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부선월은 칼을 몸에 지니고 쇼핑몰 구석에 숨어 있었으며 또한 그 많은 행인 속에서 임가희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는 점은 그 당시 그녀의 의식은 아주 뚜렷했으며 자신의 행동을 식별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따라서 박사 선생은 블로거의 동영상에서 부선월의 행위는 정신 질병 환자의 자신 행동을 식별 및 통제하지 못한다는 두 가지 특징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만일 부선월이 범행 당시 제정신이었다면 응당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동영상 결말에 그는 대중들이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정신 질병 환자에 대한 올바른 사법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네티즌들에게 여론에 휩쓸리지 말고 인내성 있게 기다려 달라고 호소했으며 사법 감정위원회에서 정확하고 공정한 감정 결과를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 동영상에 나오는 박사 선생님은 발음이 똑똑하고 조리가 분명했으며 이론과 실천을 결합했으며 입장이 객관적이고 공정하였기에 신속히 네티즌들의 지지를 받아 엄청 높은 인기를 끌고 있었다.[박사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결과를 기다리며 줄을 서지 않습니다. 요즘 이슈를 너무나 많이 봐서 정신이 없어요.][진짜 희극적이야, 연예계의 가십보다 더 재밌어.][내가 생각했던 대로 부선월은 진짜 정신 질병이 있는 것 같았지만 범행 당시 발병하지 않았으며 CCTV의 영상을 보면 부선월이 칼을 들고 곧장 임가희한테 달려드는 걸 봐서는 분명히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쉿, 장 박사님 담양이 대단하십니다. 감히 이런 상황에서 나서다니요.][며칠만 더 기다려 보고 감정 결과가 장 박사님과 같은 결론이라면 몰라도 만일 부선월이 발병한 상황에서 저지른 범행으로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 나면 나는 반드시 그 무슨 쓰레기위원회를 확 고소할 거야!][위층에서 돌진할 때 저도 데려가 주세요.][장 용사님, 용맹하시지만 사고 치면 혼자 감당할 수 있나요?][...]이 영상도 많은 사람이 리
사건이 터진 지 보름이 지나서였는지 아니면 극단적 언론으로 여론의 방향을 이끌던 고용 네티즌들의 대규모 철거한 것 때문인지 온라인의 분위기는 예전보다 많이 이성적이었다.[보름 동안 단 한 번도 줄 선 적이 없어요. 제 생각에는 근본적인 문제는 법률규정 자체인 것 같네요. 이 법률규정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나 다 행여나 해서 한 번씩 시도해보려고 할 테니깐요. 제가 보기에는 이 법률규정을 폐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앞으로 누구도 틈을 타려 하지 못하니깐요.][정신 질병 발병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면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규정의 폐지를 지지해요.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하며 정신병 환자가 사람을 다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혹시 부승민이 돈으로 해결하려다 사태가 점점 커지고 전문 박사까지 나와서 분석을 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으니 역반응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서 타협한 건 아닐까요?][진작에 사법 감정 결과를 기다려달라고 얘기했건만 부승민이 사법 감정을 신청하자마자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감정 결과는 무조건 부선월이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던 광대들은 지금 다 어디로 사라졌나요?][이건 설마 돈을 쓰고 해결하려다 실패한 건가요?][위층의 친구, 혹시 부승민은 돈 주고 해결하려는 생각은 아예 한 적이 없고 그냥 신청해서 테스트하는 건 아닐까?? 부선월 자체가 정신질환이 있으니 사법 감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당시 발병상태인지 아닌지를 장담할 수 없으니.][당신도 너무 순진해. 자본가를 참 착하게도 생각해.][어쨌든 당신보다는 착해요, 부승민은 방금 수백억을 기부했어. 부씨 그룹은 줄곧 자선 프로젝트를 운영해왔어. 당신처럼 인터넷에서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지는 않아요.][여전히 그 말이에요. 결론이 나기 전에 무단 추측은 삼가세요. 사법 감정위원회에 ‘좋아요'를 눌러주세요.][제 생각에는 그래도 네티즌들의 감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이곳에 누군가가 범행을 저질렀지만, 집에 돈도 아주 많고 권세도 있으니 정
“...”“이 사람은 이미 비밀리에 구속되었어요. 이 일을 눌러야 다음 절차로 순조롭게 넘어갈 수 있어요.”유 주임은 화제를 살짝 돌리면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부 대표님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세요?”“유 주임은 혹시 제가 그 감정원에게 뇌물을 줬을 거로 생각하시는 건가요?”유 주임을 바라보는 부승민의 눈빛은 평온했으며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유 주임은 아주 진지하게 그의 표정을 주시했지만, 그 어떤 긴장을 느끼는 내색도 보아내지 못했다. 그토록 태연자약했기에 유 주임은 자신이 부승민을 모함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아니요, 전 그런 뜻이 아닙니다.”유 주임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웃으면서 말했다.“저는 그냥 궁금해서요. 부 대표님 말고는 또 누가 범죄 용의자가 처벌을 면하길 바랄까요?”“누구든 상관없어요. 저만 아니면 되니깐요. 사법의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는 건 전 국민이 다 아는 도리입니다. 저는 절대로 손에 쥔 권력으로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유 주임은 부승민의 정의로운 표정을 보면서 속으로 탄복했다. 역시 부승민은 뛰어난 청년기업가였다. 이 심리소질은 보통 사람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누가 했든 간에 절대 승인할 리 만무하지요.”“유 주임님, 반대로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누구나 다 제가 용의자의 가족으로 사법 감정을 신청한 걸 알고 있어요. 뇌물을 받은 일이 탄로 나면 저의 혐의가 제일 클 것이 아닙니까?”“이건 장담할 수 없지요. 부 대표님의 담양이 커서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을 거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죠.”“전 종래로 너무 모험적인 배팅은 하지 않아요. 여론이 들끓고 있는 이 대목에 그 감정원이 뇌물을 받고 감정 결과를 좌우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셨나요?”무슨 일이 일어날까?수선 먼저 감정 결과가 부선월이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로 나온다면 필연코 네티즌들의 반발을 일으킬 것이었다.이때 감정원 중 누군가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면 증거 따위
