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민설아는 윤지훈과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이 아니면 거의 볼 일이 없었다.윤지훈은 매번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지만 민설아는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못 본 척하며 빠르게 지나쳐 갔고 윤지훈은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보며 쓸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다음번에 마주치면 또다시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곤 했다.시간은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갔다.윤지훈이라는 다소 신경 쓰이는 이웃을 제외하면 민설아의 일상은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로웠다.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인턴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그녀는 인턴 마무리와 새 학기 준비로 하루하루 바쁘게 움직이며 바깥일로 정신없이 지냈다.그날도 퇴근 후, 곧 다가올 가을을 맞이할 겉옷을 몇 벌 사기 위해 쇼핑에 나섰다.적당한 외투를 고르고 계산을 마친 뒤 그녀는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고 한적한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이어폰을 끼고 모자를 눌러쓴 채 걸음을 재촉하던 그녀는 자신을 따라오던 두 외국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골목 깊숙이 들어섰을 때 두 남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그제야 민설아는 자신이 강도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주변은 텅 비었고 두 남자는 번뜩이는 칼을 들고 위협적으로 다가왔다.겁에 질린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에 들고 있던 가방과 지갑을 조용히 내밀었다.그들은 물건을 낚아채고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벽에 기대 숨을 고르던 그녀의 앞을 누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놀라 고개를 들자, 윤지훈이 강도들을 쫓아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윤지훈은 뒤처지던 강도의 어깨를 잡아채며 지갑을 되찾으려 했다.강도는 반항하며 소리를 질렀고 그의 동료도 돌아와 가세했다.셋은 한복판에서 몸싸움을 벌였고 이를 본 민설아는 강도들이 들고 있는 칼이 생각나 더욱 불안해졌다.큰 사고가 날까 두려워진 그녀는 재빨리 침착함을 되찾고 골목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경찰이야! 경찰이야!”그
윤지훈이 칼에 찔린 건 다행히 급소를 피했고 적시에 응급처치를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그 소식을 들은 민설아는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한 뒤 병실로 돌아온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는 윤지훈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테이블 위에는 핏자국이 선명한 지갑과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붉은 흔적을 보자 민설아는 아까 아찔했던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숨을 고르는 윤지훈을 보며 그녀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퇴근길에 강도를 만난 것도 모자라 윤지훈이 왜 거기서 나타난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혹시... 계속 나를 따라다닌 걸까? 그렇다면 난 왜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는 사이 부모님이 병원에 도착했다.셋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엄마는 병실에 남아 윤지훈을 돌보기로 했고 민설아는 아빠와 함께 경찰서를 찾아 사건 신고를 하러 갔다.신고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서는 순간, 윤지훈이 깨어났다는 연락이 왔다.민설아와 아빠는 서둘러 병실로 돌아왔다.병실 앞에 앉아 있던 엄마는 민설아를 보며 들어가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아빠도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엄마가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결국 아빠는 딸이 병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민설아는 심호흡하고 마음을 다잡은 뒤 병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윤지훈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꽂혔고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민설아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 채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짧게 인사를 건넸다.“고마워.”윤지훈은 그녀가 곧 나가버릴까 봐 안절부절못했다.급한 마음에 침대 옆 의자를 끌어오려다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고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민설아는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고 깜짝 놀라 간호사를 부르러 가려 했다.“괜찮아, 별일 아니야
