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는 고월영에게 상을 내리려 한다. 이는 연회의 하나 목적일 뿐.하지만 주요 목적은 아니다.중요한 건 태후 마마가 안비가 현왕에게 비를 택하신다는 소식을 들어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연회에는 어떤 유형의 미인이든지 다 있었다.오늘 밤 태후의 영안궁에는 형형색색의 여인들로 가득 찼다.그림 속 여인들은 태후와 안비가 정성껏 고른 것이다.어여쁜 여인이라면 태후는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손자의 성질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 말이다.많이 골라 놓으면 그중에 한 명은 사심이 갈지도 모르니.오늘 밤 고월영의 두 언니도 있었다.여섯째 고여설, 일곱째 고평연.여덟째인 고여추는 역시나 없었다. 초화상마저 올리지 않았다.안비는 원래 장군부의 두 여식을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후가 너무 마음에 들어 하니 어쩔 수 없었다.태후가 고월영을 아끼니 그 집의 두 언니인 고여설과 고평연도 고와했다."어마마마, 장군부의 두 여식은 첩의 자식인데 출신으로 보아 현이 왕비로는 자격이 되지 않아요."안비는 장군부의 여식은 한마디로 그냥 싫었다.태후는 웃으며 말했다. " 현이의 비를 찾는 거지만 선택된다 한들 꼭 현왕비란 법은 없지."귀한 신분을 가진 왕이 한평생 왕비 하나만을 가지는 건 아니지.정실부인뿐만 아니라 첩들도 있으니.장군부의 여식은 그래도 여왕비의 언니들이니 첩이 되기엔 좀 그렇지.하지만 측비가 되는건 그래도 괜찮지.현이가 괜찮다면야.태후는 고월영의 손을 계속 꼭 잡고 있었다. 고월영을 참으로 아껴했다."우리 월영이 좀 봐, 예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좋잖니. 의술도 능통하니 기사회생도 할 수 있지!"아무튼 지금 태후 눈에는 고월영이 그야말로 보물이다.고월영을 보물로 여기니 그 언니들도 덕을 보았다.。분명히 이 집 여식들은 다 좋을 것이야."영이 언니들도 현왕부에 시집오게 되면 우리 영이를 돌부주게 될 사람이 하나 더 생기니 나도 마음이 편할 텐데."안비는 고월영을 힐끗 보았다.이 계집은 시집온 후 태후 옆자리에 앉아 말
그날 밤의 자객!안비도 눈길을 돌려 태후를 주시했다.하지만 태후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를 암살하려 한 복면을 쓴 검은 자객은 알지만 다른 한 사람은...""다른 이가 또 있어요?" 고월영은 가슴이 철렁이었다.그날 밤의 일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분명히 강현준이 태후의 침궁으로 들어가는 걸 자기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소리 없이 사라졌단 말이지.다른 한 사람이 혹시 그인가?"다른 한 사람은," 태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를 구하러 온 거 같은데 근데 누군지 잘 보지 못했어. 자객이 나를 암살 시도하려 할 때 그 사람이 막았다는 거만 알아.""그러곤 영이 네가 들어오니, 그 사람이 자객을 쫓아갔지."안비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마마마, 두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나요?"태후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는 복면을 쓰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들어올 때 내가 이미 쓰러져 있어서 잘 보지 못했어."그리곤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이 후궁에 있다지만 얌전히 살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 어떤 이의 미움을 샀길래 나를 죽이려 하다니.""아바마마가 영안궁 경비를 강화하였으니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고월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만약 다른 이가 강현준이라면 어떤 자객이길래 강현준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지?현왕의 무술로 보아 현왕의 손에서 빠져나갔다는 건 그 역시도 보통 고수는 아닐 것이다.이런 절세 고수가 아무 힘도 없는 태후를 살해하는데 실패하다니?만약 그 사람이 고수가 아니라면 강현준이 일부러 그냥 보냈을 수도 있다.강현준이 왜 그냥 풀어줬지? 그 자객과 강현준은 무슨 사이지?만약 강현준이 태후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왜 굳이 태후를 살려줬지?안갯속에 갇힌 듯 고월영은 짐작이 하나도 가지 않았다.그때 안상궁이 들어와 말했다. "태후 마마, 안비 마마, 왕비 여인들이 모두 왔습니다. 태후 마마, 나가서 여인들을 보시겠습니까?""현우는?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걔가 꼭 와야 한다고? 아직 오지 않았나?"
