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한숨을 쉬었다. “하랑아, 너무 걱정하지 마. 최동철이 메이슨을 잘 돌보고 있는 것 같아.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냥 자연스럽게 천천히 다가가보는 건 어때?” 부승민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항상 너의 곁에서 응원할 거야.” “네, 고마워요. 잘 생각해 볼게요.” 전화를 끊고 부승민은 차 시트에 기대어 여유롭게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최동철의 말을 온하랑에게 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얘기하고 싶으면 직접 하라지.’ 온하랑은 폰을 내려놓고 물을 마신 뒤 아주머니가 가르쳐 준 요가 동작을 이어서 연습했다. 그런데 요가 매트에 누워 몇 분 되지 않아 또 다시 전화가 울렸다. 휴대폰을 들어 확인해 보니 최동철의 전화였다. 그녀는 궁금해서 전화를 받았다. “동철 씨?” “하랑아, 네 휴식 방해하지 않았지?” 최동철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그 속에는 걱정 섞인 진심이 묻어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메이슨과 관련된 거예요?” “응, 너 지금 몸은 어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괜찮아요, 최근에 조리 끝나고 회복 중이에요.” “그렇구나. 사실 최근 메이슨이 나와 점점 더 친해지는데 며칠 전에 나한테 물었어. 다른 아이들은 다 부모님이 있는데 왜 자기는 아빠만 있냐고. 나도 좀 난처했어. 그래서 최대한 달래주려고 했지. 네가 곧 오게 될 거라고 말해줬어.” 최동철은 잠시 웃으며 말했다. “만약 네가 오기 힘들다면 내가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갈까 해. 요즘 집에서 선생님과 공부하고 있는데 좀 지루할 거 같아서 기회 되면 나가볼 생각이야.” 애초에 최동철은 부승민이 그의 말을 전해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얘기하는 걸 선택했다. 온하랑은 잠시 고민했다. “혹시 어려운 점이 있어?” 최동철은 즉시 덧붙였다. “걱정 마, 메이슨은 비록 몸이 약하지만 그동안 겪은 일들 덕분에 굉장히 똑똑하고 이른 나이에 성숙해졌어. 너와
온하랑은 비행기 예매 앱을 열고 내일 오전에 경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몇 가지 요가 동작을 마친 뒤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을 다 챙긴 후 온하랑은 비행기 티켓을 캡처해서 부승민에게 보냈다.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 그 의미를 알 것이다. 몇 분 후, 부승민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일 공항에 널 데리러 갈게.] 그녀는 메시지를 보고 따뜻한 기분이 들었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그가 물었다. [생각을 좀 해봤어요. 메이슨은 제 아이니까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좀 더 빨리 만나서 제가 그 아이를 버린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부승민은 자신도 어렸을 때 어머니 없이 자랐기 때문에 온하랑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우리 함께 가자.] 일정을 확정한 후 온하랑은 메이슨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은 반드시 진심이 담겨 있고 의미가 있어야 했다. 그녀는 메이슨이 자주 사용하고 선물을 볼 때마다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고민 끝에 여러 온라인 추천을 살펴본 후 그녀는 메이슨에게 스마트 로봇을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인터넷에서 여러 인기 제품을 비교한 뒤 온하랑은 음성 상호작용, 학습 도우미, 오락 기능, 생활 동반 기능을 갖춘 스마트 로봇을 선택했다. 이 로봇은 아이가 공부와 생활을 할 때 동반자가 되어주며 상호작용 게임을 통해 아이의 흥미를 유도할 수 있었다. 메이슨처럼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에게는 아주 유용할 것이다. 게다가 이 로봇은 아이가 어른에게 말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이 브랜드의 로봇은 경주에 있어 온하랑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로봇을 픽업하기로 예약했다. 그 외의 준비물은 경주에 도착한 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날 오전, 온하랑은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
