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엄마잖아. 내 엄마가 아니라...”이엘리아를 떠올린 부시아는 기분이 가라앉았다.“나도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데... 숙모가 싫어할까 봐 걱정돼.”“엄마가 왜 싫어하겠어?”메이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나는 아빠가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이고 숙모는 내 새엄마거든. 너도 새엄마가 뭔지 알지?”‘신데렐라’ 동화 속 계모를 떠올린 메이슨은 단번에 이해했다.“우리 엄마가 너에게 못되게 굴어?”“그건 아니야. 숙모는 나에게 정말 잘해 주고 나도 숙모를 정말 좋아해. 그래서 더더욱 숙모가 날 싫어할까 봐 무서운 거야...”고민이 가득한 부시아는 턱을 괴고 말했다.“네가 너무 부러워. 나도 숙모 친딸이면 얼마나 좋을까.”누군가의 부러움을 산 게 처음인 메이슨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이 머릿속에 떠올라 과연 본인이 부러움을 살 만한 존재인지 의문이 들었다.“나도 네가 부러워. 건강하게 자랄 수 있고 엄마와 같이 살 수 있잖아. 네 엄마는 누구야?”“음... 어쨌든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아니야. 그러니까 그 얘기는 하지 말자.”메이슨은 순간 자신의 양어머니를 떠올렸다.시아 누나의 친엄마도 어쩌면 양어머니가 자기를 대했던 것처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정심이 들었다.“그런데 넌 그쪽 말을 왜 그렇게 잘해?”시아가 설명했다.“어릴 때 할머니랑 같이 그쪽에서 살았거든.”메이슨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랬구나...”“거기에 내 친구들도 많아. 나중에 시간 되면 아빠에게 물어볼 테니 같이 가자!”메이슨은 반짝이는 눈으로 부시아를 바라보았다.“친구가 많아?”잠시 생각하던 부시아가 말했다.“한... 스무 명 정도?”“와, 엄청 많다!”부시아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네가 여기 며칠 더 있으면 내 친구들도 소개해 줄게!”한편 황은숙이 분유를 타오자 온하랑이 원녕을 안고 분유를 먹였다.김시연이 젖병을 받쳐 주면서 조용히 말했다.“메이슨, 너와 닮은 것 같아. 근데 너와 최동철은 어떻게 된 거야? 빨리 말해봐!”온하랑은 어쩔
필라시, 윌슨 저택.초봄의 아침 안개가 아직 가시지 않아 바람이 쌀쌀했다. 이엘리아는 베이지색 캐시미어 코트의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계단을 내려왔다.“엄마, 오늘 쇼핑하러 가기로 약속하셨잖아요.”이엘리아가 차 키를 흔들며 소파에 앉아 있는 서희수를 바라보았다.서희수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무슨 선물을 사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이렐리아는 그녀와 같이 쇼핑하며 직접 선물을 고르게 하려고 했다.빈센트 윌슨과 연도진의 작전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기에 이엘리아는 곧 필라시를 떠나게 될 예정이었다.전에 서희수가 이 작전을 묵인했던 것은 그때 한창 화가 나 있었던 상태였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지만 이별이 다가오니 마음이 아팠다.이엘리아는 어쨌든 그녀의 친딸이었기 때문이다.앞으로 자주 만나지도 못할 것이며 함께 쇼핑할 기회는 더더욱 없을 것이기에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쇼핑 요청을 받아들였다.“걱정하지 마, 엄마가 너와의 약속은 다 기억하고 있어. 가자.”서희수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이엘리아가 서희수의 팔을 끼며 말했다.“엄마, 어디 가고 싶어요?”“난 상관없어, 네가 정해.”“아니요. 엄마 생일 선물을 사는 거니까 엄마가 고르세요.”서희수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일단 프리 광장에 가자.”“좋아요.”공기가 여전히 쌀쌀한 초봄의 아침, 이엘리아는 어머니 서희수의 팔을 끼고 프리 광장의 돌담길을 걸었다.햇빛이 안개를 뚫고 광장에 비추자 은은한 아침 공기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 같았다.“엄마, 저쪽 꽃가게 보이세요? 새 꽃이 많이 들어온 것 같아요.”이엘리아는 저 멀리 화사하게 꾸며진 꽃가게를 가리키며 눈빛을 반짝였다.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서희수는 꽃가게 창가에 다양한 꽃들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화려한 색상에 생기가 넘치는 꽃들은 진한 향기를 풍겼다.서희가 미소를 지었다.“봄이 왔네, 꽃들이 다 피었구나.”“얼른 가서 봐요.”꽃가게에 들어간 두 사람은 활짝 핀 꽃들에 매료되었다.주변을 둘러본 이엘리아는
“엄마, 이 목걸이가 엄마에게 정말 잘 어울려요.”한마디 감탄한 이엘리아는 조명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서희수의 목에 걸어주었다.점원도 감탄하며 말했다.“윌슨 사모님, 정말 우아하세요. 이 목걸이는 사모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요.”서희수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웃었다.“확실히 괜찮네. 이엘리아, 너 돈이 있어? 부족하면 엄마가 보탤게.”“내가 엄마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엄마의 돈을 쓸 수 있어요?”이엘리아는 점원과 함께 카운터로 가서 카드를 긁었다.2분 후 영수증을 들고 돌아온 이엘리아는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서희수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엄마, 나중에 내가 돈이 부족하면 엄마가 주세요!”딸의 귀여운 모습에 서희수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그래.”보석상을 나온 후, 모녀는 광장에서 계속 산책을 즐겼다. 이엘리아는 어머니의 팔을 꼭 끼고 이 따뜻한 순간을 만끽했다.“엄마, 나 어렸을 때 기억나요? 날 데리고 항상 여기에 놀러 왔잖아요.”추억에 잠긴 듯한 이엘리아의 말에 서희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네가 너무 뛰어다녀서 내가 너를 따라잡지 못했어. 그런데 언제 이렇게 컸대....”이엘리아가 미소를 지었다.“이제는 내가 엄마를 지켜드릴게요. 앞으로도 영원히!”서희수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가에 슬픔이 스쳤다.‘아마... 그런 날은 없을 거야.’이때 갑자기 오토바이의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조심하세요!”빨간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본 이엘리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희수를 밀쳐냈다.그 순간 오토바이가 이엘리아를 강하게 들이받았다.“이엘리아!”밀려 넘어진 서희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이엘리아가 오토바이에 치여 날아가는 것을 목격했다.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서희수는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몸의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딸에게 달려갔다.