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섭정왕 전하께 드리는 저의 답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 드리는 거예요. 귀찮으시겠지만 섭정왕 전하께서 소인을 대신해 폐하께 전해주셨으면 합니다.”북진연은 나무 상자를 건네받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렇게 북진연이 돌아간 후, 온사는 다시 경문을 베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사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바로 막수 사태였다! “무우야.”막수 사태는 진지하게 경문을 필사하는 온사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사부님?”온사가 이내 붓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섭정왕 전하께서 그림자 호위 한 명을 데려왔다지?”“예. 감사히 받았습니다. 제가 추월이라는 이름도 지어줬어요! 그 아이를 만나보시렵니까?”사람을 수월관에 들이는 일은 막수 사태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럴 필요까지 없다. 네 사람이니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막수는 손사래를 치고는 온사가 건넨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아 보거라. 내가 너한테 긴히 물어볼 게 있으니.”온사는 찻잔을 내려놓고 사부의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무슨 일입니까?”막수는 온순한 그녀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너… 최근에 독약을 연구하고 있었니?”온사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다급히 해독약을 그녀에게 먹여준 사람이 바로 사부였으니 말이다.“예.”온사는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막수 사태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불가에 발을 들인 제자는 독을 연구하면 안 되는 겁니까?”막수 사태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아니다. 독이라도 잘 쓰면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거니까.”온사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막수 사태가 말을 이었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몰래 독을 연구하는 것은 안 된다.”막수는 엄중한 표정으로 온사를 바라보았다.“그날 자칫 잘못했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어.”“하지만 사부님, 저 이미 독경을 손에 넣은걸
갑작스러운 상황에 온사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사부님이… 독왕이셨다고요? 귀의라고 불리는 독왕이요?”막수 사태가 눈썹을 찡긋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대명 왕조에는 두 명의 유명한 의술 천재가 있었다.한명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의성 임자부, 그리고 또 한명은 의술과 독학을 겸비한 귀의 독왕이었다.그들의 명성은 안방에서 곱게 자란 온사마저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중 신출귀몰하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귀의 독왕이었는데, 소문에 지금까지 귀의 독왕의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그런데 오늘 온사가 그런 인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신비에 둘러싸인 귀의 독왕이 여승들만 사는 허름한 사찰의 주지 사태인 줄을 누가 알았을까?“그럼 사부님, 정말 저에게 독학을 가르쳐 주신다는 말씀인가요?”“왜? 싫으냐?”“그럴 리 없잖아요!”온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냥 제가 이렇게 큰 행운을 가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요.”안 그래도 직전에 북진연이 믿을만한 스승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일깨워 줬었는데 독왕이 바로 신변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게다가 그렇게 대단한 분이 자신의 사부라니!온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지금 기뻐하긴 일러. 독학을 배워주는데 있어서 만큼은 나도 아주 엄격할 거니까.”막수는 온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니 지금은 먼저 날 따라서 의술부터 배우겠다고 맹세하렴.”“무슨 맹세요?”막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불가에서 해서는 안 될 것 중에 하나가 살생이야. 독을 배우겠다면 그 독으로 절대 살인을 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그러자 온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그녀는 한참의 고민 끝에 막수에게 말했다.“걱정 마세요, 사부. 비록 독을 이용해서 복수할 생각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제 신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녀는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는 이유로 가문을 떠났고 나라를 위해 기도
