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린은 흠칫하며 고월영의 눈치를 살폈다.그런데 고월영은 담담한 얼굴을 하고 뒤돌아서더니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조바심이 난 무아린이 발을 동동 굴렀다.하지만 고월영이 가기로 한 이상 그녀 혼자 여기에 머물러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잠시 고민하던 무아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월영의 뒤를 따랐다.“같이 가요, 마마.”그들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나가 마차에 올랐다.백의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고통을 참으며 무안희가 있는 방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아가씨, 진짜 돌아갔습니다.”“나한테도 눈이 있어!”무안희의 두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오라버니의 생사도 고려하지 않고 이대로 가버리다니!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그녀는 부들부들 떨었다.“그럼 주변의 약은… 어떻게 처리할까요?”그들은 고월영이 오기 직전에 주변에 약을 뿌려두었다.그런데 사냥감이 그대로 가버렸으니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었다.무안희는 짜증스럽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죽여서 시체도 남지 않게 전부 처리해.”“예, 아가씨.”백의 여인은 무안희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한편, 고월영과 무아린은 바로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변을 돌다가 근처의 편벽한 수림으로 들어갔다.“마마….”무아린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하고 고월영을 바라봤다.고용기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는 지금 그녀는 너무도 초조했다.“그날 장군부 사람들이 같이 출발하는 모습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그런데 왜 무안희는 고용기가 자신의 손에 있다고 한 걸까?“오라버니가 무안희의 손에 잡힌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아까 방에서 만다린과 금무화의 향기를 맡았습니다.”고월영은 마차에 앉아 서책을 뒤지며 둘 사이의 작용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만다린과 금무화요?”무아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일반인이 그 향을 맡으면 환각이 생기고 이성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정염에 불타
무아린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홀로 성을 나오다니 무슨 소리야? 무안희, 네 눈에는 내가 공기로 보여?”무안희의 시선이 다시 무아린에게로 돌아갔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아린아, 네가 언제 날 이겨 본 적이 있어?”정곡에 찔린 무아린이 입을 꾹 다물었다.무안희가 정말 싫지만 그녀가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니었다.어렸을 때부터 무공으로 그녀는 무안희에게 이겨본 적이 없었다.“고월영, 무아린은 널 지켜주지 못해. 곱게 죽고 싶으면 당장 나와.”마차에 앉은 고월영이 미동도 없자 무안희는 슬슬 인내심을 잃고 표창을 던졌다.미리 대비하고 있던 무아린이 장검을 휘둘러 표창을 막아냈다.“너 끝까지 저년을 돕기로 작정했구나.”무안희가 허공을 날더니 괴이한 기운을 내뿜으며 무아린의 정수리로 공격을 퍼부었다.무아린은 백단교에 몸담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장풍에 당황했지만 이내 장검을 들고 맞서 싸웠다.장풍이 스치고 지난 자리에서 시체가 부패한 것 같은 냄새가 풍겨왔다.순결과 신성함의 상징인 백단교의 성녀가 이토록 사악한 주술을 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무아린이 잠깐 방심한 사이에 어깨에서 짜릿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무안희의 손톱이 살갗을 긁고 지나갔다.무아린은 장검을 휘둘러 무안희와 거리를 벌인 뒤, 바닥을 뒹굴었다.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어깨를 내려다보니 상처를 입은 곳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무안희의 다섯 손톱도 섬뜩한 검은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비겁한 년!”무아린이 욕설을 내뱉었다.무안희의 손톱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넌 여전히 어릴 때처럼 단순하구나?”무안희는 싸늘하게 그녀를 쳐다보고는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고월영,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안 나올 거야?”그녀가 손을 들자 손바닥을 중심으로 검은 진기가 모이고 있었다.“마차에 숨어서 안 나오면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까지 순진해 빠진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지.”무아린은 서서
무아린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았다.손이 검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독은 이미 온몸에 퍼졌고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여기서 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었다.고월영은 그녀에게 상대하기 힘들면 싸움을 끌지 말고 도망가라고 신신당부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만약 시간을 많이 끌지 못해서 고월영이 고용기가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10년 전에 비열한 술수를 써서 나를 이겼다는 건 진짜 실력이 나보다 약하다는 거잖아. 그럼 지금도 내 실력으로 널 무너뜨릴 수 있어!”무아린이 검을 휘두르자 검기가 지면에 균열을 일으키며 울부짖었다.무안희는 미세하게 갈라진 지면을 보고 경멸에 찬 미소를 지었다.“무아린, 너 지금은 3할 정도의 힘밖에 쓸 수 없을 거야. 그런 몸으로 날 막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라고!”그녀는 고월영이 대체 이 아이한테 무엇을 내줬기에 이 아이가 목숨 걸고 고월영을 지키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멍청한 년!”무안희가 음침한 얼굴로 공중에 날아올랐다.그녀는 온몸의 기력을 방출하였다. 독기를 품은 장풍이 올가미처럼 무아린을 향해 날아갔다.무아린은 검으로 막아내려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기세가 꺾였다.장풍은 죽음의 기운을 담고 무아린을 짓눌렀다.그 시각, 지붕으로 올라간 고월영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주저앉았다.