어떻게 도와줄지는 말을 안 해도 이미 알 것 같았다. “먼저 호텔로 가요.” 온하랑은 에둘러 거절했다. ‘이 대낮에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다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너 로봇 픽업도 가야 된다며?” “조금 참을 수 있어요.” “그냥 내가 도와줄게. 여기 시내와 거리가 있어.” 부승민은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지만 눈 밑은 까맣고 눈빛이 타올랐다. “뒷좌석으로 가. 칸막이가 있어.” 말을 마친 후 그는 깊은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본 뒤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고 차에 탔다. 온하랑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몇 초 후, 보조석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같은 쪽의 뒷좌석 문도 열리고 다시 닫혔다. 칸막이가 올라가면서 뒷좌석은 하나의 독립적인 작은 공간으로 나뉘었다. 밀폐된 공간은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이 칸막이는 부승민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차가 넓어도 차실 공간이 그렇게 큰 건 아니었다. 게다가 칸막이가 하나 더 설치되니 공간은 더욱 좁아졌다. 이번에는 예상치 못하게 그 칸막이가 필요하게 되었다. 온하랑의 넓은 가슴을 보자 부승민의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아 이마를 맞대고 그녀를 바라봤다. 온하랑은 잠시 몸을 뒤척였지만 곧 저항을 포기했다. “하랑아, 나 너무 보고 싶었어. 너도 나 보고 싶었어?” 부승민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온하랑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부승민의 가슴에 닿아 있었고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 강한 심장소리는 그녀에게 묘한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부승민의 손은 온하랑의 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움직임은 상냥하고 섬세했다. 그는 온하랑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이내 머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그가 경주에 온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고 그동안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루에 한 번, 가끔 이틀에 한 번씩. 그는 온하랑이 감정 결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게 자신
차가 천천히 청림 별장의 정문 앞에 멈췄고 온하랑과 부승민은 차에서 내렸다. 별장 내부는 우아하고 푸릇푸릇 한 자연이 가득하며 공기는 신선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온하랑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곧 있을 만남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부승민은 그녀의 옆에 서서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도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부승민은 선물을 문을 연 도우미에게 건네주었고 두 사람은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최동철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최동철은 온하랑을 몇 번 쳐다본 후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랑아, 얼굴이 좋아 보이네. 환영해.” 온하랑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철 씨, 오랜만이에요.” 최동철은 부승민을 바라봤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하랑아, 뭐 마실래?” “뜨거운 물이면 돼요.” “이건 메이슨을 위한 선물인가?” 최동철은 바닥에 놓인 종이 상자를 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네.” 온하랑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XX 가게의 신상 로봇이에요. 시간이 촉박해서 이걸로 먼저 골랐어요. 메이슨이 좋아하면 좋겠어요.” “로봇? 나는 생각도 못 했네. 역시 하랑이 세심하네.” 그때 도우미가 뜨거운 물과 과일을 가지고 왔다. “동성 씨, 이제 그만 칭찬하세요. 메이슨을 그렇게 잘 돌봐줬는데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해요.” “말만 하지 말고 물이나 마셔.” 부승민은 목을 가다듬고 물컵을 들며 그녀에게 건넸다. “네.” 온하랑은 물컵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 “메이슨은요?” “지금쯤은 위층 방에서 놀고 있을 거야.” 최동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평소에는 선생님이 함께 있어. 놀이와 교육을 병행하면서 중간에 쉬는 시간도 가져. 전에 메이슨을 데리고 동네 한 바퀴 돌아보려고 했는데 좀 꺼려 하고 거실이나
