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내내 부승민은 나타나지 않았다.아마도 온하랑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고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일요일 저녁 5시경, 또 다른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A시에 위치한 BX 그룹 산업단지에서 화재가 발생해 한 명이 숨지고 세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정확한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아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보도였다.마침 지나가던 행인이 공개한 영상에는 당시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주변이 어수선해지고 소방관들은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가뜩이나 네티즌들이 대기업과 자본가에 대한 적개심이 뚜렷한 데다 최근 여론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부승민의 발언이 곳곳에 퍼지면서 조롱하는 댓글로 가득했다.유부남인 부승민이 바람을 피운다는 주장도 점차 힘을 싣고 있었다.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는 부승민을 겨냥한 여러 버전의 화재 원인이 떠돌기 시작했고, 일부 영업 계정에서 여론몰이를 시작하자 누리꾼들은 더욱 열광했다.부승민이 경찰조사에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밝혀도 소용이 없었다. 댓글 창은 여전히 욕설과 비난으로 도배되고 있었다.몇몇 이성적인 누리꾼들이 조사 결과를 기다리자는 건의도 일부 누리꾼에 의해 자본가의 앞잡이로 몰리고 있다.이 뉴스가 보도되자 연민우는 더원 파크힐로 가서 온하랑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부승민이 뒷수습하기 바빠 한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어 서둘러 짐을 챙기러 왔다고 했다.텅 빈 방을 보던 온하랑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머뭇거리다가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월요일, 온하랑은 늘 그랬듯이 출근했다.회사에 들어서자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디렉터님 안녕하세요.”"좋은 아침이에요. 디렉터님.”"디렉터님, 아침 드셨어요? 여기 두유가 하나 더 있어요.”온하랑은 쌀쌀한 웃음으로 호의를 거절했다. 그녀가 모퉁이를 지날 때 한 여직원과 부딪쳤다. 여직원은 욱하려다 온하랑을 보자 표정이 변했다.“죄송해요, 디렉터님. 어디 다친 곳 없으시죠?”“괜찮습니다.”온하랑은 미
댓글 창에는 가족을 지지하는 의견으로 가득했고 모두 부승민한테 비난을 쏟아부었다. 음주는 민감한 문제이다.업무상 상해 보험 규정에는 음주 및 약물 남용은 업무상 재해로 간주할 수 없다고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즉, 근로자가 노동규율과 사업주의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작업 중 부상을 입은 경우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지 않는다.노동자는 자신의 피해에 대해 주요한 책임을 지고, 비효율적인 감독으로 인해 회사에서는 부분적 보상만 하면 되며 보상 금액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BX 그룹은 공식 계정에 경찰조사 결과를 존중하고 법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일부 네티즌들은 BX 그룹 같은 대기업이 그까짓 4억 원은 돈도 아니지 않냐는 의견이었다. 그냥 배상하면 되지 왜 일을 크게 만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고인이 정말 술을 마셔 산업단지에 불이 난 거라면 BX 그룹이 피해자인데 왜 피해보상을 해야 하는지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BX 그룹을 옹호하는 댓글에는 수백 개의 악플이 달렸다.행정심의 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이 기간에 산업단지 화재 사건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진행되었고 수많은 네티즌들이 사건에 관심을 두고 재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와중에 BX 그룹의 주식이 지속해서 하락하자 증권거래소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어떤 사람은 한숨을 쉬었고, 어떤 사람은 욕을 퍼부었다.회사에 출근한 온하랑은 회사에 도는 긴장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회장실의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고, 각종 매체에서 잇달아 전화를 걸어와 상황에 대해 물었다.비서진들은 통일적으로 회답했다. “본사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으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몇몇 비서는 찾아와 온하랑에게 주의를 줬다.