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강현준은 심야가 다 돼서야 돌아왔다. 돌아왔을 때 몸에 입고 있던 갑옷은 이미 피범벅으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고, 몸이 다치고 아파도 그의 눈가에는 빛이 났고 사람 전체가 빛 나는 듯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을 보면 그녀가 놀라게 될가봐 강현준은 돌아온 후 먼저 망월각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서 1분도 지체하지 않은 채 바로 영하각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는 망월각의 문 앞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안비였다.…운려각의 밀실은 이미 옮겨졌고, 모든 물건들은 이미 안비의 영화원으로 옮겨졌다. 이름 없는 간판은 여전히 조용히 축대 위에 놓여있었다. 강현준은 당전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너의 아이를 가졌다는게 사실이냐?” 전날 밤, 추석연회에서 강현우가 고월영을 안고 자리를 떴었다.강현준도 급히 따라나섰다.고월영이 입덧을 한 일은 정왕비의 말로부터 추리해 냈던 것이었다. 궁중에 무슨 비밀이 있겠는가? 오늘 안비는 태후와 식사를 함께 하고 나서 바로 현왕부로 달려왔다. 강현준은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강현우는 아직도 고월영의 영하각에 있었다. 안비는 친히 가서 두 눈으로 사랑하는 작은 아들이 영하각의 정자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나니 엄마로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허, 너 드디어 소원성취하였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랑 함께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넌 너에게 친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거니?” 안비는 화가 나서 “너희 둘이 같이 있게 되면 네 동생은 어떡하냐? 걔가 고월영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네가 모르고 있는것도 아니지 않느냐?”그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이 고집스런 모습은 안비의 마음을 칼로 베는듯 하였다. “한 여자를 위해 네 동생을 이렇게 내버려 둘것이냐? 잊은거니? 십여년전에 누가 너 대신 그 거독을 막았었니? 누가 너를 위해 병마와 십년이상 싸웠었느냐?”“아신은 잊지 않았습니다!”강현
강현준이 영안궁에서 떠날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오솔길에서 걷다보니 달빛은 그의 그림자를 아주 길게 당기었다. 처음에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영하각에 도착할 즈음에 발걸음은 다시 가벼워졌다. 달빛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더니 심지어 명랑한 빛을 반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오로지 아내와 아이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고월영은 이미 잠들었고 강현우도 한밤중에 자기의 운여각으로 돌아갔다. 그 시각, 영하각은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감돌았다. 강현준은 하인을 물러 가게 하고 나서 가볍게 방문을 밀고 들어가 침대옆에 다가가서 여전히 잠자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배에 머물렀다. 고월영의 몸에는 얇은 이불이 덮여 있어 그는 그녀의 배를 볼 수가 없었다. 이불을 거두어내려고 하였지만 또 감히 그럴수도 없었고 차가운 바람이 그녀와 아이를 깨울가봐 걱정스러웠다. 바로 이때 창밖으로부터 스며든 한줄기 바람이 결국에는 그녀를 깨어나게 했다. 침대옆에 있는 남자의 숨결이 이토록 익숙할 수가 없었다. 고월영은 잠시 불안함을 느꼈지만 마음은 곧 안정되었다. “내일도 성을 나가시나요?”라고 그녀는 물었다. 강현준은 조금 놀라긴 했으나 오늘 밤 그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어제보다 훨씬 더 좋아진 것을 느꼈다. 그렇게 거부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내일 서성에 가봐야 돼! 3일정도 걸릴거 같아!”강현준은 침대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서 가볍게 손바닥으로 꼭 감쌌다. “최대한 빨리 다녀올께! 이틀이면 될 수도 있소!”“빨리 돌아오기 위해 또 모든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목숨거시는거 아니예요?”“아니요!” 이번에는 강현준의 태도가 경건하였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후에도 안그럴거요! 오늘은 단지 경상만 좀 입었는데 칼에 베어 상처가 난거요, 정말이요!”그는 소매를 거두어 그녀에게 오늘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비록 상처가 깊지는 않았으나 그에게는 확실히 단지 경미한 상처일 뿐이었다. “난 앞으
