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먼저 집에 가서 좀 쉬고 있을게.” 빈센트 윌슨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들이 떠난 후 연도진은 이엘리아의 수술을 맡은 의사를 찾아가 이엘리아의 진료 기록을 받았다. 기록에는 이엘리아가 두개골 골절, 뇌출혈, 갈비뼈 골절, 내장 출혈 등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과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연도진은 그 자료를 손에 쥐고 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생을 걱정하는 이유로 간호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잘생기고 예의 바를 뿐만 아니라 가족을 걱정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그 덕분에 간호사들은 기꺼이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수술을 마친 후 잠시 휴식을 취한 간호사들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은 이엘리아에게 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간호사는 이엘리아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간호사는 일을 마친 후 물을 마시며 연도진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연도진은 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병원을 떠났다. 그는 이엘리아의 부상이 과장되거나 거짓말이 아님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빈센트 윌슨은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잡혔다는 소식이었다.빈센트 윌슨은 즉시 연도진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서로 가서 상황을 처리하라고 했다.연도진은 그 말이 없어도 오토바이 운전자를 직접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경찰서에 도착한 그는 먼저 사건의 CCTV 영상을 확인했다. 그 지역은 시내 중심에 위치해 있었고 근처에 시청도 있어 모니터링이 잘 되어 있었다. 영상 속 오토바이 운전자는 술에 취해 있었고 사고는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경찰은 이미 그를 구속했고 이제 검사의 기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도진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토
병원에서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병상 옆에 앉아 조용히 딸의 손을 잡고 있었다.이엘리아는 방금 깨어났지만 여전히 창백한 얼굴에 힘없는 목소리로 서희수를 불렀다.“엄마...”의사는 최근 며칠 동안 이엘리아가 자주 잠에 빠질 수 있다고 했었다. 이는 정상적인 반응이라며 특히 뇌를 다친 상태에서 수면은 회복에 중요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이엘리아, 깨어났구나. 괜찮아? 아직도 많이 아파?”서희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파... 온몸이 다 아파요. 너무 힘들어요...”이엘리아는 눈을 감고 괴로워하며 대답했다.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그리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의사도 당장 그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서희수는 눈에 가득 찬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네가 이렇게 다친 건 다 엄마 잘못이야.”어렸을 적 이엘리아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아프다고 울곤 했다. ‘오토바이에 치여 하늘로 날아갔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엄마, 그런 말 하지 마세요.”이엘리아는 서희수를 위로하며 그때서야 서희수의 다른 팔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엄마, 다치셨어요?”“그저 가벼운 골절이야. 별거 아니야. 너야말로 잘 회복해서 몸 건강히 챙겨야 해. 알겠지?”“네...”모녀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이엘리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연도진이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서희수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연도진은 조용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엘리아의 창백한 얼굴을 살펴본 후 고개를 돌려 서희수에게 물었다. “어머니, 이엘리아는 좀 어때요?” 서희수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대답했다. “방금 깨어났는데 상태는 괜찮아 보였어.” “다행이에요.” 연도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이엘리아
“도진아, 그런 뜻이 아니었어...”서희수는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깨닫고 급히 해명했다. “너는 이엘리아에게 정말 잘해주고 있어. 나랑 아버지도 다 알고 있어. 엄마가 괜히 오해했어.”그러나 서희수의 마음은 이미 깊은 죄책감으로 무거워져 있었다. 연도진이 돌아온 후 그는 이엘리아의 수많은 문제를 묵묵히 해결해주었고 강남시에서 이엘리아가 선을 넘었을 때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처벌했지만 최대한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만약 일이 커져 법적 절차까지 갔다면 단순히 구금되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엘리아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아픈 척하며 연도진을 모함했고 연도진은 그런 그녀를 위해 심리 상담사까지 알아봐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엘리아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결탁해 연도진을 가문의 권력 중심에서 밀어내려 했다. 연도진은 이미 오빠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내가 왜 도진이를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지?’연도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눈빛에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감추려는 듯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니, 이엘리아를 떠나보내기 싫으시다면 지금이라도 계획을 멈출 수 있어요.” 그 순간, 서희수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엘리아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교통사고 전에도 노아와 앨리스와 어울리며 연도진을 견제해왔다. 이번에 그녀를 보내지 않는다면 상처가 회복된 후에도 카이사르를 겨냥할 게 분명했다. 심지어 가문의 이익까지 희생시키면서 말이다. 그건 연도진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었다. 이미 구금까지 되었던 상황에서도 이엘리아는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연도진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녀의 성격은 더 이상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외부 환경을 통해 그녀가 해를 끼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엘리아를 보내는 게 가슴이 아픈 건 맞아. 하지만 그 애를 위해서
