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오늘 밤에도 바빠?”온하랑이 돌연 물었다.“왜?”“할말이 있어서.”“지금 말하면 안돼?”온하랑은 눈앞에 오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그냥 집에 가서 말할게.”그녀는 부영훈 부부와 같은 참극이 벌어질까 두려웠다.더윈파크힐로 돌아 와 차 키를 테이블에 올려둔 부승민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고 물 두 잔을 따르며 물었다.“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오빠, 우리 이혼하자.”온하랑은 차분히 말했다.그 말을 들은 부승민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물을 따르며 어안이 벙벙해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뭐라고?”잔이 채워진 줄도 모르고 물을 계속 따랐다.“우리 이혼 하자고.”온하랑은 부승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그 순간 부승민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눈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이 물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흘러넘쳐 나온 뜨거운 물이 그의 손가락을 빨갛게 데우고 옷소매를 적셨다.그가 말이 없자 온하랑이 이어서 말했다.“일단 할아버지께는 비밀로 하고 이혼신청서부터 발급받자. 이혼 사실은 감출 수 있을 때까지 감추고.”부승민은 온하랑은 바라보며 여전히 침묵했다.“어머, 대표님. 물이 흘러넘쳐요.”도우미 아주머니가 방에서 나오며 부승민이 바닥에 물을 붓는 걸 보고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잔과 주전자를 빼앗았다.“데인 거 아니예요? 가서 연고를 가져올게요.”“괜찮습니다! 들어 가세요.”부승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싸늘했다.부승민의 분노를 눈치챈 안씨 아주머니는 흠칫 놀라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아는 아주머니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대표님,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하세요. 절대 손대지 마시고.”안씨 아주머니의 방문이 닫히자 부승민은 어두운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인터뷰 영상이 대중에게 공개된 건 일요일 경제 채널 오전 뉴스에서였다. 그리고 동일 시간대에 공식 사이트와 앱 계정, 공식 블로그에도 발표했다.일요일 온하랑은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부승민과 온하랑이 다툰 이유를 알고 있는 안씨 아주머니는 노파심에 온하랑더러 임신 사실을 부승민에게 알려주라고 말했지만, 온하랑은 한사코 거부했다.온하랑은 문득 어젯밤 부승민이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만약 여기에 우리 아이가 있어도, 이혼할 거야?”그녀는 부승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전에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오빠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 안 나?”그때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고 그에게 물었다.“... 만약 우리에게 애가 있대도 오빠는 끝까지 이혼할 생각이야?”이제 시간이 꽤 지났다고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의 대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만약이란 건 없어. 있다고 해도 그 아이가 태어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부승민도 그 일이 생각났는지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온하랑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오빠 말이 맞아. 만약이란 건 없어. 있다고 해도 안 낳을 거야.”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지고 가빠지더니, 부승민은 온하랑을 똑바로 응시했다. 얼굴이 굳은 채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말하려던 부승민은 결국 말을 잊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오늘 점심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온하랑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관심이 없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졸리면 자고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점심 식사 시간이 되자 안씨 아주머니가 떠보듯이 물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 하실래요? 전화해서 여쭤보실래요?”“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밖에서 굶어 죽지는 않을 거니까요.”안씨 아주머니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대표님, 행운을 빌어요. 저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요.’온하랑이 한참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김시연에게서 카톡이 왔다.캔디
