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추서윤이 이 스캔들에 껴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온하랑은 일반인이었고, 부승민은 비록 공인이지만 연예계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연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하지만 연예인과 관련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기에 사람들은 이번 일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이 스캔들에서 추서윤이 피해자였고 온하랑이 가해자였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이 스캔들에서 온하랑과 부승민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다 자본가의 발닦개 취급을 받으며 같이 욕먹고 있었다.순식간에 두 사람에 관한 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BX 그룹의 주식마저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연민우의 전화를 끊은 부승민이 연락처를 뒤지더니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몇초 후, 통화가 연결되어 전화 너머에서 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부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하루 줄게. 지금 당장 ‘스캔들 연구소’, ‘이슈텔러’, ‘연예계의 모든 것’, 이 세 SNS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 와.”아무래도 이제껏 언론에 너무 관대하게 대처했나 보다. 그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건들거리며 말했다.“부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내일 좋은 소식 들고 올게요!”부승민은 전화를 끊고 포털사이트에 다시 들어갔다.연민우가 일을 잘 처리했는지 언론은 어느 정도 통제된 상태였다.그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나간 거 아니었어?”문 닫는 소리에 눈을 뜬 온하랑이 부승민을 보며 말했다. 방금 잠에서 깬 탓에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잠에서 깬 걸 알고는 큰 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가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나가? 내가 가긴 어딜 가?”온하랑은 어둠 속에서 부승민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와 한참 동안 눈을 마주치던 부승민은 그제야 깨달았다. 온하랑은 그가 추서윤의
온하랑은 이주혁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이주혁에게서 카톡이 왔다.[인터넷에서 떠드는 건 신경 쓰지 마. 그 사람들은 그냥 분풀이할 데가 필요한 것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관심 가지는 사람 없을 거야.]연예인들은 다들 세컨드 계정이 있었고 이주혁도 마찬가지였다.게다가 그는 온하랑에게 관심이 있었기에 댓글에서 온하랑을 욕하는 걸 보고는 참지 못하고 세컨드 계정으로 그들과 한 판 붙었다.[어이구, 온하랑 발닦개 납셨네...]그러나 결국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산 채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온하랑은 그의 문자를 받고 어리둥절해졌다.[무슨 뜻이야?]채팅창의 1이 사라졌지만 이주혁은 오래도록 답장이 없었다.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온하랑이 스캔들이 터진 사실을 모른다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 방금 그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서 문자를 취소하는 것도 웃기기만 할 뿐이었다.온하랑도 뭔가를 눈치채고 다시 물었다.[안 알려줄 거야? 그럼 내가 알아서 찾아봐도 되고.]그러자 이주혁은 어쩔 수 없이 온하랑에게 ‘스캔들 연구소’가 올린 게시물의 링크를 보냈다.[이런 건 그냥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언론사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만 지어내고, 네티즌들도 그냥 생각 없이 따라서 욕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맘에 담아두지 마.]이주혁은 링크와 함께 위로의 말도 보냈다.이주혁이 보내준 게시물을 쭉 훑어본 온하랑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뭐, 글은 잘 쓰네. 말도 두루뭉술하게 잘하고. 딱 언론인이 쓸 법한 글이네.’스크롤을 아래로 쭉쭉 내리다가 게시물이 올라온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부승민을 보았다.“기사 봤어. 새벽에 연 비서님한테서 전화 온 거 이거 때문이야?”부승민은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미 사람 시켜서 다 처리했어.”“그래.”말은 마친 온하랑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그 사람
게다가 부승민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적의를 보이기도 했다.예전에 그냥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넘긴 것들이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온하랑이 말하는 남자 친구가 부승민 임을 가리키는 많은 단서들이 있었다.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던 중, 이주혁은 일전에 온하랑이 남자 친구와 곧 헤어질 것 같다고 얘기했던 때가 부승민이 추서윤을 위해 생일파티를 준비했을 때라는 걸 기억해 냈다.그리고 추서윤이 화상을 입었을 때 그녀가 별로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도 부승민이 그녀의 옆에서 밤새 간호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추서윤과 부승민의 관계가 이렇게 복잡하게 이어져 있는데, 그런 남자가 온하랑에게 어울리기나 할까?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주혁은 온하랑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하랑아, 만약 그 기사가 사실이라면 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부승민은 네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핸드폰을 켠 온하랑이 이주혁에게서 온 두 통의 문자를 확인했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이 상황에서 부승민을 두둔하고 나섰겠지만 지금은 그저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온하랑이 답장을 보내려고 할 때 옆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그가 가소롭다는 듯 약간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누가 의지 할 만한 사람인데? 이주혁이?”깜짝 놀란 온하랑이 핸드폰을 몸 뒤로 숨기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부승민을 보았다.“왜 남의 핸드폰을 훔쳐봐?”“훔쳐본 적 없어. 당당하게 본 건데.”부승민은 밥 먹을 때 그녀가 계속 핸드폰을 붙들고 있기에 뭐하나 궁금해서 살짝 곁눈질했고 그때 이미 온하랑이 이주혁과 문자를 주고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온하랑이 차에 올라타서도 이주혁과 문자를 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부승민은 그녀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고 그 웃기지도 않는 대화 내용을 보게 되었다.“너...”온하랑이 부승민을 흘겨보고는 핸드폰을 다시 꺼내 이주혁에