이어지는 시간동안 강현준은 마치 밖에 나가 출근하는 남편같았다. 퇴근하기만 하면 바로 아내의 옆에 돌아와 남편이 응당 짊어져야 할 책임을 지었다. “오늘 아침에 전하께서 주방에 다녀가셨습니다.”날이 밝은 후에 강현준은 또 문을 나섰고, 시안이 고월영의 아침 시중을 들러 와서 한시간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고월영은 의아해하더니 “그이가 뭐하러 주방에 갔던거야?”“아씨에게 드릴 아침밥을 만들었습니다!” 시안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좀 짠하기도 했다. “아씨가 요즘 식욕이 안좋으시다고 한걸 현왕전하가 기억하고 있으셨나봐요! 전하는 어디서 멧대추떡이 식욕을 돋울수 있다는걸 들으셨는지 엊저녁에 돌아오실 때 멧대추를 한보따리 안고 오셨거든요.”“하지만 돌아오셨을 때 너무 늦어서 아씨는 이미 쉬시고 계셨어요. 전하께서는 저더러 대추를 잘 보관하라고 하시고 아씨와 함께 휴식하러 가셨어요.”“저는 전하께서 이 일을 잊으신줄 알았는데 오늘 새벽에 날도 밝기 전에 사람을 시켜 저더러 멧대추를 주방으로 가져가라고 알렸어요.”시안은 자신의 인생경험이 정말 풍부하다고 느겼고, 그녀는 고귀하신 현왕전하가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두눈으로 볼 수 있다니 정말로 행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왕전하는 아마도 평생 주방에 들어가보신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전장에 나가서 적을 죽이는 것은 못하는것이 없으시겠지만 주방에서는 마치 바보같이…”“뭐라고 하는것이야?”고월영이 시안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시안은 황급히 머리를 돌려 여전히 닫겨있는 방문을 보고나서야 안심할 수가 있었다. 시안은 고월영을 향하여 웃으며 말했다. “진짜예요! 현왕전하께서는 주방에서 글쎄… 얼마나 아둔한지 아무것도 모르시더라구요. 대추를 씻는데 글쎄 으깰것만 같았다니까요!” 멧대추는 너무 단단하여 돌맹이 같아서 일반 사람은 씹기도 힘든데 현왕전하께서는 으깰수 있다니!완전 난폭하였다!전장에서의 신으로는 손색이 없기에 그 힘은 놀랄 정도로 엄청났다!
강현준은 또 심야가 다돼서야 돌아왔다. 하지만 오늘 밤은 예전과 달랐다. 오늘 밤엔 고월영이 아직 잠들지 않았다. 그는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바로 왔다. 그는 자기의 여자가 상옆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이렇게 늦었는데 왜 쉬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문을 들어서며 나무랐다. “자신을 지치게 할거요!”“힘들지 않아요! 오늘 밤 당신이랑 얘기 좀 나누고 싶어요!”고월영은 그를 바라보더니 어이없어 했다. 또 피비린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부황이 당신더러 아침부터 저녁까지 적을 죽이라고 하셨나요?”자기 아들이 불쌍하지도 않은것인가?그녀는 중얼거리며 “나라마다 매년 얼마나 많은 간첩들을 보내는지 모르지만 우리 남령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간첩을 여기저기에 보내지 않습니까?”그래서 이 간첩들은 사실 아무리 잡는다해도 싹 다 잡아내기는 힘든 일이다.그이는 좀 쉬면 안되는건가요?이 체구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더 입어야 하나요? 지치지도 않으세요? 강현준은 그녀의 옆에 다가가 의자를 당겨 앉더니 그녀를 자신의 다리위에 앉혔다. “당신의 부군이 걱정돼서 그러오?”고월영은 고개를 돌리더니 “저의 부군은 여왕전하예요!”강현준은 화를 내지 않았고 심지어 유쾌하게 웃었다.“응, 걔를 몇년만 더 편하게 살게 하고 몇년 뒤면 걔도 고생할거요!”고월영은 머리 돌려 그를 바라보며 이해가 되지 않아 “무슨 뜻이예요?”라고 물었다.강현준은 여전히 웃더니 “상관하지 마요, 아무튼 앞으로 당신의 부군은 오직 나뿐이요!”그녀는 요즘 그가 자주 웃는 것을 느꼈다.지난 한 해도 사실 그녀를 향해 이처럼 웃었었다. 다만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을 때, 현왕전하로 돌아갔을 때는 잘 웃지를 않았다. 매번 웃을 때마다 얼음같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음산한 기운이 돌아 무척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 그의 웃음은 명랑하고 상쾌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봄바람처럼 상큼하게 하였다. “또 나를 보고 멍하니 있소? 정말 나를 그렇게 좋아하
