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는 직접 저부로 가지 않고 먼저 관아로 가서 문지기와 관청 심부름꾼 여럿을 불러 그들을 증인으로 내세우려 했다. 또 예친왕와 소요공을 모시고 함께 갔다. 그들더러 증인이 되어달라 했다. 도대체 누구의 업신여김이 도가 지나친지 한번 보기로 했다.저수부는 오늘 조회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기분은 아주 나빴다.저명양은 어젯밤 밖에서 온밤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기왕과의 혼사를 취소해 달라고 했다. 실은 자신이 우문호와 이미 사사로이 종신대사를 결정했다면서 초왕의 신물까지 내놓았다. 그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이 손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어찌 보아내지 못했겠는가? 하여 그녀를 관계치 않고 그녀더러 그냥 밖에 무릎을 꿇고 있으라 했다. 무릎을 꿇어 죽게 될 때까지 말이다. 아침이 되자마자 걱정이 태산이었던 저 대부인이 저명취를 불러들여 그녀더러 저명양을 설득하게 했다.그래서 저명취도 친정으로 돌아왔다. 저명양이 죽어도 우문호한테 시집가겠다는 말을 듣고 그녀도 놀랐다 그녀는 조부가 거주하는 정원 밖으로 왔다. 오래 꿇어 앉아 있던 저명양은 휘청거렸다. 원래의 아름답고 열렬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한떨기 서리 맞은 황화채(黃花菜)마냥 조금의 생기도 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오히려 아주 확고했다. “동생, 이게 무슨 고생이니? 기왕한테 시집가는 게 싫어?”저명취가 타일렀다. 저명양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누구에게 시집가든 언니랑 무슨 상관인데요? 언니는 당연히 내가 초왕에게 시집가는 게 내키지 않겠죠. 언니가 행복하지 않다고 다른 사람들도 다 불행하기를 바라면서 말이죠.”저명취는 조금 화가 났다. “너 말을 왜 그렇게 거칠게 해? 내가 너에게 미움을 산 적도 없는데.”“그럼 저를 건드리지 마세요. 우리 서로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해요.”저명양이 냉랭하게 말했다.저명취는 기가 막혔다. “너 이렇게까지 누구한테나 다 거칠게 굴어야겠어? 난 좋은
우문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채찍을 빼앗고 던져서 바로 그녀의 목에 걸더니 다시 힘들이지 않고 서일의 허리띠를 풀어 채찍에 연결했다. 그는 허리띠를 끌고 공중으로 솟아올라 직접 저명양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았다. 이 동작은 단숨에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초왕부의 문 앞에 목을 매고 죽을 필요 없어. 바로 여기에서 죽어버리면 돼.” 서일은 재빨리 옷이 흘러 내리지 않게 자신의 허리춤을 안았다. 이 거동에 저씨 집안의 하인들과 시위들은 놀라서 급히 달려 나와 도우려 했다. 우문호는 대노하며 고함을 질렀다. “누가 앞으로 나서기만 하면 본왕은 먼저 그를 폐인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저명양의 얼굴은 숨이 막혀 벌겋게 달아올랐다. 두 눈알도 금방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두 다리로 발버둥쳐 보았다. 발버둥칠수록 목은 더 옥죄여왔다. 그녀의 목에서는 ‘꺽꺽’하는 소리가 났다. 도움을 간청하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시녀 만아가 갑자기 덤벼들며 말했다.“왕야께서 힘없는 여인을 괴롭히시다니요. 참으로 악랄합니다!” 우문호가 이 시녀의 몸매와 키를 보더니 저수부로 분장하여 그에게 그 미심쩍은 짓거리들을 한 사람은 아마 그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각 부아가 치밀어 올라 발길을 날려 힘껏 그녀의 아랫배를 차버렸다. 그녀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날아간 후 두 발로 벽을 박차더니 시위를 떠난 화살마냥 다시 날아오면서 손으로 비수를 날려 허리띠를 끊어버렸다. 저명양은 곧장 아래로 추락했다. 그녀는 달려가서 받으러 했다. 이미 채찍을 가져온 우문호는 그녀를 향해 채찍을 날렸다. 그녀가 피하기만 하면 저명양은 땅에 떨어진다. 아니면 이 채찍을 고스란히 맞으며 저명양을 받아야 했다. 채찍이 도달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채찍이 그대로 그녀의 머리꼭대기를 후려갈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줄기의 붉은 흔적이 남겨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 저명양을 받아 천천히 땅 위에 내려 놓았다. 저명양은 땅에 내려지자 숨을 헐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저수부의 막대기가 내리쳐졌다. 