오늘의 온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태어나기를 성녀로 태어났다고 감탄하며, 앞으로 본분을 다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성녀로 존중해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온사 본인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진짜 성녀로 거듭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삼촌, 보세요. 짐이 선택한 성녀 괜찮지요?”한편, 어린 황제는 조정의 대신들과 백성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그는 점점 더 온사가 마음에 들었다.처음에는 그저 기회를 준 것뿐이었지만, 그녀가 지금 보여준 모습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폐하의 안목이 참 탁월하십니다.”북연진도 어린 황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동안 온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북연진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기도 의식에 필요한 경문은 총 아홉 장,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전부 암기해서 읊어야 했다.이것이 온사가 급하게 수월관으로 돌아온 이유이기도 했다.다행히도 남은 며칠 동안 막수 사태의 도움으로 그녀는 결국 기도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아홉 장절의 경문을 모두 암기하는데 성공했다.“그런데 나보다 나이도 많은 영감탱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어요.”어린 황제는 피식 웃으며 온씨 가문 일행을 힐끗 바라보았다.온자신을 제외한 온씨 가문의 모두가 무대 아래에서 행사를 참여했지만, 온권승은 그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관망대에 올라간 딸을 바라볼 뿐이었다.온장온과 다른 형제들의 표정은 착잡했다. 지금도 그들은 여동생이 성녀이자 여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리고 온사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눈빛 한번 안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분명 가족인데도 그녀는 그들을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대하고 있었다.“온사 쟤는 정말 저렇게까지 우리랑 멀어지고 싶은 걸까?”하지만 온장온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그건 아닐 겁니다.”옆에 있던 온자월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집에서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먹으면서
“수상한 여자?”온사는 멈칫하며 되물었다.“사람들과 같이 오고 있어?”“아니요. 혼자인 것 같았습니다.”온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그럼 넌 일단 숨어 있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예.”추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자취를 감추었다.온사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밖으로 향했다.막 대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손바닥이 그녀의 얼굴을 향했다.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온사는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피하고는 손을 뻗어 상대의 귀뺨을 쳤다.선수를 치려다가 된통 당한 온모는 얼굴을 감싸며 분노해서 소리쳤다.“온사, 네가 감히 나를 쳐?”“그래 쳤다. 그래서 뭐?”온사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정말 머리가 안 좋은 건가. 내가 또 말해줘야 해? 내가 널 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말이야.”“너!”분노한 온모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온사가 더 빨랐다. 그녀는 바로 상대의 손목을 낚아채고 주저없이 귀뺨을 날렸다.짝!방금 전보다 더 찰진 소리가 들려왔다.온모는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매를 맞은 탓에 볼이 빵빵하게 부어올랐다.온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디 다시 쳐봐. 내가 한대라도 맞나?”진작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전에는 기회가 없어서 못했는데, 그럼 지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온사는 몇 대 더 때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그러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온모가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그녀는 힘겨루기로 온사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화제를 돌렸다.“언니, 어떻게 동생한데 이렇게 할 수 있어? 내가 당장 폐하한테 가서 이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위선자 같으니라고! 네 본모습을 폐하한테 다 까발릴 거야!”“동생?”온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웃기지 마. 내 어머니는 내게 여동생을 낳아주지 않으셨어.”“그래. 같은 배에서 나온 게 아닌 건 인정해. 하지만 그래서 뭐?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다들 날 친딸,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챙겨줬어.”온모는 의기양양하게 온사를 도발했다.
