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들의 세상은 법으로 통제가 가능한 범위가 아니었다. 부승민의 곁에 널린 게 바로 법조계 인물들이었다. 그만큼 그의 단순한 암시 한 번에 부승민을 위해 발 벗고 나서줄 사람도 많았다. 경찰의 징계 사유도 부승민과는 관련도 없는 타당한 사유로 마무리가 되었다.유민상의 말에 주위의 직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멀대 같은 직원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애써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했다.“민상 씨가 쓸데없이 겁만 많아서는.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우린 돈만 벌면 돼!”그 순간, 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가볼게.”컵라면을 뜨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유민상이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유민상의 복부로 거센 발길질이 가해졌다.무방비 상태로 복부를 걷어차인 유민상은 그대로 배를 부여잡고 털썩 뒤로 쓰러졌다.뒤이어 머리를 빡빡 민 험한 인상의 청년이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두어 걸음 옮겨 자신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진 유민상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일어나!”갑자기 날아온 발길질을 피하지도 못하고 정통으로 맞아버린 유민상은 매우 놀랐는지 겁에 질린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말했다.“이...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이거 범죄야!”청년은 그런 유민상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는 멱살을 잡고 일으킨 그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아 벽에 들이받아 버렸다.“쿵”하는 소리와 함께 유민상의 이마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뒤이어 몰려오는 뇌가 튀어나올 듯한 극심한 통증과 어지러움에 이를 악물었다.2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소란에 사무실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던 나머지 네 명의 직원들이 달려 나왔다.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직원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너 누구야?”“네가 뭔데 함부로 남의 몸에 손을 대?”네 명의 직원들이 뒤늦게 달려 나와 유민상을 도와주려던 그때, 문밖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 여럿이
멀대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유민상이 걱정 어린 말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빨리 덜미가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부승민도 더 자세하게 따져 물으려는 생각은 없는 듯 바로 본론으로 화제를 돌렸다.“스캔들 연구소, 이슈텔러, 연예계의 모든 것. 이 계정들 다 너희들 거지?”부승민의 날카로운 질문에 사무실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멀대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조금 전의 뻔뻔하고도 당당하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말로만 듣던 그 부승민이 정말 자신들의 기사에 대한 복수를 하러 찾아왔다는데 감히 누가 나서려고 할까.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은 다른 한쪽 발을 들어 올려 자신의 발밑에 깔려있던 직원의 다친 다리를 힘껏 짓밟았다. 직원의 고통 섞인 비명이 바닥에서 들려왔다. 말로 형용하기조차 힘든 고통에 직원은 눈가 실핏줄까지 다 터져버린 건지 눈가가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공포로 물든 직원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청년은 험상궂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호통쳤다.“지금 묻고 있잖아!”청년의 발밑에 깔린 직원이 가빠오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희 것 맞아요. 근데 그 계정 관리자는 제가 아녜요. 저랑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계정이라고요!”부승민은 시선을 옮겨 청년의 발밑에 깔린 직원을 흘겨보았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어 멀대와 다른 직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계정 관리자가 누군데? 너희들한테 찌라시 퍼뜨리라고 시킨 사람이 따로 있을 거 아냐, 그게 누군데?”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에 침을 꿀꺽 삼킨 멀대가 저도 모르게 조용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다른 두 직원도 멀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그러던 중, 한 명이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멀대를 앞으로 밀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계정 관리자는 최민수예요. 유민상이 제보를 받으면 최민수가
만약 오늘 부승민이 정말 작정하고 손 볼 생각으로 찾아온 거라면 이들은 반항 한 번 못 해보고 그대로 목숨을 잃거나, 부승민의 수하들 손에 불구가 되겠지.부승민이 데리고 온 사람들은 누가 봐도 뒷골목에서 싸움질 좀 하고 다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밑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떨어진 인생이니 교도소든 뭐든 두려울 게 없었다. 게다가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도 부승민의 입김으로 그 건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풀려날 게 뻔했다.게다가 풀려난 건달들이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은 평생 이 건달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인생이 피곤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부승민은 내리깔고 있던 눈을 치켜뜨고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유민상을 바라보았다.부승민의 시선에 흠칫 몸을 떤 유민상이 다급하게 용서를 구걸하기 시작했다.“부승민 씨,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 해주십시오!