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장동후는 잠시 놀란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부승민이 옆에 놓여 있던 서류를 장동후 쪽으로 밀며 말했다.“비서팀이랑 법무부에서 작성한 경고장이에요. 이따가 우리 회사 계정에 올리세요. 그리고 장 전무님은 인터넷 반응 실시간으로 계속 확인해 주시고요.”“네, 알겠습니다.”장동후가 서류를 집어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예상대로 안에는 연예계에서 흔히 쓰이는 경고장이 들어있었다. 이 경고장은 그저 경고용일 뿐 법적인 효력은 없었다.경고장에는 ‘스캔들 연구소’가 부승민 씨의 명예권을 침해했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스캔들 연구소’는 즉시 SNS 게시물을 삭제하여 부승민 씨를 모욕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이번 일에 대해 부승민 씨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고 쓰여있었다.경고장은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실검에 올랐다.게시물 아래의 댓글은 조롱이 대부분이었다.[경고장? 그냥 고소하지 그래?][명예권? 뭐야, 그럼 진짜야?][부승민: 저 사람이 제 명예권을 침해했습니다.판사: 당신은 실제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부승민: 방금 저 사람이 말 한 일을 했습니다.][연예계 이슈 중에 명예훼손 판정이 말도 안 되게 나온 게 한두 개도 아니고, 그걸 믿겠냐?]‘스캔들 연구소’는 자신은 두려울 게 없다는 듯 게시물을 삭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 경고장을 캡처해 올리고는 [망했다, 잡혀가게 생겼네.]라는 글을 덧붙였다.추서윤 측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온하랑은 핸드폰을 끄고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창밖을 보고 멍을 때렸다.그녀는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었다.김시연의 말처럼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히지 않는 이상 그녀는 계속 억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이번 일이 터졌을 때, 그녀는 부승민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추측해 보았다.저번처럼 언론을 통제하고 무대응으로 대처할까? 아니면 정면으로 맞설까?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번에도 저번처럼 언론을 통제한 후 화제가 사그라지기를 기다릴 줄
일이 이 지경까지 되자 온하랑은 최대한 부승민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런 온하랑의 노력에도 부승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온하랑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온하랑은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진수성찬이 차려진 테이블 옆 소파에 앉았다. 그 맞은편에서 자신을 위해 세심하게 수저를 놓아주는 부승민을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꾹꾹 참아왔던 질문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정말 둘이 공개를 할 수는 있을까?’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부승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하랑아, 인터넷에 올라온 그 일은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사실 나도 우리 사이를 공개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 사이를 공개해버리면 모든 화살이 서윤이를 향할 텐데, 그럼 서윤이는 정말 이 분야에서 더는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돼. 지위도 명예도 다 잃고 언론도 쉽게 잠잠해지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게 분명해…”“그 정도는 나도 아니까 굳이 얘기 안 해도 돼.”부승민의 말에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입맛이 뚝 떨어져 입에 넣은 반찬을 삼키기가 힘들어졌다.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온하랑의 머릿속에서 작은 의문점이 피어올랐다.‘서윤 씨는 대체 승민 오빠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 걸까?’‘여태껏 오빠가 해온 모욕과 기만을 좋아하는 건가?’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승민의 자상한 모습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온하랑이었다.‘내가 미쳤지!’사무실은 한순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부승민이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결국 계속되는 침묵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온하랑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뭔가를 떠올리고는 다급히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휴대전화로 향하려던 손을 다시 뒤로 뺐다.아무도 받는
“넌 내가 가봤으면 좋겠어?”온하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자신이 바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추서윤이 먼저 포기하고 물러날지 말지의 문제라는 것을.아니나 다를까, 점심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 무렵 안수빈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부승민은 온하랑과 함께 있는 휴게실에서 망설임 없이 바로 수신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의 통화내용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진정제는 써봤나요?”“진작에 써봤죠. 근데 서윤이가 요즘 진정제를 너무 많이 맞아서 내성이 생겨버린 건지, 별로 소용이 없어요.”“이미 의사 두 명이 서윤이 때문에 다쳤어요...”“...”잠깐 침묵을 지키던 부승민은 바로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투명한 눈빛으로 부승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병원 가보게?”온하랑의 맑고 투명한 눈을 바라보던 부승민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에 해명하기 시작했다.“서윤이가... 손목을 그었대...”해명하는 부승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다 별로 소용없을 거라는 걸 부승민도 잘 알고 있었다.부승민은 다른 걸 다 떠나서 그저 추서윤이 이대로 잘못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녀는 병이 제대로 도지는 순간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응, 나도 알아.”부승민의 말에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 온하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가봐.”사실 온하랑은 병이 도진 추서윤이 투신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온하랑의 예상과는 달리 손목을 그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둘 다 자살 시도인 것은 틀림이 없으니 비슷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같이 가자. 서윤이랑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 너랑 약속까지 했는데.”“내가 같이 가면 서윤 씨가 슬퍼할걸...”부승민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온하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그래, 알겠어.”온하랑은 어