“잘했어.” 온하랑은 메이슨이 아직 꽤 긴장한 걸 눈치채고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메이슨, 엄마가 로봇을 사 왔어. 내려가서 같이 볼래?” ‘로봇?’ 메이슨의 눈이 반짝이며 최동철을 올려다보았다. 최동철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엄마.” 메이슨은 고개를 들고 부끄러운 듯 살짝 웃었다.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은 참 다루기 쉬운 것 같다. 온하랑은 메이슨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 메이슨과 비슷한 크기의 종이 상자 앞에 섰다. “자, 로봇은 여기 안에 있어. 같이 열어볼까?” “엄청 크네요.” 메이슨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만약 마이크가 자기가 이렇게 큰 로봇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면 분명히 부러워할 거다. 상자를 열자 로봇은 폼에 싸여 있었고 본체와 몇 가지 부속품 설명서와 보증서 등이 들어 있었다. 부승민이 다가가려는 찰나 최동철이 한발 앞서서 로봇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온하랑은 설명서를 꺼내며 영어와 한국어 두 가지 버전으로 된 걸 펼쳤다. 영어 버전을 열어 두 사람 앞에 놓고 하나의 부속품을 꺼내 메이슨에게 설명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로봇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로봇이 완성되자 온하랑은 전원을 켰다. 로봇의 화면에 만화 스타일의 작은 얼굴이 나타났고 큰 눈이 반짝이며 정말 귀여운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로봇 01입니다. 당신을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말할 때마다 화면 속 작은 입이 오물오물 움직이며 마치 실제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메이슨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번졌다. 온하랑은 설정을 찾아 기본 언어를 영어로 바꿨다. “메이슨, 이제 이 로봇과 대화해 볼래?” 메이슨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 메이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최동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이슨은 고개를 떨구고 어색하게 말했다. “밥 먹었어?” 말하고 나서 그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귀가 붉어졌다. 로봇 0
아이는 온하랑의 손을 꼭 잡았다. 반짝이는 눈에는 기대감을 지닌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엄마... 안 가면 안 돼요?”부승민은 이 말을 듣고 최동철을 올려다보았다.온하랑은 마음이 약해져서 쪼그려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메이슨...”일을 떼자마자 최동철이 말을 끊었다.“하랑아, 이번에는 경주에 얼마 있을 예정이야?”“일주일 정도 있을 거예요.”“다른 급한 일은 없어?”“네.”“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한 주 동안 여기서 살아. 마침 메이슨과 시간도 많이 보낼 수 있잖아?”온하랑이 대답하기도 전이 부승민이 거절했다.“안돼.”최동철은 미간을 치켜들었다. 부승민은 그를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최동철은 웃음을 짓더니 부승민의 어깨를 툭툭 쳤다.“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걱정하지 마. 오늘 나는 여기에 있지 않을 거야. 여기 방이 많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함께 남아도 돼.”말하여 그는 온하랑을 쳐다보았다.“하랑아, 생각해 봐. 여기는 호텔보다 훨씬 편할 거야.”“...”부승민은 표정이 어두워졌다.온하랑이 말했다.“동철 씨가 저녁에 여기 있지 않는다면 아줌마만 남아서 메이슨과 함께 있는 거예요?”“그리고 선생님이랑 집사도 있어.”최동철이 설명했다.“나는 평소에 시 중심에 살고 있어. 회사랑 가까워. 청림 별장은 환경이 좋지만 멀어서 불편해.”“엄마, 여기 남으면 안 돼요?”메이슨은 온하랑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메이슨을 보러 온 것이기에 여기서 묵으면 훨씬 편리했다.메이슨은 눈을 반짝이며 찬란한 웃음을 지었다.최동철은 의미심장하게 부승민을 한번 보더니 웃었다.“시간이 늦었는데 저녁을 준비하라고 할게.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가서 짐을 갖고 와.”“네.”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돼요.”“번거롭지 않아.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최동철은 아줌마한테 저녁을 준비하라고 하고
