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내내 부승민은 나타나지 않았다.아마도 온하랑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고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일요일 저녁 5시경, 또 다른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A시에 위치한 BX 그룹 산업단지에서 화재가 발생해 한 명이 숨지고 세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정확한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아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보도였다.마침 지나가던 행인이 공개한 영상에는 당시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주변이 어수선해지고 소방관들은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가뜩이나 네티즌들이 대기업과 자본가에 대한 적개심이 뚜렷한 데다 최근 여론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부승민의 발언이 곳곳에 퍼지면서 조롱하는 댓글로 가득했다.유부남인 부승민이 바람을 피운다는 주장도 점차 힘을 싣고 있었다.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는 부승민을 겨냥한 여러 버전의 화재 원인이 떠돌기 시작했고, 일부 영업 계정에서 여론몰이를 시작하자 누리꾼들은 더욱 열광했다.부승민이 경찰조사에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밝혀도 소용이 없었다. 댓글 창은 여전히 욕설과 비난으로 도배되고 있었다.몇몇 이성적인 누리꾼들이 조사 결과를 기다리자는 건의도 일부 누리꾼에 의해 자본가의 앞잡이로 몰리고 있다.이 뉴스가 보도되자 연민우는 더원 파크힐로 가서 온하랑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부승민이 뒷수습하기 바빠 한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어 서둘러 짐을 챙기러 왔다고 했다.텅 빈 방을 보던 온하랑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머뭇거리다가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월요일, 온하랑은 늘 그랬듯이 출근했다.회사에 들어서자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디렉터님 안녕하세요.”"좋은 아침이에요. 디렉터님.”"디렉터님, 아침 드셨어요? 여기 두유가 하나 더 있어요.”온하랑은 쌀쌀한 웃음으로 호의를 거절했다. 그녀가 모퉁이를 지날 때 한 여직원과 부딪쳤다. 여직원은 욱하려다 온하랑을 보자 표정이 변했다.“죄송해요, 디렉터님. 어디 다친 곳 없으시죠?”“괜찮습니다.”온하랑은 미
댓글 창에는 가족을 지지하는 의견으로 가득했고 모두 부승민한테 비난을 쏟아부었다. 음주는 민감한 문제이다.업무상 상해 보험 규정에는 음주 및 약물 남용은 업무상 재해로 간주할 수 없다고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즉, 근로자가 노동규율과 사업주의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작업 중 부상을 입은 경우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지 않는다.노동자는 자신의 피해에 대해 주요한 책임을 지고, 비효율적인 감독으로 인해 회사에서는 부분적 보상만 하면 되며 보상 금액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BX 그룹은 공식 계정에 경찰조사 결과를 존중하고 법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일부 네티즌들은 BX 그룹 같은 대기업이 그까짓 4억 원은 돈도 아니지 않냐는 의견이었다. 그냥 배상하면 되지 왜 일을 크게 만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고인이 정말 술을 마셔 산업단지에 불이 난 거라면 BX 그룹이 피해자인데 왜 피해보상을 해야 하는지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BX 그룹을 옹호하는 댓글에는 수백 개의 악플이 달렸다.행정심의 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이 기간에 산업단지 화재 사건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진행되었고 수많은 네티즌들이 사건에 관심을 두고 재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와중에 BX 그룹의 주식이 지속해서 하락하자 증권거래소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어떤 사람은 한숨을 쉬었고, 어떤 사람은 욕을 퍼부었다.회사에 출근한 온하랑은 회사에 도는 긴장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회장실의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고, 각종 매체에서 잇달아 전화를 걸어와 상황에 대해 물었다.비서진들은 통일적으로 회답했다. “본사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으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몇몇 비서는 찾아와 온하랑에게 주의를 줬다.“부 대표님께서 방금 전화 오셨는데, 디렉터님께서 요즘 최대한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시네요. 특히 회사에 드나드실 때 주의하라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온하랑은 일부 언론매체는 트래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부승민은 담당자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러자 담당자는 허리를 곧게 펴며 말했다.