민설아는 윤지훈이 자기 말을 그렇게 이해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내가 물어본 건 넌 네 목숨이 아까운지도 모르냐는 거야.”하지만 윤지훈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너를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 필요 없어.”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민설아는 순간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몇 달 전 같았으면 이런 고백에 감동해서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멍한 침묵으로 일관했다.윤지훈은 그녀의 반응이 없자 조급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넌 어디 다친 데 않았지? 내가 늦게 와서 많이 놀랐을 텐데...”그의 말에 민설아는 사건 후 계속 머리를 맴돌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그녀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며 윤지훈에게 질문을 던졌다.“근데 넌 왜 내 뒤를 따라온 거야?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순 없겠지.”그는 그녀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볼 줄 몰랐는지 한순간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짧은 침묵은 민설아의 의심을 더욱 확신으로 바꾸었다.그녀의 표정은 점점 냉랭해졌고 윤지훈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느꼈다.결국 그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내가 인턴으로 있는 회사가 네가 사는 건물 바로 맞은편이야. 오늘 퇴근길에 네가 평소랑 다른 길로 가길래 그냥 따라가 본 거야. 어디 가는지 궁금했는데 네가 강도를 만나는 걸 보게 된 거지. 지갑에 중요한 서류라도 있을까 봐 쫓아간 거야. 나도 그들이 칼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그는 민설아의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미안해. 설아야, 일부러 네 뒤를 따라다닌 건 아니었어. 그냥...”하지만 민설아는 그의 말을 끊고 더 깊은 질문을 던졌다.“오늘만 그랬던 거야? 아니면 계속 나를 따라다닌 거야?”윤지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변명을 꺼냈다.“꼭 따라다녔다고 볼 순 없어. 퇴근 시간이 비슷하다 보니 우연히 너와 비슷한 시간에 집에 들어간 거야.”그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같았다.두세 달 동안 마주친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민설아는 자
민설아가 믿지 않는 표정을 짓자 윤지훈은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사실 내가 이렇게 내성적인 성격이 된 것도 부모님이 늘 바쁘셔서 나를 잘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야. 두 분은 다 각지로 출장을 다니시느라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어. 이번에 다친 것도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서 아마 오시지 않을 거야."그의 얼굴에는 거짓말을 할 때 특유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민설아는 그의 말을 조금은 믿기 시작했다.“그럼 서예슬한테도 연락 안 할 거야?”그녀의 질문에 윤지훈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대답했다.“예슬이는 나한테 별로 관심 없어. 솔직히 내가 예전에 너무 좋아해서 예슬한테 모든 걸 맞춰줬을 뿐이야. 서예슬은 나의 그런 태도를 즐기기만 했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어.”그의 말에 민설아는 조금 놀랐다.윤지후 역시 자신처럼 사랑에서 일방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이었다니.예전에 서예슬이 윤지훈을 무시하면서도 그를 곁에 두던 모습이 떠오르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결국에는 인과응보였네.’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분위기를 고려해 웃음을 참은 민설아는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물건을 집어 들며 말했다.“네가 나 때문에 다친 거니까 병원에 있는 동안은 내가 챙길게. 너는 그냥 치료에만 전념해.”그 말을 듣고 윤지훈은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예상 밖의 대답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알았어. 여기서 잘 있을게. 네가 와줄 때까지 기다릴게.”민설아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병실을 빠져나갔다.윤지훈은 그녀를 보내며 속으로 기쁨을 삼켰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민설아의 엄마였다.그가 가득했던 기대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민설아의 엄마가 보온병을 들고 병실로 들어오자 윤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머님, 설아는 어디 갔나요?”민설아의 엄마는 보온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를 흘끗 쳐다봤다.“설아는 회사에 갔어. 앞으로도 바빠서 여기 오긴 어려울 거야. 내가 대신 올 테니 필요한
윤지훈도 민설아의 엄마가 한 말이 모두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자신도 수없이 다짐하고 설득했지만 눈을 감기만 하면 그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머릿속을 채웠다.그의 인생에서 누군가의 온전한 사랑을 받는 건 늘 간절한 바람이었다.한때 그 사람은 서예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저 친구로 남길 원했을 뿐이었다.그리고 민설아가 떠나간 뒤에야 그토록 바라던 사람이 이미 곁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뒤늦은 후회와 죄책감에 이성은 사라졌고 그는 오로지 이 관계를 다시 붙잡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하지만 현실은 그의 행동이 민설아를 더 멀어지게 할 뿐임을 보여주었다.혼란과 괴로움, 집착과 포기가 교차하며 윤지훈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갈등했다.한편으로는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붙잡고 싶다는 본능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민설아의 엄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너희 둘 다 아직 젊잖아. 살아가다 보면 더 많은 일을 겪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날 거야. 이미 끝난 관계에 계속 매달리다 보면 서로의 앞길만 막을 뿐이야. 이제는 설아 곁에서 물러나서 너도 새로운 미래를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윤지훈이 병원에 머물던 기간 동안 민설아는 개강 직전에 딱 한 번 그를 찾아갔다.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다시 만났을 때는 과거의 냉정한 태도도, 얼마 전까지 보였던 집착도 모두 사라졌다.헤어진 후 처음으로 두 사람은 차분하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대화 주제는 더 이상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고 서로의 미래에 대해 나눌 수 있었다.윤지훈은 몸이 회복되면 한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했다.그의 말을 들은 민설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진심으로 응원했다.“너라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야. 네 앞길에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바랄게.”그녀의 미소를 본 윤지훈도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너는
