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시, 윌슨 저택.초봄의 아침 안개가 아직 가시지 않아 바람이 쌀쌀했다. 이엘리아는 베이지색 캐시미어 코트의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계단을 내려왔다.“엄마, 오늘 쇼핑하러 가기로 약속하셨잖아요.”이엘리아가 차 키를 흔들며 소파에 앉아 있는 서희수를 바라보았다.서희수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무슨 선물을 사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이렐리아는 그녀와 같이 쇼핑하며 직접 선물을 고르게 하려고 했다.빈센트 윌슨과 연도진의 작전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기에 이엘리아는 곧 필라시를 떠나게 될 예정이었다.전에 서희수가 이 작전을 묵인했던 것은 그때 한창 화가 나 있었던 상태였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지만 이별이 다가오니 마음이 아팠다.이엘리아는 어쨌든 그녀의 친딸이었기 때문이다.앞으로 자주 만나지도 못할 것이며 함께 쇼핑할 기회는 더더욱 없을 것이기에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쇼핑 요청을 받아들였다.“걱정하지 마, 엄마가 너와의 약속은 다 기억하고 있어. 가자.”서희수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이엘리아가 서희수의 팔을 끼며 말했다.“엄마, 어디 가고 싶어요?”“난 상관없어, 네가 정해.”“아니요. 엄마 생일 선물을 사는 거니까 엄마가 고르세요.”서희수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일단 프리 광장에 가자.”“좋아요.”공기가 여전히 쌀쌀한 초봄의 아침, 이엘리아는 어머니 서희수의 팔을 끼고 프리 광장의 돌담길을 걸었다.햇빛이 안개를 뚫고 광장에 비추자 은은한 아침 공기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 같았다.“엄마, 저쪽 꽃가게 보이세요? 새 꽃이 많이 들어온 것 같아요.”이엘리아는 저 멀리 화사하게 꾸며진 꽃가게를 가리키며 눈빛을 반짝였다.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서희수는 꽃가게 창가에 다양한 꽃들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화려한 색상에 생기가 넘치는 꽃들은 진한 향기를 풍겼다.서희가 미소를 지었다.“봄이 왔네, 꽃들이 다 피었구나.”“얼른 가서 봐요.”꽃가게에 들어간 두 사람은 활짝 핀 꽃들에 매료되었다.주변을 둘러본 이엘리아는
“엄마, 이 목걸이가 엄마에게 정말 잘 어울려요.”한마디 감탄한 이엘리아는 조명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서희수의 목에 걸어주었다.점원도 감탄하며 말했다.“윌슨 사모님, 정말 우아하세요. 이 목걸이는 사모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요.”서희수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웃었다.“확실히 괜찮네. 이엘리아, 너 돈이 있어? 부족하면 엄마가 보탤게.”“내가 엄마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엄마의 돈을 쓸 수 있어요?”이엘리아는 점원과 함께 카운터로 가서 카드를 긁었다.2분 후 영수증을 들고 돌아온 이엘리아는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서희수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엄마, 나중에 내가 돈이 부족하면 엄마가 주세요!”딸의 귀여운 모습에 서희수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그래.”보석상을 나온 후, 모녀는 광장에서 계속 산책을 즐겼다. 이엘리아는 어머니의 팔을 꼭 끼고 이 따뜻한 순간을 만끽했다.“엄마, 나 어렸을 때 기억나요? 날 데리고 항상 여기에 놀러 왔잖아요.”추억에 잠긴 듯한 이엘리아의 말에 서희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네가 너무 뛰어다녀서 내가 너를 따라잡지 못했어. 그런데 언제 이렇게 컸대....”이엘리아가 미소를 지었다.“이제는 내가 엄마를 지켜드릴게요. 앞으로도 영원히!”서희수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가에 슬픔이 스쳤다.‘아마... 그런 날은 없을 거야.’이때 갑자기 오토바이의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조심하세요!”빨간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본 이엘리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희수를 밀쳐냈다.그 순간 오토바이가 이엘리아를 강하게 들이받았다.“이엘리아!”밀려 넘어진 서희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이엘리아가 오토바이에 치여 날아가는 것을 목격했다.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서희수는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몸의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딸에게 달려갔다.“이엘리아! 이엘리아! 괜찮니?”떨리는 손으로 딸의 얼굴을 잡은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약 30분 후, 빈센트 윌슨이 수술실 앞에 도착했다.“이엘리아는 어떻게 됐어?”서희수가 고개를 살짝 젓더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모르겠어요. 수술 중이에요.”빈센트 윌슨이 한숨을 쉬며 서희수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오토바이 사고일 뿐이잖아. 이엘리아는 분명히 괜찮을 거야. 경찰서에 CCTV 영상을 요청했어. 누군지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거야!”서희수는 침묵하며 빈센트 윌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당신은 다친 데 없어?”서희수는 그제야 스스로를 돌볼 겨를이 있었다.이엘리아가 그녀를 밀면서 그녀도 바닥에 뒹굴며 넘어졌다.나이가 들어 몸이 약한 서희수는 조금 전 충격으로 허리와 다리에 통증을 느꼈지만 이엘리아의 부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빈센트 윌슨은 서희수의 손바닥에 몇 군데 찰과상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같이 검사받으러 가자.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조심해야 해.”검사 결과,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손으로 땅을 짚었던 충격 때문에 서희수의 왼쪽 팔뚝에 가벼운 골절이 발견되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의사는 서희수의 팔뚝에 깁스를 한 뒤 약을 처방했다.서희수는 간호사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받아 약을 먹은 뒤 다시 수술실 앞으로 갔다.수술실에 켜져 있는 빨간 불 때문에 복도 벽에 긴 그림자가 생겼다.벤치 의자에 앉은 서희수는 왼손은 깁스를 하고 있었고 오른손은 이엘리아가 사고 현장에 떨어뜨린 라벤더 꽃다발을 꼭 쥐고 있었다.꽃잎이 약간 시들었지만 은은한 향기가 여전히 코끝을 맴돌았다.