인터뷰가 진행된 지 20분이 지났다.진행자는 잠시 줄거리를 요약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사실 시청자분들 모두가 부승민 씨의 연애사에 관심이 아주 많으실 텐데요. 부승민 씨도 아시다시피 최근 인터넷에 당신과 온하랑 씨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온하랑 씨와의 관계에 대해 공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솔직히 경제 채널 관계자도 부승민이 인터뷰에 응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방송국 경영진은 이를 중시하고 특별히 베테랑 진행자를 파견해 사회를 보게 했다. 그리고 인터뷰 진행 과정에서 불쾌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민우에게 미리 질문 목록을 보내 가능한 질문들을 추리도록 했다.최근 부승민의 소식이 화제가 되면서 방송국 측에서도 이슈몰이를 하기 위해 질문 목록에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포함했다.애당초 부승민 측에서 부결할 줄 알았는데 연민우가 돌려보내온 질문 목록에 사적인 질문을 그대로 보류했을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뜻밖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부승민은 카메라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사실 저는 사람들이 제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과거 여러 루머에 대해서도 여론이 확산되는 게 싫어 굳이 해명에 나서지 않았는데, 일부 사람들은 지나친 행동을 서슴지 않았어요. 인터넷에 제 와이프의 개인 정보를 유출해 심각한 사이버 폭력까지 당하게 만들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저 부승민은 인터넷에 루머를 퍼뜨리고 여론을 선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변호사가 이미 증거를 확보하고 고소장을 작성했으니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인터넷은 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아니니, 시청자 여러분도 현명하게 판단하시고 유언비어를 믿지도 퍼뜨리지도 마시고 다함께 청정한 네트워크 환경을 유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진행자는 깜짝 놀랐다.“온하랑 씨가 대표님의 부인이라는 말씀이세요?”고개를 끄덕인 부승민은 카메라를 굳건히 쳐다보며 말했
부승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성격도 맞지 않았고 제가 부전공까지 수강해서 학업이 바빠서 그녀와 함께 할 시간이 적었어요. 입사 후엔 일하느라 바빠져서 관계가 소원해지고 갈등도 많아졌어요. 결국 합의하에 헤어지기로 했죠.”비교적 공식적인 답변이었다.“아무래도 종사하는 업종과 관련이 있나 봐요. 배우는 촬영 들어가면 적어도 한 달씩 걸리고, 애인도 바쁘면 관계를 지속하기 힘들죠. 그럼 지금 BX 그룹 대표시니까 바쁘실 텐데, 온하랑 씨는 개의치 않아 하시나요?”부승민은 웃으며 말했다.“하랑씨도 엄청 바쁘시고, 자주 같이 야근하니 오히려 충실한 삶을 살고 있어요.”“들어보니 온하랑 씨가 낙하산이라는 소문은 헛소문이라는 말씀인가요?”부승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BX 그룹에서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추서윤 씨가 귀국 후 BX 그룹과 계약을 맺었다는 말이 있던데 혹시 부승민 씨와 관련인 있나요?”최근 인터넷에는 대표모델이 임서우에서 추서윤으로 바뀌었다는 소문이 돌았다.“네. 추서윤 씨가 국내 활동을 시작하고 싶어 해서 조금 도움을 줬습니다.”“대부분의 커플들은 합의하에 결별하더라도 친구가 되기는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근데 추서윤 씨가 귀국 후 바로 부승민 씨한테 연락하신 걸 보면 아직 연락하고 지내시나 봐요? 이러면 온하랑 씨가 질투할까 두렵지 않으신가요?”“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이라 연락할 일이 많아요. 저와 추서윤 씨 아버님과도 자주 협력하는 관계이고 하니 이별 후에도 종종 연락하게 되었습니다. 추서윤 씨를 도운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지만 제가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선을 제대로 긋지를 못해서 온하랑 씨를 제3자로 보이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악플에 시달리게 했죠. 하랑 씨한테 많이 미안할 따름이에요.”이윽고 부승민은 카메라를 응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여보, 미안해.”“설마 이러시려고 인터뷰에 응하신 건 아니시겠죠? 들어보니 부승민 씨한테 온하랑 씨가 아주 소중한 존재인 것 같은데요?”“네. 온하랑 씨는