30분쯤 지났을 때 현관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민설아는 예전처럼 반갑게 일어나 마중 나가지 않았다. 대신 천장에 켜진 눈부신 백열등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윤지훈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 있는 민설아를 보고 고개를 살짝 들며 물었다.“왜 아직 안 자고 있어?”“기다렸어. 내가 메시지 보낸 거 못 봤어?”민설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윤지훈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무심히 말했다.“오늘 하루 종일 실험실에 있었어. 핸드폰 볼 시간이 없었거든.”그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믿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외투를 벗어 화장실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윤지훈이 거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낮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르며 민설아는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여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해 잠금을 풀었다.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분홍색 토끼 프로필 사진을 사용한 ‘예슬’이라는 이름의 여자였다.“지훈아, 오늘 정말 고마웠어!”“집에 잘 도착했어!”친근하고 다정한 메시지를 본 민설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대화 명세를 위로 넘겼다. 어젯밤 9시에 기록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나 오늘 귀국했어. 너 마중 나올 거야?”그리고 바로 이어진 짧고 간단한 답장이 보였다.“주소.”윤지훈은 어젯밤 8시 50분쯤 집에 들어왔고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아서 민설아는 그가 샤워 중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는 그 시간 동안 서예슬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민설아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대화창을 닫고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저장된 대화창을 열었다.“오늘 비 온대. 우산 챙겨.”“점심엔 좀 쉬어.”“이거 봐. 내가 고른 장바구니 사진이야!”“길에서 본 강아지야. 너무 귀엽지?”그녀가 보낸 메시지들로 하얀 말풍선이 가득 채워져 있었
밤 11시, 알람 소리가 울릴 때쯤 윤지훈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핸드폰을 들고 책방으로 들어갔다.그가 아직도 잘 생각이 없는 모습을 보고 민설아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윤지훈은 항상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했다. 이 알람은 자야 할 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민설아는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물었다.“이미 늦었는데... 안 잘 거야?”윤지훈은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빠르게 화면을 누르며 대답했다.“아직 끝내야 할 과제가 좀 있어서. 조금 있다 잘게.”3년간 함께한 시간 동안 민설아는 이렇게 다른 윤지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서예슬을 데리러 가느라 밤 10시 반이 돼서야 집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잘 시간마저 핑계를 대며 미루고 있었다.민설아는 윤지훈의 뻔한 거짓말을 들춰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침실 맞은편 책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녀는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과제가 있다고 하던 윤지훈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그렇게 행복한 표정의 윤지훈은 민설아도 낯설었다.그동안 함께한 시간 동안 그녀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차가운 사람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거구나.’민설아는 속으로 씁쓸하게 생각했다.윤지훈은 사랑할 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단지 민설아 자신이 그의 마음을 얻을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민설아는 문을 닫으며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어차피 30일 후면 내가 떠나고 나면 윤지훈은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이 진정 사랑하는 여자랑 함께 보낼 수 있겠지. 이미 결심한 건데 왜 스스로 괴로워해야 하지?’다음 날 아침, 화창한 날씨 속에서 민설아는 일찍 집을 나서 아침밥을 사가지고 왔다.집에 도착했을 때 윤지훈도 막 일어나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조용히 아침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뒤, 윤지훈은 외투를 집어 들며 나갈 준비를 했다.민설
