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왕을 구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위기의 순간이 오자 고월영은 현왕이 돌아와서 그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가능할까?현왕이 건네준 활은 진작에 바닥에 내던져지고 그녀는 지언에게서 장검 하나를 받았다.하지만 그녀가 손을 쓸 기회는 거의 없었다. 지언이 그녀의 앞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다른 여인들은 그녀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악!”“나 물렸어! 너무 아파….”여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위대는 이미 늑대 무리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부상자들이 속속 출현하기 시작했다.바닥은 그들이 흘린 피가 흥건했다.모두가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든 순간,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아우….”야생 늑대의 울음소리가 조금 전과는 많이 다르게 들렸다.사람들은 곧 늑대들이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무리는 그들을 버리고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우두머리 늑대가 호소하듯 비명을 질러댔다.강적을 만났다는 신호였다.“혀… 현왕 전하가 오셨어!”누군가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늑대들이 향한 곳으로 향했다.뿌연 안개 속에서 한 그림자가 다가오는 늑대들을 마주하고 태산처럼 서 있었다.그의 손에는 대도가 들려 있었는데 칼끝에서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늑대들이 그에게 달려들자 그는 가볍게 대도를 휘둘러 늑대들을 두 동강 냈다.늑대들이 하나씩 경기를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졌다.그는 홀몸으로 칼을 휘두르며 늑대 무리를 뚫고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온몸에서 풍기는 싸늘한 기운은 마치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와 흡사했다.너무 강해서 시선을 뗄 수가 없는,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현왕 전하가 맞았어!”그를 본 여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호했다.역시 남령국의 수호신이었다.그가 존재하는 이상, 그 어떤 세력도 남령국을 침공하지 못할 것이다.그런 안정감은 하늘 아래 이 남자만 줄 수 있는 것이었다.여자들은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늑대 무리에 길이 가로막혔다.늑대들이 사
여왕비가 현왕의 눈밖에 나서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는 소문은 현장에 있던 궁녀와 태감의 입을 통해 궁궐 곳곳에 퍼졌다.사람들이 즐겁게 먹고 마시는 사이 우리 가련한 여왕비는 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녀에게는 식탁에 앉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월영은 맛있는 음식 앞에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배가 너무 고팠다.오늘 수렵장에서 벌어진 사고로 많은 호위 무사가 목숨을 잃고 여자들이 다쳤지만 황족은 타인의 생사에 관심이 없는 족속들이었다.어차피 죽은 건 밑바닥 호위병들 뿐이라 아무도 그들의 죽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사람들은 수렵장에서 돌아온 뒤로 근처에 있는 행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라 황가 일원들의 궁전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필요한 건 다 있었다.수발을 드는 나인과 태감도 적지 않았다.그리고 음식은 전혀 궁중 음식에 뒤처지지 않았다.게다가 오늘 사냥 수확도 적지 않아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은 풍부했다.꾸르륵….고월영은 손으로 배를 만졌다.배고파!“현왕 전하, 다리는 좀 괜찮아지셨나요?”그녀는 최대한 가련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하지만 강현준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결국 고월영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작은 주먹으로 그의 무릎을 두드렸다.그래도 왕비인데 식사 자리에 참여를 못한 것도 부족해서 시녀처럼 현왕 무릎 안마나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그녀는 이제 수치심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배가 고파서 돌아가실 것 같았다.주변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고 아무도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현왕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쌤통이라는 표정이었다.“현준 오라버니, 소녀가 한잔 올리겠나이다.”다리를 다친 남궁연이 절뚝거리며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강현준은 그녀가 내민 술잔을 받지도 않고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누가 나한테 다가와서 술을 권하는데 뭐 하고 있는 게냐?”“예?”고월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월영은 잔뜩 실망한 얼굴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결국 그녀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 그의 다리를 두드려대기 시작했다.‘사는 게 의미 없어….’남궁연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거지?’아무리 부군인 여왕이 어릴 때부터 잔병을 많이 앓고 있고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어떻게 형님한테 이리 요망하게 굴 수 있을까!‘뻔뻔하긴!’남궁연은 길게 심호흡하고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그녀는 술잔을 든 채, 강현준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한잔 드시지요, 현준 오라버니.”어찌됐건 고월영 같이 하찮은 유부녀는 시녀처럼 바닥에 꿇고 있는 게 어울리긴 했다.자신은 고귀한 남궁 가문의 여식인데 어찌 저런 파렴치한 여자와 비교할 수 있을까?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술을 마시려던 강현준의 시선을 끌었다.꾸르륵!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고 바닥에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배가 많이 고프냐?”고월영은 욕설이 나올 것 같았다.지금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은 사람한테!짜증이 가득했기에 그녀는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또 손에 땀을 쥐었다.감히 현왕의 질문을 무시하다니!어쩜 저렇게 대담할 수 있을까!하지만 예상 밖으로 현왕은 그것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았다.그는 칼로 고기 한 점을 베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먹어.”고월영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어쩜 이렇게 얄미운 짓만 골라 할까?자존심이 있지!“안 먹어?”강현준이 인상을 썼다.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다시 긴강감에 몸을 떨었다.남궁연조차 그들에게서 한발 물러서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현왕의 눈치를 살폈다.고월영은 당장 저 고기를 입에 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정말 안 먹어?”강현준은 자세를 숙이고 고기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살짝 그을린듯한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정말 눈앞이 아찔하고 당장이라도 입을 벌리고 싶지만….“안 먹을 거면 내일도 밥 먹지 말거라.”강