현왕이 오셨다!여인들은 허리를 펴고 가슴을 꼿꼿이 세운 뒤 곧바로 자신의 가장 완벽한 자태와 각도를 잡았다.내시가 한 사람을 모시고 들어왔다.그 그림자마저 훤칠하였다.그 걸음걸이는 태생적으로 한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여인들이 한번 쳐다봤을 뿐, 온몸이 서늘해졌다.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완벽한 존재다.온몸에 한기가 풍겨 무서워 똑바로 쳐다보진 못하지만 모두 곁눈질로 훔쳐보고 있었다.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열심히 살피고 눈초리의 모든 기색을 진지하게 헤아리려 했다.아쉽지만 현왕의 얼굴에는 표정 하나 없었다.그는 마당으로 걸어가 태후와 안비를 향해 몸을 기울여 인사했다. "할마 마마, 어마 마마."태후가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현아, 여기."강현준 성큼 걸어갔다.고월영도 얼른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사황제를 뵙겠습니다."강현준은 고월영을 담담하게 한번 쳐다볼 뿐이었다.여인들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여기 있는 여인들은 모두 외모에 자신이 있다지만 그래도 고월영이 절세미인이란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월영은 그야말로 여자들이 한눈에 봐도 질투할 만큼 예쁜 얼굴을 가졌다.이렇게 예쁜데 혹여나 현왕이 고월영에게 눈이 갈까 두려웠다.다행히도 이미 시집간 여인이다. 그것도 현왕의 동생에게.그러니 아무리 예쁜 여인이라도 이미 시집갔으니 현왕 눈에는 그저 시든 꽃에 불과하다. 그러니 견제할 필요도 없다."현아, 어서 앉으렴." 태후가 손을 흔들었다.강현준이 고개를 끄덕인 후 옆으로 돌아가 앉았다.행동거지가 제멋대로에다 우아하지도 않는데 돌아서는 모습이며 걸음이며 앉는 동작 모두 상남자적인 매력이 있었다.여인들은 이 모습을 보며 정신이 혼미해진 듯했다.그런데... 그런데 형왕이 자리를 잘못 앉은 거 같은데?여왕비의 자리는 여왕에게 남겨주어야 하는데!현왕이... 어떻게 여왕비의 곁에 앉는단 말인가?"현아, 거기 앉으면..." 안비가 못 참고 말했다.강현준은 담담히 바라보았다. 공손한 태도인듯했지만 확고한
뭐라?현왕전하께서 왕비를 선택하는데 여왕비더러 결정하시라고 하셨다고?이는 정말 전례 없던 일이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안비는 화가 치밀어 얼굴까지 파래졌고 태후마저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겠는데 말이다. 뭇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은 채 멍하니 고월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월영인 경우에는 과일즙이 목구멍에 걸려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영아야, 괜찮느냐?” 태후는 관심조로 얘기했다. 고월영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만 벌리면 기침이 끊기지 않았다. “콜록, 콜록콜록”손바닥만한 작은 얼굴은 기침 때문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현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문뜩 손을 들어 거대한 손바닥으로 고월영의 등을 가볍게 다독이기 시작했다. 주변은 갑자기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뭇사람들은 고월영 등을 다독이고 있는 강현준의 손을 쳐다보며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고월영은 여왕전하의 왕비잖아! 그의 제수잖아!아무리 총애한다고 하여도 이 정도로 방자한 행위는 과분했다. 이 행위는 너무 다정하잖아!이미 완전히 형님이 제수씨에게 할 수 있는 행위를 초과한 것이다. 안비는 기가 막혀 잔을 “팍”하고 강하게 내려놓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현아야, 오늘 너무 많이 마셨구나!”라고 말했다. 태후도 이번엔 두 눈을 믿을 수 없어서 멍하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고월영은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일부러 이러는 것이고 그는 지금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자신을 저항하였다고 화내는 건가? 당시 자신이 어떤 모양새인지는 생각해보지도 않고?온몸은 피로 덥혀있었고 내밀었던 그 큰 손바닥도 피범벅이었는데 그녀는 감히 어찌 자기의 손을 그의 손바닥에 놓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녀는 현재 여왕비인데 말이다. 그와의 사이에 전에 어떤 사이였든지 이젠 국면을 제대로 봐야 했다. 이 남자는 그녀의 미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사황형, 이젠 괜찮습니다.” 라고 고월영은 무거워진 그의 눈길을 무시하고 그의 손을 밀어냈다