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인터넷에 올린 그 기사들은 지금 바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승민 씨와 온하랑 씨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이거, 너랑 진재영이 만든 첫 작품 아니잖아, 내 말 맞지?”유민상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꿇고 있는 다리마저 달달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뒤늦게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그게...”부승민은 유민상의 변명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유민상은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8월쯤에 진재영이 사진 몇 장을 들고 저를 한 번 찾아왔었습니다.”그는 덜덜 떨리는 눈빛으로 부승민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 사진은 바로 부승민 씨와 추서윤 씨가 함께 BX 그룹 본사로 들어가는 사진이었습니다.”“그리고?”“더 없습니다. 이 두 번이 다입니다.”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승민을 발견한
온하랑은 부승민 없이 꿈도 꾸지 않은 채 아주 편히 잘 수 있었다. 어찌나 잘 잤는지 평소엔 꿈도 꾸지 못한 늦잠까지 잤다.도우미 아주머니가 어젯밤 부승민의 일을 얘기해주기도 전에 온하랑은 급히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회사까지 이동하던 중, 온하랑은 자신의 휴대전화에 뜬 인스타 알림을 발견했다.제목은 바로 이러했다:[#스캔들_연구소_공식 사과]해시태그는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라가 있었다.호기심에 해시태그를 눌러본 온하랑의 눈에 제일 처음으로 들어온 게시물은 다름 아닌 스캔들 연구소의 공식 사과문과 모든 게시글이 지워진 피드였다. 유명세를 먹고 사는 계정이 댓글 창과 공유기능을 모조리 폐쇄해버렸다.어제까지만 해도 게시글은 절대 지우지 않겠다고 고집하던 스캔들 연구소가 하루아침에 180도로 태도를 바꾸자 사람들은 계정이 해킹당했거나 누군가의 협박을 받고 모든 게시글을 지운 것으로 추측하기 시작했다. 스캔들 연구소의 하루아침에 달라진 계정 상태는 오히려 네티즌들의 반감을 산 듯 보였다.하지만 스캔들 연구소가 댓글 창을 닫고 게시글을 내린다고 해도 진작에 그들의 게시물을 캡처해 보관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스캔들 연구소가 올렸던 찌라시들의 캡처 본과 화면 녹화본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또 다른 사이트가 생겨나고 그 사이트는 많은 네티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규모가 점점 커지더니 암호까지 맞춰가며 돈을 받고 사진과 영상들을 판매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ㅂㅅㅁ, ㅇㅎㄹ 50분짜리 호텔 XX 영상, 필요하신 분은 디엠 주세요.][ㅇㅎㄹ 고객 접대 영상, 구매하실 분만 디엠 해주세요.]무엇보다 온하랑과 관련된 선정적인 루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누구는 그녀가 지금 전무직까지 오른 건 다 잠자리 덕분이라 떠들었고, 또 누군가는 그녀가 항상 침대 위에서 고객을 접대한다고 떠들어댔다. 일부 성형외과들도 이 틈을 타 온하랑이 자신들의 병원에서 비밀리에 성형수술을 받았다며 허위광고를 해댔다.
이주혁이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자신에게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한 스태프는 더 기가 산 건지 더 오만방자한 태도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부 대표님이랑 추서윤 씨가 사귀고 있던 거 모르는 사람 있어요? 온하랑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중간에 끼어든 건데, 전 무슨 말도 못 합니까?”극도의 분노에 이주혁의 이마에 핏줄까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잡고 있던 사람들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그 스태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극한의 분노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이주혁을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결국, 진 감독이 직접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싸움이 일단락되었다.진 감독은 사건의 전후를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촬영장 화장실에서 주먹다짐을 한 사람들을 따로 한 명씩 휴게실로 불러 개인 면담을 시작했다.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기사라면 진 감독도 진작에 확인했다. 그 기사의 진위는 알 수 없어도 이주혁이 온하랑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정도쯤은 일전 온하랑과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결국, 스태프가 먼저 뒤에서 온하랑의 루머를 퍼뜨렸다는 것을 알게 된 진 감독은 그 스태프를 따로 불러 먼저 이주혁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건방지기 그지없던 스태프였지만 이성이 돌아온 지금, 괜한 오기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일이 이주혁의 팬덤에게 알려지는 순간, 수많은 비난 여론 속에 잠겨 죽을 것이 뻔했다. 어디 그뿐일까, 여기서 괜히 고집만 더 부렸다간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다. 누가 봐도 지금 이 드라마 촬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스태프가 아닌 주연 이주혁이었으니까.스태프가 이주혁에게 고개 숙여 사과한 모습을 확인한 진 감독은 이제 이주혁더러 함부로 스태프에게 손찌검한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하지만 이주혁은 진 감독의 요구를 철저히 거절하며 자신은 스태프에게 사과할 생각이 조금도 없음을 강력하게 어필했다.이주혁이 먼저 주먹질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