경주에서 그와 원한을 가진 사람은 최씨 가문과 그와 관계가 있는 강씨 가문, 오씨 가문 정도뿐이다. 이번 일은 오씨 가문과 전혀 관계가 없다. 임가희는 특히나 부선월이 법적 처벌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녀가 감정 결과에 개입할까 봐 걱정되어 서둘러 여론을 이용해 그녀에게 압박을 가하려 했다. 그렇다면 이 함정을 놓은 사람은 임가희가 아닐 것이다. 강씨 가문은 얼마 전 큰 손상을 입었기에 단기간 내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강씨 가문도 아니고 결국 최동철 혼자다. 그가 부선월을 증오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년간 원망하며 살아온 최동철은 복수를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부승민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계획이 성공하게 되면 부씨 가문은 힘을 잃어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하게 되고 그 후에는 정신병원에 있는 부선월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정말 교활한 계획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부승민은 몸을 뒤로 기댄 채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최동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수화기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부승민?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다니, 무슨 일이야?” “감정 위원들을 매수한 거, 네가 한 짓이지?” 부승민의 목소리는 차갑고 평온했다. 감정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전화 너머 최동철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야? 감정 위원을 매수했다고? 나는 그런 일 몰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최동철은 감정 결과가 예상과 달리 발표되자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보아하니 위원회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고 감정 위원들은 이미 비밀리에 억제된 상태였다. 다행히도 최동철은 그들과는 직접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부승민이 설치한 덫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가 뭘 했는지 너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나?” 부승민의 말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비밀리에 감정 위원을 매수하고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여론을 반발시키며 누군가가 뇌물
최동철의 복수심은 부선월의 죽음으로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부승민이 한 번 물러서면 최동철은 더 큰 요구를 할 것이다. 최동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부승민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강 여사님은 결혼 생활 중 불행했고 출산 후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부선월이 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최국환이야말로 가장 큰 원흉이었다. 당시 강씨 가문은 부선월에게 책임을 물을 기회가 있었지만 이들은 이익을 교환하기로 했다. 부씨 가문은 일부 이익을 양보하고 부선월은 강제로 해외로 보내져 인생을 허비했다. 그로 인해 피폐해지고 미쳐버린 그녀도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지금 최동철이 이를 빌미로 다시 부씨 가문을 겨냥하는데 부승민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때, 살짝 열려 있던 문에서 두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리며 연 비서가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부 대표님, 최국환 씨가 최근 자주 이사회 멤버들을 초대해 회식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움직이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부승민은 살짝 눈썹을 올리며 연 비서에게 더 말해보라고 신호를 보냈다. 연 비서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최국환 씨는 이사들을 설득해 새로운 제안을 지지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확실한 건 이 제안은 회사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합니다.” 부승민은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국환은 이미 반 은퇴 상태여서 중요한 결정을 제외하고는 리우 그룹의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지. 그런데 갑자기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는 건 그룹의 정점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계획일 수도 있어.” 연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부 대표님, 혹시나 해서 저희도 뭔가 준비를 해야 할까요?” 부승민은 창문 앞으로 걸어가 창밖의 화려한 도시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최국환이 이번에 의도하는 건 부씨 가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최동철을 내쫓
그의 목소리는 친숙했다. 마치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친구처럼. 부승민은 찻잔을 받으며 그대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찻잔에 뜨거운 김이 오르자 그는 그 위에 살짝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셨다. 커피 향이 풍기고 맛은 진하고 부드러웠다. 확실히 최고급 커피였다.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메이슨은?” “위층에 있어. 선생님께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 최동철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서두르지 마. 아홉 시에 내려오라고 내가 이미 말해놨으니까. 자, 커피나 마셔.” 부승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내리깔고 다시 커피잔을 들어 천천히 음미했다. 