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현왕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뒤돌아섰다.고월영은 겉보기에 인간미 없고 까탈스러운 현왕이 지금 보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뒤돌아서기 전,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침대에 던져주기까지 했다.그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다리의 상처를 살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지언은 박 상궁의 부름을 받고 외출했으니 당장 어의를 부를 방법도 없었다.고월영이 옷을 다 입고 침대를 내려왔을 때, 그는 옷가지를 찢어 대충 상처를 감싸고 있었다.“전하, 아직 유리조각을 제거하지도 않았는데 그러시면 안 됩니다. 먼저 상처를 씻어내야지요!”그녀는 장롱으로 가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그 상자는 그녀의 전속 시녀가 입궐하기 전 챙겨준 상자였다. 안에는 각종 약재와 은침이 들어 있었다.그녀가 은침을 챙겨 다가오자 강현준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여왕비가 의술에 능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고월영이 새침하게 대답했다.“현왕 전하는 전에 소인과 접촉해 본 적도 없잖아요. 그러니 소인에 대해 모르시는 게 당연하지요!”강현준은 어딘가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그래서 내가 얼마나 알아주기를 바라느냐?”고월영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다.상자 안에은 은침을 제외하고도 신기한 물건들이 참 많았다.칼날 같은 것도 있었고 집게, 가위도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작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들이었다.“고작 이런 것들을 호신용 무기로 들고 다니는 건가?”그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고월영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처에 박힌 유리조각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사람을 죽이려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오라, 살리려고 만든 물건입니다.”강현준은 그 뒤로 말없이 그녀의 손놀림을 응시했다.곧게 뻗은 가녀린 손가락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손놀림이 정확하고 빨랐다.그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던 물건들로 피부에 깊숙이 박혔던 유리조각이 조금씩 제거되고
고월영은 초야를 치르던 밤 미친 듯이 자신을 탐하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그날 밤 그는 그녀가 뒤돌아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매번 고개를 돌리려 할 때면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녀를 다그쳤고 그녀는 그 움직임에 이성을 잃고 교성을 질러댔다.결국 그녀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가 사랑을 나눌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고월영은 두려움에 떠는 눈빛으로 현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가 갑자기 그녀를 안아 올렸다.놀란 고월영이 비명을 지르며 손바닥으로 그를 힘껏 밀쳤다.“제 몸에 손 대지 마십시오!”강현준은 아무런 대비도 없다가 갑자기 날아든 장풍을 그대로 맞았다.그의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고월영은 그제야 그가 내력으로 약효를 저항하다가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자신이 왜 그 순간에 진기를 운용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전하….”강현준은 거칠게 그녀를 침대에 던졌다.그녀는 바로 몸을 일으켰으나 그는 조금 전에 앉았던 긴 흔들의자로 가서 몸을 맡겼다.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침대로 옮겨주고 자신은 의자에서 잠잘 생각이었던 것이다.고월영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쏘아보았다.조금 전 그가 했던 말 때문에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다행히 의자에 몸을 맡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어 버렸다.고월영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오늘밤은 이대로 잠 못드는 밤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너무 쉽게 잠들어 버렸다.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꿈에서 그녀는 강현우와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갔다.일년 전, 그녀는 현대에서 갑자기 타임슬립하여 고대로 오게 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장군부의 아홉 번째 딸, 고월영이 되어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 장군은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탐방을 갔다.가는 길에 그들은 강도를 만났다.고월영은 강도 무리에 포로로 잡혔다.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한 남자가 말을 타고 도적무리의 진영으
고월영은 태후에게 예를 취한 뒤, 남자에게 다가갔다.“여왕 전하!”그런데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고월영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하얀색은 강현우가 가장 좋아하는 색상이었다.하지만 그의 눈가에는 눈물점이 보이지 않았다.그는 여왕이 아닌 현왕 강현준이었다!고월영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저와 현우가 많이 닮기는 했나 봅니다. 여왕비마저 저희를 헷갈릴 정도네요.”강현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현왕의 성격을 아는 태후는 월영이 상처 입을까 봐 이내 두둔하고 나섰다.“네가 평소에 잘 입지도 않던 흰옷을 입고 있으니 착각한 거지. 월영이 아니라 나였어도 못 알아봤을 거다!”“이리 가까이 와서 앉거라, 월영아.”어제 하루종일 말동무를 해드렸더니 태후와 월영의 사이는 크게 가까워져 있었다.태후가 월영의 손을 잡더니 인상을 찌푸렸다.“손이 왜 이렇게 차? 밖에 바람이 차서 추웠느냐?”“걱정하실 정도는 아니니 괜찮습니다.”고월영은 최대한 강현준과 멀리 떨어져서 태후의 옆에 꼭 붙어 앉았다.눈물점을 그리지 않고 나타났다는 건 현왕의 신분으로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하지만 그는 어제 분명 여왕의 신분으로 그녀와 같은 방을 썼다.도대체 이 인간은 왜 이러는 걸까?태후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뭣들 하느냐? 어서 왕비가 걸칠만한 망토라도 챙겨오지 않고!”“귀찮게 왔다갔다할 필요 없이 제 것을 주면 되겠네요.”강현준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더니 궁녀에게 건넸다.궁녀는 얼굴을 붉히며 곁눈질로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현왕은 평소에 검은 옷만 고집하는 편이었는데 흰옷을 입은 현왕도 이렇게 위풍당당하고 아름다울 줄이야.궁녀는 망토를 들고 고월영에게 다가왔다.고월영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저… 전 정말 괜찮습니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지금 이 몸이 친히 옷을 벗어줬는데 성의를 무시하는 건가? 여왕비는 내가 정말 싫은가 보지?”싸늘한 현왕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고월영은 가슴이 철렁해서 당황한 눈