“무슨 실검?”그러자 옆사람이 말을 받았다.“나 봤어! 새벽에 터진 그거 말하는 거지? 1시간도 안돼서 감쪽같이 사라지던데? 역시 우리 부 대표님 대단하시다니까.”“대체 무슨 실검인데?”“소리야, 너 알면 진짜 충격받을 텐데.”소리라고 불린 직원이 헛숨을 들이키며 말했다.“설마 민윤커플이 깨진 거야?”다른 두 여직원은 소리가 민윤커플의 팬인 걸 알고 있었고 그녀가 얼마나 그들을 지지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소리는 SNS에서 꽤 유명한 민윤커플의 팬이었다.그녀는 BX 그룹의 직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SNS에 ‘추서윤이 부승민을 찾으러 또 회사에 왔다.’ 같은 소식을 올렸고 그 덕분에 팔로워가 적지 않았다.“맞아. 부 대표님이랑 MQ의 온 전무에 관한 얘기인데... 인스타그램에 ‘스캔들 연구소’라고 쳐봐.”소리가 검색을 하자 다른 한 사람이 말을 이었다.“봐봐, 증거도 꽤 많아. 이건 빼박이지. 같이 집에 들어가는 사진이 엄청 많이 찍혔어.”“아아악-!”게시물을 확인한 소리가 비명을 내질렀다.“이게 뭐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부 대표님은 추서윤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내 민윤커플...”“그러게 덕질하는데 감정을 쏟으면 안된다니까? 부자들이 다 그렇지 뭐. 그나저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냐 더니, 역시 얼마 전에 그런 소문이 돈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온하랑도 진짜 역겹다, 어쩜 임자 있는 사람을 꼬시고 다녀...”“아아악! 진짜 짜증 나 죽겠네. 남의 남자 뺏는 X들은 다 죽어야 돼!”“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떡해.”“괜찮아, 여기 다른 사람 없어.”“...”온하랑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아, 진짜 토 나오네. 발표회 때 그런 짓을 해놓고 죽은 아버지 팔아서 인성 세탁했잖아.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진짜 그 아버지 없었으면 어쩔뻔했대?”소리가 큰소리로 온하랑을 욕했다.그녀는 신제품 발표회 날 온하랑과 부승민이 이런저런 이벤트를 같이 했을 때부터 온하랑을 곱지 않게 보고 있었다.“회
하지만 그 누구도 휴식 시간에 온하랑과 같이 화장실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그 친구들은 결국 성적이 좋은 온하랑에게 편하게 질문을 하기 위해 겉으로나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수능이 끝난 후에야 온하랑은 그 친구들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그리고 이 일은 온하랑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그녀는 예전에 국어 선생님이 자신을 보고는 경계심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며 한숨을 쉬던 것을 기억한다. 선생님은 온하랑만큼 경계가 심한 학생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그녀가 고양이라면 아마 땅에 바짝 엎드린 채 하악질을 하며 언제나 달려들 준비가 되어있는 고양이가 아닐까. 절대 그 누구에게도 약점인 배를 보여주지 않는 경계심 많은 고양이.심지어 그녀는 부승민에게도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았었다.온하랑은 그와 같이 지내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그를 완전히 자신의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부승민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릴 용기도 없었다.부승민과 함께 지낸 3년 동안 겉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사실 부승민을 완전히 신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온하랑이 이마의 잔머리를 쓸어내렸다.인복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지 뭐.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녀는 BX 그룹에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았다.화장실을 나와 사무실로 걸어가는 동안 온하랑은 몇몇 직원들의 시선이 진득하게 달라붙는 걸 느꼈다.사무실에 도착한 그녀는 평소처럼 일을 시작했다.점심이 되었을 때 김시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랑 씨, 하랑 씨. 기사 봤어요?][봤어요.][부 대표님이랑 무슨 사이예요 대체? 이 기사, 왜 보면 볼수록 진짜 같지?][음... 진짜도 섞여 있긴 해요.][네? 뭐라고요?????]김시연이 물음표 다섯 개를 보내며 깜짝 놀란 티를 팍팍 냈다.[부 대표님이랑 만나는 거예요?][네.]그러자 김시연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온하랑은 그녀가 이주혁처럼 놀라서 말을 잃은 거로 생각했다.그러다 잠시 후
설사 부승민이 대놓고 바람을 피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와 추서윤이 서로 썸 타는 사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김시연의 기준에서는 그게 바람이었다.온하랑도 부승민을 두둔하지 않았다.[지금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세요. 그리고 저희가 이혼하는 걸 원하지 않으시고요.]게다가 온하랑은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신의 아이는 같은 일을 겪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온하랑과 부승민의 사이를 봤을 때, 그들이 정말 아이에게 행복한 가정을 꾸려 줄 수 있을까?[당사자가 아무래도 더 잘 알겠죠. 저도 하랑 씨의 일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니까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요.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어요.]김시연이 이어서 말했다.[그럼 앞으로 어떡하려고요? 