거실 안은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고 그런 미묘한 순간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 평화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그 사이에는 어딘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부승민의 휴대폰이 진동하며 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그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메시지는 연 비서가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첨단 연구소의 멤버 및 그들의 가족에 관한 자료들을 대표님의 이메일로 발송했습니다. 부총괄 이사인 이 박사님이 대표님의 의도를 알고 있으며 면담을 원합니다.] 부승민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휴대폰을 조용히 주머니에 넣고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사회가 있다. 첨단 연구소는 업계의 최고봉으로 엘리트들이 많고 이익 분배가 불균형하다. 외부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언제든지 누군가는 떠날 것이다. 만약 그곳의 핵심 인물들을 부씨 가문로 끌어올 수 있다면 최씨 가문에 큰 타격을 주는 동시에 부씨 가문은 막대한 기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최동철이 먼저 농담 식으로 입을 열었다. “커피에 독이라도 탔으면 어쩔 뻔했냐?” “독이라니, 걱정하지 마. 넌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부승민은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침내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한 작은 그림자가 2층의 계단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 받은 정보대로 그는 시아보다 몇 센티미터 정도 작은 키에 당시 비서가 부승민에게 준 사진보다 훨씬 더 나아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오며 긴장한 표정으로 거실을 살폈다. 부승민에게 몇 초간 시선을 두고 두려운 듯 고개를 숙인 채 어색하게 최동철의 옆으로 걸어갔다. 최동철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가 긴장할 필요 없다고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메이슨, 저기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봐. 아빠랑 닮지 않았니?” 메이슨은 그 말을 듣고 저절로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은 부승민 삼촌이야. 너를 보려고 온 거야.” “안녕, 메이슨.” 부승민은 부드럽게 인사하며 목소리를 친근하게 낮췄다. “만나서 반가워.” 모국어가 낯선 곳에서 들릴 때 그만큼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다. 메이슨은 여전히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대담하게 대답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삼촌.” 부승민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 나는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휴대용 게임기를 꺼내 메이슨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너에게 준 선물이야.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 메이슨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조금 궁금해하며 그 물건을 살펴보았다. 옆집의 마이크가 비슷한 걸 가지고 있던 걸 봤지만 이게 같은 것인지는 몰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최동철을 쳐다보았다. “삼촌이 선물을 줬잖아. 삼촌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최동철은 부드럽게 이끌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삼촌.” 메이슨은 낮게 대답했다. 그는 게임기를 받아들고 호기심에 차서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부승민은 그를 지켜보며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그냥 즐겁게 놀았으면 좋겠어.” 그는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도 봤으니 이제 방해하지 않겠어. 기회가 되면 다시 보자.” 최동철은 시계를
별장을 떠나 차 뒷좌석에 앉은 뒤, 부승민은 기사에게 호텔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연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리고 적당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만날 수 있도록 해.] 몇 분 뒤, 연 비서가 답장했다. [부총괄님께서 오늘 밤 시간이 있다고 하십니다. 8시에 제가 직접 호텔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사람을 빼내는 일은 절대로 대놓고 할 수 없다. [호텔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아산로 별장으로 가자.] 그곳은 부승민의 경주에 있는 집이었지만 자주 살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연 비서는 메시지를 보내며 덧붙였다. [메일은 꼭 확인하세요.] 부승민은 답장하지 않고 온하랑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 “부승민?” 온하랑의 목소리가 들렸고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마치 방금 운동을 마친 듯한 느낌이었다. “하랑아, 뭐 하고 있었어?” “요가 하고 있었어요...” 온하랑은 숨을 고르며 불평했다. “몇 동작도 안 했는데 땀이 쏟아져서 너무 힘들어요. 진짜 저 너무 약해요.” “내가 한 달만 더 쉬라고 하지 않았어? 왜 며칠만 더 쉬지 않았어?” “괜찮아요, 아주머니한테 물어봤어요. 간단한 운동은 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온하랑은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말했다.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못 봤는데 나 안 보고 싶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해요.” “방금 최동철한테 다녀왔어.” 부승민의 목소리가 전화기 속에서 좀 더 낮고 진지하게 들렸다. “메이슨을 만났어.” 온하랑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 아이 지금 어때요?” 공항에서 영상 통화로 봤을 때 메이슨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번 한 달 동안, 최동철은 자주 메이슨의 상태를 보고하고 사진도 몇 장 찍어 보냈지만 직접 만나본 적은 없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괜찮아. 이 한 달 동안 최동철이 잘 돌본 게 보였어. 키는 좀 작고 마른 편이