가슴이 갑갑한 것이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죽은 시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빠졌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수림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무아린은 어떻게 된 거지?가슴이 갑갑한 것이 꼭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고월영이 무아린에게 돌아가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복도 끝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곧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백의 여인이 절뚝거리며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복도 끝 쪽에 있는 작은 별채로 들어갔다.고월영은 소리를
고월영은 고용기의 앞에 쭈그려 앉아 준비해 온 철사를 꺼내 잠금쇠에 꽂았다.고용기가 말했다.“열쇠가 없이는 못 열게 되어 있어. 무안희가 돌아오지 않은 틈을 타서 당장 여기를 나가.”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발을 속박했던 잠금쇠가 열렸다.고용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가느다란 철사 하나로 어떻게 잠금쇠를 푼 거지?고월영은 놀라는 그를 무시한 채, 그의 손을 묶었던 쇠사슬을 풀어냈다.그리고 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발을 묶었던 잠금쇠도 풀렸다.“오라버니, 어쩌다가 무안희 손에 잡히게 된 건가요?”그 질문에 고용기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그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나중에 다 설명해 주마.”상황이 급박한 만큼, 고월영도 더 이상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아린 아씨가 무안희와 시간을 끌고 있어요. 지체할 시간 없어요. 오라버니, 지금 아린 아씨를 구하러 가야 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고용기의 팔을 잡아 끌었다.“오라버니, 어디 다친 곳은….”“괜찮아. 날 다치게 하진 않았으니 걱정 말거라.”하지만 창고에서 나온 그들은 얼마 못가 백의 여인에게 붙잡히게 되었다.여인은 음침한 표정을 하고 허공에 날아오르더니 고월영을 향해 장풍을 쏘았다.무안희를 모시는 시녀라서 그런지 다쳤는데도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하지만 고월영을 제치고 나온 고용기의 손에 쉽게 무너졌다.얼마 안가 백의 여인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고용기는 그 여인에게 다가가는 고월영에게 담담히 말했다.“평생 주인이 시킨 일만 하는 불쌍한 인생이다. 이미 다친 것 같으니 그냥 가자꾸나.”고월영은 의아한 얼굴로 오라버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어쩐지 고용기가 무안희에게 너무 관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그녀도 얼른 허공으로 떠올라서 가볍게 담을 넘었다.“오라버니, 빨리 가야 해요!”비록 무아린에게 다칠 것 같으면 도망가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아
무아린은 너무도 큰 충격에 울컥하고 피를 토했다.“아린 아씨!”고월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무아린을 부축했다.그녀는 다급히 오라버니를 향해 소리쳤다.“오라버니, 아씨는 독에 당했어요!”고용기는 그제야 굳은 표정으로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등 뒤에서 무안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장군, 지금 가시면 앞으로 다시는 저를 볼 수 없을 겁니다!”“난 처음부터 너를 다시 만날 생각이 없었다!”주먹을 불끈 쥔 고용기가 울부짖었다.“무안희, 우리 사이는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끝났어!”“그런가요?”무안희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그런 분이 제가 남긴 기호를 따라 저를 찾아오셨습니까?”고용기는 원해서 대오를 이탈했고 그렇게 무안희의 손에 잡혔던 것이다.“장군,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세요. 지금도 저를 잊지 못해서 이리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무아린은 손바닥에 기를 모으고 고용기를 향해 뻗었다.고용기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나의 진심을 알면서 왜 이리도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냐?’“오라버니!”뒤에서 고월영이 애타게 그를 불렀다.이미 기절하기 직전인 무아린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다.하지만 이미 모든 힘을 소진한 그녀는 한발자국 움직이자마자 입에서 피를 뿜었다.고용기는 세상이 멈춘 것처럼 무안희만 바라보고 있었다.쾅!무안희의 장풍이 그대로 그의 가슴에 맞았다.고용기는 그대로 장풍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고월영, 봤어? 네 오라버니는 내 사람이야. 처음부터 너를 도울 마음이 없었다고!”무안희가 쏜 장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일격에 고용기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그가 고월영과 손을 잡는다면 자신이 위험해질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그 장풍 하나로 고용기의 5할 이상의 공력이 무용지물이 되었다.이제 둘이 같이 덤빈다고 해도 무안희는 두려울 게 없었다. “흥! 멍청한 것들!”무안희는 독이 든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무아린의 장검을 집어들었다.그리고 검의 끝을 고월
무안희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고월영의 지원군이 곧 당도할 테지만 강풍의 세기로 대략적인 위치를 추산했을 때,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당도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통틀어 현왕 한 명뿐이었다.검기가 공기 중에서 울부짖으며 고월영을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장풍이 무안희의 앞에 당도했다.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은 허공에서 두 동강이 났다.무안희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입에서 피를 뿜으며 멀리 튕겨져 나갔다.그녀는 뒤에 있는 나무에 그대로 처박히며 쓰러졌다.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고목이 쓰러졌다.고월영의 앞에 훤칠한 인영이 사뿐히 착지했다.검은색 장포를 걸치고 신비한 기운을 뿜어내는 현왕 강현준이었다.‘현왕 전하가 어떻게?’