고월영은 알게 되었다. 강현준은 평생 자신이 강현우한테 빚졌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강현우가 무엇을 요구하든 심지어 그것이 그의 목숨일지라도 선뜻 줄 수 있었다. “만약 현우씨가 꼭 저를 요구하면은요?” 그녀의 마음은 조금 무거워졌다. 강현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손바닥으로 감싸쥐면서 말했다. “그동안 난 무엇을 위해 살려고 했는지조차 모르고 힘들게 살아왔거든요.”고월영은 마음이 철렁 내려앉으며 뭔가 찌르는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무엇을 가지려는지 알게 되었어요.”그는 국물 한사발을 단숨에 다 마셨고 대충 뭔가를 주어먹고 나서 사람을 시켜 치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안고 침대곁으로 가서 그녀를 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고월영은 자기 몸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그의 손을 누르더니 “저 할 말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응”하고 대답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곧 그녀의 윗옷은 열려졌다. “현준씨,”강현준은 온몸이 짜릿해졌다. 이는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였다. 자신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불려질 때 이런 느낌인지는 몰랐다.짜릿하였고 부드러웠고 뜨거웠다. 강현준은 참을 수 없었다. 그녀를 자기 품속으로 끌어당기더니 머리를 숙여 얇은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갖다 대였다. 고월영은 급히 고개를 돌리면서 “저 아직 할 말이 있어요!”라고 그를 피하였다.“말해요. 듣고 있을게요!” 그더러 입을 못맞추게 하여도 기죽지 않고 그녀의 옷을 열어제끼더니 그녀의 몸을 들어올려 힘껏 입을 맞추었다. 고월영은 하마터면 비명소리를 지를뻔 했다. 그제서야 자신의 옷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벗겨져 마지막 얇은 천조각만 남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우씨…”“지금은 다른 남자를 생각하지마!” 현우라도 안돼.“아니, 제 말은…아! 잠시만요, 거기는 안돼요… 음-”강현준은 그녀의 작은 입으로부터 다른 남자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주의하지 않은 틈
황제가 시킨 임무를 앞당겨 완성하기 위해 잇달은 며칠동안 강현준은 문을 나서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비록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월영은 그에 대해 자신이 넘쳤다. 그가 5일후에 돌아온다고 말했으니 꼭 돌아올것이다. 그래서 이 5일동안 그는 난원과 함께 강현우의 마지막 치료를 준비했다. 요 며칠 강현우는 고월영을 감히 보러가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실 그는 매일 영하각을 지키고 있었다. 단지 그녀가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그는 자발적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안비는 아들의 기분이 좋지 않은것을 보고 위로하였다. “너가 만약 정말로 그녀를 좋아한다면 사황형하고 직접 말해보렴. 형은 고월영을 너한테 양보할거야!”하지만 이 말은 안하기보다 못한것 같았다. 이 말을 듣고난 강현우는 마음이 더욱더 아팠다. “영아는 물건이 아니고 물품도 아니예요. 누가 양보하면 그녀가 누구한테 속해지는것도 아니예요!”“고작 장군부의 아씨일뿐이야! 넌 일국의 전하로서 무엇을 원하든지 쉽게 가질수 있어!”안비는 작은 아들이 기분이 시무룩해서 또 다시 병날가봐 걱정되었다. 그녀는 “넌 너의 사황형이 기분나빠할가봐 걱정하는 거지? 걱정마, 모비가 너를 대신해 사황형을 잘 타일러볼께!”“그동안 너가 원한다면 사황형은 모두 너에게 주었잖아! 한 여자일뿐인데 네 사황형은 그녀를 위해 너를 억울하게 하지는 않을거야!”강현우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안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비님, 설마 모비는 맘속으로 사황형의 감정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본적이 있나요?”“현우야, 넌 잘 몰라. 네 사황형은 일반 사람들과는 달라! 그는 장래에 반드시 한 시대의 효웅이 될거야!”안비는 그를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그는 한 여자를 위해서 자신의 발걸음을 지체해선 안돼. 그래서 말인데, 현우야, 형은 걱정하지마!”“모비!” 강현우는 급한 나머지 마음속에는 말로 이룰수 없는 괴로움이 욱씬거렸다. “사황형도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예요! 그는 나무가 아니예요! 형도 괴롭고 상심하고 절망합니다!”