빈센트 윌슨이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집에 가서 좀 쉴래? 내가 여기서 지킬게.”서희수가 고개를 젓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이엘리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서희수는 손에 든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거 알아? 이엘리아는 날 구하다가 차에 치인 거야.”이엘리아의 본능적인 행동은 어떤 생일 선물보다도 소중했다.이엘리아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 저 방금 도착했어요. 이엘리아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요? 상태는 어때요?”“고비는 넘겼어.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관찰 중이야.”빈센트 윌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도착했으면 네 동생 보러 병원에 와. 네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해.”“지금 바로 갈게요. 어머니는 다치신 데 없으세요?”“팔뚝이 골절됐지만 조금 전에 치료받았어.”“어머니 몸도 안 좋으신데... 골절상도 가볍게 보면 안 돼요. 휴식을 잘 취하셔야 해요.”“말해봤지만 네 어머니가 기어코 이엘리아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네.”“의사는 언제쯤이면 깬다고 하던가요?”“두세 시간 정도 있다고 깰 거라고 했는데 여기서 지금 기다린 지 한 시간 반이 되었으니까 곧 깨어날 것 같아.”“그럼 다행이네요.”연도진은 자세한 상황은 병원에 도착한 후 다시 물어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중환자실로 향한 연도진은 유리창 너머로 병상에 누워있는 이엘리아를 바라보았다.조용히 누워있는 그녀는 기기들이 온몸에 연결된 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호흡은 안정적이었다.빈센트 윌슨과 서희수는 VIP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다. 이엘리아가 깨어나면 간호사가 그들에게 알려주겠다고 했다.팔에 깁스를 한 서희수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아버지, 어머니.”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연도진이 낮은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부르자 빈센트 윌슨이 고개를 들어 아들을 보며 끄덕였다.“왔어?”서희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연도진은 어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위로했다.“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요. 이엘리아는 분명 괜찮을 거예요.”고개를 끄덕인 서희수는 손에 쥔 라벤더 꽃다발을 꼭 쥐었다.“어머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이엘리아는 왜 갑자기 사고를 당한 거예요? 어머니는 어떻게 다치신 거예요?”연도진이 빈센트 윌슨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서희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간신히 설명했다.“오토바이가 너무 빨랐어... 이엘리아가 아니었으면 나는...”시선을 내린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자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급히 병상으로 다가가 딸의 손을 살며시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 엄마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 어디 아픈 데 없어?” 이엘리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답했다.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창백한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이마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말하지 말고 푹 쉬어. 엄마가 옆에 있을게.” 곁에 서 있던 빈센트 윌슨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이엘리아, 넌 상처 회복에만 집중해. 사고 낸 놈은 우리가 반드시 찾아낼 거야. 널 이렇게 다치게 해놓고 가만두진 않을 거야.” 이엘리아는 지친 눈빛 속에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잠시 쉬려는 듯했지만 마치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서희수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낮게 중얼거렸다. “이엘리아, 꼭 빨리 회복해야 해. 엄마는 너 없이 살 수 없어...” 빈센트 윌슨은 아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위로했다. “걱정 마. 의사도 이엘리아가 고비는 넘겼다고 했잖아. 이제 푹 쉬기만 하면 금방 나아질 거야.” 서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야.’ 그녀는 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마음속 깊은 죄책감과 미안함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나만 아니었다면 이엘리아가 이렇게까지 다치진 않았을 텐데...’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이엘리아의 숨소리는 점점 안정되더니 어느새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희수와 빈센트 윌슨은 말없이 병상 옆에서 조용히 딸의 곁을 지켰다.ICU 밖에서 연도진은 그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표정만으로 이엘리아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이엘리아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렇게
