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씨?” 이 시각 침대옆에 서있던 사람은 바로 강현우였다. 더욱 고월영을 의문쩍게 한 부분이 있었다. 어제 밤 고월영은 분명 긴 의자에서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침대위에 있었던거였다. 여기는 강현준이 자고 있었던 자리였다. “사황형은?”하고 그는 불쑥 일어나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방안에는 자신과 강현우뿐이었다. “여긴 우리의 침방인데 왜 사황형을 찾고 있느냐?” 라고 말한 강현우는 웃는 것 같기도 하였고 아무 표정이 없는것 같기도 하였다. 고월영이 듣기에는 강현우의 말에는 전혀 탓하는 의미가 내포하지 않은듯 하였다. “당신 자신은 무슨 일인지 잘 알면서…”라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현우는 즉시 “어디 아퍼?”라고 관심을 보였다. “그냥 좀 피곤해요!” 요즘엔 아프거나 다쳐서 종일 놀라움과 두려움속에서 살고 있는것처럼 느껴진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야 그녀는 “그이는?”라고 물었다. “밤에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야밤에 성밖으로 나가 적들을 죽이러 갔어!”고월영은 갑자기 걱정이 앞섰다. “어제 밤에 엄청 많은 술을 마셨는데…”“당신은 현준형이 걱정스러운가 보지?”“아니예요!”라고 고월영의 낯색은 어두워지더니 바로 “당신의 사황형이니까요.”라고 반박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사황형의 주량은 얼마 안되지만 한 잠 자고 일어나면 바로 멀쩡해지거든.”“ 현왕전하 수하에 많은 첩자들이 있거든. 그들을 먼저 지켜보다가 도망가도 걱정할 필요없어!” 술취한 몸으로 의식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적과 싸우러 간다고?위험하지 않을가? 현왕전하의 성질은 이 정도란 말인가? 그러나 지난 일년동안 그녀의 옆에 있을 때만큼은 강현준은 적어도 명랑하고 온윤한 사람이었다. 물론 절반 이상의 시간은 위장중이었던 것이다. 고월영은 참다 못해 다시 한번 미간을 만졌다. 왠지 자기는 이제 그 남자를 완전히 간파할 수 없는것을 느꼈다. 이럴바엔 생각하지도 말아야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지. 강현우는 웃으
“사실 저도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요. 그냥 느끼건대 당신이 걸린 독은 일반 독이 아닐거라는 거예요!” 물론 일반 독이었다면 현재까지 이 많은 의사들을 속수무책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강현우는 존귀한 신분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의료자원의 양이 일반 백성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엄청나다. 하지만 이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여전히 그를 해독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제가 수많은 독을 연구해보았습니다만 당신 체내의 독은 제가 연구한 범위에 속해있지 않아요!” “니가 왜 독을 연구하느냐?”강현우의 관심사는 그녀와는 전혀 달랐다.고월영은 머리가 휑해지더니 눈에 힘을주면서 “중점만 얘기할가요?”라고 하자 강현우는 웃기만 하였다. 고월영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예전에 상상속에서만 가능했지만 이런 날이 정말 올 줄이야! 가장 평범한 말투로 이렇게 간단한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지라도 강현우가 인생은 희망으로 가득차보였다. 그는 처음으로 이렇게 강렬하게 희망해본다. 자신이 완쾌되어 살아가고 싶었다. 고월영은 그가 왜서 기분좋아졌는지를 알수 없었다. 체내에 독이 이 정도로 퍼졌는데 또 기분 좋아질 일이 있을가?“저는 당신의 해독할 수 있다고 하진 않았어요!”“원래부터 해독이 안돼. 상관없어.”라고 강현우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고월영은 눈길이 무거워지더니 “어찌 상관없을 수가 있죠? 해독이 안되면 당신은…”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 이 지독한 충독은 이미 그의 오장육부까지 퍼졌다. 강현우는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아보고 싶지만 그에겐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목소리는 산들바람같이 부드럽게 “생과 사는 모두 명에 달렸어. 살아있을 때 소원을 이룬다면 죽어서도 여한은 없거든.” 고월영은 갑자기 우울함이 느껴졌다. 강현우는 종래로 정말로 나아질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설마 스무세살밖에 안되는 젊은 나이에 아무 희망도 갖지 않는다는 말인가?” “치료하지