태후는 여왕전하의 황조모이자 황제의 모후이다. 여왕비는 태후께 이혼장을 하사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비록 이 일은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태후가 대답했으니 곡절이 있다고 해도 결국에는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필경 이런 일인 경우 원칙성이 없는 문제는 황제도 태후의 말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고월영은 왜 여왕전하와 이혼하려는 걸까? 설마 여왕전하의 몸이 안 좋아서 싫어서인가?아무리 몸이 안 좋다해도 그는 여전히 여왕전하이다!일국의 전하가 비할 데 없이 존귀한데 만약 이혼한다면 고월영의 남은 인생에는 아마 다시는 다른 어떤 남자에게도 시집갈 수가 없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혼자 고독하게 삶을 마감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고월영이 미쳤나? 안비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설마 현우와 이혼하고 현준한테 시집가서 현왕비로 되려는 것은 아니겠지? 꿈에서 깨어나!그녀는 죽어도 이런 일이 발생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고..”“너는 현왕부를 무슨 곳으로 생각하느냐?”안비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강현준한테 제지당했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강현준이 잡고 있던 잔은 분말로 되었다. 거대한 체구가 고월영의 뒤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거대함에 그의 강대함, 사람들로 하여금 두렵게 하는 포악함이 그 거대한 그림자로 하여금 갑자기 왜소한 고월영을 철저하게 휩싸여버렸다. 고월영은 심호흡하였다. 두려운 게 아니지만 이 시각만큼 그녀는 자신이 두려워서 물러서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고월영은 태후를 보면서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더니 “태후마마,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무엇을 요구하든 모두…아!”갑자기 허리가 확 조여오더니 그녀는 짊어졌다.뭇사람들이 바라보는 눈길 속에서 강현준은 그의 제수를 어깨에 짊어졌던 것이다. “현아!” 안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상을 두드리며 일어나며 “그녀를 내려놔!”라고 외쳤다. “강현준, 나를 내려놔!” 라고 고월영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
고월영은 침대에 뿌리쳐졌다. 이는 강현준이 처음으로 이 정도로 공공연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진정한 신분으로 그녀를 자기 침상에 뿌리친것이다. 고월영은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그의 거대한 체구는 힘껏 눌러내렸으며 그의 모든 퇴길을 철저하게 막아버렸다. 그녀는 분노하며 “현왕전하, 당신이 지금 무슨 신분으로 저와 이토록 가까이 한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었다. “니가 보기에는?” 강현준은 갑자기 앞으로 몸을 기울렸다. 고월영은 당황하며 뒤로 피하다가 즉시 그에 의해 침상위에 넘어졌다. 자세가 극도로 우아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 고월영이 일어나려고 할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은 그 녀의 어깨에 놓아졌고 힘을 쓰지 않아도 그녀를 자기의 몸밑에 봉쇄할 수 있었다. “현왕전하, 당신의 모비는 아직도 밖에 계시는데 그의 부름소리를 들었나요?” 하며 힘껏 몸부림쳤다. 밖으로부터 과연 안비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현아, 너 너무 방자하구나! 그 녀는 너의 동생의 왕비야!”목소리에는 분노가 넘쳐났고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강현준은 들은 체 만 체하였다. 그는 다만 자기한테 갇힌 몸밑의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눈가에 훨훨타오르는 것은 분노외에 고월영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불꽃도 있었다. 그는 갑자기 머리를 숙였다.고월영은 놀라서 “강현준! 너는 현우씨의 사황형이자 나의 사황형이기도 해!”라고 소리쳤다. “너는 이혼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니가 현우의 낭자가 되기 싫으면 이 본왕한테는 밖에 있는 여자일 뿐이야!”“밖에 있는 여자야, 본왕이 가지려면 가지고 그 누구의 체면도 줄 필요가 없어!”그는 갑자기 손을 들었다. 밖에 서있던 안비도 똑똑히 들었는데 그것은 고월영의 옷을 찢는 소리였다. “현아, 멈춰! 그녀는 현우의 낭자야! 현아!”안비는 힘껏 지언을 밀쳤는데 지언의 거대한 체구는 끔쩍도 하지 않았다. 안비는 화가 나서 손을 들더니 그의 얼굴을 후려치며 “비켜! 본궁이 너를 비키라고