“동림아, 네가 임 여사님을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어머니는 스스로 잘 해결하실 거야.” 최동림은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엄마의 태도가 이상했다. 친구네 아빠가 바람을 피웠을 때 친구 엄마는 크게 분노하고 난리를 쳤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적도 있다. 아내가 남편의 내연녀를 공격하는 영상 그리고 그 영상 아래 달린 수많은 댓글. ‘저런 여자들은 가만두면 안 돼.’ ‘원래 저런 건 맞아야 정신 차리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연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는 너무도 평온했다. 심지어 그 여자, 설윤에게까지 온화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형, 그런데 엄마는 왜 그러시는 거야?” “너한테는 아직 좀 어려운 얘기야. 그냥 엄마 말 잘 따르기만 하면 돼.” “나도 알고 싶어. 형, 알려줘.” 최동림은 형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이의 눈빛은 맑고 어렸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단순한 호기심만이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최동철은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림아, 너 이익이 뭔지 알아?” “알지. 돈!”최동림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최동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꼭 돈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사람과의 관계, 사업 기회, 사회적 지위, 더 나은 생활. 이 모든 게 다 이익이 될 수 있어.”“음...” 최동림은 이해가 되는 듯 안 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최동철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정략결혼도 결국 이익과 이익이 맞물린 관계야.” “정략결혼?”“그래. 두 집안이 서로 협력하면서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맺는 거지. 남자가 신분이 낮다면 여자 집안의 도움을 받아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도 있고 반대로 여자가 남자의 배경 덕을 볼 수도 있어.”“임 여사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더 나은 생활을 했고 더 많은 인맥과 사회적 지위를 얻었어.”“그게 바로 결혼이 임 여사님에게 가져다준 이익이야.” 최동림은 조금 헷갈린
“형이야 당연히 막아보려고 했지. 하지만...”최동철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소용없었어. 아버지가 결정한 일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그리고...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아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최국환은 언제나 강하고 존경할 만한 존재였다. 그런데 형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그건 혹시 설윤 아줌마가 아버지를 유혹한 거 아닐까요?”“유혹?”최동철은 피식 웃으며 동생을 내려다봤다. “유혹이라는 단어 뜻은 제대로 알고 쓰는 거야?” “들었어요. 아빠 같은 사람한테는 붙으려는 여자가 많대요. 그러니까 설윤 아줌마도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최동림은 사립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학비가 비싼 만큼 친구들도 하나같이 부잣집 자식들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집안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다른 여자와 가정을 차린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안도했다. ‘우리 집은 달라.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니까.’하지만 지금 그 믿음이 완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동림아, 형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대단한 사람이요.” 최동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이는 존경 어린 눈빛으로 형을 바라봤다. 그들은 나이 차가 많아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형에 대한 동경은 항상 있었다.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이 형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형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새삼 깨닫곤 했다. 형이 해외 명문대에 진학할 때도 집안 도움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합격했고 지금도 모든 걸 스스로 해내고 있었다. “외모로 보면 형이랑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잘생겼어?” “당연히 형이죠.” ‘아빠는 이미 늙었으니까.’ “몸매는?” “그것도 당연히 형이죠.” “재산은?” 최동림은 이번엔 조금 고민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더 많겠지만... 형도 결코 부족하지
최동철의 입술이 설윤의 쇄골을 스쳤다. “아무도 모를 거야.”“그만해요. 저... 임신 중이에요. 안 돼요.”“알아.”“회장님은 최동림 공부 봐주시러 가셨으니까 곧 돌아오실 거예요.”“아버지는 오늘 서재에서 밤새 일할 거야.”“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계속 방에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문 잠갔어. 그리고 다들 내가 방해받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그럼 어떻게 나왔어요?”“테라스로.”설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조용히 말했다. “흔적 남기지 않게 조심해요.”“응.”잠시 후, 최동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윤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빠르게 손을 닦아내고 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창문과 테라스 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켰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치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옷을 단정히 여민 최동철이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간다.”“잠깐만요.” 설윤이 그의 팔을 잡았다. 최동철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그 순간, 설윤은 커다란 종이티슈 덩어리를 그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최동철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당신 거예요. 가져가세요. 회장님이 보면 제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동철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윤은 그가 창문을 넘어 테라스로 이동하는 걸 지켜봤다. 본가의 방들은 각자 테라스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최동철의 방은 설윤의 방 바로 옆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빈 객실 하나만 두고 가까운 편이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설윤은 곧장 방을 점검했다. 이상한 흔적은 없는지, 냄새가 남아 있지 않은지. 모든 걸 확인한 뒤에야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편, 최동철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종이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책상 앞으로 갔다. “똑똑.”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하려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최동철은