고월영은 이 물음에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와 강현준을 싫어한다고? 왜 생각할 수록 이상하지? 강현우는 그녀에게 그 어떤 생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일어서더니 그녀를 보면서 “깨났으면 일어나. 노장군과 인사하고 귀가해야지.”귀가…고월영은 좀 답답함을 느꼈다. 방금 말했듯이 현왕부는 그녀의 집이 아니다. “현우씨…”“이 후의 일들은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 장군부는 아직도 좀 뒤숭숭해요. 만약 지금 현왕부를 떠나면 장군부의 가족들을 번거롭게 할 것 같아.”강현우는 그녀의 눈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에서 피하는 것 같았다. 고월영도 잘 알다시피 이럴때일수록 장군부에 더 이상 폐를 끼쳐서는 않된다. 오라버니가 사라진 일에 대하여 아직 열기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이 시기에 그 어떤 움직임이든지 황제로 하여금 장군부에 대하여 선입견을 가지게 될 수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강현우 그리고 강현준 사이의 일들은 반드시 빠른 시일내에 해결을 봐야 한다. 어떤 방식을 사용해야 황제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승낙하면서 또한 장군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가 있을가? “내가 짐을 정리해줄께, 뭔 일 있더라도 현왕부에 돌아가서 말하자꾸나.”여기는 필경 남의 집이다. 강현우는 현왕부에서 나오면은 사실 적응하기 힘들어한다. 모든것은 그녀를 위한 것이였다. “현우씨,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그의 기다란 뒷모습을 보면서 고월영의 손끝은 오므렸다. 강현우는 머리를 돌리지 않았으며 아마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맞춘듯 하였다. 고월영은 여전히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 뒷모습의 굳어짐을 선뜻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집착하더니 “왜 그를 당신의 신분과 대신해서 나랑 함께 하였어요? 심지어 동방화촉의 밤에도 …그이였죠? 현우씨,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예요?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구요?”라고 물었다. 분명 아주 간단한 일인데 이처럼 복잡하게 만들다니!하지만 그녀도 이제야 느꼈듯
고월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현우 씨!”라고 불렀다. 강현우는 담담하게 “내가 만약 일 년 전에 너를 처음으로 봤을 때 이미 첫눈에 반했고 지금까지 여전히 엄청 좋아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니?”고월영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하지만 저는 이미 사황형이랑…”강현우는 시종일관 정색한 얼굴로 “내가 전에 말했었지, 나는 너와 그 어떤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방해하지 않을 거야. 니가 만약 가끔이라도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허락만 해준다면 말이야. “고월영은 그와 더 이상 소통이 계속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이렇게 많은 감정을 쏟아내다니…강현우는 왕부에만 남아있고 거의 외출을 안 하다 보니 밖에 있는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을 좋아한다면 어찌 그녀와 다른 사람이 함께 다니고 심지어 가장 친밀한 관계까지 발생하도록 놔둘 수 있겠는가?그는 너무 조용히 지내왔고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서인지 아예 모르는 것 같다. 강현우는 병풍위의 두루마기를 걷우어 그녀의 앞에 다가가서 씌워주면서 “귀가해야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월영은 되려 “그전에 먼저 한 사람을 뵈러 가야 돼요!”라고 말했다. 오늘 여왕전하가 모두들 앞에 나타나면서 뭇사람들을 또 한 번 의문의 바닷속으로 빠트려 넣었다. 눈앞의 여왕전하와 어젯밤의 여왕전하는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곳이 없었다. 그렇지만 또 어디든지 달라 보이기도 하였다. 특별히 여자들은 마음이 복잡했다. 어젯밤에 봤던 여왕전하와 오늘 본 여왕전하는 모두 준수한데 왜 두 가지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여왕전하가 더욱 사악스러운 매혹감이 넘쳤고 신비하고 예측불허한 느낌이었다. 고월영은 뭇사람들의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아린을 찾았다. 이 시각 강현우는 밖에서 고용기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강현우는 아예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어젯밤 여왕전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가 말