무안희는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입에서 피를 토했다.“안희야!”조금 전까지 동생의 안위를 걱정하던 고용기가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아직도 피를 뿜고 있는 무안희를 바라보았다.한참 주저하던 그는 결국 무안희에게로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했다.“안희야, 괜찮아?”무안희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했지만 계속 피만 뿜어대고 있었다.현왕이 발사한 진기가 가슴에서 요동치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느껴졌고 진기가 마구 흩어지고 있었다.그 뒤로 말을 탄 호위 무사들도 당도했고 그들의 맨 앞에는 강현우가 지휘하고 있었다.강현우는 다급히 고월영의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쪽지를 보고 달려오는 길이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그때 그는 마침 강현준과 함께 있었다.그래서 둘은 쪽지를 확인한 즉시 달려왔던 것이다.강현준이 아니었으면 아마 고월영은 크게 다쳤을 것이다.고월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착잡한 눈빛으로 저 먼 곳에 서 있는 훤칠한 사내를 바라보았다.강현준이 손짓하자 지언과 시위대가 무안희를 포위했다.“고 장군, 이런 여자를 위해 남령국을 배반하려는 것인가?”강현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용기는 뭐라고 설명하고 싶었지
고용기의 목숨을 건 엄호를 받고 결국 무안희는 포위를 뚫고 도망쳤다.고월영의 오라버니이자 이 나라의 장군이었기에 지언과 그의 호위대는 감히 그에게 죽자고 덤빌 수 없었다.결국 고용기는 현왕부로 압송되었지만 고월영은 그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무아린의 부상은 아주 심각했다. 간신히 체내의 독을 제거했지만 이미 맹독으로 인해 심맥이 완전히 손상된 상태였다.그 후 며칠 동안 고월영은 매일 침술로 그녀를 치유해 주었고 강현준도 줄곧 방에 머물며 기를 운용하여 치료를 도왔다.그렇게 꼬박 3일이 지났다.지언은 상전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3일째가 되던 날,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강현우를 찾아갔다.“여왕 전하, 제발 현왕 전하를 좀 설득해 주실 수 있을까요? 조금만… 쉬었다 하라고요.”매일 진기를 소모하여 심맥이 모두 손상된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으니 아무리 내공이 강한 자라도 결국 지치기 마련이다.“나도 설득은 해보았지만….”“그럼 여왕비 마마라도 설득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강현준의 심복인 지언이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고월영이 아니었으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아린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이유도 없었다.그가 행하는 모든 것은 고월영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왕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강현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무아린의 상황으로 진기 전달이 끊기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고월영을 설득하여 강현준을 멈추게 하는 것은 고월영에게 무아린을 살릴 기회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그녀는 평생 고통스러워할 것이다.“전하,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현왕 전하께서는 전에 당한 부상도 아직 완쾌되지 않았습니다.”“형님이 다쳤다고? 언제?”강현우가 매서운 눈초리로 지언을 노려보며 물었다.지언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사실을 고했다.“수림으로 가기 전에도 부상이 채 낫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때 마마를 구한다고 속도를 추구하느라 내력을 상당히 소진했기에 부상이 가중되었을 겁니다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강현우는 지금 들어가야 할지 몰라 문 앞에서 망설였다.얼마나 지났을까, 강현준은 드디어 눈을 뜨고 침상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무언가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가슴이 울컥하더니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월영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의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주었다.“그만하세요, 전하. 제 의술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하지만 강현준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고월영은 고통스러웠다.최선을 다했지만 워낙 부상이 심각했고 극악한 독이 이미 무아린의 오장육부를 잠식한 상태라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또 한참이 지나 줄곧 눈을 감고 있던 강현준이 말했다.“이 아이는 너를 위해 일하다가 다쳤다.”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만약 이대로 무아린을 보낸다면 평생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전하가 이 사람을 구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죄책감… 그것뿐이더냐?”강현준은 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런 것 말고 다른….”“없습니다.”고월영은 매정하게 말을 끊었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말했다.“그러니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만하세요.”그 말에 강현준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왜 필요 없다고 말하느냐?”그의 입가에서 또다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 아이가 죽으면 넌 평생을 아파하고 괴로워할 것이지만 내가 죽으면 잠깐 죄책감을 느끼고 말겠지. 차라리 그쪽이 너한테는 더 편하지 않겠느냐?”“전하!”고월영은 순간 울컥하며 화가 치밀었다.‘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속이 편하겠나이까?’“전하께서 돌아가시면 현우 오라버니가 슬퍼합니다. 저는 현우 오라버니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강현준은 원망에 찬 눈으로 그녀를 잠깐 바라보았다.결국 그는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눈을 감으며 담담히 말했다.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