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수는 이엘리아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자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급히 병상으로 다가가 딸의 손을 살며시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 엄마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 어디 아픈 데 없어?” 이엘리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답했다.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창백한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이마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말하지 말고 푹 쉬어. 엄마가 옆에 있을게.” 곁에 서 있던 빈센트 윌슨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이엘리아, 넌 상처 회복에만 집중해. 사고 낸 놈은 우리가 반드시 찾아낼 거야. 널 이렇게 다치게 해놓고 가만두진 않을 거야.” 이엘리아는 지친 눈빛 속에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잠시 쉬려는 듯했지만 마치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서희수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낮게 중얼거렸다. “이엘리아, 꼭 빨리 회복해야 해. 엄마는 너 없이 살 수 없어...” 빈센트 윌슨은 아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위로했다. “걱정 마. 의사도 이엘리아가 고비는 넘겼다고 했잖아. 이제 푹 쉬기만 하면 금방 나아질 거야.” 서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야.’ 그녀는 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마음속 깊은 죄책감과 미안함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나만 아니었다면 이엘리아가 이렇게까지 다치진 않았을 텐데...’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이엘리아의 숨소리는 점점 안정되더니 어느새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희수와 빈센트 윌슨은 말없이 병상 옆에서 조용히 딸의 곁을 지켰다.ICU 밖에서 연도진은 그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표정만으로 이엘리아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이엘리아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렇게
서희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먼저 집에 가서 좀 쉬고 있을게.” 빈센트 윌슨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들이 떠난 후 연도진은 이엘리아의 수술을 맡은 의사를 찾아가 이엘리아의 진료 기록을 받았다. 기록에는 이엘리아가 두개골 골절, 뇌출혈, 갈비뼈 골절, 내장 출혈 등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과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연도진은 그 자료를 손에 쥐고 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생을 걱정하는 이유로 간호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잘생기고 예의 바를 뿐만 아니라 가족을 걱정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그 덕분에 간호사들은 기꺼이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수술을 마친 후 잠시 휴식을 취한 간호사들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은 이엘리아에게 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간호사는 이엘리아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간호사는 일을 마친 후 물을 마시며 연도진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연도진은 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병원을 떠났다. 그는 이엘리아의 부상이 과장되거나 거짓말이 아님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빈센트 윌슨은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잡혔다는 소식이었다.빈센트 윌슨은 즉시 연도진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서로 가서 상황을 처리하라고 했다.연도진은 그 말이 없어도 오토바이 운전자를 직접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경찰서에 도착한 그는 먼저 사건의 CCTV 영상을 확인했다. 그 지역은 시내 중심에 위치해 있었고 근처에 시청도 있어 모니터링이 잘 되어 있었다. 영상 속 오토바이 운전자는 술에 취해 있었고 사고는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경찰은 이미 그를 구속했고 이제 검사의 기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도진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토
병원에서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병상 옆에 앉아 조용히 딸의 손을 잡고 있었다.이엘리아는 방금 깨어났지만 여전히 창백한 얼굴에 힘없는 목소리로 서희수를 불렀다.“엄마...”의사는 최근 며칠 동안 이엘리아가 자주 잠에 빠질 수 있다고 했었다. 이는 정상적인 반응이라며 특히 뇌를 다친 상태에서 수면은 회복에 중요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이엘리아, 깨어났구나. 괜찮아? 아직도 많이 아파?”서희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파... 온몸이 다 아파요. 너무 힘들어요...”이엘리아는 눈을 감고 괴로워하며 대답했다.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그리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의사도 당장 그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서희수는 눈에 가득 찬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네가 이렇게 다친 건 다 엄마 잘못이야.”어렸을 적 이엘리아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아프다고 울곤 했다. ‘오토바이에 치여 하늘로 날아갔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엄마, 그런 말 하지 마세요.”이엘리아는 서희수를 위로하며 그때서야 서희수의 다른 팔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엄마, 다치셨어요?”“그저 가벼운 골절이야. 별거 아니야. 너야말로 잘 회복해서 몸 건강히 챙겨야 해. 알겠지?”“네...”모녀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이엘리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연도진이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서희수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연도진은 조용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엘리아의 창백한 얼굴을 살펴본 후 고개를 돌려 서희수에게 물었다. “어머니, 이엘리아는 좀 어때요?” 서희수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대답했다. “방금 깨어났는데 상태는 괜찮아 보였어.” “다행이에요.” 연도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이엘리아