추서윤은 한껏 위축된 표정으로 부승민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그러면서도 울음기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승민아, 난 네가 진짜 나 버리는 줄 알았다고! 왜 이제 왔어...”추서윤의 돌발행동에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부승민은 뒤늦게 천천히 손을 뻗어 추서윤의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부승민의 다정한 음성에 추서윤은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울어댔다.능력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 두 사람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애틋한 부부의 모습이었다.온하랑은 멀지 않은 곳에서 무표정으로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지금 불편한가? 그렇게 불편한 것 같지는 않네.’온하랑이 병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예상하던 상황이었다.그녀는 둘의 다정해 보이는 모습에 자신이 슬픔과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것이라 예상했었다.하지만 정작 예상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녀의 마음은 이상하게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아직도 피가 안 멈추고 있잖아. 우선 의사 불러서 치료부터 받자.”부승민은 다친 추서윤의 손목을 가볍게 쥔 채 고개를 들어 옆에 있던 의사에게 가볍게 눈짓했다.하지만 의사가 가까이 접근하기 시작한 그 순간, 추서윤은 미친 듯이 거부하며 부승민의 등 뒤로 몸을 한껏 움츠리고 외쳤다.“안 꿰맬 거야! 안 꿰맬 거라고! 가까이 오지 마!”의사는 막막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부승민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서윤아, 지혈은 해야지. 안 그럼 너 정말 죽어!”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망울로 부승민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추서윤이 답했다.“네 품에서 죽는 거라면, 난 언제든 환영이야!”“헛소리하지 말랬지!”순식간에 표정을 차갑게 굳힌 부승민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온하랑에게 향했다.부승민의 시선 끝에 닿은 온하랑은 평온한 표정으로 두
“이 얘기는, 서윤 씨한테 해야 한다고 보는데요. 아무리 애틋한 사이라고 해도, 그게 남의 결혼에 눈치 없이 함부로 끼어들 만한 이유가 되진 못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 오전에 말이에요, 시연 씨는 그 뉴스가 진짜인 줄 알고 있더라고요. 갑자기 저 찾아오더니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난 불륜녀 친구 둔 적 없어.’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죠? 인간은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정말 끼리끼리네요.”온하랑의 말에 표정이 급격하게 굳은 안수빈이 무어라 반박하려 하던 그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그 발걸음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병실에서 걸어 나오던 부승민이었다. 그는 병실을 나서자마자 바로 온하랑의 등 뒤로 다가가 말을 꺼냈다.“가자.”“봉합은 끝났어?”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승민의 음성에 몸을 돌린 온하랑이 물었다.“응.”병실 안에서는 놀란 듯한 추서윤의 비명이 들려왔다.“대표님, 더 있다 가시지 그래요? 서윤이...”몇 마디 얹으려던 안수빈은 날카롭고도 서늘한 부승민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온하랑도 부승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부승민은 그런 온하랑의 작은 손을 움켜잡고 나란히 병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병원 밖으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운전기사는 피고 있던 담배를 급히 버리고는 차 문을 열어 둘을 맞이했다.“회사로 돌아갈까요, 도련님?”“응.”두 사람을 태운 차는 부드럽게 병원 정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과속방지턱을 넘은 차량은 이내 회사로 향하는 도로에 진입했다.그러던 순간, 운전기사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정차시켰다.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차를 에워싸더니 차의 보닛 앞을 막아섰다. 차를 막아선 수십 대의 카메라들이 눈부신 플래시를 사정없이 터뜨리며 차 내부를 찍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며 부승민과 온하랑이 차에서 내려 자신들의 인터뷰에 응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그 사람들은 다름 아닌 병원 근처에서 잠복 중이던