“아씨,”시안은 여전히 고월영의 손목을 가볍게 잡고 있었고 감히 놓지 못하였다. “아씨, 현왕전하를 생각하시죠! 두분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아씨도 많이 아쉬울거예요! 그렇죠?”고월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침통을 들고 있는 손은 더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요즘 이 시간을 뒤돌아보면 마치 일년전으로 돌아간듯 하였다. 제멋대로 마음이 활짝 열리고, 행복했다. 심지어 예전보다 더 행복했다. 그녀는 진정으로 그의 이름- 현준을 부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가짜 현우가 아니었다. “아씨, 여왕전하는 매일 호전중입니다. 사실 다른 방법도 생각해낼수 있지 않을가요?”시안은 아씨의 능력으로 혈청을 추출하는 다른 방법을 이용하여 여왕전하를 치료할 수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다.꼭 이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이것은 최선의 방법이야!” 고월영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시안은 급하게 “하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 않나요?”고월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어쩔수 없어 하더니 “하지만 내 뱃속의 아이는…”21세기에 전문지식을 배운 의사로서 그녀는 아이를 남길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엄마로서는…“아씨…”바깥에는 갑자기 다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시안은 깜짝 놀라 고월영을 바라보았다. 고월영은 침관을 치우고 나서 대문을 바라보았다. 방문은 바로 두드려졌다. 누군가 문을 두번 두드리고는 바로 밀고 들어왔다. “난선생?” 시안은 다급히 이 기회에 고월영의 손에서 침통을 빼앗아 조심스레 나무함에 넣었다. 그녀는 난원한테 걸어가더니 “난선생, 무슨 일…”난원앞에까지 다가가기도 전에 시안은 갑자기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머리는 삽시간에 흐리멍텅해졌다. “시안아, 조심!” 고월영은 놀라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다가가려 하였다. 시안은 이미 난원앞에 쓰러졌다. “난원, 왜 이러는거죠?” 고월영은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려고 하였는데 난원뒤에 두명의 시위가 뛰쳐 들어와 그녀를 막아섰다. 시위뒤에 들어온 사람
“고월영, 너는 현우의 낭자야! 오늘 다른 남자와 함께 하기 위해 현우를 포기하다니!”안비는 사용하지 않은 침관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화가 났다. “너의 부군한테 미안하지도 않느냐?”고월영은 되려 안비를 쳐다보면서 침착하게 “한 가지 일은 모비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잘못 알고 계셨을겁니다!”“본궁이 잘못 알고 있었다고?” 안비는 분노하여 “네가 자신의 몸으로 현우를 치료하는 것을 원치 않아 하는것은 약속을 어긴 일인데 감히 본궁이 틀렸다고?”“안비마마,”이 호칭은 안비로 하여금 더욱 화내게 하였다. 그녀는 심지어 자기를 모비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마마,” 안비의 노한 얼굴을 마주하고 고월영은 여전히 냉정을 잃지 않았다. “저는 종래로 저를 희생하여 현우씨를 치료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 마마께서 잘 알아보시기 바랍니다.”“뭐라고?” 안비는 듣자마자 분노하여 얼굴마저 새빨개졌다. “너 감히 이랬다저랬다 하는구나! 너 이 악독한 년아! 너…”“마마께 묻나이다. 제가 언제 제 자신을 희생하여 현우씨를 구하겠다고 하였나요?”고월영도 화가 났는데 너무 화가나 웃기까지 하였다. 이 하늘아래 왜 이렇게 은혜를 고맙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을가?은혜를 원수로 갚다니…한번을 도와주면 고마워할지 몰라도, 계속해서 도와주면 당연한줄 안다. “제가 현우씨를 구하는것은 현우씨가 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의 신분이나 배경때문이 아니며 저와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안비마마, 저는 현우한테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마마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너, 일년전에 현우가 너를 구했잖아!”“일년전에 저를 구한것은 현준씨였습니다.”라고 고월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안비는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고월영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고월영은 한보 뒤로 물러서더니 가볍게 피하였다. 안비는 자기의 힘때문에 하마트면 넘어질뻔 했다. 두 명의 시위는 바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마마…”“놔, 본궁은 너희들이 부축할 필요가 없어!꺼져!”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