“도진아, 그런 뜻이 아니었어...”서희수는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깨닫고 급히 해명했다. “너는 이엘리아에게 정말 잘해주고 있어. 나랑 아버지도 다 알고 있어. 엄마가 괜히 오해했어.”그러나 서희수의 마음은 이미 깊은 죄책감으로 무거워져 있었다. 연도진이 돌아온 후 그는 이엘리아의 수많은 문제를 묵묵히 해결해주었고 강남시에서 이엘리아가 선을 넘었을 때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처벌했지만 최대한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만약 일이 커져 법적 절차까지 갔다면 단순히 구금되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엘리아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아픈 척하며 연도진을 모함했고 연도진은 그런 그녀를 위해 심리 상담사까지 알아봐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엘리아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결탁해 연도진을 가문의 권력 중심에서 밀어내려 했다. 연도진은 이미 오빠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내가 왜 도진이를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지?’연도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눈빛에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감추려는 듯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니, 이엘리아를 떠나보내기 싫으시다면 지금이라도 계획을 멈출 수 있어요.” 그 순간, 서희수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엘리아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교통사고 전에도 노아와 앨리스와 어울리며 연도진을 견제해왔다. 이번에 그녀를 보내지 않는다면 상처가 회복된 후에도 카이사르를 겨냥할 게 분명했다. 심지어 가문의 이익까지 희생시키면서 말이다. 그건 연도진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었다. 이미 구금까지 되었던 상황에서도 이엘리아는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연도진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녀의 성격은 더 이상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외부 환경을 통해 그녀가 해를 끼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엘리아를 보내는 게 가슴이 아픈 건 맞아. 하지만 그 애를 위해서
연도진의 표정을 살핀 서희수가 잠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번에 강남시에 오래 있었는데 그 아가씨가 네 정체를 알게 된 거야?” 연도진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몰라요.” 서희수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조용히 웃었다. “정말 잘 숨기고 있구나. 그럼 이번에 돌아온 이유는 뭐라고 했어?” “친구가 어려움에 처해서 도와주러 왔다고 했어요.” 서희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한숨을 쉬었다. “계속 숨길 수는 없잖아. 언젠가는 알게 될 텐데.” 연도진은 잠시 고민하듯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계약이 끝나면 그때 얘기하려고 해요.” “그럼 강남시에 더 오래 머물겠다는 거네? 도진아, 네 아버지도 이제 연세가 있으셔. 가업도 돕고 너의 책임도 많아.” 연도진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잘 조율할 테니 어머니는 걱정하지 마세요.” 서희수는 그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신분을 숨기고 시작한 게 문제였어...” 연도진은 잠시 말을 아끼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장모님은 우리 계약에 대해 전혀 모르세요. 몇 번이나 저에게 강남시에서의 생활에 집중하라고 하셨고 시연이는 외동딸이라 해외로 보내는 걸 절대 원치 않으 실 겁니다.”서희수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너의 장모님은 네가 가족이 없는 줄 알기에 강남시에 머무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네 신분을 알게 되면 부모님이 이곳에 계시니 더 나은 협의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연도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장모님은 시연이에 대한 애착이 강하셔서 제 신분을 알게 되면 오히려 더 반대하실 거예요. 최악의 경우,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할 수도 있죠.” 서희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엘리아와 김시연 사이의 갈등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너의 장모님의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네가