연도진의 표정을 살핀 서희수가 잠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번에 강남시에 오래 있었는데 그 아가씨가 네 정체를 알게 된 거야?” 연도진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몰라요.” 서희수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조용히 웃었다. “정말 잘 숨기고 있구나. 그럼 이번에 돌아온 이유는 뭐라고 했어?” “친구가 어려움에 처해서 도와주러 왔다고 했어요.” 서희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한숨을 쉬었다. “계속 숨길 수는 없잖아. 언젠가는 알게 될 텐데.” 연도진은 잠시 고민하듯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계약이 끝나면 그때 얘기하려고 해요.” “그럼 강남시에 더 오래 머물겠다는 거네? 도진아, 네 아버지도 이제 연세가 있으셔. 가업도 돕고 너의 책임도 많아.” 연도진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잘 조율할 테니 어머니는 걱정하지 마세요.” 서희수는 그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신분을 숨기고 시작한 게 문제였어...” 연도진은 잠시 말을 아끼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장모님은 우리 계약에 대해 전혀 모르세요. 몇 번이나 저에게 강남시에서의 생활에 집중하라고 하셨고 시연이는 외동딸이라 해외로 보내는 걸 절대 원치 않으 실 겁니다.”서희수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너의 장모님은 네가 가족이 없는 줄 알기에 강남시에 머무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네 신분을 알게 되면 부모님이 이곳에 계시니 더 나은 협의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연도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장모님은 시연이에 대한 애착이 강하셔서 제 신분을 알게 되면 오히려 더 반대하실 거예요. 최악의 경우,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할 수도 있죠.” 서희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엘리아와 김시연 사이의 갈등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너의 장모님의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네가
노아는 그 자리에 서서 연도진의 뒷모습이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 어두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손끝으로 책상 위를 무심코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빈센트 윌슨은 말로는 자신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지만 연도진이 돌아오자마자 중요한 프로젝트를 전부 맡긴 사실에 속으로 차가운 웃음이 나왔다. ‘결국 친아들이란 말이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 헛수고가 될 뿐이다. 노아는 주먹을 꽉 쥐며 눈빛 속에서 불만과 분노가 번뜩였다. 다행히도 그는 이미 삼촌의 진짜 속내를 파악했기에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말이 맞아. 연도진을 내보내지 않으면 가문 기업을 장악할 기회는 영원히 내게 오지 않을 거야.’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노아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앨리스는 거실에서 꽃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비싼 기계 손가락을 장착한 상태로 적응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전, 앨리스와 노아는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되었다. 그가 돌아오자 엘리스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일이 잘 안 풀렸어?” 노아는 코트를 벗어 소파에 던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사르가 돌아왔어.” 앨리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꽃가지를 떨어뜨렸다. 끊어진 손가락이 아직도 아픈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잠시 원망의 감정이 스쳤고 곧 허리를 굽혀 꽃가지를 주워 들며 말했다. “그게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억울해서 그래. 카이사르는 돌아오자마자 바로 ‘불사조 테크놀로지’ 프로젝트를 맡았어.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해왔는데 결국 그 친아들보다 못하다는 게 너무 억울해.” “그건 당연하지. 그쪽은 가족이고 너는 그들에겐 남일 뿐이야.” 앨리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엘리아가 그렇게 멍청한데도 회
연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로 다가갔다. “너 차 사고 날 때 내가 딱 돌아오던 참이었어. 걱정 마. 사고 낸 운전사는 이미 잡혔고 경찰이 엄중히 처벌할 거야. 푹 쉬고 빨리 나아.”“고마워요, 오빠.”이엘리아는 고개를 들어 연도진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어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병실 안은 잠시 고요해졌다.이엘리아는 죽을 몇 숟가락 더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불편함을 느끼고 결국 말을 꺼냈다. “그만 먹을래요.”서희수는 그릇 안의 남은 음식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적게 먹은 것 같아. 더 안 먹을래?”이엘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의사 선생님이 지금은 많이 먹지 말고 조금씩 자주 먹으라고 하셨어요.”하인들이 그릇과 식사를 치우고 나가자 병실 안엔 가족 네 명만 남았다.이엘리아는 잠시 연도진을 쳐다보았고 얼굴에는 말을 꺼낼지 말지 망설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결국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서희수는 부드럽게 물었다.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네...”이엘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서희수는 연도진을 잠시 바라보았다.연도진은 일어나 침대 옆으로 다가가며 시선이 이엘리아와 서희수 사이를 한 번 스쳤다. “무슨 일이에요?” “이엘리아가 너한테 할 말이 있대.” 서희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멀어져야 할지 고민했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오빠... 미안해요.” 이엘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모든 힘을 다해 그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 이불을 꽉 쥐고 고개를 숙인 채 연도진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연도진은 잠시 멈칫했다. 이엘리아가 갑자기 사과를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엘리아가 사과한다고?’ 연도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부드럽게 물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이엘리아는