그녀는 어딘가 쑥스러운 듯 손끝으로 옷자락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붉어진 귀 끝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민박에 머무는 며칠 동안 그들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날 밤이 너무 격정적이어서 그럴 겨를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둘 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최동철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고정하더니 혀끝으로 어금니를 굴리며 낮게 물었다. “내 거야?” 설윤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네.”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최동철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감정을 지운 듯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네가 임 여사한테 쫓겨나기 전부터 이미 임신했다고 하던데?” 설윤의 손끝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가희가 절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먼저 덫을 놓았어요.” 임가희의 수법은 너무나도 조악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유나영이 임가희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반대로 그녀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만약 다움시에서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최동철이 천천히 물었다. “낙태 수술 기록이라도 위조해서 아버지한테 가서 울었겠지?” “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임신할 줄은 몰랐다. 최국환에게 보낸 자료에는 임신 9주 차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5주 남짓이었다. 최동철은 낮게 웃었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니까 네 원래 계획대로라면 결국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거네. 돈이 필요해서 그랬다면서 왜 내 제안은 거절했던 거야?” ‘이 인간은 아직도 그걸 따지고 있는 거야?’설윤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등을 꼿꼿이 세우고 발끝을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요.”그녀는 조용히 숨을
최동림이 이렇게 쉬운 문제조차 풀지 못하는 걸 보자 최국환은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 아들은 원해부터 몸이 약했고 공부에서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몸이 약하니 학업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한 거겠지.’그렇게 스스로 납득한 후 차분하게 문제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최동림은 금세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제 알겠어요! 아빠, 감사합니다.” 사실 그는 이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랬다. 이렇게 하면 아빠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최국환은 한 번만 듣고도 문제를 이해하는 아들이 기특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모르는 문제 있으면 언제든 아빠한테 물어보렴.” “네!” 최동림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설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불을 켜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강하게 벽으로 밀쳤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거친 손이 빠르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딸깍.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천장의 조명이 켜지며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환히 밝혔다. 설윤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빛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리고 마침애 눈앞의 인물을 또렷이 마주했다. 최동철. 그는 문 앞에 서서 한쪽 손으로 그녀를 벽에 가둔 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한 달 만에 봤다고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낮고 서늘한 목소리. “설마요.” 설윤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우고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신데요. 최 대표님?” 최동철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탐색하는 듯한 어딘가 날카로운 시선. 설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불안했다. 그녀는 눈길을 피하며 자