“이엘리아! 이엘리아! 괜찮니?”떨리는 손으로 딸의 얼굴을 잡은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약 30분 후, 빈센트 윌슨이 수술실 앞에 도착했다.“이엘리아는 어떻게 됐어?”서희수가 고개를 살짝 젓더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모르겠어요. 수술 중이에요.”빈센트 윌슨이 한숨을 쉬며 서희수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오토바이 사고일 뿐이잖아. 이엘리아는 분명히 괜찮을 거야. 경찰서에 CCTV 영상을 요청했어. 누군지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거야!”서희수는 침묵하며 빈센트 윌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당신은 다친 데 없어?”서희수는 그제야 스스로를 돌볼 겨를이 있었다.이엘리아가 그녀를 밀면서 그녀도 바닥에 뒹굴며 넘어졌다.나이가 들어 몸이 약한 서희수는 조금 전 충격으로 허리와 다리에 통증을 느꼈지만 이엘리아의 부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빈센트 윌슨은 서희수의 손바닥에 몇 군데 찰과상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같이 검사받으러 가자.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조심해야 해.”검사 결과,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손으로 땅을 짚었던 충격 때문에 서희수의 왼쪽 팔뚝에 가벼운 골절이 발견되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의사는 서희수의 팔뚝에 깁스를 한 뒤 약을 처방했다.서희수는 간호사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받아 약을 먹은 뒤 다시 수술실 앞으로 갔다.수술실에 켜져 있는 빨간 불 때문에 복도 벽에 긴 그림자가 생겼다.벤치 의자에 앉은 서희수는 왼손은 깁스를 하고 있었고 오른손은 이엘리아가 사고 현장에 떨어뜨린 라벤더 꽃다발을 꼭 쥐고 있었다.꽃잎이 약간 시들었지만 은은한 향기가 여전히 코끝을 맴돌았다.빈센트 윌슨이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집에 가서 좀 쉴래? 내가 여기서 지킬게.”서희수가 고개를 젓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이엘리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서희수는 손에 든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거 알아? 이엘리아는 날 구하다가 차에 치인 거야.”이엘리아의 본능적인 행동은 어떤 생일 선물보다도 소중했다.이엘리아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 저 방금 도착했어요. 이엘리아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요? 상태는 어때요?”“고비는 넘겼어.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관찰 중이야.”빈센트 윌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도착했으면 네 동생 보러 병원에 와. 네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해.”“지금 바로 갈게요. 어머니는 다치신 데 없으세요?”“팔뚝이 골절됐지만 조금 전에 치료받았어.”“어머니 몸도 안 좋으신데... 골절상도 가볍게 보면 안 돼요. 휴식을 잘 취하셔야 해요.”“말해봤지만 네 어머니가 기어코 이엘리아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네.”“의사는 언제쯤이면 깬다고 하던가요?”“두세 시간 정도 있다고 깰 거라고 했는데 여기서 지금 기다린 지 한 시간 반이 되었으니까 곧 깨어날 것 같아.”“그럼 다행이네요.”연도진은 자세한 상황은 병원에 도착한 후 다시 물어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중환자실로 향한 연도진은 유리창 너머로 병상에 누워있는 이엘리아를 바라보았다.조용히 누워있는 그녀는 기기들이 온몸에 연결된 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호흡은 안정적이었다.빈센트 윌슨과 서희수는 VIP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다. 이엘리아가 깨어나면 간호사가 그들에게 알려주겠다고 했다.팔에 깁스를 한 서희수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아버지, 어머니.”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연도진이 낮은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부르자 빈센트 윌슨이 고개를 들어 아들을 보며 끄덕였다.“왔어?”서희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연도진은 어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위로했다.“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요. 이엘리아는 분명 괜찮을 거예요.”고개를 끄덕인 서희수는 손에 쥔 라벤더 꽃다발을 꼭 쥐었다.“어머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이엘리아는 왜 갑자기 사고를 당한 거예요? 어머니는 어떻게 다치신 거예요?”연도진이 빈센트 윌슨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서희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간신히 설명했다.“오토바이가 너무 빨랐어... 이엘리아가 아니었으면 나는...”시선을 내린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자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급히 병상으로 다가가 딸의 손을 살며시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 엄마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 어디 아픈 데 없어?” 이엘리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답했다.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창백한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이마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말하지 말고 푹 쉬어. 엄마가 옆에 있을게.” 곁에 서 있던 빈센트 윌슨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이엘리아, 넌 상처 회복에만 집중해. 사고 낸 놈은 우리가 반드시 찾아낼 거야. 널 이렇게 다치게 해놓고 가만두진 않을 거야.” 이엘리아는 지친 눈빛 속에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잠시 쉬려는 듯했지만 마치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서희수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낮게 중얼거렸다. “이엘리아, 꼭 빨리 회복해야 해. 엄마는 너 없이 살 수 없어...” 