시간은 흘러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민설아는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워 집 밖으로 나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기대어 쉬며 핸드폰을 열어 SNS를 확인했다.가장 최근 게시물은 분홍색 토끼 프로필 사진을 가진 여자가 올린 일몰 사진이었다. 사진 중 한 장에는 남자의 옆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타르트 상자가 들려 있었다.화면 속의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니 민설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서예슬의 개인 계정은 민설아가 윤지훈 몰래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 어렵게 추가한 것이었다.어느 날, 그녀는 서예슬이 “외국에서 먹었던 타르트가 너무 먹고 싶어~”라는 게시글을 올린 것을 보고 윤지훈이 왜 그토록 자주 타르트를 사 오는지 깨달았다.그렇게 조금씩 민설아는 윤지훈과 서예슬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윤지훈이 고집스럽게 사용하는 세제, 그녀에게 선물했던 꽃다발, 집에 들여놓은 장식품들까지.모두 서예슬의 SNS에 올라온 것과 똑같았다.윤지훈은 민설아와 함께하면서도 서예슬을 잊으려 했지만 결국 그녀를 깊이 그리워하며 민설아를 대체물처럼 여겼다.그 사실을 곱씹으며 민설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가슴이 먹먹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설아는 냉장고에서 오이를 꺼내 씻어 천천히 먹었다.시간이 흘러 벽시계의 시침이 몇 바퀴를 더 돌았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윤지훈이 집에 돌아왔다.윤지훈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들어왔다. 아까 떠날 때 약속했던 타르트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그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집에 뭔가 빠진 것 같아.”“오후에 안 쓰는 물건들 좀 치웠어.”민설아의 말을 들은 윤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소매 단추를 풀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윤지훈의 늘 곧은 뒷모습을 보며 민설아는 시선을 내렸다.사실 그가 조금만 신경 썼다면 사라진 물건들 대부분이 그녀가 평소에 사용하던 것들이라는 걸 눈치챌 수도 있었다.그렇게 똑똑한 그가 민
윤지훈도 민설아의 엄마가 한 말이 모두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자신도 수없이 다짐하고 설득했지만 눈을 감기만 하면 그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머릿속을 채웠다.그의 인생에서 누군가의 온전한 사랑을 받는 건 늘 간절한 바람이었다.한때 그 사람은 서예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저 친구로 남길 원했을 뿐이었다.그리고 민설아가 떠나간 뒤에야 그토록 바라던 사람이 이미 곁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뒤늦은 후회와 죄책감에 이성은 사라졌고 그는 오로지 이 관계를 다시 붙잡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하지만 현실은 그의 행동이 민설아를 더 멀어지게 할 뿐임을 보여주었다.혼란과 괴로움, 집착과 포기가 교차하며 윤지훈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갈등했다.한편으로는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붙잡고 싶다는 본능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민설아의 엄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너희 둘 다 아직 젊잖아. 살아가다 보면 더 많은 일을 겪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날 거야. 이미 끝난 관계에 계속 매달리다 보면 서로의 앞길만 막을 뿐이야. 이제는 설아 곁에서 물러나서 너도 새로운 미래를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윤지훈이 병원에 머물던 기간 동안 민설아는 개강 직전에 딱 한 번 그를 찾아갔다.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다시 만났을 때는 과거의 냉정한 태도도, 얼마 전까지 보였던 집착도 모두 사라졌다.헤어진 후 처음으로 두 사람은 차분하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대화 주제는 더 이상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고 서로의 미래에 대해 나눌 수 있었다.윤지훈은 몸이 회복되면 한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했다.그의 말을 들은 민설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진심으로 응원했다.“너라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야. 네 앞길에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바랄게.”그녀의 미소를 본 윤지훈도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너는
민설아가 믿지 않는 표정을 짓자 윤지훈은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사실 내가 이렇게 내성적인 성격이 된 것도 부모님이 늘 바쁘셔서 나를 잘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야. 두 분은 다 각지로 출장을 다니시느라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어. 이번에 다친 것도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서 아마 오시지 않을 거야."그의 얼굴에는 거짓말을 할 때 특유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민설아는 그의 말을 조금은 믿기 시작했다.“그럼 서예슬한테도 연락 안 할 거야?”그녀의 질문에 윤지훈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대답했다.“예슬이는 나한테 별로 관심 없어. 솔직히 내가 예전에 너무 좋아해서 예슬한테 모든 걸 맞춰줬을 뿐이야. 서예슬은 나의 그런 태도를 즐기기만 했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어.”그의 말에 민설아는 조금 놀랐다.윤지후 역시 자신처럼 사랑에서 일방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이었다니.예전에 서예슬이 윤지훈을 무시하면서도 그를 곁에 두던 모습이 떠오르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결국에는 인과응보였네.’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분위기를 고려해 웃음을 참은 민설아는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물건을 집어 들며 말했다.“네가 나 때문에 다친 거니까 병원에 있는 동안은 내가 챙길게. 너는 그냥 치료에만 전념해.”그 말을 듣고 윤지훈은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예상 밖의 대답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알았어. 여기서 잘 있을게. 네가 와줄 때까지 기다릴게.”민설아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병실을 빠져나갔다.윤지훈은 그녀를 보내며 속으로 기쁨을 삼켰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민설아의 엄마였다.그가 가득했던 기대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민설아의 엄마가 보온병을 들고 병실로 들어오자 윤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머님, 설아는 어디 갔나요?”민설아의 엄마는 보온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를 흘끗 쳐다봤다.“설아는 회사에 갔어. 앞으로도 바빠서 여기 오긴 어려울 거야. 내가 대신 올 테니 필요한