고월영은 마차에 던져졌다.탁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모서리에 부딪히며 눈물이 나왔다.“아파….”그녀는 얼얼한 머리를 감싸고 상석에 앉은 남자를 노려보았다.술기운 때문인지 촉촉한 눈망울에는 현왕에 대한 서러움과 분노가 가득했다.“나쁜 자식….”“뭐라고 중얼거리는 게냐?”강현준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겼다.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사악하게 물었다.“욕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여자가 틀림없었다.고월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신음했다.강현준은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그렇게 아팠나?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강현준은 그녀를 잡아당겨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따뜻한 기운을 느낀 고월영은 이상하게도 통증이 좀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통증 때문에 조금 사그라들었던 술기운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잠시 후, 그녀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강현준은 그녀의 표정이 편안해 보이자 손을 뗐다.그런데 기댈 곳을 잃은 그녀의 머리가 흔들거리더니 한쪽으로 기울었다.‘편안해….’강현준은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는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걸 자각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그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고월영은 어느새 쿨쿨 잠들어 버렸다.남자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술을 머금어 촉촉해진 입술이 탐스럽게 빛났다.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그녀가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집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현우 오라버니….”강현준의 눈빛이 점점 음침해졌다.하지만 화가 난 건 아니었다.그가 손을 거두려고 하는데 여자가 그의 손목을 꽉 끌어안았다.“현우 오라버니….”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현우 오라버니… 우리 그냥… 나가서 살면 안 되나요? 저 정말… 현왕 전하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아파….”한참 뒤, 정신을 차린 고월영이 처음 느낀 느
그 인영은 망월각에서 나와 곧장 정원의 좁은 길로 들어갔다.고월영은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하얀색은 강현우가 가장 좋아하는 색상이었다.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는 우아한 기품과 온화한 기운이 그가 강현우가 맞다고 말해주고 있었다.여왕은 왕부를 떠난 적 없는데 왜 현왕은 그가 외출했다고 거짓말했을까?“현우 오라버니!”고월영은 그 자의 뒤를 뒤쫓아갔다.그는 아치형 문을 지나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월영은 다급히 그곳으로 쫓아갔다. 아치형 문을 지나자 그 사람이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현우 오라버니!”하지만 상대는 그녀의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그의 뒤를 쫓아 문 두 개를 지나자 인공 산과 호수가 보였다.정원의 끝 쪽에 그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정원이 있었다.강현우는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었다.멀리서 바라보니 운려각이라는 글짜가 희미하게 보였다.그곳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중후한 압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주변 경계가 극도로 삼엄했다.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자 두 명의 호위 무사가 갑자기 뛰쳐나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이곳은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현왕 전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현왕부에 출입금지 구역이 있었다니.“난 여왕비다. 조금 전에….”“월영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등 뒤에서 갑자기 여자의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린 고월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예를 행했다.“안비마마!”그 여인이 바로 강현우와 강현준의 생모, 안비였다.분명히 혼례가 끝나고 천형산으로 기도를 올리러 가셨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 계신 거지?안비가 외출했다고 들었기에 궁에 들어갔을 때도 안비에게는 따로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그런데 왜 현왕부에 나타난 거지?이상한 건, 강현우와 안비는 분명히 왕부에 있으면서 외출했다는 가짜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도대체 이 왕부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 있을까?“안비마마를 뵙습니다.”안비 신변의 정 상궁이 웃으며 물
현왕부의 시위대도 철저했지만 운려각을 지키는 시위대는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더 삼엄했다!바깥 경비도 삼엄했지만 내원에는 수시로 시위대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지켜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고월영의 경공은 강현우에게 배웠는데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하지만 운려각의 지붕 위를 걸으려니 조심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그녀는 드디어 불이 켜진 방 하나를 발견했다.안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위험해질 걸 알면서 왜 굳이 그애를 집으로 들인 게냐? 혹시라도 그애가 이곳의 비밀을 알게 되면….”목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고월영은 주변 공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침입을 들킨 것이다!그녀는 재빨리 몸을 날려 가장 빠른 속도로 지붕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있던 곳에 표창 세 개가 연속으로 날아와서 박혔다.