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부승민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적의를 보이기도 했다.예전에 그냥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넘긴 것들이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온하랑이 말하는 남자 친구가 부승민 임을 가리키는 많은 단서들이 있었다.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던 중, 이주혁은 일전에 온하랑이 남자 친구와 곧 헤어질 것 같다고 얘기했던 때가 부승민이 추서윤을 위해 생일파티를 준비했을 때라는 걸 기억해 냈다.그리고 추서윤이 화상을 입었을 때 그녀가 별로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도 부승민이 그녀의 옆에서 밤새 간호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추서윤과 부승민의 관계가 이렇게 복잡하게 이어져 있는데, 그런 남자가 온하랑에게 어울리기나 할까?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주혁은 온하랑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하랑아, 만약 그 기사가 사실이라면 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부승민은 네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핸드폰을 켠 온하랑이 이주혁에게서 온 두 통의 문자를 확인했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이 상황에서 부승민을 두둔하고 나섰겠지만 지금은 그저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온하랑이 답장을 보내려고 할 때 옆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그가 가소롭다는 듯 약간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누가 의지 할 만한 사람인데? 이주혁이?”깜짝 놀란 온하랑이 핸드폰을 몸 뒤로 숨기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부승민을 보았다.“왜 남의 핸드폰을 훔쳐봐?”“훔쳐본 적 없어. 당당하게 본 건데.”부승민은 밥 먹을 때 그녀가 계속 핸드폰을 붙들고 있기에 뭐하나 궁금해서 살짝 곁눈질했고 그때 이미 온하랑이 이주혁과 문자를 주고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온하랑이 차에 올라타서도 이주혁과 문자를 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부승민은 그녀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고 그 웃기지도 않는 대화 내용을 보게 되었다.“너...”온하랑이 부승민을 흘겨보고는 핸드폰을 다시 꺼내 이주혁에
“무슨 실검?”그러자 옆사람이 말을 받았다.“나 봤어! 새벽에 터진 그거 말하는 거지? 1시간도 안돼서 감쪽같이 사라지던데? 역시 우리 부 대표님 대단하시다니까.”“대체 무슨 실검인데?”“소리야, 너 알면 진짜 충격받을 텐데.”소리라고 불린 직원이 헛숨을 들이키며 말했다.“설마 민윤커플이 깨진 거야?”다른 두 여직원은 소리가 민윤커플의 팬인 걸 알고 있었고 그녀가 얼마나 그들을 지지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소리는 SNS에서 꽤 유명한 민윤커플의 팬이었다.그녀는 BX 그룹의 직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SNS에 ‘추서윤이 부승민을 찾으러 또 회사에 왔다.’ 같은 소식을 올렸고 그 덕분에 팔로워가 적지 않았다.“맞아. 부 대표님이랑 MQ의 온 전무에 관한 얘기인데... 인스타그램에 ‘스캔들 연구소’라고 쳐봐.”소리가 검색을 하자 다른 한 사람이 말을 이었다.“봐봐, 증거도 꽤 많아. 이건 빼박이지. 같이 집에 들어가는 사진이 엄청 많이 찍혔어.”“아아악-!”게시물을 확인한 소리가 비명을 내질렀다.“이게 뭐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부 대표님은 추서윤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내 민윤커플...”“그러게 덕질하는데 감정을 쏟으면 안된다니까? 부자들이 다 그렇지 뭐. 그나저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냐 더니, 역시 얼마 전에 그런 소문이 돈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온하랑도 진짜 역겹다, 어쩜 임자 있는 사람을 꼬시고 다녀...”“아아악! 진짜 짜증 나 죽겠네. 남의 남자 뺏는 X들은 다 죽어야 돼!”“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떡해.”“괜찮아, 여기 다른 사람 없어.”“...”온하랑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아, 진짜 토 나오네. 발표회 때 그런 짓을 해놓고 죽은 아버지 팔아서 인성 세탁했잖아.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진짜 그 아버지 없었으면 어쩔뻔했대?”소리가 큰소리로 온하랑을 욕했다.그녀는 신제품 발표회 날 온하랑과 부승민이 이런저런 이벤트를 같이 했을 때부터 온하랑을 곱지 않게 보고 있었다.“회
하지만 그 누구도 휴식 시간에 온하랑과 같이 화장실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그 친구들은 결국 성적이 좋은 온하랑에게 편하게 질문을 하기 위해 겉으로나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수능이 끝난 후에야 온하랑은 그 친구들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그리고 이 일은 온하랑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그녀는 예전에 국어 선생님이 자신을 보고는 경계심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며 한숨을 쉬던 것을 기억한다. 선생님은 온하랑만큼 경계가 심한 학생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그녀가 고양이라면 아마 땅에 바짝 엎드린 채 하악질을 하며 언제나 달려들 준비가 되어있는 고양이가 아닐까. 절대 그 누구에게도 약점인 배를 보여주지 않는 경계심 많은 고양이.심지어 그녀는 부승민에게도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았었다.온하랑은 그와 같이 지내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그를 완전히 자신의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부승민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릴 용기도 없었다.부승민과 함께 지낸 3년 동안 겉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사실 부승민을 완전히 신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온하랑이 이마의 잔머리를 쓸어내렸다.인복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지 뭐.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녀는 BX 그룹에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았다.화장실을 나와 사무실로 걸어가는 동안 온하랑은 몇몇 직원들의 시선이 진득하게 달라붙는 걸 느꼈다.사무실에 도착한 그녀는 평소처럼 일을 시작했다.점심이 되었을 때 김시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랑 씨, 하랑 씨. 기사 봤어요?][봤어요.][부 대표님이랑 무슨 사이예요 대체? 이 기사, 왜 보면 볼수록 진짜 같지?][음... 진짜도 섞여 있긴 해요.][네? 뭐라고요?????]김시연이 물음표 다섯 개를 보내며 깜짝 놀란 티를 팍팍 냈다.[부 대표님이랑 만나는 거예요?][네.]그러자 김시연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온하랑은 그녀가 이주혁처럼 놀라서 말을 잃은 거로 생각했다.그러다 잠시 후