“부 대표님께서 방금 전화 오셨는데, 디렉터님께서 요즘 최대한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시네요. 특히 회사에 드나드실 때 주의하라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온하랑은 일부 언론매체는 트래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부승민은 담당자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러자 담당자는 허리를 곧게 펴며 말했다.“저는 고 상무님의 의견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여론에서 오는 압력을 줄이고 사적으로 유가족들과 중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유가족이 소란을 피우도록 내버려두면 회사에 매우 불리할 것입니다.”부승민은 소파 등에 기대어 오른손을 손잡이에 걸치고 규칙적으로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일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요. 지금도 최기준 집 앞에는 기자가 지키고 있을 거예요. 지금 최기준을 찾아가도 저희가 겁먹은 줄로 인식할 거예요. 게다가 행정심의 결과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좀 더 기다려 봅시다.”하지만 고 이사는 여전히 부승민의 의견에 반대 입장이었다.“최근 부정적인 뉴스가 잇달아 보도되는 바람에 주식이 계속 하락해 투자자들의 불만 소리가 말이 아니에요. 행정심의 결과가 어떻든 고인의 잘못이라 해도 저희가 유가족을 찾아뵙는 게 오히려 회사 이미지에 유리할 수도 있어요.”“제가 기억하는 이사님은 의기양양했었는데. 산업단지가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된 데는 이사님의 공이 컸어요. 사무실에 너무 오래 앉아계셔서 그런가? 왜 두려움이 많아지셨나요?”고 이사는 바로 말문이 막혔다.“기자들은 이미 회사를 노리고 있는데, 우리가 사적으로 보상한다고 여론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번에 개인적으로 찾아가 합의를 보면,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또 개인적으로 처리 하실 건가요? BX 그룹은 절대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요. 정말 저희 책임이라면 배상하면 됩니다. 우리 문제가 아니면 저희도 손해를 봐가며 보상할 필요는 없죠.” 담당자는 고 이사의 눈치를 살폈다.고 이사는 확고한 부승민의 태도에 깊게 한숨을 내쉬며 담당자를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아래층에서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발언할 때 표현에 주의하세요.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시고 자세를 너무 낮추지도 마세요. 모든 것은 경찰 측의 결과에 따
"봤어."온하랑은 소파에 걸터앉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온하랑이 고작 한마디 답을 할 줄은 몰랐는지 부승민은 잠시 머뭇거렸다."여전히 생각이 변함없어?"온하랑은 그를 바라보며 단답형으로 답했다.“없어.”부승민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언제 동사무소에 가서 이혼서류 받아올래?"부승민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그는 넋을 잃고 온하랑을 쳐다봤다."아직도 이혼을 고집하는 거야?""응.""이미 공개했잖아.""누가 공개하면 이혼할 수 없대?""대체 왜 이러는데?""지난번에 말했잖아.""이주혁 때문이야? 걔가 사업도 뒤로하고 널 위해 사람을 때려 네티즌의 시선을 돌려줘서? 걔가 녹음파일을 너한테 들려줬어?"온하랑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수상쩍게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야? 이주혁이 사람을 때리다니. 무슨 녹음파일?""아무것도 아니야."부승민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그럼 굳이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야?""더 이상 오빠와 살고 싶지 않을 뿐이야. 오빠는 추서윤과 한 약속을 지켜. 난 평온하게 내 삶을 살고. 좋지 않아?""그럼 추서윤 때문이야? 내가 어떻게 할까? 네가 말하는대로 다 할게.""오빠 항상 추서윤과 같이 있고 싶어 했잖아. 내가 도와줄게.""좋아, 네가 싫다면 서윤이를 해외로 보낼게. 그럼 다시는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거야, 어때?"부승민의 확고한 모습에 온하랑은 몸을 일으켜 깊은 심호흡을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오빠,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 오빠가 뭘 하든 난 이혼할 거야!"말을 마치고 온하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하랑아, 가지 마!"부승민은 뒤에서 그녀를 꼭 껴안고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 가까이 느껴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빌었다."다시 한번 기회를 줘, 응?"‘제발 잔인하게 굴지 마!’부승민은 이젠 온하랑을 좋아하다 못해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 하지만 온하랑은 그를 떠나려 한다."난 이미 기회를 줄 만큼 줬