최씨 가문의 저녁 식탁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최동철은 식탁 한쪽에 앉아 냉랭한 표정으로 조용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몇 번 음식을 집어 들었을 뿐 내내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설윤을 스쳤다. 눈빛에는 차가움과 은근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고 설윤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시 최국환에게 시선을 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여보, 집안 아주머니 손맛이 정말 좋아요. 너무 마음에 드네요.”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바로 준비하게 할 테니까.” 최국환은 그렇게 말하며 직접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덜어 주었다. “고마워요. 여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연지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설윤이 일부러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며 사랑스러운 아내인 척하는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임연지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손에 쥔 젓가락을 부러질 것처럼 꽉 쥐었다. 혹여나 자신의 표정에서 감정이 드러날까 봐 애써 고개를 숙이고 밥만 떠넣었지만 도무지 목구멍을 넘어가질 않았다. 최동림 역시 그녀 옆에서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도 가끔 설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곁에 앉은 임가희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없이 진정시키려 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먼저 나서서 공용 젓가락으로 설윤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거 한번 먹어봐. 아주머니가 제일 잘하는 요리야.” “고마워요. 언니.” 설윤은 미소를 띠며 음식을 한입 가져갔다. “정말 맛있네요.” 최국환은 식탁의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먹어. 이제 둘이서 먹는 거니까 영양도 충분히 챙겨야지.” 설윤은 살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여보도 많이 드세요.” ‘우웩!’ 임연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저 귀에 거슬리는 ‘여보’
‘뭐야. 저 여자 또 시작이네.’ 설윤은 체리를 입에 넣고 씨를 가볍게 뱉은 뒤 애교 섞인 목소리로 최국환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고마워요. 최 회장님.” “아직도 최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최국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설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옆에 앉아 있는 임가희를 흘끗 쳐다봤다. 그러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여보, 더 먹고 싶어요.” ‘우웩!’ 눈앞에서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자 임연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그리고 고모부... 저 역겨운 느끼한 미소는 또 뭐야?’ 오늘 오후, 최국환은 직접 설윤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러니까 임연지의 고모인 임가희는 설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설윤도 눈치가 있었는지 임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 후, 임가희는 집안의 가정부들을 모두 불러 모아 설윤을 가족의 일원으로 소개하며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라고 당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연지는 억울함과 불쾌함을 꾹 참고 어쩔 수 없이 설윤에게 좋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진짜 토할 것 같아.’ 더 있다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할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은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뒤 설윤도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위해 최국환이 따로 가정부까지 붙여주었고 집안일은 손끝 하나 대지 않도록 했다. 설윤은 그저 편하게 지내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한동안 방에서 쉬던 그녀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거실로 내려왔다. 그러다 계단을 내려오던 도중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은 최국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최동철. 설윤의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갔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우아한 걸음으로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 한
최동철은 김지환의 말을 듣자마자 문서를 거칠게 덮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김지환을 향했다. 싸늘한 눈빛이 그대로 박혀들었다. “설윤 씨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네가 해야 할 일만 신경 써. 나머지는 간섭하지 말고.”그 차가운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김지환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경솔했습니다.”“됐어. 나가.”“예.”김지환은 속으로 싸늘한 긴장감을 느끼며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히는 순간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안만 했을 뿐 직접 나서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설윤 씨가 임신한 지 3개월도 채 안 됐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처리할 생각이지?’ ‘그냥 아이가 태어나는 걸 지켜볼 셈인가?’ 어젯밤, 최동철이 설윤의 주소를 조사하라고 했을 때 김지환은 최동철이 직접 그녀를 만나 겁을 주고 이후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후에도 최동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해 봤자 의미 없었다. 김지환은 잠시 머릿속에서 이 일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요즘 회사 일이 많아 최동철은 매일 야근했고 김지환 역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대표님이 정시 퇴근을 하시네?’김지환은 놀라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졌다. 비서실 내부에도 한층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회사 로비.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는 최동철을 본 김지환은 재빠르게 다가가 노트북을 받아들었다. 그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대표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네요. 메이슨 도련님 보러 가시는 건가요? 정말 좋은 아버지세요.”그 말에 최동철이 순간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강남시에서 돌아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