[어머, 부승민 공식 계정에 올라온 기소자 명단에 네 이름이 있네.][...]캔디:[온하랑이 부승민한테 산소처럼 삶의 구석구석에 있어서 이제 온하랑 없이는 안된대요.]캔디:[부승민 씨 꽤 로맨틱한 말도 잘하네요.]이에 온하랑은 혼자 무덤덤한 반응이었다.부승민의 할리우드 연기에 속을 대로 속았던 온하랑은 더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캔디:[ 하지만 하랑 씨, 절대 이 사탕발린 말에 속아 넘어 가지 마세요! 부승민은 여전히 추서윤을 옹호하고 있어요.]부승민이 인터뷰에서 온하랑의 신분에 대해 명확하게 밝혔고 추서윤과의 관계도 해명하며 모든 잘못을 자신한테 돌렸다.온하랑이 부승민과 추서윤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몰랐다면 김시연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다.그러나 온하랑은 이미 그 일을 알았기에 부승민이 이렇게 나올 걸 예상했다.부승민이 모든 책임을 추서윤에게 떠넘겼다면, 온하랑은 그를 더 무시했을 것이다. [저도 알고 있으니 안심하세요.]인터뷰 때 부승민은 답변에 신경을 쓴게 보였지만, 입장 표명이 너무 늦었을 뿐이다.온하랑은 이미 이혼 얘기를 꺼냈고 후회하지도 않는다....인터뷰 영상이 공개된 후, 댓글 창에는 여러 가지 반응이 보였다. 온하랑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입 다물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온하랑을 마음 아파하는 부승민 팬들도, 무책임한 인터넷 폭력과 미디어를 비판하며 부승민과 온하랑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부승민이랑 온하랑이 부부라고 추측했던 댓글 때문에 추서윤 팬들한테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모르겠네. 이제 그 사람들 머리도 못 들고 다니겠지!][만약 반전이 있으면 사과하겠다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대?”[누군가 온하랑을 욕할 때 온강호 기자도 같이 욕했었지. 정말 미친 사람들 같으니라고, 악플 하나 달았다고 처벌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더 막무가내로 악플을 달고 하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이만하면 온라인 실명 체제를 실행해야 하는 거 아님?][잡지식: 온하랑도 J 대 출신이고 부승민 학교 후배인 데다 대기업에서 서로
인터넷에서 일부 사람들의 침묵은 또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다.입으로는 사이버 폭력을 반대한다며 추서윤 인스타에 악플을 달며 조롱한다. 매체의 폭로에 따르면 추서윤 팬들은 여론몰이에 휩쓸렸을 뿐이라고 했지만, 민윤 커플에 대한 소문이 불거졌을 때 몇몇 팬들은 소속사 공식 계정에 찾아가 소문의 진위에 관해 물었다.이에 소속사에서는 급히 입장을 내놓지는 않고 하트 이모티콘을 달았을 뿐이다.이에 민윤 커플을 응원하는 팬들은 이 답장을 민윤 커플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어떤 팬들은 이를 캡처해 다시 민윤 커플을 태그하고 인스타에 업로드 했다. 이 게시글은 여전히 핫이슈였다.되려 지금은 민윤 커플의 안티팬들이 공식 계정의 답변을 가지고 추서윤의 나쁜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제3자”라는 딱지를 추서윤에게 붙이고 마구 씹어댔다.[뭐? 이 상황에서도 추서윤 팬들은 걔가 제3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소속사에서 이런 답장을 하는 것은 여론몰이에 동참하는 것 아닌가? 온하랑이 악플에 시달릴 때까지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아?][그래, 어쨌든 죄명이 하나쯤은 있으니까.]추서윤 소속사의 무대응에 일부 팬들은 끊임없이 공유하며 여론을 부추겼다. 임리안과 이주혁의 팬들은 부계정을 개설해 손을 씻었다. 수운성 촬영 초반에 두 팬클럽은 서로 많이 싸웠었다. 추서윤도 곧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30분 후, 추서윤 소속사에서는 추서윤과 부승민은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일침을 가하며 허위 사실 유포를 자제해 달라고 요구했다.한 팬은 추서윤을 지지 한다며 악플이 달리는 것을 제지했다.하지만 그중에 눈에 띄는 댓글이 있었다.[부승민과 스캔들 났을 때도 조용히 있고 온하랑이 욕을 먹고 있을 때도 아무 말도 없더니 부승민이 해명하니까 이제야 입장을 밝히는 거 봐. 정말 흉측해!]팬들이 추서윤을 믿고 옹호하던 와중에 한 사람이 나서서 소속사의 잘못이 크다며 운영팀을 해고할 것을 요구했고 팬들은 이 댓글을 리트윗하며 응원했다. 결국 추서윤 소속사