서희수의 눈에 맺힌 눈물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엘리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서희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엘리아, 엄마는 네가 좋은 아이라는 걸 항상 믿었어. 네가 진심으로 고칠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널 지지할 거야.” 이엘리아는 서희수의 품에 기대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감정들이 쏟아지듯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억눌린 죄책감과 후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그녀의 울음 속에서 가족 간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어딘가 따스한 공기가 흐르는 듯했다. 얼마 후 이엘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희수는 하인에게 이엘리아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며 병실을 떠났다. 빈센트 윌슨과 연도진은 회사로 향했고 서희수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주위는 침묵에 쌓였고 오직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의 진심 어린 대화에 여전히 얽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감동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고 이성의 끈이 조금씩 돌아오며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게 되였다. 이엘리아의 사과는 진심처럼 들렸지만 점점 생각할수록 무언가 빠져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엘리아는 김시연을 해친 일, 그리고 연도진을 모함하려 했던 일을 고백했지만 그녀가 회사에 들어가려 했던 일이나 노아와 앨리스와 함께 연도진을 가문에서 내쫓아내려던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모든 계획에 대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눈물로 고백하던 그 모습과 구금된 상황에서 겁먹은 척했던 모습이 떠올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엘리아는 너무나도 뛰어난 연기를 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단지 속이기 위한 술수였는지.서희수는 알 수 없었다. ‘그 감동적이었던 사과,
앨리스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지더니 기계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적응 중이야. 원래 손처럼 자유롭진 않지만 최소한 간단한 일은 할 수 있어. 그나마 나은 편이지. 그보다 네 상황이 더 걱정돼.”이엘리아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이전보다는 한결 나아 보였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 의사도 잘 쉬면 금방 회복될 거라고 했어.”“다행이네.”앨리스는 이엘리아를 직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케이사르가 돌아왔어. 만나 봤지?”연도진의 말이 나오자 이엘리아는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며 눈빛에는 깊은 냉기가 서렸다. “만났어.”“그래?” 앨리스는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며 물었다. “내가 듣기로 네가 그 사람에게 사과했다던데?”이엘리아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걸 믿었어? 내가 그럴 리 없잖아.”앨리스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케이사르가 김시연 때문에 널 그렇게 오래 감금했는데 화해라니. 말도 안 되지.”이엘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케이사르의 귀환은 오히려 우리 계획을 실행하기에 완벽한 기회야. 난 그저 그 사람을 방심시키고 경계를 풀게 하려고 했을 뿐이야.”“하지만 지금 넌 병원에 있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이엘리아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직접 움직일 수 없지만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앨리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엘리아, 우리가 직접 나서긴 어려워. 모두가 노아와 케이사르가 경쟁 관계라는 걸 알고 있잖아. 만약 케이사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노아가 가장 먼저 의심받게 될 거야. 이 일을 끝낼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아무도 널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이엘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최소 한 달은 병원에 있어야 해. 퇴원하더라도 아빠가
최동철의 입술이 설윤의 쇄골을 스쳤다. “아무도 모를 거야.”“그만해요. 저... 임신 중이에요. 안 돼요.”“알아.”“회장님은 최동림 공부 봐주시러 가셨으니까 곧 돌아오실 거예요.”“아버지는 오늘 서재에서 밤새 일할 거야.”“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계속 방에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문 잠갔어. 그리고 다들 내가 방해받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그럼 어떻게 나왔어요?”“테라스로.”설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조용히 말했다. “흔적 남기지 않게 조심해요.”“응.”잠시 후, 최동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윤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빠르게 손을 닦아내고 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창문과 테라스 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켰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치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옷을 단정히 여민 최동철이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간다.”“잠깐만요.” 설윤이 그의 팔을 잡았다. 최동철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그 순간, 설윤은 커다란 종이티슈 덩어리를 그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최동철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당신 거예요. 