강민은 객실 문을 열고, 부승민 한 사람만 있는 것을 보고는 자초지종을 알아차렸다.그는 문을 닫고 탁자 앞에 멈춰 서서 비어 있는 술병들을 보며 물었다."온하랑이랑 싸웠어?"부승민은 비틀거리며 말없이 술잔을 채우고 벌컥 마셨다.강민은 술병을 가로채며 부승민을 말렸다.부승민은 뒤늦게 술병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강민한테 손을 내밀었다."술 이리 내놔!""네가 술 마시는 거 보라고 나를 부른 거야? 난 관심 없으니까 자리 비켜줄게. 계속 마셔."부승민은 넋이 나간 채 허공에 뻗은 손에 힘이 빠지며 무릎을 퍽,하고 내리쳤다. 그는 소파에 힘없이 기댔다.그의 반쯤 감긴 눈은 아무런 기색도 없었다. 속눈썹 아래의 넓게 드리운 다크서클은최근 그의 노고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나랑 이혼하겠대."밑도 끝도 없이 뱉어낸 말을 강민은 용케 알아들었다.강민은 익숙한 듯 술병을 한쪽에 치워놓고 부승민과 마주 앉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예상했어."부승민은 눈이 번쩍 뜨였다."지난번에 모였을 때, 네가 노준형보고 온하랑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너와 노준형만 진지하고 온하랑은 평온해 보였어."부승민은 눈을 질끈 감고 그때 온하랑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그러나 부승민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너는 항상 온하랑이 철이 들었다고 하는데, 하랑이는 쉽게 다른 사람에게 순종하며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어. 하지만 실망해서 반항하기로 마음먹으면 마음을 돌리기가 어려운 성격이야."부승민은 한참 침묵을 유지했다.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강민한테 따졌다."왜 진작에 알려주지 않았어?"강민은 피식 웃었다."나는 진작에 주의를 줬어. 자기 아내 이외의 여자에게 마음 약해지지 말라고 했지. 부승민, 다른 사람들은 널 몰라도 난 알아. 그때 온하랑을 보는 네 눈빛이 얼마나 깊었는지.”부승민은 점점 초점을 잃어가며 뭔가 회상하는 것 같았다.그는 일찍부터 온하랑에게 마음이 있었다.아마도.그래서 온하랑에게 이혼을 요구하고도 그녀와는 여전히 남매라고
강민의 말을 들은 부승민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렇게 간단한 도리를 나는 왜 이제야 안 걸까?"그는 온하랑과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안수빈한테서 추서윤이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고 당장 떠나야 한다며 고집했던 기억이 났다.온하랑은 거듭 만류했지만 그는 결국 떠났다.그는 그때까지도 온하랑이 조금의 동정심도 없다며 씩씩거렸다.지금 되짚어 보니 온하랑이 얼마나 상처받았을까.온하랑은 자신의 결혼생활을 망친 추서윤을 동정할 필요 따위 없다.만약 지금 누군가가 추서윤이 실종되었다고 그에게 말한다면, 그는 손뼉을 칠 것이다."사실, 네가 추서윤에게 빚진 것이 있다고 해도 너무 방임해서는 안 돼. 그 일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너를 비난하면서도 너와 추서윤 모두 반듯한 성인이라는 사실은 잊은 것 같아."강민은 계속하여 말했다."네가 추서윤 보호자는 아니니, 그녀가 밤늦게 학교를 뛰쳐나간 건 걔 문제야. 추서윤이 납치되어 납치범이 탐욕을 부린 것은 더더욱 너와 무관해. 당시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최선의 선택이었어. 그렇지 않으면 너 혼자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막론하고 네가 사건에 휘말리게 돼. 네가 추서윤한테 죄책감을 느껴서 지나치게 잘해주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네가 마음의 빚을 되갚으려 하다가 범죄를 저질러야 한다면 그때도 그럴 거야? 약속도 유효기한이 있어. 네가 온하랑 사이에 아이가 생긴 후에도 추서윤이 귀국해서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면, 그때도 승낙할 거야? 거듭 강조하지만, 추서윤도 이제는 어른이야. 처음에 걔가 출국하기로 한 것은, 스스로 약속을 포기한 것과 같아. 추서윤도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BX 그룹 대표 자리는 어르신이 네 능력을 믿고 맡긴 거야. 평소에는 부민재한테 양보해도, 부민재가 너만 못한 거니까 부민재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네가 없었어도 네 둘째 삼촌과 사촌 동생은 대표 자리에 앉을 수 없어. 여기까지만 말할게. 그러니까 네 마음을 무시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게 뭔지 곰곰이 생각해 봐. 나는 네
