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원파크힐.부승민은 통유리 창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자동차가 시야에 들어오자 부승민은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거실을 빠져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마침 연도진도 중앙 잠금장치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부승민은 곧바로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어 부시아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삼촌.”부시아는 엉덩이를 한쪽으로 빼며 부승민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하지만 아이의 노력이 무색하게 부승민은 부시아를 안아 들자마자 엉덩이를 한 대 내리쳤다.“힝...”부시아는 서러운 표정으로 부승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왜 때려요, 삼촌?”부승민은 아이를 흘겨보더니 차 문을 닫으며 말했다.“왜일 것 같아?”부시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부승민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넌 집에 들어가서 보자.”말을 마친 부승민이 연도진을 바라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오늘 같은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네요.”연도진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저 차창만 내린 채 말했다.“다음엔 연락 드릴게요. 그럼 저는 따로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아야, 안녕.”“외삼촌, 잘 가요.”부승민은 부시아를 안고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부시아는 부승민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연도진의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거실로 들어서자 부시아가 몸을 비틀며 말했다.“삼촌, 이제 저 내려주세요.”하지만 부시아는 아이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는 소파에 앉더니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부시아의 엉덩이를 두 번 내리쳤다.당황한 부승민이 울음을 터뜨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만 치는 것처럼 우렁차게 울어댔다.“흐아앙, 삼촌...”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서러웠다.“뭘 잘못했는지는 알겠어? 다음에 또 혼자 막 돌아다닐 거야?!”부승민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저... 저 혼자 어디 안 돌아다녔어요...”부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자 아이의 엉덩이에 또 두 대의 매가 떨어졌다.아이가 입술을 삐죽이며 상황을 살
“다음부턴 어딜 가든, 누구랑 있든 다 아빠랑 숙모 아니면 도우미 할머니한테 얘기해.”“네.”“그래, 이제 이리 와서 앉아봐.”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던 부승민은 부시아에게 손짓했다.“외할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셨어? 잘 해주셨어?”“외할아버지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부시아는 호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부승민에게 흔들어 보였다.“외할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셨어요.”“벌써 매수당한 거야?”부승민이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어떻게 그래요?”부승민의 말을 들은 부시아가 까치발을 들고는 웃는 얼굴로 애교를 부렸다.“전 절대 다른 사람한테 안 넘어가요. 아빠가 짱이에요! 근데 뭐라도 뜯어낼 게 있으면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죠!”부승민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어린아이의 코를 꼬집었다.“이 욕심쟁이 같으니.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따로 뭐라고 하셨어?”부승민은 윌슨이 강남에 온 이유가 단지 부시아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부시아는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슬쩍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외할아버지께서 아빠랑 얘기해보라고 하신 게 있었어요. 며칠 뒤면 저를 필라로 데려가서 외할머니도 만나고 거기서 잠깐 지내고 싶으시대요.”잠깐 지낸다니?아예 못 돌아오게 하려는 게 아니고?“넌 가고 싶어?”부승민의 질문에 부시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외할아버지가 아주 잘 대해준 것은 맞지만 어쨌든 한 번밖에 못 만나본 사람이고 필라도 부시아에게는 낯선 곳이었다. 차라리 삼촌 곁에 남아 유치원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게 부시아에게는 훨씬 행복했다.“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돼. 아빠가 여기 있잖아.”부승민이 화제를 전환했다.“저녁은 먹었어?”“먹었어요.”“그럼 얼른 숙모한테 전화 드려. 아직도 너 걱정하고 있을 거야.”“네.”부시아가 깡충깡충 뛰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부승민은 휴대폰을 꺼내 연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도진이 전화를 받자마자 부승민은 다른 말을 다 생략하고 본론부터 바로 얘기했다.