점점 위험이 고월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그녀가 바로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저기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월영은 가볍게 담벼락을 뛰어넘었다.그런데 맞은편 담벼락에서 두 명의 무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칼을 든 무사가 달려들자 가월영은 어쩔 수 없이 안채 쪽으로 도망쳤다.검기로 보아 전부 다 실력이 상당한 무림고수였다.그녀는 지체할 시간이 없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잠입했다.“자객이다! 빨리 잡아!”등 뒤에서 열 명이 넘는 그림자 무사가 광풍처럼 그녀를 쫓아왔다.꽤 괜찮은 경공 실력을 갖추었지만 결국 고월영은 무사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안채에는 점점 더 많은 그림자 무사가 몰려들고 있었다.운려각의 수비 실력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등 뒤에서 표창이 날아왔다. 고월영은 몸을 날려 아슬아슬하게 피했다.뒤에서 십여 명의 시위대가 쫓아오고 있었다.고월영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그녀가 이제는 끝장이라고 절망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서 광풍이 휘몰아쳤다.시야가 흐릿해지더니 그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고월영은 본능적으로 장풍을 날렸지만 상대는 피하지
“이거 놓으세요!”조급해진 고월영이 소리를 낮춰 말했다.부군의 형님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줄이야!아래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느니 치욕스럽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강현준의 큰 손이 허리를 잡고 있어 힘을 줄 수가 없었다.“비켜! 비키라고!”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가녀린 여체가 적나라하게 그의 시야에 드러났다.그것도 가장 치욕스러운 자세로!야속하게도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사실 강현준도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그런 건 아니었다.속바지까지 찢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하얀 여체를 본 순간 그는 숨이 거칠어지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그는 마에 낀 것처럼 저도 모르게 여자의 은밀한 곳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그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 마세요!”그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겁에 질린 고월영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이러지 마세요, 전하.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제발요.”강현준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그는 긴 한숨을 내쉰 뒤, 짜증스럽게 그녀를 뿌리쳤다.“다시 금지 구역에 들어가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줄 알아!”말을 마친 그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가기 전, 촛불을 끄는 것도 잊지 않았다.방 안이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고월영은 그가 왜 정문으로 나가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잠시 후, 밖에서 소란이 들려왔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운려각의 호위 무사들이 이곳까지 수색을 하고 있었다.“아가씨는 한참 전에 취침에 드셨습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소리를 듣고 달려온 시안이 그들을 막았지만 험악한 인상을 한 그림자 호위가 그녀를 거칠게 밀쳤다.잠시 후, 고월영의 방 문이 거칠게 열리고 밖에서 무사들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그들 중 몇몇은 횃불까지 들고 있었다.방 안
이불 밖으로 드러난 고월영은 얇은 잠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평상시에 그녀가 자주 있던 잠옷이었고 크게 이상한 점도 없었다.무사들은 고개를 뒤로 돌리고 이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그들은 자객을 잡으러 왔지 왕비를 곤란하게 할 목적은 없었다.정 상궁은 이불을 내려놓고 잠시 고민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호위대에 명령했다.“시작하거라!”호위 무사들이 사방으로 수색을 시작했다.그들은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장롱이며 상자며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죄다 뒤졌다.겁에 질린 시안은 고월영의 옆에 꼭 붙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기물들을 깨뜨린 건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었다.사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뜻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정 상궁은 고월영의 침상도 직접 수색했다.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침대를 내려 시안이 가져온 망토를 걸치고 조용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결국 수색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정 상궁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봤다.“왕비마마, 지금 입고 계신 의복을 조금 살펴봐도 될까요?”“왜지?”고월영이 불쾌한 기색으로 물었다.정 상궁이 지시를 내렸다.“다 나가 있거라.”호위대가 밖으로 나가고 시안은 방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정 상궁은 친히 고월영의 몸 곳곳을 수색했다.모든 것을 끝낸 정 상궁이 드디어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왕비마마,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상황이 상황이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실 거라 믿겠습니다.”고월영은 한숨을 쉬며 싸늘하게 말했다.“됐네. 어차피 난 시집 온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신분이니 내 양해가 자네에게 굳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네.”정 상궁은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시위대와 함께 가버렸다.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여기저기 수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시안은 이런 상황에서 상전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두 사람은 그나마 멀쩡한 의자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은 드디어 영월각 수색을 전부 마쳤다.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