방망이가 살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저명양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 뒤로는 죽기내기로 이를 악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저명취가 급히 뒤쫓아 왔다. 그 광경을 본 그녀가 달려왔다. 하지만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 막대기가 한 대 한 대씩 저명양의 등과 다리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뜻밖에도 말할 수 없는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저명양은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이 한대에 저수부는 아주 큰 힘을 들였다. 피부가 찢기고 터졌다.만아가 달려들어 저수부의 나무 막대기를 빼앗으려 했다. 우문호는 잔 하나를 쥐어 그녀에게 던졌다. 잔은 만아의 이마에 부딪쳤다. 곧 선혈이 낭자했다. 만아는 머리를 들고 음험하게 우문호를 보았다. 피가 아래로 뚝뚝 떨어지니 형용할 수 없이 음산하고 공포스러웠다. “초왕, 당신은 여인과 따지려 드네요. 정말 남자답지 못해요.”“저씨 집안의 노비는 이렇게 방자할 수 있군요. 본왕의 식견이 넓어졌습니다.”예친왕이 냉랭하게 말했다.저수부의 나무 막대기는 만아의 몸에 내려쳐졌다. 만아는 이를 악물며 버텼다. “어르신, 때리십시오. 이 노비를 때려 죽이시고 둘째 아가씨를 용서해 주십시오.”저씨 집안의 사람들이 잇달아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저명양의 부모도 마침 도착했다. 저명양이 맞아서 거의 의식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급히 막아서며 땅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저명양은 땅에 엎드려 있었다. 너무 아파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입술도 깨물어 터져서 아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우문호를 보더니 팔꿈치를 약간 들어올리며 모진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오늘 저에게 했던 모든 일들을 가슴 깊이 새길 거예요. 훗날 열 배로 갚아줄 겁니다.” 우문호는 그녀를 아예 보지도 않았다. 속으로 센 곤장이 서른 대를 넘기자 그의 화도 많이 누그러졌다. 그가 일어서서 저수부를 향해 말했다. “수부, 저는
저수부는 자신이 정말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술을 올리라 명했다. 그는 소요공과 나한 침대에 앉아 가부좌를 한 채 술을 마셨다.“다섯째 그 녀석도 그래, 좀 쩨쩨했지.”소요공이 웃으면서 말했다.“너무 마음에 두지 마.”저부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쩨쩨하다고?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공처가인 거겠지.”소요공이 웃으며 술잔을 들어 그의 것과 부딪쳤다.“그 말에 반박하지 않겠어. 확실히 그랬어. 여인을 위해 정말 필사적이었지, 자네의 미움을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이야.”저수부가 그를 흘겼다.“그는 황실의 사람이야, 내 미움을 사는 게 어때서? 그럼 안되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는 건 그렇다 쳐도, 자네와 내가 무슨 사이인데 어찌 자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자네에게 좋은 술을 대접하면 안됐었어.”말을 마친 그가 손을 뻗어 가로채려 했다.소요공은 그의 손을 찰싹 때리며 입을 쩝쩝댔다.“됐어, 됐어. 인색하긴, 두 마디 말했다고 귀에 거슬려 할건 뭐람. 요 몇 년 동안 저씨 집안에서 좀 제멋대로 굴었어? 자네 정말 아랫사람들을 관리해야겠어. 어디서 온 배짱인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지게 구는 거야? 어린 계집이 감히 친왕에게 행패를 부리며 그가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질 않나.”그가 자신의 얼굴을 때렸다.“낯은 어쩔 거야? 낯은? 내가 다 자네 대신 부끄럽군.”저수부가 차갑게 말했다.“관리라고? 적게 한 줄 아나? 내가 바쁘단 걸 자네도 알잖아. 부중의 일은 다 맏이한테 맡겼지만 그는 성정이 모질지 못해. 됐네, 됐어. 운이 다 한다면 그건 조상님의 복이 다 했다는 뜻이야. 내가 관 냄새를 맡을 나이에 아직도 그들을 관리해서 뭐하나? 죽을 사람은 죽어야지. 심란하지 않게 말이야.”“”자넨 죽어서도 편치 못할까 봐 걱정되는 군. 언젠가 자네가 들들 볶여 관에서 뛰쳐나올 듯싶어.”소요공이 회향콩을 먹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수부가 손을 내저었다.“이 얘기는 그만하지. 자네가 보기엔 초왕은 어떻던가?”“말했잖아, 쩨