추서윤은 더는 병에 걸렸다는 핑계로 부승민을 불러낼 수 없게 되었다.그녀는 부승민을 불러낼 다른 계획을 세우던 중 인터뷰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댓글 창에 악플이 끊임없이 달리자 안수빈은 소속사가 빨리 입장을 발표하기를 부탁했다.안수빈은 한숨을 쉬며 추서윤에게 물었다.“서윤아, 뭔 대책이라도 있어? 만약 네가 포기하고 이번 고비를 넘기면 수운성 여주인공 역할로 다시 전세 역전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포기를 못 하겠다면...”안수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추서윤은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나 절대 포기 못 해!”추서윤은 오랫동안 참아왔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부승민의 아내 자리는 무조건 추서윤의 자리여야만 했다!안수빈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이래야 내가 아는 추서윤이지!”추서윤은 안수빈을 지그시 바라봤다.“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응. 네가 마음 독하게 먹어야 해.”...한편 인터뷰를 본 추장훈은 추상훈에게 연락했다."부승민이 인터뷰 한 거 봤지? 내가 저번에 부승민과 온하랑 관계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고 얘기했었잖아. 그때는 믿지도 않더니, 인터뷰를 한 번도 응하지 않던 부승민이 이번 인터뷰에서 모든 걸 다 밝혔으니 이혼은 한 물 건너간 것 같아. 추서윤도 부씨 일가의 안주인이 되긴 힘들 것 같아...”추장훈은 말과 다르게 한쪽으로는 은근히 기뻐했다.최근 추상훈이 추장훈에게 주식을 달라고 졸라대면서 회사 일에 끼어들어 은근히 짜증이 났었다.그는 내심 추서윤이 진짜로 부씨 일가의 안주인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었다가는 추상훈과 함부로 관계를 끊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나중에 추상훈이 또 주식을 탐낼 때 단칼에 거절해도 추상훈은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다.집에서 인터뷰 영상을 본 추상훈은 피가 솟구쳐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분명 주위 사람들 모두 추서윤을 부씨 일가 안주인으로 여겼다. 추상훈도 부승민의 장인 어른 행세를 하며 사람들한테 사위 자랑을 늘어놓았다.
일요일 내내 부승민은 나타나지 않았다.아마도 온하랑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고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일요일 저녁 5시경, 또 다른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A시에 위치한 BX 그룹 산업단지에서 화재가 발생해 한 명이 숨지고 세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정확한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아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보도였다.마침 지나가던 행인이 공개한 영상에는 당시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주변이 어수선해지고 소방관들은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가뜩이나 네티즌들이 대기업과 자본가에 대한 적개심이 뚜렷한 데다 최근 여론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부승민의 발언이 곳곳에 퍼지면서 조롱하는 댓글로 가득했다.유부남인 부승민이 바람을 피운다는 주장도 점차 힘을 싣고 있었다.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는 부승민을 겨냥한 여러 버전의 화재 원인이 떠돌기 시작했고, 일부 영업 계정에서 여론몰이를 시작하자 누리꾼들은 더욱 열광했다.부승민이 경찰조사에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밝혀도 소용이 없었다. 댓글 창은 여전히 욕설과 비난으로 도배되고 있었다.몇몇 이성적인 누리꾼들이 조사 결과를 기다리자는 건의도 일부 누리꾼에 의해 자본가의 앞잡이로 몰리고 있다.이 뉴스가 보도되자 연민우는 더원 파크힐로 가서 온하랑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부승민이 뒷수습하기 바빠 한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어 서둘러 짐을 챙기러 왔다고 했다.텅 빈 방을 보던 온하랑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머뭇거리다가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월요일, 온하랑은 늘 그랬듯이 출근했다.회사에 들어서자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디렉터님 안녕하세요.”"좋은 아침이에요. 디렉터님.”"디렉터님, 아침 드셨어요? 여기 두유가 하나 더 있어요.”온하랑은 쌀쌀한 웃음으로 호의를 거절했다. 그녀가 모퉁이를 지날 때 한 여직원과 부딪쳤다. 여직원은 욱하려다 온하랑을 보자 표정이 변했다.“죄송해요, 디렉터님. 어디 다친 곳 없으시죠?”“괜찮습니다.”온하랑은 미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