설사 부승민이 대놓고 바람을 피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와 추서윤이 서로 썸 타는 사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김시연의 기준에서는 그게 바람이었다.온하랑도 부승민을 두둔하지 않았다.[지금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세요. 그리고 저희가 이혼하는 걸 원하지 않으시고요.]게다가 온하랑은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신의 아이는 같은 일을 겪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온하랑과 부승민의 사이를 봤을 때, 그들이 정말 아이에게 행복한 가정을 꾸려 줄 수 있을까?[당사자가 아무래도 더 잘 알겠죠. 저도 하랑 씨의 일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니까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요.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어요.]김시연이 이어서 말했다.[그럼 앞으로 어떡하려고요? 지금도 댓글창에 하랑 씨 욕이 계속 달리고 있는 거 알고 있어요? 저라면 제가 떳떳한 부인인데 차라리 다 공개하고 말겠어요. 추서윤 개망신 당하게.][저희는 아직 공개할 생각이 없어요. 욕할 사람들은 욕하라고 해요.][하하, 부승민 씨가 무슨 생각인지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온하랑이 답장하지 않자 김시연이 말을 이었다.[두 사람이 결혼한 사이인 거 밝혀지면 부승민 씨는 빼박 바람남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절대 공개하지 않으려 하겠죠. 진짜 영악한 남자네요, 덕분에 하랑 씨만 힘들게 됐네.]온하랑이 웃프다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지금 그녀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이모티콘이었다.[맞다, 그럼 그때 SNS에 올린 남자 친구가 부승민 씨인 거예요? 몸매 진짜 좋던데. 어때요? 부승민 씨는 잘해요? 느낌은 좋아요?][?]온하랑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저기요, 음란 마귀 씨. 저희 지금 진지한 얘기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얼마나 기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진 않았잖아요. 이 정도면 진지한 거 아니에요?]그 말을 끝으로 김시연은 자신의 볼일을 보러 갔는지 더 이상 문자가 오지 않았다.얼마 후, 온하랑은 주현으로부터 또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그 말을 들은 장동후는 잠시 놀란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부승민이 옆에 놓여 있던 서류를 장동후 쪽으로 밀며 말했다.“비서팀이랑 법무부에서 작성한 경고장이에요. 이따가 우리 회사 계정에 올리세요. 그리고 장 전무님은 인터넷 반응 실시간으로 계속 확인해 주시고요.”“네, 알겠습니다.”장동후가 서류를 집어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예상대로 안에는 연예계에서 흔히 쓰이는 경고장이 들어있었다. 이 경고장은 그저 경고용일 뿐 법적인 효력은 없었다.경고장에는 ‘스캔들 연구소’가 부승민 씨의 명예권을 침해했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스캔들 연구소’는 즉시 SNS 게시물을 삭제하여 부승민 씨를 모욕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이번 일에 대해 부승민 씨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고 쓰여있었다.경고장은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실검에 올랐다.게시물 아래의 댓글은 조롱이 대부분이었다.[경고장? 그냥 고소하지 그래?][명예권? 뭐야, 그럼 진짜야?][부승민: 저 사람이 제 명예권을 침해했습니다.판사: 당신은 실제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부승민: 방금 저 사람이 말 한 일을 했습니다.][연예계 이슈 중에 명예훼손 판정이 말도 안 되게 나온 게 한두 개도 아니고, 그걸 믿겠냐?]‘스캔들 연구소’는 자신은 두려울 게 없다는 듯 게시물을 삭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 경고장을 캡처해 올리고는 [망했다, 잡혀가게 생겼네.]라는 글을 덧붙였다.추서윤 측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온하랑은 핸드폰을 끄고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창밖을 보고 멍을 때렸다.그녀는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었다.김시연의 말처럼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히지 않는 이상 그녀는 계속 억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이번 일이 터졌을 때, 그녀는 부승민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추측해 보았다.저번처럼 언론을 통제하고 무대응으로 대처할까? 아니면 정면으로 맞설까?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번에도 저번처럼 언론을 통제한 후 화제가 사그라지기를 기다릴 줄
일이 이 지경까지 되자 온하랑은 최대한 부승민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런 온하랑의 노력에도 부승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온하랑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온하랑은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진수성찬이 차려진 테이블 옆 소파에 앉았다. 그 맞은편에서 자신을 위해 세심하게 수저를 놓아주는 부승민을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꾹꾹 참아왔던 질문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정말 둘이 공개를 할 수는 있을까?’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부승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하랑아, 인터넷에 올라온 그 일은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사실 나도 우리 사이를 공개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 사이를 공개해버리면 모든 화살이 서윤이를 향할 텐데, 그럼 서윤이는 정말 이 분야에서 더는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돼. 