만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온몸이 지저분한 소년의 눈빛은 차가웠고 적의가 가득했다. 그녀가 눈물을 훔치고는 말했다.“내가 네 집에 앉은 거야? 미안해, 자리를 좀 옮길게.”“넌 손발이 멀쩡하잖아. 일거리를 찾아.”소년이 냉랭하게 말했다.“왜 구걸을 하냐?”만아가 울음을 터뜨렸다.“난 남강인이야. 어느 집안에서도 남강 출신 여종을 원하지 않아.”“부두에 가서 큰 짐을 날라. 넌 손발이 튼튼하고 힘이 있잖아.”소년이 앉더니 배를 만졌다. 오늘도 역시 헛물만 켰다. 그는 이틀 동안 먹을 것을 얻지 못한 채 뱃속 가득 물만 채웠다.만아가 몸을 일으켜 떠났다.얼마 후 그녀가 돌아왔는데 손에는 찐빵 두 개를 쥐고 있었다. 그녀가 소년에게 찐빵을 건넸다.“내가 사주는 거야.”소년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너….”“훔친 게 아니고 내가 산 거야.”그녀가 자신의 귓불을 매만졌다. “원래 주인 댁에서 은귀걸이를 주셨어. 그걸 팔아서 돈 좀 바꿨지.”“너 거지가 아니었어?”소년은 그것을 건네 받아 조금씩 떼먹으며 오랫동안 씹고 나서야 삼켰다.“아니야.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아.”만아가 서글프게 말하며 앉아서 소년을 바라봤다.“부두에 큰 짐을 나르는 곳 말이야, 여인을 받아줄까?”소년이 고개를 저었다.“아마 안 받아 줄걸.”만아가 한숨을 내쉬며 벌겋게 부은 눈을 문질렀다. 어쩌면 좋을 지 몰랐다.소년이 말했다.“너 권법 할 줄 알아?”“조금.”소년이 말했다.“내일 서집(西集)에 한번 가봐. 어떤 집안에서 권법을 하는 시녀를 구한다더라.”“나는 남강인이라니까.”만아는 일반 사람들이 남강인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년은 조금 짜증이 났다.“시도는 해보란 말이야. 안되면 그때 가서 다시 보면 되고.”“응, 알겠어.”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년은 참 괜찮은 사람 같았다.***한편 우문호는 왕부로 돌아가서 어떻게 저명양에게 죄를 물었는지, 어떻게 가법으로 다스려졌는
희씨 어멈과 아사는 요 이틀 사이 조금 바빴다. 부중에는 일손이 부족했다. 특히 나중에 어린 세자가 태어나면 각종 일로 더 바쁠 터였다. 때문에 왕부에는 믿을 만한 사람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좋기는 권법을 할 줄 아는 자여야 할 것이다. 이 건의는 아사가 했다. 왕비가 출입할 때 신변에 권법을 할 줄 아는 시녀가 따라다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하여 다음날 아침부터 아사는 희씨 어멈을 이끌고 서집에 갔다. 그들은 초왕부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몇몇 실력이 좋은 시녀를 구해 부인을 시중들게 한다고 했을 뿐이다. 내세운 가격이 퍽 훌륭한지라 매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적합한 이를 찾지는 못했다. 아사의 요구는 매우 높았는데 그녀와 십 수를 겨룰 수 있어야만 받아들이려 했다.안타깝게도 삼 수를 버티는 이도 적었다.오늘도 좌판을 벌렸더니 노예상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사가 손을 내저었다.“됐네, 우리가 알아서 구하겠어.”그녀는 노예상을 믿지 않았다. 말하는 법, 성격까지 모든 항목을 가르쳤으니 진심을 보아낼 수 없었다.노예상이 웃었다.“이미 이, 삼 일이나 나오셨지만 한 사람도 못 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소인 수중의 이들을 한번 보시지요. 각양각색의 미녀들이 다 있답니다.”아사가 언짢은 듯 말했다.“누가 언제 미인들을 요구했어? 우리가 원하는 건 마음가짐이 순수하며 올곧고 권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저리가, 길 막지 말고. 이제 곧 사람이 올 테니.”노예상이 재미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이때 한 사람이 다가왔다. 튼튼해 보이는 소녀였다. 아사는 먼저 권법에 대해 물어봤다. 소녀는 자신의 힘이 세다며 단번에 쇠솥을 들어올릴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겨뤄보니 아사는 발을 한 번 걷어차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쇠솥을 들어올리는 것은 쓸모가 없어 보이네요.”아사가 탄식했다.희씨 어멈이 웃었다.“그만 하시지요, 몇몇 튼튼한 이를 찾으면 될 겁니다. 요즘 무예를 배운 소녀들은 아주 적으니까요.”희씨 어