“저는 고 상무님의 의견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여론에서 오는 압력을 줄이고 사적으로 유가족들과 중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유가족이 소란을 피우도록 내버려두면 회사에 매우 불리할 것입니다.”부승민은 소파 등에 기대어 오른손을 손잡이에 걸치고 규칙적으로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일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요. 지금도 최기준 집 앞에는 기자가 지키고 있을 거예요. 지금 최기준을 찾아가도 저희가 겁먹은 줄로 인식할 거예요. 게다가 행정심의 결과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좀 더 기다려 봅시다.”하지만 고 이사는 여전히 부승민의 의견에 반대 입장이었다.“최근 부정적인 뉴스가 잇달아 보도되는 바람에 주식이 계속 하락해 투자자들의 불만 소리가 말이 아니에요. 행정심의 결과가 어떻든 고인의 잘못이라 해도 저희가 유가족을 찾아뵙는 게 오히려 회사 이미지에 유리할 수도 있어요.”“제가 기억하는 이사님은 의기양양했었는데. 산업단지가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된 데는 이사님의 공이 컸어요. 사무실에 너무 오래 앉아계셔서 그런가? 왜 두려움이 많아지셨나요?”고 이사는 바로 말문이 막혔다.“기자들은 이미 회사를 노리고 있는데, 우리가 사적으로 보상한다고 여론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번에 개인적으로 찾아가 합의를 보면,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또 개인적으로 처리 하실 건가요? BX 그룹은 절대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요. 정말 저희 책임이라면 배상하면 됩니다. 우리 문제가 아니면 저희도 손해를 봐가며 보상할 필요는 없죠.” 담당자는 고 이사의 눈치를 살폈다.고 이사는 확고한 부승민의 태도에 깊게 한숨을 내쉬며 담당자를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아래층에서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발언할 때 표현에 주의하세요.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시고 자세를 너무 낮추지도 마세요. 모든 것은 경찰 측의 결과에 따
"봤어."온하랑은 소파에 걸터앉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온하랑이 고작 한마디 답을 할 줄은 몰랐는지 부승민은 잠시 머뭇거렸다."여전히 생각이 변함없어?"온하랑은 그를 바라보며 단답형으로 답했다.“없어.”부승민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언제 동사무소에 가서 이혼서류 받아올래?"부승민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그는 넋을 잃고 온하랑을 쳐다봤다."아직도 이혼을 고집하는 거야?""응.""이미 공개했잖아.""누가 공개하면 이혼할 수 없대?""대체 왜 이러는데?""지난번에 말했잖아.""이주혁 때문이야? 걔가 사업도 뒤로하고 널 위해 사람을 때려 네티즌의 시선을 돌려줘서? 걔가 녹음파일을 너한테 들려줬어?"온하랑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수상쩍게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야? 이주혁이 사람을 때리다니. 무슨 녹음파일?""아무것도 아니야."부승민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그럼 굳이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야?""더 이상 오빠와 살고 싶지 않을 뿐이야. 오빠는 추서윤과 한 약속을 지켜. 난 평온하게 내 삶을 살고. 좋지 않아?""그럼 추서윤 때문이야? 내가 어떻게 할까? 네가 말하는대로 다 할게.""오빠 항상 추서윤과 같이 있고 싶어 했잖아. 내가 도와줄게.""좋아, 네가 싫다면 서윤이를 해외로 보낼게. 그럼 다시는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거야, 어때?"부승민의 확고한 모습에 온하랑은 몸을 일으켜 깊은 심호흡을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오빠,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 오빠가 뭘 하든 난 이혼할 거야!"말을 마치고 온하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하랑아, 가지 마!"부승민은 뒤에서 그녀를 꼭 껴안고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 가까이 느껴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빌었다."다시 한번 기회를 줘, 응?"‘제발 잔인하게 굴지 마!’부승민은 이젠 온하랑을 좋아하다 못해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 하지만 온하랑은 그를 떠나려 한다."난 이미 기회를 줄 만큼 줬
강민은 객실 문을 열고, 부승민 한 사람만 있는 것을 보고는 자초지종을 알아차렸다.그는 문을 닫고 탁자 앞에 멈춰 서서 비어 있는 술병들을 보며 물었다."온하랑이랑 싸웠어?"부승민은 비틀거리며 말없이 술잔을 채우고 벌컥 마셨다.강민은 술병을 가로채며 부승민을 말렸다.부승민은 뒤늦게 술병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강민한테 손을 내밀었다."술 이리 내놔!""네가 술 마시는 거 보라고 나를 부른 거야? 난 관심 없으니까 자리 비켜줄게. 계속 마셔."부승민은 넋이 나간 채 허공에 뻗은 손에 힘이 빠지며 무릎을 퍽,하고 내리쳤다. 그는 소파에 힘없이 기댔다.그의 반쯤 감긴 눈은 아무런 기색도 없었다. 속눈썹 아래의 넓게 드리운 다크서클은최근 그의 노고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나랑 이혼하겠대."밑도 끝도 없이 뱉어낸 말을 강민은 용케 알아들었다.강민은 익숙한 듯 술병을 한쪽에 치워놓고 부승민과 마주 앉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예상했어."