“영아, 얘기 다 끝났어?”강현우가 문을 두드렸다.영이의 머릿속 생각이 단번에 끊겼다.아까 분명 무언가 떠올랐는데. 아주 중요한 순간이 머릿속을 지나쳤다.생각이 날듯 말듯 할 순간에 맥이 탁 끊겼다.“어쨌든 큰 오라버니를 위해 많을 걸 했으니 결코 당신을 버리진 않을거예요.” 고월영이 무아린을 보며 말했다.하지만 무아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한텐 마음이 하나도 없을 가봐 두려운 거죠.”“그럴 리가요? 제가 보기엔…”“괜찮아요, 어차피 평생 쫓아다닐 거니까.”무아린은 고월영의 말을 가로챘다. “부군이 찾아왔네요, 얼른 가세요.”부군이 있고 돌아갈 집이 있는 게 얼마나 좋나.그러다 고월영은 오라버니를 보며 집에 가자고 했다.오라버니의 집에 살고 있지만 왠지 언제든지 쫓겨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월영은 힘내라는 듯 무아린의 손을 토닥여줬다.무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네, 그럼."고월영은 그제야 일어나 문을 열었다.월영이 나오자 강현우의 눈에는 월영이뿐이었다. "집에 가자, 영아"월영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사람이랑은 말이 통하질 않으니.오라버니의 집을 떠난 후 고월영은 바람 좀 쐬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강현우는 계속 곁에 있어줬다.월영은 길거리에 아무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다.사실 왜 나와 돌아다니는진 알 수 없었다. 단지 현왕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뿐.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불안했다.그 자식이 상처가 아물었다 했지만 칼부림에 그리 빨리 나을 리가?이제 며칠 지났다고 또 적을 처치하러 나간다고 하다니, 자기 몸은 하나도 생각 안 하지."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 사황제가 걱정되는 거야?"강현우가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걔 걱정을 왜 해요?" 고월영은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거기 탕후루 있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서있어, 내가 사 올게, 한번 먹어 봐봐." 강현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강
난적의 큰 칼이 떨어지지 않았다.하지만 고월영은 분명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이건 무슨 소리지?주방 칼로 고기를 써는 소리인지 아니면 큰 칼로 뼈를 절단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혹여나 피 튀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주위에서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사람들은 놀라서 여기저기 도망쳤다.어떤 사람은 겁에 질린 나머지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기도 했다.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얼마나 무서웠으면 이 정도일까.그러나 고월영은 말 등에 앉은 그 그림자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얼굴은 피투성이에 이미 마른 피도 있었고 선홍색을 띤 축축한 피도 있었다.먼지를 뒤집어쓴 머리카락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현왕은 전포를 입고 달려왔다.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큰 칼을 들고.그는 큰 말 위에서 피로 물들인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따뜻하고 끈적인 무언가가 얼굴에 튀었다. 그로 인해 고월영의 시선 속 그 그림자도 흐려진 것 같다.고월영은 손으로 얼굴을 쓱 닦았다.손을 내려다보자 피투성이였다.다른 사람의 피가 얼굴에 몸에 다 튀었다.그 여자는 바로 눈앞에서 두 동강이 나버렸다.사람은 이미 죽어 시체는 땅에 쓰러져있지만 여전히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주위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백성들로 가득 찼다. "꺅! 아...""꺄악..."말 위에 있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 그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사람들은 심지어 악마인 줄 알았다.손에 큰 칼을 들고 사람을 두 동강을 내는 악마 말이다!"영아!" 강현우는 빠른 걸음으로 고월영의 곁으로 달려갔다. 손에 든 탕후루는 어느새 땅에 떨구어졌다.말 위에 있는 남자도 무표정으로 고월영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월영의 얼굴과 몸이 피투성이인 모습을 본 강현우는 사황제를 한번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너무 잔혹스럽지 않은가.강현우는 소매를 걷어 고월영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주며 부드럽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지?"고월영은 멍하니 고개를 끄
