 측에서도 이슈몰이를 하기 위해 질문 목록에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포함했다.애당초 부승민 측에서 부결할 줄 알았는데 연민우가 돌려보내온 질문 목록에 사적인 질문을 그대로 보류했을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뜻밖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부승민은 카메라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사실 저는 사람들이 제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과거 여러 루머에 대해서도 여론이 확산되는 게 싫어 굳이 해명에 나서지 않았는데, 일부 사람들은 지나친 행동을 서슴지 않았어요. 인터넷에 제 와이프의 개인 정보를 유출해 심각한 사이버 폭력까지 당하게 만들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저 부승민은 인터넷에 루머를 퍼뜨리고 여론을 선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변호사가 이미 증거를 확보하고 고소장을 작성했으니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인터넷은 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아니니, 시청자 여러분도 현명하게 판단하시고 유언비어를 믿지도 퍼뜨리지도 마시고 다함께 청정한 네트워크 환경을 유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진행자는 깜짝 놀랐다.“온하랑 씨가 대표님의 부인이라는 말씀이세요?”고개를 끄덕인 부승민은 카메라를 굳건히 쳐다보며 말했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