민설아는 윤지훈이 자기 말을 그렇게 이해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내가 물어본 건 넌 네 목숨이 아까운지도 모르냐는 거야.”하지만 윤지훈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너를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 필요 없어.”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민설아는 순간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몇 달 전 같았으면 이런 고백에 감동해서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멍한 침묵으로 일관했다.윤지훈은 그녀의 반응이 없자 조급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넌 어디 다친 데 않았지? 내가 늦게 와서 많이 놀랐을 텐데...”그의 말에 민설아는 사건 후 계속 머리를 맴돌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그녀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며 윤지훈에게 질문을 던졌다.“근데 넌 왜 내 뒤를 따라온 거야?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순 없겠지.”그는 그녀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볼 줄 몰랐는지 한순간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짧은 침묵은 민설아의 의심을 더욱 확신으로 바꾸었다.그녀의 표정은 점점 냉랭해졌고 윤지훈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느꼈다.결국 그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내가 인턴으로 있는 회사가 네가 사는 건물 바로 맞은편이야. 오늘 퇴근길에 네가 평소랑 다른 길로 가길래 그냥 따라가 본 거야. 어디 가는지 궁금했는데 네가 강도를 만나는 걸 보게 된 거지. 지갑에 중요한 서류라도 있을까 봐 쫓아간 거야. 나도 그들이 칼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그는 민설아의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미안해. 설아야, 일부러 네 뒤를 따라다닌 건 아니었어. 그냥...”하지만 민설아는 그의 말을 끊고 더 깊은 질문을 던졌다.“오늘만 그랬던 거야? 아니면 계속 나를 따라다닌 거야?”윤지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변명을 꺼냈다.“꼭 따라다녔다고 볼 순 없어. 퇴근 시간이 비슷하다 보니 우연히 너와 비슷한 시간에 집에 들어간 거야.”그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같았다.두세 달 동안 마주친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민설아는 자
윤지훈이 칼에 찔린 건 다행히 급소를 피했고 적시에 응급처치를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그 소식을 들은 민설아는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한 뒤 병실로 돌아온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는 윤지훈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테이블 위에는 핏자국이 선명한 지갑과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붉은 흔적을 보자 민설아는 아까 아찔했던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숨을 고르는 윤지훈을 보며 그녀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퇴근길에 강도를 만난 것도 모자라 윤지훈이 왜 거기서 나타난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혹시... 계속 나를 따라다닌 걸까? 그렇다면 난 왜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는 사이 부모님이 병원에 도착했다.셋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엄마는 병실에 남아 윤지훈을 돌보기로 했고 민설아는 아빠와 함께 경찰서를 찾아 사건 신고를 하러 갔다.신고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서는 순간, 윤지훈이 깨어났다는 연락이 왔다.민설아와 아빠는 서둘러 병실로 돌아왔다.병실 앞에 앉아 있던 엄마는 민설아를 보며 들어가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아빠도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엄마가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결국 아빠는 딸이 병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민설아는 심호흡하고 마음을 다잡은 뒤 병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윤지훈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꽂혔고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민설아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 채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짧게 인사를 건넸다.“고마워.”윤지훈은 그녀가 곧 나가버릴까 봐 안절부절못했다.급한 마음에 침대 옆 의자를 끌어오려다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고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민설아는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고 깜짝 놀라 간호사를 부르러 가려 했다.“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날 이후, 민설아는 윤지훈과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이 아니면 거의 볼 일이 없었다.