빈센트 윌슨은 아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위로했다. “걱정 마. 의사도 이엘리아가 고비는 넘겼다고 했잖아. 이제 푹 쉬기만 하면 금방 나아질 거야.” 서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야.’ 그녀는 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마음속 깊은 죄책감과 미안함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나만 아니었다면 이엘리아가 이렇게까지 다치진 않았을 텐데...’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이엘리아의 숨소리는 점점 안정되더니 어느새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희수와 빈센트 윌슨은 말없이 병상 옆에서 조용히 딸의 곁을 지켰다.ICU 밖에서 연도진은 그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표정만으로 이엘리아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이엘리아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렇게
서희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먼저 집에 가서 좀 쉬고 있을게.” 빈센트 윌슨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들이 떠난 후 연도진은 이엘리아의 수술을 맡은 의사를 찾아가 이엘리아의 진료 기록을 받았다. 기록에는 이엘리아가 두개골 골절, 뇌출혈, 갈비뼈 골절, 내장 출혈 등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과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연도진은 그 자료를 손에 쥐고 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생을 걱정하는 이유로 간호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잘생기고 예의 바를 뿐만 아니라 가족을 걱정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그 덕분에 간호사들은 기꺼이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수술을 마친 후 잠시 휴식을 취한 간호사들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은 이엘리아에게 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간호사는 이엘리아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간호사는 일을 마친 후 물을 마시며 연도진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연도진은 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병원을 떠났다. 그는 이엘리아의 부상이 과장되거나 거짓말이 아님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빈센트 윌슨은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잡혔다는 소식이었다.빈센트 윌슨은 즉시 연도진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서로 가서 상황을 처리하라고 했다.연도진은 그 말이 없어도 오토바이 운전자를 직접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경찰서에 도착한 그는 먼저 사건의 CCTV 영상을 확인했다. 그 지역은 시내 중심에 위치해 있었고 근처에 시청도 있어 모니터링이 잘 되어 있었다. 영상 속 오토바이 운전자는 술에 취해 있었고 사고는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경찰은 이미 그를 구속했고 이제 검사의 기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도진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토
병원에서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병상 옆에 앉아 조용히 딸의 손을 잡고 있었다.이엘리아는 방금 깨어났지만 여전히 창백한 얼굴에 힘없는 목소리로 서희수를 불렀다.“엄마...”의사는 최근 며칠 동안 이엘리아가 자주 잠에 빠질 수 있다고 했었다. 이는 정상적인 반응이라며 특히 뇌를 다친 상태에서 수면은 회복에 중요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이엘리아, 깨어났구나. 괜찮아? 아직도 많이 아파?”서희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파... 온몸이 다 아파요. 너무 힘들어요...”이엘리아는 눈을 감고 괴로워하며 대답했다.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그리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의사도 당장 그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서희수는 눈에 가득 찬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네가 이렇게 다친 건 다 엄마 잘못이야.”어렸을 적 이엘리아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아프다고 울곤 했다. ‘오토바이에 치여 하늘로 날아갔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엄마, 그런 말 하지 마세요.”이엘리아는 서희수를 위로하며 그때서야 서희수의 다른 팔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엄마, 다치셨어요?”“그저 가벼운 골절이야. 별거 아니야. 너야말로 잘 회복해서 몸 건강히 챙겨야 해. 알겠지?”“네...”모녀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이엘리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연도진이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서희수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연도진은 조용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엘리아의 창백한 얼굴을 살펴본 후 고개를 돌려 서희수에게 물었다. “어머니, 이엘리아는 좀 어때요?” 서희수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대답했다. “방금 깨어났는데 상태는 괜찮아 보였어.” “다행이에요.” 연도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이엘리아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