노아는 그 자리에 서서 연도진의 뒷모습이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 어두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손끝으로 책상 위를 무심코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빈센트 윌슨은 말로는 자신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지만 연도진이 돌아오자마자 중요한 프로젝트를 전부 맡긴 사실에 속으로 차가운 웃음이 나왔다. ‘결국 친아들이란 말이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 헛수고가 될 뿐이다. 노아는 주먹을 꽉 쥐며 눈빛 속에서 불만과 분노가 번뜩였다. 다행히도 그는 이미 삼촌의 진짜 속내를 파악했기에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말이 맞아. 연도진을 내보내지 않으면 가문 기업을 장악할 기회는 영원히 내게 오지 않을 거야.’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노아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앨리스는 거실에서 꽃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비싼 기계 손가락을 장착한 상태로 적응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전, 앨리스와 노아는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되었다. 그가 돌아오자 엘리스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일이 잘 안 풀렸어?” 노아는 코트를 벗어 소파에 던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사르가 돌아왔어.” 앨리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꽃가지를 떨어뜨렸다. 끊어진 손가락이 아직도 아픈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잠시 원망의 감정이 스쳤고 곧 허리를 굽혀 꽃가지를 주워 들며 말했다. “그게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억울해서 그래. 카이사르는 돌아오자마자 바로 ‘불사조 테크놀로지’ 프로젝트를 맡았어.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해왔는데 결국 그 친아들보다 못하다는 게 너무 억울해.” “그건 당연하지. 그쪽은 가족이고 너는 그들에겐 남일 뿐이야.” 앨리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엘리아가 그렇게 멍청한데도 회
연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로 다가갔다. “너 차 사고 날 때 내가 딱 돌아오던 참이었어. 걱정 마. 사고 낸 운전사는 이미 잡혔고 경찰이 엄중히 처벌할 거야. 푹 쉬고 빨리 나아.”“고마워요, 오빠.”이엘리아는 고개를 들어 연도진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어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병실 안은 잠시 고요해졌다.이엘리아는 죽을 몇 숟가락 더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불편함을 느끼고 결국 말을 꺼냈다. “그만 먹을래요.”서희수는 그릇 안의 남은 음식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적게 먹은 것 같아. 더 안 먹을래?”이엘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의사 선생님이 지금은 많이 먹지 말고 조금씩 자주 먹으라고 하셨어요.”하인들이 그릇과 식사를 치우고 나가자 병실 안엔 가족 네 명만 남았다.이엘리아는 잠시 연도진을 쳐다보았고 얼굴에는 말을 꺼낼지 말지 망설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결국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서희수는 부드럽게 물었다.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네...”이엘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서희수는 연도진을 잠시 바라보았다.연도진은 일어나 침대 옆으로 다가가며 시선이 이엘리아와 서희수 사이를 한 번 스쳤다. “무슨 일이에요?” “이엘리아가 너한테 할 말이 있대.” 서희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멀어져야 할지 고민했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오빠... 미안해요.” 이엘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모든 힘을 다해 그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 이불을 꽉 쥐고 고개를 숙인 채 연도진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연도진은 잠시 멈칫했다. 이엘리아가 갑자기 사과를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엘리아가 사과한다고?’ 연도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부드럽게 물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이엘리아는
서희수의 눈에 맺힌 눈물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엘리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서희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엘리아, 엄마는 네가 좋은 아이라는 걸 항상 믿었어. 네가 진심으로 고칠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널 지지할 거야.” 이엘리아는 서희수의 품에 기대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감정들이 쏟아지듯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억눌린 죄책감과 후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그녀의 울음 속에서 가족 간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어딘가 따스한 공기가 흐르는 듯했다. 얼마 후 이엘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희수는 하인에게 이엘리아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며 병실을 떠났다. 빈센트 윌슨과 연도진은 회사로 향했고 서희수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주위는 침묵에 쌓였고 오직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의 진심 어린 대화에 여전히 얽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감동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고 이성의 끈이 조금씩 돌아오며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게 되였다. 이엘리아의 사과는 진심처럼 들렸지만 점점 생각할수록 무언가 빠져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엘리아는 김시연을 해친 일, 그리고 연도진을 모함하려 했던 일을 고백했지만 그녀가 회사에 들어가려 했던 일이나 노아와 앨리스와 함께 연도진을 가문에서 내쫓아내려던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모든 계획에 대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눈물로 고백하던 그 모습과 구금된 상황에서 겁먹은 척했던 모습이 떠올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엘리아는 너무나도 뛰어난 연기를 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단지 속이기 위한 술수였는지.서희수는 알 수 없었다. ‘그 감동적이었던 사과,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