“이러지 마세요!”고월영은 있는 힘껏 몸부림쳤으나 결국에는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신혼밤처럼 그녀의 두 손은 기둥에 묶여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남자는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고월영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지만 보지 않아도 지금 그의 모양을 알 수 있었다. “이러지 마요!”하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얇은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요!” 안비와 청아상궁, 그리고 지언은 모두 문밖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 그는 어찌 이 장소에서 이 신분으로 그녀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가?“본왕한테 비는거냐?” 강현준은 머리를 숙으리더니 입술로 그녀의 가녀린 어깨 위를 스쳐갔다. 뼈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이 고월영을 하여금 소름 끼치게 하였다. 몸에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고 감히 머리를 내려 보기도 두려웠다. 윗옷은 허리까지 끄집어 내려졌고 윗몸의 마지막 천쪼각마저 현준한테 당겨내려졌다. 고월영은 눈을 감고 잠긴 목소리로 “비나이다, 이렇게 빌게요! 제발요!”가슴이 확 조여오더니 그녀는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몸부림치려고 하였지만 또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강현준, 당신은 나한테 이럴 자격이 없어요! 자격이 없다구요!”“울고 싶어?”강현준은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창백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본왕이 네가 우는 모습을 본지가 정말로 오랜 시간이 지나갔지?니가 울 때의 모습이 진짜 매혹적인데 다시 한번 본왕한테 우는 모습을 보여줄래?”고월영은 입술을 깨물었고 눈물은 눈가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굳게 참고 울 수가 없었다. 그는 빌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눈물은 그의 앞에서는 아무 가치도 없었다.누구한테 우는 모습을 보여주려고?그녀는 절망적이였다. 실력 차이가 너무 현저하다. 그가 하려고 하는 일이면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고월영이 생각지 못한 것은 강현준이 발광할 때 이 정도로 무서운 단계까지 이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심지어 그의 모비마저도 신경
강현준은 손을 흔들었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고월영을 묶었던 천은 끊어졌다. 고월영은 온몸이 나른해서 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그는 단지 마음대로 손을 들었을 뿐인데 고월영은 그에게 들려 침상에 뿌려졌다. 그녀는 놀라더니 황급히 옷을 정리하였다. 겨우 옷을 찾아입고 바라보니 방안에는 더 이상 강현준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강현우는 문가에 서서 감히 그녀를 볼 염두가 나지 않았다. 자기의 눈이 그녀의 몸을 더럽힐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더럽혀진 지가 오래되었다. “영아야” 침상에서 옷을 입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강현우는 조심스레 “다 됐어?”라고 물었다. 고월영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옷은 입었지만 신체의 감각은 아직 회복이 안 되었다. 마치 그 나쁜 자식이 그녀의 몸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듯 두 다리 사이에는 참을 수 없이 시리고 쓰렸다. 강현우는 드디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이미 옷을 모두 입은 것을 보고 몸을 돌려 침상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도 눈물흔적이 남아있었다. 강현우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손을 내밀어 그녀를 도와 닦아주려고 하였다. 고월영은 고개를 돌려 현우의 손이 자기를 닿지 못하게 하였다. 강현우의 손은 반공에서 떠 있었고 다시 거두어드릴 수가 없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조심스레 “영아야, 아직도 나에게 화가 나 있느냐?”라고 물었다. 고월영은 원래 그를 거들떠보지 않으려고 했었다. 현우에게 화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어떤 태도로 그를 반겨야 할지를 알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조심스러움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녀는 입을 열고 무력하게 “제가 왜 현우씨에게 화를 내겠어요? 이런 일들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나요?”라고 물었다. 이 말을 하고 나서야 목소리가 이처럼 잠긴 걸 알게 됐다. 짙은 콧소리를 띠었다. 방금전에는 정말로 울었던 것이다. 아픔과 당황함에 놀라 울었던 것이다. 자신은 충분히 건강하다고 생각했었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