부승민은 눈이 번쩍 뜨였다."지난번에 모였을 때, 네가 노준형보고 온하랑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너와 노준형만 진지하고 온하랑은 평온해 보였어."부승민은 눈을 질끈 감고 그때 온하랑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그러나 부승민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너는 항상 온하랑이 철이 들었다고 하는데, 하랑이는 쉽게 다른 사람에게 순종하며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어. 하지만 실망해서 반항하기로 마음먹으면 마음을 돌리기가 어려운 성격이야."부승민은 한참 침묵을 유지했다.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강민한테 따졌다."왜 진작에 알려주지 않았어?"강민은 피식 웃었다."나는 진작에 주의를 줬어. 자기 아내 이외의 여자에게 마음 약해지지 말라고 했지. 부승민, 다른 사람들은 널 몰라도 난 알아. 그때 온하랑을 보는 네 눈빛이 얼마나 깊었는지.”부승민은 점점 초점을 잃어가며 뭔가 회상하는 것 같았다.그는 일찍부터 온하랑에게 마음이 있었다.아마도.그래서 온하랑에게 이혼을 요구하고도 그녀와는 여전히 남매라고
강민의 말을 들은 부승민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렇게 간단한 도리를 나는 왜 이제야 안 걸까?"그는 온하랑과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안수빈한테서 추서윤이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고 당장 떠나야 한다며 고집했던 기억이 났다.온하랑은 거듭 만류했지만 그는 결국 떠났다.그는 그때까지도 온하랑이 조금의 동정심도 없다며 씩씩거렸다.지금 되짚어 보니 온하랑이 얼마나 상처받았을까.온하랑은 자신의 결혼생활을 망친 추서윤을 동정할 필요 따위 없다.만약 지금 누군가가 추서윤이 실종되었다고 그에게 말한다면, 그는 손뼉을 칠 것이다."사실, 네가 추서윤에게 빚진 것이 있다고 해도 너무 방임해서는 안 돼. 그 일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너를 비난하면서도 너와 추서윤 모두 반듯한 성인이라는 사실은 잊은 것 같아."강민은 계속하여 말했다."네가 추서윤 보호자는 아니니, 그녀가 밤늦게 학교를 뛰쳐나간 건 걔 문제야. 추서윤이 납치되어 납치범이 탐욕을 부린 것은 더더욱 너와 무관해. 당시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최선의 선택이었어. 그렇지 않으면 너 혼자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막론하고 네가 사건에 휘말리게 돼. 네가 추서윤한테 죄책감을 느껴서 지나치게 잘해주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네가 마음의 빚을 되갚으려 하다가 범죄를 저질러야 한다면 그때도 그럴 거야? 약속도 유효기한이 있어. 네가 온하랑 사이에 아이가 생긴 후에도 추서윤이 귀국해서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면, 그때도 승낙할 거야? 거듭 강조하지만, 추서윤도 이제는 어른이야. 처음에 걔가 출국하기로 한 것은, 스스로 약속을 포기한 것과 같아. 추서윤도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BX 그룹 대표 자리는 어르신이 네 능력을 믿고 맡긴 거야. 평소에는 부민재한테 양보해도, 부민재가 너만 못한 거니까 부민재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네가 없었어도 네 둘째 삼촌과 사촌 동생은 대표 자리에 앉을 수 없어. 여기까지만 말할게. 그러니까 네 마음을 무시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게 뭔지 곰곰이 생각해 봐. 나는 네
밤이 깊어지자, 검은색 카이엔이 조용히 수운성 촬영팀이 머물고있는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도련님, 도착하셨습니다."기사님은 차를 세우고 백미러를 봤다. 기사님은 뒷좌석에 눈을 감고 있는 부승민을 깨웠다."응."부승민은 눈을 감은 채 대답하더니 이내 다시 꿈나라로 향한 듯 조용해졌다.기사님은 짙은 술 냄새를 맡으며 계속 깨워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2분가량 지나자 부승민이 뒷좌석에서 뒤척거렸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손으로 몇 번 클릭하자 휴대폰에서 다이얼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고, 전화기 너머 피곤한 목소리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부승민?”"나 너희 호텔 주차장에 있어.”부승민이 보디가드를 보낸 후, 추서윤은 부승민이 경계를 풀고 먼저 그녀를 만나주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전에 쓰던 방법은 더 이상 부승민한테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증상이 완화된 척하며 계속 촬영에 들어가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추서윤은 촬영에 들어간 다음 날 한밤중에 부승민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해 쏟아지던 졸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나 지금 바로 내려갈게!”그녀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갑자기 거울 앞에 달려가 자기 모습을 찬찬히 비춰보았다. 가슴을 덮은 긴 머리는 마구 흐트러져 있었고, 게슴츠레한 눈은 졸려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입은 꽃무늬 잠옷은 치맛자락이 허벅지까지 올라와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는 고민 끝에 립스틱을 찾아 바르고 옷장에서 짧은 외투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는 룸카드를 챙기고 나섰다."부승민!"한적한 지하 주차장에서 추서윤의 외침은 유난히 또렷했다.부승민은 차창을 통해 그녀를 내다보고는 차에서 내렸다."왜 올라오지 않고."추서윤은 부승민한테 바짝 다가섰다.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나는 네가