태후는 고월영에게 상을 내리려 한다. 이는 연회의 하나 목적일 뿐.하지만 주요 목적은 아니다.중요한 건 태후 마마가 안비가 현왕에게 비를 택하신다는 소식을 들어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연회에는 어떤 유형의 미인이든지 다 있었다.오늘 밤 태후의 영안궁에는 형형색색의 여인들로 가득 찼다.그림 속 여인들은 태후와 안비가 정성껏 고른 것이다.어여쁜 여인이라면 태후는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손자의 성질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 말이다.많이 골라 놓으면 그중에 한 명은 사심이 갈지도 모르니.오늘 밤 고월영의 두 언니도 있었다.여섯째 고여설, 일곱째 고평연.여덟째인 고여추는 역시나 없었다. 초화상마저 올리지 않았다.안비는 원래 장군부의 두 여식을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후가 너무 마음에 들어 하니 어쩔 수 없었다.태후가 고월영을 아끼니 그 집의 두 언니인 고여설과 고평연도 고와했다."어마마마, 장군부의 두 여식은 첩의 자식인데 출신으로 보아 현이 왕비로는 자격이 되지 않아요."안비는 장군부의 여식은 한마디로 그냥 싫었다.태후는 웃으며 말했다. " 현이의 비를 찾는 거지만 선택된다 한들 꼭 현왕비란 법은 없지."귀한 신분을 가진 왕이 한평생 왕비 하나만을 가지는 건 아니지.정실부인뿐만 아니라 첩들도 있으니.장군부의 여식은 그래도 여왕비의 언니들이니 첩이 되기엔 좀 그렇지.하지만 측비가 되는건 그래도 괜찮지.현이가 괜찮다면야.태후는 고월영의 손을 계속 꼭 잡고 있었다. 고월영을 참으로 아껴했다."우리 월영이 좀 봐, 예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좋잖니. 의술도 능통하니 기사회생도 할 수 있지!"아무튼 지금 태후 눈에는 고월영이 그야말로 보물이다.고월영을 보물로 여기니 그 언니들도 덕을 보았다.。분명히 이 집 여식들은 다 좋을 것이야."영이 언니들도 현왕부에 시집오게 되면 우리 영이를 돌부주게 될 사람이 하나 더 생기니 나도 마음이 편할 텐데."안비는 고월영을 힐끗 보았다.이 계집은 시집온 후 태후 옆자리에 앉아 말
그날 밤의 자객!안비도 눈길을 돌려 태후를 주시했다.하지만 태후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를 암살하려 한 복면을 쓴 검은 자객은 알지만 다른 한 사람은...""다른 이가 또 있어요?" 고월영은 가슴이 철렁이었다.그날 밤의 일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분명히 강현준이 태후의 침궁으로 들어가는 걸 자기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소리 없이 사라졌단 말이지.다른 한 사람이 혹시 그인가?"다른 한 사람은," 태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를 구하러 온 거 같은데 근데 누군지 잘 보지 못했어. 자객이 나를 암살 시도하려 할 때 그 사람이 막았다는 거만 알아.""그러곤 영이 네가 들어오니, 그 사람이 자객을 쫓아갔지."안비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마마마, 두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나요?"태후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는 복면을 쓰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들어올 때 내가 이미 쓰러져 있어서 잘 보지 못했어."그리곤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이 후궁에 있다지만 얌전히 살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 어떤 이의 미움을 샀길래 나를 죽이려 하다니.""아바마마가 영안궁 경비를 강화하였으니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고월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만약 다른 이가 강현준이라면 어떤 자객이길래 강현준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지?현왕의 무술로 보아 현왕의 손에서 빠져나갔다는 건 그 역시도 보통 고수는 아닐 것이다.이런 절세 고수가 아무 힘도 없는 태후를 살해하는데 실패하다니?만약 그 사람이 고수가 아니라면 강현준이 일부러 그냥 보냈을 수도 있다.강현준이 왜 그냥 풀어줬지? 그 자객과 강현준은 무슨 사이지?만약 강현준이 태후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왜 굳이 태후를 살려줬지?안갯속에 갇힌 듯 고월영은 짐작이 하나도 가지 않았다.그때 안상궁이 들어와 말했다. "태후 마마, 안비 마마, 왕비 여인들이 모두 왔습니다. 태후 마마, 나가서 여인들을 보시겠습니까?""현우는?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걔가 꼭 와야 한다고? 아직 오지 않았나?"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