지위도 명예도 다 잃고 언론도 쉽게 잠잠해지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게 분명해…”“그 정도는 나도 아니까 굳이 얘기 안 해도 돼.”부승민의 말에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입맛이 뚝 떨어져 입에 넣은 반찬을 삼키기가 힘들어졌다.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온하랑의 머릿속에서 작은 의문점이 피어올랐다.‘서윤 씨는 대체 승민 오빠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 걸까?’‘여태껏 오빠가 해온 모욕과 기만을 좋아하는 건가?’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승민의 자상한 모습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온하랑이었다.‘내가 미쳤지!’사무실은 한순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부승민이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결국 계속되는 침묵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온하랑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뭔가를 떠올리고는 다급히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휴대전화로 향하려던 손을 다시 뒤로 뺐다.아무도 받는
“넌 내가 가봤으면 좋겠어?”온하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자신이 바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추서윤이 먼저 포기하고 물러날지 말지의 문제라는 것을.아니나 다를까, 점심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 무렵 안수빈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부승민은 온하랑과 함께 있는 휴게실에서 망설임 없이 바로 수신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의 통화내용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진정제는 써봤나요?”“진작에 써봤죠. 근데 서윤이가 요즘 진정제를 너무 많이 맞아서 내성이 생겨버린 건지, 별로 소용이 없어요.”“이미 의사 두 명이 서윤이 때문에 다쳤어요...”“...”잠깐 침묵을 지키던 부승민은 바로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투명한 눈빛으로 부승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병원 가보게?”온하랑의 맑고 투명한 눈을 바라보던 부승민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에 해명하기 시작했다.“서윤이가... 손목을 그었대...”해명하는 부승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다 별로 소용없을 거라는 걸 부승민도 잘 알고 있었다.부승민은 다른 걸 다 떠나서 그저 추서윤이 이대로 잘못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녀는 병이 제대로 도지는 순간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응, 나도 알아.”부승민의 말에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 온하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가봐.”사실 온하랑은 병이 도진 추서윤이 투신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온하랑의 예상과는 달리 손목을 그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둘 다 자살 시도인 것은 틀림이 없으니 비슷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같이 가자. 서윤이랑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 너랑 약속까지 했는데.”“내가 같이 가면 서윤 씨가 슬퍼할걸...”부승민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온하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그래, 알겠어.”온하랑은 어
추서윤은 한껏 위축된 표정으로 부승민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그러면서도 울음기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승민아, 난 네가 진짜 나 버리는 줄 알았다고! 왜 이제 왔어...”추서윤의 돌발행동에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부승민은 뒤늦게 천천히 손을 뻗어 추서윤의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부승민의 다정한 음성에 추서윤은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울어댔다.능력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 두 사람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애틋한 부부의 모습이었다.온하랑은 멀지 않은 곳에서 무표정으로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지금 불편한가? 그렇게 불편한 것 같지는 않네.’온하랑이 병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예상하던 상황이었다.그녀는 둘의 다정해 보이는 모습에 자신이 슬픔과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것이라 예상했었다.하지만 정작 예상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녀의 마음은 이상하게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아직도 피가 안 멈추고 있잖아. 우선 의사 불러서 치료부터 받자.”부승민은 다친 추서윤의 손목을 가볍게 쥔 채 고개를 들어 옆에 있던 의사에게 가볍게 눈짓했다.하지만 의사가 가까이 접근하기 시작한 그 순간, 추서윤은 미친 듯이 거부하며 부승민의 등 뒤로 몸을 한껏 움츠리고 외쳤다.“안 꿰맬 거야! 안 꿰맬 거라고! 가까이 오지 마!”의사는 막막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부승민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서윤아, 지혈은 해야지. 안 그럼 너 정말 죽어!”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망울로 부승민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추서윤이 답했다.“네 품에서 죽는 거라면, 난 언제든 환영이야!”“헛소리하지 말랬지!”순식간에 표정을 차갑게 굳힌 부승민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온하랑에게 향했다.부승민의 시선 끝에 닿은 온하랑은 평온한 표정으로 두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