고월영은 재빨리 손을 내렸다.그녀는 강현준을 힘껏 노려보았지만 반박할 용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상처를 모르는 척할 걸, 조금 후회가 되었다.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얄밉고 치졸할 수가 있는 거지?분명히 강현우는 온화하고 자상한 사람인데 어떻게 저렇게 성질 포악하고 이기적인 형을 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눈빛은 뭐지?”강현준이 시비조로 물었다.생긴 건 여리여리하고 툭 치면 쓰러지게 생겨서는 가끔 그를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앙칼진 고양이 같은 느낌이랄까!“현왕 전하, 왜 다시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오신 겁니까?”현왕이 나타나고 여왕이 사라졌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너 따위랑 부부 연기를 계속할 마음이 사라졌다! 심히 거슬리거든!”현왕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고월영은 순간 울컥하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짜증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거든?’‘악귀처럼 음침한 얼굴을 하고 괴롭히기만 하는 사람을 누가 부군으로 삶고 싶어 한다고!’‘그래도 현왕으로 나타날 때 뒤처리는 깔끔하게 했겠지?’태후가 오늘 그녀에게 여왕의 행방을 묻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이미 적당히 해명을 해둔 것이 분명했다.고월영은 다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 뒤로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강현준은 병법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는 병법서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 점은 강현우와 무척 비슷했다.사실 그들은 비슷한 점이 매우 많은 형제였다.성격과 저 살벌한 눈빛, 그리로 눈물점만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게 똑같았다.고월영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피로감이 몰려왔다.그와 강현우가 너무 닮아서 가끔은 강현우와 같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그렇게 얼마를 더 달렸을까, 마차는 드디어 태화전에 도착했다.그 뒤로 한 시진 동안 고월영은 태후의 지시대로 향을 피우고 조상에게 큰절을 올린 뒤, 기도까지 마쳤다.그리고 현왕은 예상 외로 그
고월영은 왜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의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현왕이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아마 강현우가 여기 없다는 것을 알아서 의식적으로 현왕에게 의지했는지도 모른다.또는 그의 민첩함과 실력을 믿기에 가장 먼저 그가 떠올랐을 수도 있다.어쨌든 여기서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현왕뿐이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앞에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나타났다.고월영은 갑자기 양발이 공중에 뜨는 느낌을 받으며 시야가 흐려졌다.그녀는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급히 눈을 감았다.“악!”멀지 않은 곳에서 말과 소녀의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눈을 뜨자 고월영의 눈에 보인 건, 아까 그녀와 부딪힐 뻔했던 그 소녀가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대는 모습이었다.그리고 말은 쓰러진 뒤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그녀는 무사했다.고개를 들어 보니 남자의 싸늘한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다쳤느냐?”고월영은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강현준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이 몸을 목놓아 부를 만큼 두려웠나 봐?”그녀가 ‘현우 오라버니’가 아닌 그를 불렀다는 게 조금 신기한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말했다.“어차피 현우 오라버니는 곁에 없으니 불러도 소용없으니까요.”“단지 그것 때문이냐?”강현준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실망? 왜?“그게 아니면 또 뭐가 있겠나이까?”“허, 참!”그는 그녀를 힘껏 밀치고는 뚜벅뚜벅 어딘가로 향했다.고월영은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분을 참아냈다. 조금 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달려가서 저 얄미운 등을 걷어차고 싶었다.참 기분이 날씨처럼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사람이었다.고개를 돌려 보니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진 소녀를 부축하고 있었다.폭주하던 말 등에서 떨어진 소녀는 큰 부상은 안 입은 거로 보아 평소에 무공을 연마한 듯했다.소녀는 강현준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현준 오라버니, 너무 아팠사옵니다!”그녀는 다