서일이 아사를 쳐다보며 물었다.“뜬금없네요. 그냥 본 것 같다고만 왜 뻔뻔스럽다고 그래요?”“분명 그녀가 예쁘니 어디서 본 것 같다고 한 거겠죠. 전 당신과 같은 호색가들을 많이 봤어요.”서일은 얼이 빠져있다가 그녀를 덥석 끌어당기며 벽으로 밀쳤다.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아사를 자신의 커다란 그림자 속에 가뒀다. 그가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며 근엄하게 말했다.“똑바로 말해봐요, 누가 호색가라는 겁니까?”아사는 깜짝 놀라서 얼른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며 밀쳐냈다. “무슨 짓이에요?”그녀가 밀치면서 손가락이 서일의 눈을 찔렀다. 서일이 급히 손을 올려 찰싹 때렸다. 아사도 손을 뻗어 때렸다. 하여 두 사람은 결국 겨루기 시작했다.서일이 크게 화를 냈다.“왜 자꾸 생트집을 잡아요? 당신 성이 원씨라서 내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해요? 계속 나한테 멍청하다 하는 것도 당신에게 따지지 않았어요. 지금은 아예 저더러 호색한이라면서 제 눈알을 파버리려고 하고 있네요.”아사가 화를 냈다.“난 그저 당신과 농담한 것 뿐이에요. 돼지 머리라서 모르는 거예요?”“당신이야말로 돼지 머리에요.”“댱신이 돼지 머리가 아니면 누가 돼지 머린데요?”아사가 불쑥 앞으로 몸을 날리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서일은 그녀가 또 손을 대려고 하자 손을 뻗어 그녀를 밀쳤다.“꺼져요…”아사는 머릿속이 ‘펑’하고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머문 위치를 보노라니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녀가 하늘을 뒤흔들 듯 소리를 질렀다.“서일, 이 망할 호색한 같으니라고. 감히 나를 희롱해?”그녀가 펄쩍 뛰며 서일의 뺨을 갈겼다. 서일은 한 손으로 뺨을 감싸며 다른 한 손을 거뒀다. 그가 경악에 차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가슴을 쳐다보았는데 그의 얼굴빛이 공포로 물들었다.“세상에, 당신이 여인이라니.”“빌어먹을. 내가 여자인걸 몰랐어요?”아사가 노성을 질렀다. 서일이 목을 움츠러뜨리며 억울한 듯 말했다.“당신 항상 왁자지껄했잖아요. 누가 당신이
원경능은 처음에 정신을 딴 데 팔며 대충 듣고 있었지만 그녀의 비분에 가득 찬 말투를 듣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여인으로서, 기왕비도 다른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다.선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쓸쓸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한 사람이 독한 마음을 먹고 악랄한 수단을 사용했던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무리 그녀가 처참한 일을 당해도 공감이 가지 않았다.원경능이 말했다.“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생각할 줄 안다는 거예요. 어떤 일은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죠. 모든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선(線)이라는 게 있어요. 모든 사람이 그래요. 당신은 많은 악행들을 저질렀어요. 그건 모두 당신이 기꺼이 원해서 한 일이죠. 누구도 당신에게 강요한 적 없어요. 기왕이 당신보다 백배는 악하다고 해서 당신이 무고한 게 아니에요.”“난 무고하지 않아요. 난 내가 무고하다고 말한 적 없어요.”기왕비는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당신이 내 죄상들을 셀 필요는 없어요. 난 내가 병에 걸린 게 인과응보란 걸 알아요.”“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원경능이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기왕비는 낙담한 듯 보였다.“당신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우린 말이 통하지 않을 겁니다. 전 당신이 누군가에게 괴로움을 호소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기왕의 무정함을 털어놓거나 공감할 사람을 찾아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위해 변명하려 하죠.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될 수 없어요. 사람 잘못 찾았어요.”기왕비가 냉랭하게 말했다.“뭘 그렇게 기고만장해있어요? 당신은 지금 다섯째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자신의 처지를 잊을 만하죠. 만약 당신이 시집 오자마자 다른 여인들과 총애를 다퉈야 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부군의 마음을 붙잡아야 한다면 당신도 저처럼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원경능이 고개를 저으며 엄숙하게 말했다.“저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