연도진은 윌슨의 비하 섞인 말에도 아무런 동요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이런 이유로 저를 부르신 거라면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네 여동생 풀어줘라. 그럼 내가 이엘리아 데리고 바로 필라로 돌아갈 테니까.”윌슨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연도진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말했다.“그건 안됩니다. 이 사건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 것도 외삼촌 체면 살려드린 거고, 지금 당장 이엘리아 석방 시키고 싶으시다면 외삼촌한테 직접 얘기하세요.”“이놈이...”연도진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윌슨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차 문을 열고 올라탄 연도진은 바로 시동을 거는 대신 먼저 김시연에게 전화를 걸어 몇 마디 당부했다. 최근 며칠 동안은 꼭 조심하고, 절대 혼자 외출하지 말고, 어딜 가든 꼭 매니저와 함께 다니라는 말을 전했다.김시연은 연도진의 말에 호기심이 발동했다.“왜? 무슨 일 있어?”연도진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이엘리아 아버지가 강남으로 왔어.”“이엘리아 아빠가 나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돼?”“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는 게 좋잖아.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할지 아무도 예측을 못 하니까 조심해야지.”연도진이 대답했다.예전부터 이엘리아가 괴롭혀왔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윌슨은 그런 일에 신경을 쓴 적이 전혀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엘리아가 처음으로 처벌을 받고 구치소로 들어갔다. 그러니 연도진은 윌슨이 혹시라도 김시연에게 보복하려 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다.게다가 윌슨은 이미 자신과 김시연의 관계를 알고 일부러 앞에서 언급까지 했으니 연도진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알았어, 조심할게.”김시연은 연도진이 이미 이엘리아의 가족을 알고 있는 만큼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경고하는 것도 단순한 우려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엘리아의 가족 모두가 앙갚음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연도진이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당부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김시연이 또다시 불평을 늘어놓았다.“오늘 오후에 집
김시연은 어쩌면 이엘리아의 아버지에게 약간의 염치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의 딸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의식을 하고 자신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모델의 메이크업이 끝나자 김시연은 모델에게 먼저 촬영장으로 가라고 지시하고는 화장실로 향했다.여자 화장실의 문턱을 막 넘어서는 순간, 그녀는 곁눈질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예전의 기억 때문에 겁을 먹어버린 김시연은 곧장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누군가 김시연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입을 가로막고는 김시연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목덜미를 맞는 순간, 김시연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기절해버렸다.얼마나 지났을까. 김시연이 눈을 떴다.눈앞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하지만 김시연은 곧바로 자신이 어두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몸은 밧줄로 꽁꽁 묶여있었고 두 손도 뒤로 묶여있었다.김시연은 자신이 어디로 끌려왔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떤 강한 바람이 자신의 귀를 스치며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것을 느꼈다.10월의 강남에는 아직 더운 기운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지금 그녀를 감싸는 가을바람은 시원함을 넘어 차가움까지 느껴졌다. 그 때문에 김시연은 약간의 추위를 느꼈다.이런 바람은 도시에서 거의 느낄 수 없었다.아마도 지금 자신은 외곽 지역에 있는 것 같았다.김시연은 누군가에게 틈을 내어줄 정도로 방심해버린 게 후회되었다.이번... 이번에도 연도진이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까?김시연의 마음은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 찼다.이엘리아의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까지 뺏으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것은 확신할 수 없었다.어쩌면 김시연의 팔이나 다리를 잘라버릴지도 모른다.그런 모습을 상상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김시연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깼어?”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눌한 한국어 발음을 들어보니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 같았다.김시연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누구세요?”“내
눈이 가려지니 온몸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매서운 바람이 귓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몸이 중력에 의해 빠르게 밑으로 떨어지자 김시연은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몸의 아드레날린이 순식간에 솟구치더니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지더니 피가 순간적으로 머리에 몰리는 것 같았다.그럴수록 공포는 더더욱 극도로 치달으며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김시연은 마치 누군가 비명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기라도 한 듯 입에서는 계속 비명만 흘러나왔다.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을 감는 것도 잊은 채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나와 김시연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적셨다.그 순간.몸이 허공에서 잠깐 멈춘 것 같았다.바닥에 닿았다고 생각한 김시연은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의아해하다가 갑자기 위로 튀어 오르는 몸에 깜짝 놀랐다.“꺄악-”김시연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일정한 높이에 다다르자 다시 급속도로 추락했다.그러다가 다시 위로 튀어 올랐다.다시 빠르게 떨어졌다.그리고 또다시 위로 튕겨 올라갔다.김시연의 심장은 그녀의 몸처럼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단 몇 초 만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몇 번 뛰어오른 김시연은 공중에 매달린 상태로 이리저리 힘없이 흔들렸다.혼이 완전히 빠져나갔다가 다시 육체로 들어온 김시연은 여전히 공포에 휩싸여 심장이 쿵쿵 뛰었다.하지만 적어도 오늘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어쩌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만한 좋은 소식이었다.알고 보니 그 남자는 김시연을 죽이려던 게 아니라 번지점프를 시킨 것이었다. 몸에 묶인 줄도 사실은 안전장치였다.한동안 계속 공중에서 흔들리던 김시연은 자신의 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음을 느꼈다.이렇게 올라가면 그 남자는 김시연을 어떻게 대할까?김시연이 속으로 추측하기 시작했다.손가락이나 발가락이라도 하나 잘라내려고 할까?아니면 손이나 발을 자르려나?그것도 아니라면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할까?그럼