수렵장에는 많은 귀족 가문 여식들이 모였다.황가의 방계 가족이거나 고위 관료의 자제들이었다.그런 그들이 현왕 앞에서는 다들 고개를 푹 숙이고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현왕에게 밉보인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그런 현왕이 여왕비를 끌고 어딘가를 향하는 것을 보고 다들 의문을 품는데….“장군댁 따님이 반반한 외모 하나만 믿고 현왕 전하께 꼬리를 쳤다가 괜히 현왕 전하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은데요?”사람들 중에는 고월영의 천사 같은 얼굴을 시기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외모는 정말 예쁜데 현왕 전하는 원래 여자가 접근하는 걸 싫어하시잖아요. 설마 모르고 그랬을까요?”“아까 남궁가의 아가씨를 장풍에서 말을 떨어뜨린 거 못 봤어요?”“그러니까요. 냉철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현왕 전하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지요.”“혼인까지 한 유부녀라면 더욱 역겹지요.”“게다가 무려 여왕비잖습니까! 어찌 부군의 형님을 상대로 그렇게 방탕한 짓을….”“전하!”그렇게 뒤에서 신나게 흉을 보던 사람들은 강현준이 수렵장 입구에서 이쪽으로 다가오자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남궁연은 절뚝거리며 다가오더니 그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현준 오라버니, 화 푸세요. 그런 여자 때문에 화낼 필요 없습니다.”부군의 형님에게 꼬리친 여자를 반길 사람은 없었다.강현준이 고월영을 잔인하게 죽음으로 몰았다는 사실이 남궁연을 기쁘게 했다.다리의 고통도 잊을만큼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현준 오라버니, 사냥 가실 겁니까? 저랑 같이 가실까요? 오라버니? 어디 가세요?”그녀의 애교에도 불구하고 강현준은 몸을 날려 말에 오르더니 바람처럼 숲속으로 사라졌다.“전하! 전하께서 맹수 구역으로 향하고 있어!”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현왕이 맹수 구역에 진입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이들 중에는 현왕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은 사람들도 많았다.남자들은 현왕의 인정을 받고 싶어했고 여자들은 어떻게든 현왕에게
현왕이 다쳤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바깥에 있던 귀공자와 공녀들은 일제히 맹수 구역으로 달려갔다.앞장 선 이들은 공녀들이었다.그들은 원래 현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왕이 다친 지금이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다.만약 현왕의 목숨을 구하고 그를 밀림에서 데리고 나온다면… 혼인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고월영은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맹수 구역,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장소였다. 저 가녀린 여자들이 현왕을 위해 목숨까지 불사한다고?“마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인원을 더 소집해서 현왕 전하를 구출하러 가겠습니다.”“저기….”고월영은 사실을 말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사실 그녀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맹수 구역이라고는 하지만 황가의 이름을 단 수렵장이었다.야생 밀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안전이 보장된다는 얘기였다.그녀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지언은 시위대에게 손짓하고 출발 명령을 내렸다.지언은 다리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고월영의 요대를 잡아 말에 태웠다.“현왕 전하께서는 왕비께서 위험한 구역으로 가셨다고 판단해서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니 왕비마마도 동행하셔야 합니다. 현왕 전하는 마마의 안전을 확인해야 돌아오려고 할 테니까요.”“저기! 지언… 그냥 자네가 가서 난 무사하다고 전하면 될 것을….”지언은 그녀의 의견을 무시하고 채찍을 휘둘러 맹수 구역으로 출발했다.그들의 뒤를 호위 무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황가의 수렵장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고월영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맹수 구역에 입장하자마자 그녀는 위험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얼마나 갔을까, 전방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느… 늑대야!”전원이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활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무력감이 앞섰다.강현준이 그녀에게 건넨 활은 아주 작고 정교한 것이었는데 어린 황자나 공주가 활 연습을 할 때 쓰던 것이 분명했다.현왕이 자신을 어린아
현왕을 구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위기의 순간이 오자 고월영은 현왕이 돌아와서 그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가능할까?현왕이 건네준 활은 진작에 바닥에 내던져지고 그녀는 지언에게서 장검 하나를 받았다.하지만 그녀가 손을 쓸 기회는 거의 없었다. 지언이 그녀의 앞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다른 여인들은 그녀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악!”“나 물렸어! 너무 아파….”여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위대는 이미 늑대 무리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부상자들이 속속 출현하기 시작했다.바닥은 그들이 흘린 피가 흥건했다.모두가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든 순간,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아우….”야생 늑대의 울음소리가 조금 전과는 많이 다르게 들렸다.사람들은 곧 늑대들이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무리는 그들을 버리고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우두머리 늑대가 호소하듯 비명을 질러댔다.강적을 만났다는 신호였다.“혀… 현왕 전하가 오셨어!”누군가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늑대들이 향한 곳으로 향했다.뿌연 안개 속에서 한 그림자가 다가오는 늑대들을 마주하고 태산처럼 서 있었다.그의 손에는 대도가 들려 있었는데 칼끝에서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늑대들이 그에게 달려들자 그는 가볍게 대도를 휘둘러 늑대들을 두 동강 냈다.늑대들이 하나씩 경기를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졌다.그는 홀몸으로 칼을 휘두르며 늑대 무리를 뚫고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온몸에서 풍기는 싸늘한 기운은 마치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와 흡사했다.너무 강해서 시선을 뗄 수가 없는,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현왕 전하가 맞았어!”그를 본 여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호했다.역시 남령국의 수호신이었다.그가 존재하는 이상, 그 어떤 세력도 남령국을 침공하지 못할 것이다.그런 안정감은 하늘 아래 이 남자만 줄 수 있는 것이었다.여자들은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늑대 무리에 길이 가로막혔다.늑대들이 사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