윤지훈은 매번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지만 민설아는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못 본 척하며 빠르게 지나쳐 갔고 윤지훈은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보며 쓸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다음번에 마주치면 또다시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곤 했다.시간은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갔다.윤지훈이라는 다소 신경 쓰이는 이웃을 제외하면 민설아의 일상은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로웠다.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인턴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그녀는 인턴 마무리와 새 학기 준비로 하루하루 바쁘게 움직이며 바깥일로 정신없이 지냈다.그날도 퇴근 후, 곧 다가올 가을을 맞이할 겉옷을 몇 벌 사기 위해 쇼핑에 나섰다.적당한 외투를 고르고 계산을 마친 뒤 그녀는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고 한적한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이어폰을 끼고 모자를 눌러쓴 채 걸음을 재촉하던 그녀는 자신을 따라오던 두 외국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골목 깊숙이 들어섰을 때 두 남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그제야 민설아는 자신이 강도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주변은 텅 비었고 두 남자는 번뜩이는 칼을 들고 위협적으로 다가왔다.겁에 질린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에 들고 있던 가방과 지갑을 조용히 내밀었다.그들은 물건을 낚아채고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벽에 기대 숨을 고르던 그녀의 앞을 누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놀라 고개를 들자, 윤지훈이 강도들을 쫓아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윤지훈은 뒤처지던 강도의 어깨를 잡아채며 지갑을 되찾으려 했다.강도는 반항하며 소리를 질렀고 그의 동료도 돌아와 가세했다.셋은 한복판에서 몸싸움을 벌였고 이를 본 민설아는 강도들이 들고 있는 칼이 생각나 더욱 불안해졌다.큰 사고가 날까 두려워진 그녀는 재빨리 침착함을 되찾고 골목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경찰이야! 경찰이야!”그
윤지훈은 한참을 생각하다가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맞아, 서예슬을 좋아했던 적 있어. 하지만 그건 정말 옛날얘기야. 설아야, 너랑 사귀고 나서부터는 너한테 마음이 갔어. 예슬이는 이제 그냥 친구일 뿐이야.”친구라는 말에 민설아의 머릿속엔 귀신의 집 앞에서 윤지훈과 서예슬이 나눈 키스가 떠올랐다.‘이성 친구끼리 키스를 한단 말이야?’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섞인 냉소적인 미소가 번졌다.“만약 서예슬이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지금까지도 네 차갑고 절제된 태도가 사랑이라고 믿으며 살았을지도 몰라.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네 사랑이 뭔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어. 내가 본 건 네가 서예슬에게 쏟는 관심과 배려뿐이었어. 너한테 예슬이가 친구라면 나는 네게 친구만도 못한 존재였던 거겠지. 지훈아, 너도 그만 자신을 속여. 네가 진짜로 좋아했던 사람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어.”민설아의 말이 끝나자 민설아의 부모님은 서로를 쳐다봤다.두 사람의 눈엔 놀람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짧은 대화만으로도 딸이 이 관계에서 겪었던 상처가 그녀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전화기 너머의 윤지훈은 할 말을 잃었고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민설아도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하지만 옆으로 고개를 돌려 부모님의 표정을 보니 두 분 모두 심각해 보였다.그녀는 황급히 태도를 바꾸며 말했다.“헤어지던 날, 난 너에 대한 모든 사랑을 몽땅 쓰레기통에 버렸어. 그러니까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야. 우리에겐 과거는 있어도 미래는 없다는 거야.”차갑게 말을 마친 그녀는 윤지훈이 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그리고는 홀가분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께 눈을 깜빡였다.“저 방금 멋있었죠? 엄마 아빠 닮아서 그런가?”민설아의 부모님은 눈가가 붉어진 채 딸을 꼭 끌어안았다.“정말 멋졌어. 우리 설아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설아야, 앞으로는 힘든 일이 생기면 혼자
민설아가 온다고 하니 엄마는 그녀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한가득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딸의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을 본 부모님은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설아야, 무슨 일이니?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어? 아니면 새로 이사한 집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돌아오는 길 내내 윤지훈이 바로 옆집으로 이사 온 일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던 민설아는 부모님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니에요.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제 발을 밟아서 조금 기분이 상했을 뿐이에요.”딸의 억지스러운 미소에 부모님은 딱히 믿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로 더는 묻지 않고 손을 씻고 밥을 먹으라며 재촉했다.그러나 이렇게 푸짐한 한 상 차림에도 민설아는 계속 마음이 산만했다.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민설아는 먹던 갈비를 씹는 둥 마는 둥 삼키지 않고 입에 물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아빠는 엄마와 눈빛을 교환하며 신호를 보냈고 엄마는 눈치를 챈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설아야,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적응이 조금 어려운 건 당연해. 