“...”알겠다.아마 경찰에 신고해도 별 소용 없을 것이다.김시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모든 줄이 다 풀렸다.직원이 대답했다.“손님, 이제 먼저 돌아가셔도 됩니다. 나중에 무슨 일 생기면 연도진 님한테 연락 드리겠습니다.”“네.”연도진이 김시연을 부축하며 말했다.“가자.”김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디다가 다리가 풀려버려 그만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연도진은 재빨리 그녀를 잡더니 김시연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조심해, 내가 안고 내려갈게.”“응.”김시연은 두 팔을 연도진의 목을 감았다. 그녀의 두 손목이 빨갛게 눌려있었다.“시연아.”“응?”“밀려서 떨어질 때 무서웠어?”“무서웠어.”“그런데 지금은 엄청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지난번 밀가루 공장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연도진은 김시연이 혹시라도 너무 놀라버려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버티고 있는 거야, 억지로.”김시연은 순식간에 감정을 터뜨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으아아아악, 짜증 나. 도진아, 나 지금 다리에 힘 다 풀렸어. 난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젠장! 떨어지는데 정말 육체랑 혼이 분리되는 느낌이었단 말이야. 유언도 못 남겼는데. 아직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만져봐...”김시연이 어린 마음에 말했다.“난 네가 너무 놀라서 어디 잘못된 줄 알았잖아. 이제 괜찮아. 돌아가서 푹 쉬자.”“넌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누가 나한테 전화를 걸었어.”연도진은 복잡한 표정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일하던 도중 연도진은 앨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윌슨 쪽에 무슨 일이 생긴 줄로만 알고 있던 연도진은 앨런이 불러주는 주소를 들어버렸다. 수화기 너머의 앨런은 이 주소로 김시연은 데리러 오라는 말을 남겼다.연도진은 아무것도 물을 겨를 없이 곧장 앨런이 불러준 주소로 달려갔다.김시연은 밀리기 전 남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 여동생을 건드렸
BX 그룹 이사회 사무실.비서가 부승민에게 회사 내선으로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윌슨 씨가 접견실에 도착하셨답니다. 지금 시간 괜찮으실까요?”부승민은 손목시계와 옆에 있던 스케줄표를 확인해보더니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10분 뒤에 회의가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전화가 끊기자 비서는 커피 두 잔을 타 자본주의적 미소를 지으며 접견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차분하게 윌슨과 앨런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었다.“윌슨 씨, 회장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시라 커피부터 천천히 마시면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윌슨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흘깃 보고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흥, 이 녀석이.앨런이 비꼬기 시작했다.“그렇게 바쁜 와중에 우릴 만날 시간까지 따로 내준 찰스 씨한테 참 고마워해야겠네요.”비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못 알아들은 척 계속 말을 이었다.“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두 분께서 따로 필요하신 게 있다면 그때 불러주십시오.”앨런이 물었다.“회의는 언제 끝납니까?”“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선 회의가 끝나는 대로 곧 오실 겁니다.”앨런은 뭐라 더 말을 얹으려 했지만 윌슨이 비서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인제 그만 나가보세요.”비서는 구원의 손길이라도 만난 듯 빠른 걸음으로 접견실을 빠져나갔다.앨런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찰스 씨가 우릴 대놓고 무시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부승민이 감히 이런 식으로 그들을 무시하는 이유가 설마 여기가 강남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러는 것일까?한국어 속담에 그런 말이 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만약 여기가 필라시였다면 부승민은 감히 윌슨에게 절대 이런 짓을 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윌슨은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부승민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 태도야. 네가 정말 여기서 나가버린다면, 그건 부승민의
“이쪽입니다. 따라오시죠.”비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웃음을 억눌렀다.윌슨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부시아의 워치로 전화를 걸었다.마침 휴식시간이라 자유시간을 보내고 있던 부시아는 조용한 자리를 찾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그래, 카롤. 지금 뭐 하고 있니?”“친구랑 시소 놀고 있었어요.”“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보고 싶어서 전화했단다. 카롤은 외할아버지 안 보고 싶니?”“저도 외할아버지 보고 싶어요.”부시아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 외할아버지는 정말 매일 매일 시아가 보고 싶단다. 하지만 아쉽게도 너희 아빠가 널 데리고 필라로 가는 걸 허락하지 않더구나.”“괜찮아요. 외할아버지께서 다음에 강남 또 놀러와서 카롤 만나시면 되죠.”부시아가 대답했다.그러자 워치에서는 윌슨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네 아빠 설득하러 BX 본사까지 찾아왔단다. 하지만 너희 아빠가 외할아버지를 만나주지를 않는구나. 할아버지가 손녀랑 좀 가깝게 지내보겠다는데 그걸 막으려고 하다니. 카롤도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으니 분명 같이 필라로 가고 싶겠지. 너희 아빠가 마음대로 막았을 거야. 흥, 참으로 답답하지 그지없구나!”부시아가 어딘가 불편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외할아버지, 아빠는 그냥 제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괜찮다. 외할아버지가 너희 아빠 꼭 설득할 테니까. 곧 있으면 외할아버지랑 같이 필라로 갈 수 있을 거다.”“... 저기, 외할아버지!”“그럼 얘기 끝난 거로 하고 외할아버지는 아빠 만나러 갔다 오마. 뚜- 뚜-”부시아는 수화기 너머의 통화 종료음을 들으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외할아버지가 정말 아빠를 설득해버리면 어떡하지?!!회의가 드디어 끝났다.비서가 다시 접견실로 와 두 사람에게 말했다.“윌슨 씨, 회장님께서 회의 끝나셨답니다. 지금 바로 회장실로 모실게요.”“그래요.”윌슨은 조금 전 통화 부시아와 통화했을 때 손녀의 반응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정교하게 잘 조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