밤이 깊어지자, 검은색 카이엔이 조용히 수운성 촬영팀이 머물고있는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도련님, 도착하셨습니다."기사님은 차를 세우고 백미러를 봤다. 기사님은 뒷좌석에 눈을 감고 있는 부승민을 깨웠다."응."부승민은 눈을 감은 채 대답하더니 이내 다시 꿈나라로 향한 듯 조용해졌다.기사님은 짙은 술 냄새를 맡으며 계속 깨워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2분가량 지나자 부승민이 뒷좌석에서 뒤척거렸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손으로 몇 번 클릭하자 휴대폰에서 다이얼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고, 전화기 너머 피곤한 목소리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부승민?”"나 너희 호텔 주차장에 있어.”부승민이 보디가드를 보낸 후, 추서윤은 부승민이 경계를 풀고 먼저 그녀를 만나주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전에 쓰던 방법은 더 이상 부승민한테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증상이 완화된 척하며 계속 촬영에 들어가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추서윤은 촬영에 들어간 다음 날 한밤중에 부승민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해 쏟아지던 졸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나 지금 바로 내려갈게!”그녀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갑자기 거울 앞에 달려가 자기 모습을 찬찬히 비춰보았다. 가슴을 덮은 긴 머리는 마구 흐트러져 있었고, 게슴츠레한 눈은 졸려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입은 꽃무늬 잠옷은 치맛자락이 허벅지까지 올라와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는 고민 끝에 립스틱을 찾아 바르고 옷장에서 짧은 외투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는 룸카드를 챙기고 나섰다."부승민!"한적한 지하 주차장에서 추서윤의 외침은 유난히 또렷했다.부승민은 차창을 통해 그녀를 내다보고는 차에서 내렸다."왜 올라오지 않고."추서윤은 부승민한테 바짝 다가섰다.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나는 네가
추서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승민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현재 국내 연예계는 실력보다는 인맥이 더 중요한 상황이었다.때문에 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배역에만 머물러 있었고 오히려 연기가 딸리는 배우들이 주역을 차지하고는 했다.추씨 가문은 강남시에서 그래도 꽤나 이름이 있는 집안이었다.하지만 추서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매일 놀고먹으며 허세 부리는 걸 좋아하는 한량이었고, 그녀의 큰아버지는 겉으로는 상냥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추서윤이 부승민이라는 빽을 잃으면 그녀의 큰아버지도 더 이상 그녀를 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추서윤이 부승민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원망이 담겨 있었고 꽉 쥔 주먹 탓에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났다.“승민아, 꼭 이렇게 해야 했어? 그렇게 내가 미워? 네 인터뷰가 나간 뒤로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욕하는 줄 알아? 내가 너희 둘 결혼생활에 끼어든 내연녀라고….”“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다고 말할 수 있어?”부승민이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묻자 추서윤은 순간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넌 나와 하랑이가 결혼한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러 번 꾀병을 부려서 나를 네 곁에 묶어두려고 했잖아. 그리고 내가 너한테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이용해서 여러 번이나 하랑이에게 상처를 줬지. 그런 일을 하면서 찔린 적이 한 번도 없었어?”부승민은 추서윤에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가 온하랑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더 처절히 깨닫고 있었다. 온하랑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은 추서윤이 아니라 바로 부승민 자신이었다. 그가 모든 일의 원인이었고, 그가 죽일 놈이었다.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추서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서윤아, 우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