온하랑의 끈질긴 추궁 끝에 이주혁은 혹시라도 온하랑에게 걱정거리가 될까 단지 드라마 촬영 중에 생긴 작은 트러블이라고만 대충 얼버무렸다. 이주혁의 대수롭지 않은 듯한 대답에 온하랑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온하랑은 그저 시답잖은 말들로 이주혁을 위로해주는 수밖에 없었다.[아무것도 모르면서 인터넷에서 함부로 지껄이는 사람들 말, 굳이 마음에 담아두려 하지 마.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네 일이니까.]온하랑의 위로에 이주혁이 바로 답장했다.[걱정하지 마.]공교롭게도 안티팬 단체의 멍청한 편집 덕분에 이주혁에게 역전승의 기회가 주어졌다.만약 자신에게 맞은 그 스태프가 카메라 앞에 얼굴만 비추지 않았더라도 지금쯤 모든 네티즌의 공격을 감수하고 있는 건 이주혁 하나뿐일 터였다.하지만 여론 조성을 위해서인지 안티팬 단체들은 굳이 자신에게 손찌검을 당한 스태프를 따로 섭외해 아무 잘못도 없는 무고한 사람으로 꾸며 진 감독까지 의도치 않게 이주혁의 편에 서도록 끌어들여 버렸다.이렇게 된 이상, 이주혁과 진 감독은 한마음 한뜻이 될 수밖에 없었다.수운성은 제작 규모가 꽤 큰 드라마로서 꽤 많은 투자자의 투자를 받아 제작에 들어간 작품이었다. 그 이유 중 첫 번째가 바로 추서윤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제작 감독이 진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투자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 감독이 이 드라마에서 손을 떼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진 감독을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니 투자자들은 자연스럽게 이주혁이 스태프에게 손찌검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으니 진 감독이 사과를 요구했다는 쪽으로 상황이 흘러가게 만들기를 원했다.따라서 겉보기엔 언론이 지금 매섭게 이주혁을 물고 뜯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주혁이 임찬호라는 캐릭터를 잃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었다. 기껏해야 맡고 있던 광고나 타격 조금 입고 말 것이다.만약 이주혁이 수운성에서 뛰어난 연기실력만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면 이주혁은 그
눈을 잠깐 질끈 감았다 뜬 온하랑은 비서가 두고 간 서류로 손을 뻗으며 최대한 정신을 차려 곧 있을 회의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대표님, 큰일 났습니다.”다급한 발걸음으로 회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연민우의 목소리와 태도에까지 조급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전무님 전화번호와 온갖 개인 SNS 계정들이 모조리 공개되어 버렸습니다!”연민우의 말에 표정이 차갑게 식은 부승민 역시 바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대표님. 전무님께서도 이미 공개된 그 전화번호는 과감히 버리셨으니까요.”“가서 IP 추적부터 해.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수집하고 경찰에 신고 넣어!”화가 제대로 난듯한 부승민이 한 글자, 한 마디에 힘을 실어 얘기했다. 부승민은 주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공권력의 힘을 빌리기보다 자신의 선에서 조용히 끝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는 것의 단점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공권력을 이용한 공개적인 본보기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목숨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함부로 덤벼대는데, 그렇다면 원하던 대로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지 제대로 느끼게 해줘야지!“네, 지금 바로 추적 시작하겠습니다.”부승민도 자리를 뜨려던 그 순간,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부승민은 바로 휴대전화를 들어 수신 버튼을 눌렀다.“부승민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수화기 너머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뭡니까?”“진재용 말입니다. 오상철 부대표님의 먼 친척 되는 사람이던데요. 평소엔 빈둥대며 놀기만 하다가 최근 들어 오진후 군과 부쩍 가까워진 것으로 보입니다.”오진후라면 오상철 부사장의 아들이었다.부승민은 의외의 소식에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그럼, 그 둘 사람 거래 내역은?”“이미 대표님께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오진후는 아마 오미연한테 철저하게 조종당한 걸 거야. 넌 그 두 사람에 대해서 계속 알아봐 줘.”“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기사들이었지만 임직원들은 그 아무도 감히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감히 언급할 자격이 없었다.하지만 이 상무 이사라면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그는 회사의 상무 이사직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의 주주로서 이사회의 멤버였으니 그는 단순히 회사의 주가와 직결되는 일에 관해 얘기한 것뿐이었다.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부승민에게 문제가 있다 해도 감히 부승민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독을 당한 온하랑의 창백한 안색이 더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녀의 속은 이미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었다.“저 하나 때문에 회사 이미지에 손해를 끼친 점, 정말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온하랑의 말은 이내 부승민에 의해 끊겨버렸다.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리에 있는 임직원들을 하나하나 쏘아보며 말했다.“지금 이 얘기를 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요.”여기서 투표를 통해 결정되는 자리는 오직 재무부 부장직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임직원들의 해임권과 부임권은 모두 부승민에게 있었다.고승범 이사가 애써 웃으며 경직된 미소로 말했다.“그렇죠.”누가 봐도 온하랑을 회사에 남겨두려는 부승민의 의도 섞인 말이었다. 여기서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해봤자 부승민의 미움만 살 게 뻔했다.“계속하시죠.”말을 마친 부승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오상철 부대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미 앞에서 다 해주셨네요. 굳이 같은 말을 반복하진 않겠습니다.”“하지만.”아무 말 않고 넘어가려나 싶던 그 순간, 오상철이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며칠 전, 이 감독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감독님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온하랑 전무님께서 요청한 단독 스폰서 자리를 거절하신 것도 모자라 이 감독님의 메신저를 차단까지 하셨다고. 전무님, 이게 사실입니까?”다른 상무 이사가 오상철의 말을 거들었다.“이 감독님? 이 감독님이라면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