지금도 댓글창에 하랑 씨 욕이 계속 달리고 있는 거 알고 있어요? 저라면 제가 떳떳한 부인인데 차라리 다 공개하고 말겠어요. 추서윤 개망신 당하게.][저희는 아직 공개할 생각이 없어요. 욕할 사람들은 욕하라고 해요.][하하, 부승민 씨가 무슨 생각인지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온하랑이 답장하지 않자 김시연이 말을 이었다.[두 사람이 결혼한 사이인 거 밝혀지면 부승민 씨는 빼박 바람남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절대 공개하지 않으려 하겠죠. 진짜 영악한 남자네요, 덕분에 하랑 씨만 힘들게 됐네.]온하랑이 웃프다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지금 그녀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이모티콘이었다.[맞다, 그럼 그때 SNS에 올린 남자 친구가 부승민 씨인 거예요? 몸매 진짜 좋던데. 어때요? 부승민 씨는 잘해요? 느낌은 좋아요?][?]온하랑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저기요, 음란 마귀 씨. 저희 지금 진지한 얘기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얼마나 기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진 않았잖아요. 이 정도면 진지한 거 아니에요?]그 말을 끝으로 김시연은 자신의 볼일을 보러 갔는지 더 이상 문자가 오지 않았다.얼마 후, 온하랑은 주현으로부터 또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그 말을 들은 장동후는 잠시 놀란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부승민이 옆에 놓여 있던 서류를 장동후 쪽으로 밀며 말했다.“비서팀이랑 법무부에서 작성한 경고장이에요. 이따가 우리 회사 계정에 올리세요. 그리고 장 전무님은 인터넷 반응 실시간으로 계속 확인해 주시고요.”“네, 알겠습니다.”장동후가 서류를 집어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예상대로 안에는 연예계에서 흔히 쓰이는 경고장이 들어있었다. 이 경고장은 그저 경고용일 뿐 법적인 효력은 없었다.경고장에는 ‘스캔들 연구소’가 부승민 씨의 명예권을 침해했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스캔들 연구소’는 즉시 SNS 게시물을 삭제하여 부승민 씨를 모욕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이번 일에 대해 부승민 씨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고 쓰여있었다.경고장은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실검에 올랐다.게시물 아래의 댓글은 조롱이 대부분이었다.[경고장? 그냥 고소하지 그래?][명예권? 뭐야, 그럼 진짜야?][부승민: 저 사람이 제 명예권을 침해했습니다.판사: 당신은 실제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부승민: 방금 저 사람이 말 한 일을 했습니다.][연예계 이슈 중에 명예훼손 판정이 말도 안 되게 나온 게 한두 개도 아니고, 그걸 믿겠냐?]‘스캔들 연구소’는 자신은 두려울 게 없다는 듯 게시물을 삭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 경고장을 캡처해 올리고는 [망했다, 잡혀가게 생겼네.]라는 글을 덧붙였다.추서윤 측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온하랑은 핸드폰을 끄고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창밖을 보고 멍을 때렸다.그녀는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었다.김시연의 말처럼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히지 않는 이상 그녀는 계속 억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이번 일이 터졌을 때, 그녀는 부승민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추측해 보았다.저번처럼 언론을 통제하고 무대응으로 대처할까? 아니면 정면으로 맞설까?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번에도 저번처럼 언론을 통제한 후 화제가 사그라지기를 기다릴 줄
일이 이 지경까지 되자 온하랑은 최대한 부승민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런 온하랑의 노력에도 부승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온하랑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온하랑은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진수성찬이 차려진 테이블 옆 소파에 앉았다. 그 맞은편에서 자신을 위해 세심하게 수저를 놓아주는 부승민을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꾹꾹 참아왔던 질문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정말 둘이 공개를 할 수는 있을까?’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부승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하랑아, 인터넷에 올라온 그 일은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사실 나도 우리 사이를 공개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 사이를 공개해버리면 모든 화살이 서윤이를 향할 텐데, 그럼 서윤이는 정말 이 분야에서 더는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돼. 지위도 명예도 다 잃고 언론도 쉽게 잠잠해지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게 분명해…”“그 정도는 나도 아니까 굳이 얘기 안 해도 돼.”부승민의 말에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입맛이 뚝 떨어져 입에 넣은 반찬을 삼키기가 힘들어졌다.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온하랑의 머릿속에서 작은 의문점이 피어올랐다.‘서윤 씨는 대체 승민 오빠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 걸까?’‘여태껏 오빠가 해온 모욕과 기만을 좋아하는 건가?’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승민의 자상한 모습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온하랑이었다.‘내가 미쳤지!’사무실은 한순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부승민이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결국 계속되는 침묵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온하랑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뭔가를 떠올리고는 다급히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휴대전화로 향하려던 손을 다시 뒤로 뺐다.아무도 받는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