서희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먼저 집에 가서 좀 쉬고 있을게.” 빈센트 윌슨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들이 떠난 후 연도진은 이엘리아의 수술을 맡은 의사를 찾아가 이엘리아의 진료 기록을 받았다. 기록에는 이엘리아가 두개골 골절, 뇌출혈, 갈비뼈 골절, 내장 출혈 등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과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연도진은 그 자료를 손에 쥐고 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생을 걱정하는 이유로 간호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잘생기고 예의 바를 뿐만 아니라 가족을 걱정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그 덕분에 간호사들은 기꺼이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수술을 마친 후 잠시 휴식을 취한 간호사들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은 이엘리아에게 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간호사는 이엘리아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간호사는 일을 마친 후 물을 마시며 연도진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연도진은 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병원을 떠났다. 그는 이엘리아의 부상이 과장되거나 거짓말이 아님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빈센트 윌슨은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잡혔다는 소식이었다.빈센트 윌슨은 즉시 연도진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서로 가서 상황을 처리하라고 했다.연도진은 그 말이 없어도 오토바이 운전자를 직접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경찰서에 도착한 그는 먼저 사건의 CCTV 영상을 확인했다. 그 지역은 시내 중심에 위치해 있었고 근처에 시청도 있어 모니터링이 잘 되어 있었다. 영상 속 오토바이 운전자는 술에 취해 있었고 사고는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경찰은 이미 그를 구속했고 이제 검사의 기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도진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토
병원에서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병상 옆에 앉아 조용히 딸의 손을 잡고 있었다.이엘리아는 방금 깨어났지만 여전히 창백한 얼굴에 힘없는 목소리로 서희수를 불렀다.“엄마...”의사는 최근 며칠 동안 이엘리아가 자주 잠에 빠질 수 있다고 했었다. 이는 정상적인 반응이라며 특히 뇌를 다친 상태에서 수면은 회복에 중요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이엘리아, 깨어났구나. 괜찮아? 아직도 많이 아파?”서희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파... 온몸이 다 아파요. 너무 힘들어요...”이엘리아는 눈을 감고 괴로워하며 대답했다.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그리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의사도 당장 그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서희수는 눈에 가득 찬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네가 이렇게 다친 건 다 엄마 잘못이야.”어렸을 적 이엘리아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아프다고 울곤 했다. ‘오토바이에 치여 하늘로 날아갔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엄마, 그런 말 하지 마세요.”이엘리아는 서희수를 위로하며 그때서야 서희수의 다른 팔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엄마, 다치셨어요?”“그저 가벼운 골절이야. 별거 아니야. 너야말로 잘 회복해서 몸 건강히 챙겨야 해. 알겠지?”“네...”모녀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이엘리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연도진이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서희수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연도진은 조용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엘리아의 창백한 얼굴을 살펴본 후 고개를 돌려 서희수에게 물었다. “어머니, 이엘리아는 좀 어때요?” 서희수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대답했다. “방금 깨어났는데 상태는 괜찮아 보였어.” “다행이에요.” 연도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이엘리아
“도진아, 그런 뜻이 아니었어...”서희수는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깨닫고 급히 해명했다. “너는 이엘리아에게 정말 잘해주고 있어. 나랑 아버지도 다 알고 있어. 엄마가 괜히 오해했어.”그러나 서희수의 마음은 이미 깊은 죄책감으로 무거워져 있었다. 연도진이 돌아온 후 그는 이엘리아의 수많은 문제를 묵묵히 해결해주었고 강남시에서 이엘리아가 선을 넘었을 때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처벌했지만 최대한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만약 일이 커져 법적 절차까지 갔다면 단순히 구금되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엘리아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아픈 척하며 연도진을 모함했고 연도진은 그런 그녀를 위해 심리 상담사까지 알아봐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엘리아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결탁해 연도진을 가문의 권력 중심에서 밀어내려 했다. 연도진은 이미 오빠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내가 왜 도진이를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지?’연도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눈빛에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감추려는 듯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니, 이엘리아를 떠나보내기 싫으시다면 지금이라도 계획을 멈출 수 있어요.” 그 순간, 서희수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엘리아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교통사고 전에도 노아와 앨리스와 어울리며 연도진을 견제해왔다. 이번에 그녀를 보내지 않는다면 상처가 회복된 후에도 카이사르를 겨냥할 게 분명했다. 심지어 가문의 이익까지 희생시키면서 말이다. 그건 연도진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었다. 이미 구금까지 되었던 상황에서도 이엘리아는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연도진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녀의 성격은 더 이상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외부 환경을 통해 그녀가 해를 끼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엘리아를 보내는 게 가슴이 아픈 건 맞아. 하지만 그 애를 위해서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