“...”최동철이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자 최국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나중에 말 바꾸지 마.”“당연하죠. 설윤 씨 배속에... 제 동생이 있는 건데.”“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먼저 나가볼게요.”웃으며 방을 나선 최동철은 문을 닫자마자 미소를 싹 지웠다.이어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임가희도 없는 거실을 지나 최동철은 밖으로 나갔다.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차에 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특유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어두운 상사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 대표님?”“네.”...최씨 집안 방.임연지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임가희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고모, 진짜 그년 집에 들일 거예요?”“응.”“하지만!”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임가희는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연지는 그 더러운 내연녀의 얼굴을 집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파렴치하게 최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모가 상간녀가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 연지야.”“일을 좀 더 철저하게 못 한 내 잘못이지. 내가 설윤 그 년한테 도망갈 기회를 준 거야.”임연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고모를 보며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 너도 괜히 시비 걸지 마.”짜증 난다는 듯 대충 대답하던 임연지는 갑자기 무슨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고모, 일단 집에 들이고 그다음에 다시 처리...”“아니, 난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임가희는 임연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럼 진짜 그 년이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애 낳아봤자 재산 조금 받는 것뿐이야. 그런데 난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지는 거잖아.”아직 어린 동림이를 두고 이혼한다면 최씨 집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
필라시 국제공항.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방송에서는 항공편 정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연도진은 도착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 속을 살피며 부승민과 부시아를 찾고 있었다.그는 잘 맞춘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며 여유 있게 서 있었다.잠시 후, 부승민이 짐 수레를 밀고 통로를 지나 나오고 부시아는 짐 수레 위에 앉아 손에 봉제 인형을 안고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린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를 한 채로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삼촌!” 부시아는 멀리서 연도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짐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왔다.연도진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맞아 안았다.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아야, 돌아온 거 환영해.”부시아는 연도진의 품에 안겨 목을 감싸며 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승민은 부시아를 보고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네.’부시아는 혀를 내밀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도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이번에 삼촌이랑 많이 놀자.”부승민은 짐 수레를 밀고 다가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연도진 씨, 오랜만입니다.” 연도진은 일어난 후 부승민과 악수를 나누며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시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연도진은 눈길을 부시아에게 돌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야, 피곤하지 않아?” 부시아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 피곤해요. 비행기에서 만화도 보고 잠도 자고 왔어요.” 연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부승민에게 말했다. “이엘리아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직 병원에 있어요. 시아를 데리고 이엘리아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그
이엘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엘리샤,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벌써 6년이 되었어요. 아가씨.” “6년이라...”이엘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시간 참 빠르네. 처음 왔을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엘리샤는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넌 요 며칠 동안 날 성심껏 돌봐줬잖아. 그 보답으로 네게 아파트 한 채를 선물하려고 해.” 엘리샤는 순간 귀를 의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아치 거리 쪽에 있는 곳이야. 내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당장 처리하긴 어렵지만 퇴원하면 함께 소유권 이전을 하러 가자.” 이엘리아는 엘리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이야.” 엘리샤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어떻게 받아야 할지...”이엘리아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 갖지 마. 내겐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이지만 네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잖아. 난 늘 너한테 감사하고 있었어.” 엘리샤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엘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똑똑한 아이야. 난 항상 널 높이 평가해왔어. 앞으로도 내 곁에서 충성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샤는 감동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평생 윌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