추서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승민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현재 국내 연예계는 실력보다는 인맥이 더 중요한 상황이었다.때문에 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배역에만 머물러 있었고 오히려 연기가 딸리는 배우들이 주역을 차지하고는 했다.추씨 가문은 강남시에서 그래도 꽤나 이름이 있는 집안이었다.하지만 추서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매일 놀고먹으며 허세 부리는 걸 좋아하는 한량이었고, 그녀의 큰아버지는 겉으로는 상냥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추서윤이 부승민이라는 빽을 잃으면 그녀의 큰아버지도 더 이상 그녀를 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추서윤이 부승민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원망이 담겨 있었고 꽉 쥔 주먹 탓에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났다.“승민아, 꼭 이렇게 해야 했어? 그렇게 내가 미워? 네 인터뷰가 나간 뒤로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욕하는 줄 알아? 내가 너희 둘 결혼생활에 끼어든 내연녀라고….”“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다고 말할 수 있어?”부승민이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묻자 추서윤은 순간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넌 나와 하랑이가 결혼한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러 번 꾀병을 부려서 나를 네 곁에 묶어두려고 했잖아. 그리고 내가 너한테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이용해서 여러 번이나 하랑이에게 상처를 줬지. 그런 일을 하면서 찔린 적이 한 번도 없었어?”부승민은 추서윤에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가 온하랑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더 처절히 깨닫고 있었다. 온하랑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은 추서윤이 아니라 바로 부승민 자신이었다. 그가 모든 일의 원인이었고, 그가 죽일 놈이었다.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추서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서윤아, 우
온하랑은 쪼그리고 앉아 메이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메이슨은 경주에 집이 있기에 낯선 강남시에 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도 이곳은 낯선 곳이야, 엄마의 집은 강남시에 있어.”슬퍼하는 메이슨을 온하랑은 계속 달래주었다.“앞으로 엄마가 메이슨 보러 자주 올게. 메이슨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강남시에 찾아와도 돼.”그녀가 조산을 앞두고 있을 당시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한발 늦은 탓에 먼저 메이슨을 데려간 최동철이 각종 절차를 밟아 양육권을 가졌고 그 사이 메이슨도 이미 이곳에 적응해 버렸다.최동철은 온갖 정성을 쏟아서 메이슨을 돌봤으며 마음이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생활환경을 자주 바꿀 수 없으므로 여기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메이슨은 의기소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그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이모가 만들었던 쿠키를 기억해? 엄마가 메이슨이 도움이 필요한데 함께 만들 수 있을까? 아빠가 돌아오시면 메이슨의 솜씨가 어떤지 맛보라고 하자.”기분이 언짢았던 메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쿠키를 만들기 시작하자 곰돌이 모양의 틀로 반죽을 찍던 그는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쿠키를 만들던 중 온하랑은 부승민의 전화를 받았다.그가 물었다.“출발했어?”“아니, 깜빡했어. 아까 최 회장님 다녀가셨는데 동철 오빠의 소식이 있다고 하셨어.이틀 더 머물다 그가 돌아오면 돌아갈게.”부승민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그가 기분이 언짢다고만 생각한 온하랑은 웃으면서 말했다.“며칠인데 못 기다리겠어?”“아니.”부승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우현 씨 핸드폰을 훔쳤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응, 기억해.”바로 서우현이 그 남자를 찾았고 그의 입에서 메이슨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온하랑은 식탁에서 쿠키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메이슨을 바라보았다.“그가 왜?”“줄곧 그가 나타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사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으라고 했는데 며칠 전 그를 찾아서 잡고 심문하니 진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