가져가세요. 회장님이 보면 제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동철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윤은 그가 창문을 넘어 테라스로 이동하는 걸 지켜봤다. 본가의 방들은 각자 테라스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최동철의 방은 설윤의 방 바로 옆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빈 객실 하나만 두고 가까운 편이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설윤은 곧장 방을 점검했다. 이상한 흔적은 없는지, 냄새가 남아 있지 않은지. 모든 걸 확인한 뒤에야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편, 최동철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종이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책상 앞으로 갔다. “똑똑.”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하려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최동철은
그녀는 어딘가 쑥스러운 듯 손끝으로 옷자락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붉어진 귀 끝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민박에 머무는 며칠 동안 그들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날 밤이 너무 격정적이어서 그럴 겨를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둘 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최동철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고정하더니 혀끝으로 어금니를 굴리며 낮게 물었다. “내 거야?” 설윤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네.”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최동철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감정을 지운 듯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네가 임 여사한테 쫓겨나기 전부터 이미 임신했다고 하던데?” 설윤의 손끝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가희가 절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먼저 덫을 놓았어요.” 임가희의 수법은 너무나도 조악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유나영이 임가희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반대로 그녀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만약 다움시에서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최동철이 천천히 물었다. “낙태 수술 기록이라도 위조해서 아버지한테 가서 울었겠지?” “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임신할 줄은 몰랐다. 최국환에게 보낸 자료에는 임신 9주 차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5주 남짓이었다. 최동철은 낮게 웃었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니까 네 원래 계획대로라면 결국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거네. 돈이 필요해서 그랬다면서 왜 내 제안은 거절했던 거야?” ‘이 인간은 아직도 그걸 따지고 있는 거야?’설윤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등을 꼿꼿이 세우고 발끝을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요.”그녀는 조용히 숨을
최동림이 이렇게 쉬운 문제조차 풀지 못하는 걸 보자 최국환은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 아들은 원해부터 몸이 약했고 공부에서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몸이 약하니 학업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한 거겠지.’그렇게 스스로 납득한 후 차분하게 문제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최동림은 금세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제 알겠어요! 아빠, 감사합니다.” 사실 그는 이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랬다. 이렇게 하면 아빠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최국환은 한 번만 듣고도 문제를 이해하는 아들이 기특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모르는 문제 있으면 언제든 아빠한테 물어보렴.” “네!” 최동림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설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불을 켜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강하게 벽으로 밀쳤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거친 손이 빠르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딸깍.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천장의 조명이 켜지며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환히 밝혔다. 설윤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빛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리고 마침애 눈앞의 인물을 또렷이 마주했다. 최동철. 그는 문 앞에 서서 한쪽 손으로 그녀를 벽에 가둔 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한 달 만에 봤다고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낮고 서늘한 목소리. “설마요.” 설윤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우고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신데요. 최 대표님?” 최동철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탐색하는 듯한 어딘가 날카로운 시선. 설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불안했다. 그녀는 눈길을 피하며 자