하지만 최동철은 메이슨이 너무 많이 먹지 못하게 했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온하랑은 호텔로 가서 짐을 가져오겠다고 했다.최동철은 기사에게 그녀를 데려다주라고 했다.부승민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하면 돼.”최동철은 웃어 보이고는 온하랑을 보며 말했다.“그럼 좀 이따 봐.”“이따가 봐요.”차에 돌아가서 온하랑은 안전띠를 착용했다.부승민은 의자에 기대 입술을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하랑은 고개를 까딱하며 그를 쳐다보더니 그의 허리를 쿡 찌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부승민은 눈을 축 늘어뜨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그는 그녀와 갈라지기 싫었다. 그는 최동철이 간사하다고 탓할 수밖에 없었다.“진짜?”온하랑은 별로 믿지 않았다.“나랑 함께 와서 있어도 돼.”부승민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너무 멀어서 불편해. 마음 놓고 여기 있어. 시간 나면 보러 올게.”“사건은 변호사가 있잖아?”“회사 일이야.”어젯밤에 그는 부총괄과 만났었고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사무실에는 부승민의 사람들과 팀이 있었다. 만약 회사를 옮긴다면 반드시 그들과 함께 나와야 할 것이다.이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좋은 일에는 늘 방해가 있기 마련이다.“저 사람한테 멀리 떨어져 있는 거 잊지 마.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고.”이렇게 말하고 부승민은 작게 콧방귀를 꼈다.“‘동철 씨’하고 정말 다정하게 부르던데.”온하랑은 그가 질투하는 것을 알고 덥석 그의 손을 잡고 달랬다.“겉으로 그러는 척하는 거지. 메이슨 앞에서 우리는 사이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잖아.”부승민은 멈칫했지만, 이 점은 외면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바로 화제를 돌려 고개를 숙여서 힐끔 보았다.“부풀었어?”“?”그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던 온하랑은 그를 째려보았다. 따뜻한 보일러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부풀어도 안 돼...”“왜?”온하랑은 핸드폰을 꺼내 황은숙이 보낸 메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 미아 선생님은 메이슨을 데리고 남쪽 꽃밭에서 산책하고 장난치고 있었다.남쪽 꽃밭에는 어린이 시설을 몇 개 설치하였는데 미끄럼틀과 그네 등이 있었다.빌트 마을의 어린이집에도 이런 시설들이 있었다. 매일 쓰레기를 주울 때 메이슨은 여기를 지나가게 되는데 난간을 통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이웃인 마크도 있었다.메이슨은 무척 부러워했다.메이슨도 어린이집에 다니고 싶어 했다. 아이들과 함께 미끄럼틀과 시소와 그네를 놀고 싶어 했다.메이슨은 ‘아빠, 엄마’한테 얘기를 했지만 크게 혼났었다.메이슨이 난간에 다가갈 때면 안에 있는 어린이들은 싫어하는 티를 내며 그를 쫓아내고는 했었다.지금 메이슨은 자신의 미끄럼틀을 가지게 되었다.처음 며칠간 메이슨은 관심을 보이는 듯했지만 몇 번 타고나니 흥미가 떨어졌다.산책하고 난 후, 미아 선생님은 메이슨과 함께 게임을 했고 가끔 최동철도 함께했다.다만 오늘은 온하랑도 있었고 로봇 01도 있었다.오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메이슨은 온하랑과 많이 친해졌지만, 온하랑을 마주할 때 메이슨은 살짝 긴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이슨은 미아 선생님과 더 친했다.예전에 겪었던 일들로 하여 메이슨에게는 자주 화를 내고 욕을 퍼붓지 않도록 감정 기복이 크지 않는 부모가 필요했다.온하랑은 억지로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고 열심히 메이슨과 함께 놀아주면서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과 습관에 대해 관찰했다.그녀는 메이슨에게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인간관계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기꺼이 충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메이슨에게 그런 공간을 제공할 생각이었다.게임을 하면서 온하랑은 넌지시 물었다.“메이슨은 나가서 논 적이 있어요? 아니면 계속 별장에 있는 거예요?”미아가 대답했다.“한번 밖에 나간 적이 없어요. 동철 씨가 데리고 나갔는데 평소에는 동철 씨가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어요.”미아는 그저 선생님일 뿐이기에 메이슨과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