역시 예상했던 대로 두 사람이 카메라 앞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는 기사는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서 퍼져나갔다.네티즌들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만 듣는 사람들이었다. 대응하면 궤변으로 치부되었고 회피로만 일관하면 암묵적인 인정으로 여겨졌다.떠들썩한 언론 때문에 일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그런 언론을 살피며 심기가 불편해진 김시연은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한 줄의 문장과 함께 영상 하나를 공유했다.‘양심도 없지. 인간의 탈을 쓴 악마 같은 게, 감히 누굴 건드려.’메이크업 사건 이후로 김시연은 항상 온하랑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필사적으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여러 글을 공개적인 SNS 계정에 올려왔다. 그로 인해 네티즌들도 두 사람이 각별한 친구 사이라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로 인해 김시연의 인스타 계정까지 함께 차고 들어간 네티즌들은 온하랑에게만 퍼붓던 공격을 김시연에게까지 퍼붓기 시작했다.하지만 그것에 지레 겁먹고 가만히 있을 김시연이 아니었다. 자신의 게시글에 악성 댓글을 남긴 한 네티즌과 살벌하게 싸웠던 증거가 여전히 그녀의 인스타 게시물 댓글 창에 그대로 남아있었다....오후에 작은 회의 일정이 잡혀 있던 온하랑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서류를 든 채 회의실을 빠져나왔다.“전무님.”근무실에 있던 연민우가 온하랑을 맞이했다.“대표님 찾으러 오셨어요?”“네, 결재받을 서류가 있어서요.””대표님 지금 회사에 안 계시는데. 급한 일 아니시면 일단 그 서류 저한테 맡기실래요? 나중에 대표님 돌아오시면 그때 제가 대신 전달해드릴게요.”연민우의 말에 온하랑은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은 어느덧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네, 그렇게 하죠.”온하랑은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연민우에게 건네며 말했다.“거래처에서 최대한 빨리 처리해달라고 재촉하는 서류라서요. 적어도 오늘 퇴근 전까지는 저한테 다시 제출해주세요.”“물론이죠.”연민우에게 서류를 맡긴 온하랑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일에 몰두
재벌들의 세상은 법으로 통제가 가능한 범위가 아니었다. 부승민의 곁에 널린 게 바로 법조계 인물들이었다. 그만큼 그의 단순한 암시 한 번에 부승민을 위해 발 벗고 나서줄 사람도 많았다. 경찰의 징계 사유도 부승민과는 관련도 없는 타당한 사유로 마무리가 되었다.유민상의 말에 주위의 직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멀대 같은 직원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애써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했다.“민상 씨가 쓸데없이 겁만 많아서는.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우린 돈만 벌면 돼!”그 순간, 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가볼게.”컵라면을 뜨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유민상이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유민상의 복부로 거센 발길질이 가해졌다.무방비 상태로 복부를 걷어차인 유민상은 그대로 배를 부여잡고 털썩 뒤로 쓰러졌다.뒤이어 머리를 빡빡 민 험한 인상의 청년이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두어 걸음 옮겨 자신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진 유민상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일어나!”갑자기 날아온 발길질을 피하지도 못하고 정통으로 맞아버린 유민상은 매우 놀랐는지 겁에 질린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말했다.“이...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이거 범죄야!”청년은 그런 유민상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는 멱살을 잡고 일으킨 그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아 벽에 들이받아 버렸다.“쿵”하는 소리와 함께 유민상의 이마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뒤이어 몰려오는 뇌가 튀어나올 듯한 극심한 통증과 어지러움에 이를 악물었다.2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소란에 사무실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던 나머지 네 명의 직원들이 달려 나왔다.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직원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너 누구야?”“네가 뭔데 함부로 남의 몸에 손을 대?”네 명의 직원들이 뒤늦게 달려 나와 유민상을 도와주려던 그때, 문밖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 여럿이
멀대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유민상이 걱정 어린 말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빨리 덜미가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부승민도 더 자세하게 따져 물으려는 생각은 없는 듯 바로 본론으로 화제를 돌렸다.“스캔들 연구소, 이슈텔러, 연예계의 모든 것. 이 계정들 다 너희들 거지?”부승민의 날카로운 질문에 사무실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멀대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조금 전의 뻔뻔하고도 당당하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말로만 듣던 그 부승민이 정말 자신들의 기사에 대한 복수를 하러 찾아왔다는데 감히 누가 나서려고 할까.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은 다른 한쪽 발을 들어 올려 자신의 발밑에 깔려있던 직원의 다친 다리를 힘껏 짓밟았다. 직원의 고통 섞인 비명이 바닥에서 들려왔다. 말로 형용하기조차 힘든 고통에 직원은 눈가 실핏줄까지 다 터져버린 건지 눈가가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공포로 물든 직원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청년은 험상궂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호통쳤다.“지금 묻고 있잖아!”청년의 발밑에 깔린 직원이 가빠오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희 것 맞아요. 근데 그 계정 관리자는 제가 아녜요. 저랑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계정이라고요!”부승민은 시선을 옮겨 청년의 발밑에 깔린 직원을 흘겨보았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어 멀대와 다른 직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계정 관리자가 누군데? 너희들한테 찌라시 퍼뜨리라고 시킨 사람이 따로 있을 거 아냐, 그게 누군데?”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에 침을 꿀꺽 삼킨 멀대가 저도 모르게 조용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다른 두 직원도 멀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그러던 중, 한 명이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멀대를 앞으로 밀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계정 관리자는 최민수예요. 유민상이 제보를 받으면 최민수가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