최씨 가문의 저녁 식탁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최동철은 식탁 한쪽에 앉아 냉랭한 표정으로 조용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몇 번 음식을 집어 들었을 뿐 내내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설윤을 스쳤다. 눈빛에는 차가움과 은근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고 설윤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시 최국환에게 시선을 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여보, 집안 아주머니 손맛이 정말 좋아요. 너무 마음에 드네요.”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바로 준비하게 할 테니까.” 최국환은 그렇게 말하며 직접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덜어 주었다. “고마워요. 여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연지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설윤이 일부러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며 사랑스러운 아내인 척하는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임연지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손에 쥔 젓가락을 부러질 것처럼 꽉 쥐었다. 혹여나 자신의 표정에서 감정이 드러날까 봐 애써 고개를 숙이고 밥만 떠넣었지만 도무지 목구멍을 넘어가질 않았다. 최동림 역시 그녀 옆에서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도 가끔 설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곁에 앉은 임가희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없이 진정시키려 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먼저 나서서 공용 젓가락으로 설윤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거 한번 먹어봐. 아주머니가 제일 잘하는 요리야.” “고마워요. 언니.” 설윤은 미소를 띠며 음식을 한입 가져갔다. “정말 맛있네요.” 최국환은 식탁의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먹어. 이제 둘이서 먹는 거니까 영양도 충분히 챙겨야지.” 설윤은 살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여보도 많이 드세요.” ‘우웩!’ 임연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저 귀에 거슬리는 ‘여보’
‘뭐야. 저 여자 또 시작이네.’ 설윤은 체리를 입에 넣고 씨를 가볍게 뱉은 뒤 애교 섞인 목소리로 최국환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고마워요. 최 회장님.” “아직도 최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최국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설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옆에 앉아 있는 임가희를 흘끗 쳐다봤다. 그러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여보, 더 먹고 싶어요.” ‘우웩!’ 눈앞에서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자 임연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그리고 고모부... 저 역겨운 느끼한 미소는 또 뭐야?’ 오늘 오후, 최국환은 직접 설윤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러니까 임연지의 고모인 임가희는 설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설윤도 눈치가 있었는지 임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 후, 임가희는 집안의 가정부들을 모두 불러 모아 설윤을 가족의 일원으로 소개하며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라고 당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연지는 억울함과 불쾌함을 꾹 참고 어쩔 수 없이 설윤에게 좋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진짜 토할 것 같아.’ 더 있다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할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은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뒤 설윤도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위해 최국환이 따로 가정부까지 붙여주었고 집안일은 손끝 하나 대지 않도록 했다. 설윤은 그저 편하게 지내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한동안 방에서 쉬던 그녀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거실로 내려왔다. 그러다 계단을 내려오던 도중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은 최국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최동철. 설윤의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갔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우아한 걸음으로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 한
최동철은 김지환의 말을 듣자마자 문서를 거칠게 덮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김지환을 향했다. 싸늘한 눈빛이 그대로 박혀들었다. “설윤 씨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네가 해야 할 일만 신경 써. 나머지는 간섭하지 말고.”그 차가운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김지환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경솔했습니다.”“됐어. 나가.”“예.”김지환은 속으로 싸늘한 긴장감을 느끼며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히는 순간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안만 했을 뿐 직접 나서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설윤 씨가 임신한 지 3개월도 채 안 됐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처리할 생각이지?’ ‘그냥 아이가 태어나는 걸 지켜볼 셈인가?’ 어젯밤, 최동철이 설윤의 주소를 조사하라고 했을 때 김지환은 최동철이 직접 그녀를 만나 겁을 주고 이후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후에도 최동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해 봤자 의미 없었다. 김지환은 잠시 머릿속에서 이 일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요즘 회사 일이 많아 최동철은 매일 야근했고 김지환 역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대표님이 정시 퇴근을 하시네?’김지환은 놀라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졌다. 비서실 내부에도 한층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회사 로비.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는 최동철을 본 김지환은 재빠르게 다가가 노트북을 받아들었다. 그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대표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네요. 메이슨 도련님 보러 가시는 건가요? 정말 좋은 아버지세요.”그 말에 최동철이 순간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강남시에서 돌아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