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엄마 아빠한테 말해보렴. 우리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잖아.”부모님의 따뜻한 시선에 민설아의 어두운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그녀는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말을 꺼냈다.“사실, 오늘 퇴근하고 집에 오다가 윤지훈... 그러니까 제 전 남자 친구를 마주쳤어요.”이 말을 들은 아빠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갑자기 식탁을 손으로 쾅 치셨다.“뭐야, 그놈이 스토커야? 이미 끝난 사인데 왜 또 나타난 거야? 설아야, 밥 먹고 나랑 가서 확실히 따져보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민설아와 엄마는 깜짝 놀라 움찔했다.민설아는 서둘러 아빠의 손을 붙잡으며 진정시켰다.“아빠, 진정하세요. 제가 보기엔 그가 저를 쫓아다니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새 학기까지 아직 몇 달의 시간이 남아있었다.민설아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 근처 광고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갔다.평면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이 분야에서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학교 출신답게 상사와 동료들의 많은 배려를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단 하나의 문제는 회사가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긴 출퇴근 시간 때문에 피곤할까 봐 걱정된 부모님은 회사 근처에 작은 원룸을 빌려주었고 주말마다 집으로 오라고 권했다.독립된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설아는 파리의 삶에 금세 적응했다.그녀는 매일 아침 8시에 가방을 메고 하품을 참으며 출근길에 올랐다.그러던 어느 날, 원룸 맞은편 오랫동안 비어 있던 방에 새 이웃이 들어온 것을 발견했다.호기심이 동해 누군지 확인해 보려던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그녀는 호기심을 접고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매끄러운 런던 억양이 섞인 낮고 차분한 목소리.민설아는 순간 멈칫하며 속으로 되뇌었다.‘윤지훈? 설마 지훈이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머릿속을 스친 말도 안 되는 상상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출근길에 올랐다.그날 회사에서 그녀는 여느 때처럼 주어진 일에 몰두했다.일이 워낙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결국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옆자리 동료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마침 금요일이라 그녀는 잠시 집에 들러 짐을 챙기고 부모님 댁으로 가기로 했다.저녁 무렵, 원룸에 돌아온 그녀는 맞은편 문이 닫혀 있는 것을 흘낏 보고 나서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짐을 챙겨 나서려던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춰 열렸다.엘리베이터에서 한 사람이 내렸고 그녀는 무심코 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타려고 했다.그러나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엘리베이터 앞을 가로막았다.‘누구야, 이렇게 무례하게.’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얼굴이 굳어졌다.“저녁은 먹었어?”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그 사람은 윤지훈이었다.“
차가운 술이 얼굴을 적시자 윤지훈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보고는 서예슬의 말을 되뇌었다.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몇 분이 걸렸지만 결국 그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그는 민설아를 좋아하게 된 게 분명했다.‘아니라면, 왜 이별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가슴이 아팠을까?’머릿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맴돌았고 답은 점점 확실해졌다.윤지훈은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그래. 난 민설아를 좋아해.”그 말을 들은 서예슬은 이성을 잃었고 다가가 윤지훈의 뺨을 세게 때리며 외쳤다.“미쳤어? 민설아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계속 잊지 못하는 건데?”그 한 대는 윤지훈의 정신을 더 맑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우리는 3년을 함께했어. 설아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어. 내가 문제였을 뿐이야.”“근데 너희 이미 끝났잖아. 헤어졌다고!”서예슬은 절박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고 윤지훈은 고개를 떨군 채 더 깊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맞아, 끝났어. 하지만 난 설아를 떠날 수 없어. 5일 후에 나도 파리로 갈 거야. 설아를 다시 찾아서 설득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사람들은 충격에 말을 잃었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윤지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서예슬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람은 윤지훈이 서예슬을 미친 듯이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서예슬이 4년 동안 해외에 있을 때 윤지훈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민설아를 위해 파리까지 찾아간다고? 그럼 난 뭔데?’룸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체면이 깎일 대로 깎인 그녀는 억울하고 화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비틀거리며 방을 나가버렸다.방 안의 친구들은 서로를 쳐다보다 결국 윤지훈에게 시선을 돌렸다.“지훈아, 너 정말 프랑스로 갈 거야? 유학 준비하는 거야?”윤지훈은 고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