온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온사가 자신도 몰랐던 정곡을 찔렀으니 말이다. 그녀는 독기 어린 눈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온씨 가문에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거야?”온사도 사실 그럴 생각이었지만 온모가 편하게 살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온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상황을 봐야겠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되면 돌아가서 진국공부의 적녀의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적녀라는 두 글짜가 온모의 자존심을 찔렀다.대외적으로 그녀는 온권승이 은인의 딸을 입양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단지 그녀의 어머니가 정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제대로 따지면 온모는 서녀의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비천한 사생아에 불과했다.온사의 어머니인 란자군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우고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써넣지 않는 한은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영원히 온사를 뛰어넘어 진국공부 적녀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전생의 온모가 죽은 온사의 어머니를 괴롭혔던 이유기도 했다.“꿈 깨!”온모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며 잔뜩 분노한 눈으로 온사를 노려보았다.“가문에서 나갔으면 다신 돌아오지 마!”온사의 말은 일부분 사실이었다. 그녀는 온사를 집에 다시 데려다가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기를 원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온사는 이미 예전처럼 그녀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는 것보다는 밖에서 해결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온모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는 등 뒤가 무엇인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돌린 온사의 눈에는 막수 사태와 다른 사태들의 싸늘한 눈동자가 들어왔다.“이곳은 수월관 승려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입니다. 함부로 침입하지 마시지요.”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흉악한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온모는 처음부터 이 여승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그래서 곧바로 표정을 수습하고는 온사에게 미
“우쭈쭈.”“먹어, 언니, 왜 안 먹어?”어두컴컴한 밀실에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온사가 숨죽인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몸에 있는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목과 사지를 묶어 빠져나갈 수 없게 했다.그녀의 앞에는 노란색 옷를 입고 있는 소녀가 개 먹이를 들고 개를 놀리는 것처럼 그녀를 놀리고 있었다.웃을 때 보조개가 예쁘게 생기는 이 소녀는 그녀의 여동생 온모였다.온모는 뒤에 있던 시녀에게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이거 봐, 우리 언니 진짜 쓸데없다니까? 개로도 못 쓰겠어. 이 몸이 직접 먹여주는데도 감히 안 받아먹잖아.”시녀는 곧장 앞으로 가 바닥에 있던 사람을 걷어찼다.차인 사람이 힘겨운 소리를 내자, 그제야 시녀는 온모를 달랬다.“아가씨, 그러지 마세요. 이 개가 아직도 자기가 국공부 정실 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온모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온사가 정실 딸은 무슨, 아버지랑 오라버니들도 다 모르는 사람이라는데, 개로 써주는 것도 얘한텐 영광이지.”“불쌍한게 눈치도 없어.”온모는 차가운 말 한마디를 던지고 온사의 손을 있는 힘껏 짓이겼다.너무 세게 밟은 탓에 손가락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고, 온사는 고통스러운 듯 흐느꼈다.“온사, 내가 마지막 기회 한 번 더 줄게, 그 옥패 내놔.”“흐…… 흐흐……”이미 정신이 조금 희미해진 온사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힘겹게 반응했다.그녀는 힘없는 웃음을 내뱉고 말했다.“온모, 너 헛된 희망 가지지 마……”옥패는 어머니가 그녀에게 물려준 유일한 물건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는 절대 온모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멍청한 것, 네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온모는 눈에서 불을 뿜을 것처럼 화를 냈다.마침 이때, 밖에 있던 누군가에 의해 밀실의 문이 열리고, 실루엣 몇 개가 밀실로 들어왔다.온모는 그들을 돌아보고 급히 개 사료를 시녀의 품에 숨기며,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듯 순식간에 순수하고 귀여운 얼굴로 바뀌더니 기뻐하며 그들에게 달
성년식?성년식은 진작 끝났잖아?그녀는 성년식 당시에 겪었던 치욕들을 지금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손님들의 비웃음, 오라버니들의 조롱, 혼인 상대의 파혼, 그리고 부모님의 질책……그녀는 이미 그런 일들을 한번 겪었었다.근데 지금 또 웬 성년식?설마 온모가 또 무슨 새로운 수작을 부려서, 그때 그 치욕을 다시 겪게 하고 죽이려는 건가?!온사는 순간 숨이 가빠졌다.감정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던 그때, 갑자기 그녀의 시선이 멈추었다.잠깐!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깨끗한 자신의 손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보고 서서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손과 발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다 괜찮아진 걸까?이게 가능한 일인가?분명 그녀의 손과 발의 힘줄은 전부 끊어져서 절대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정도였다.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온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모든 장식품들이 서서히 기억과 합쳐졌다.그녀는 방 한편에 있는 화장대로 시선을 옮겼다.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니 구리로 된 거울에 서서히 가녀린 실루엣이 비쳤다.앳되고 멀쩡한 얼굴 그리고 풋풋한 옷차림……이건 분명 온모가 그녀의 얼굴을 망가뜨리기 전일뿐더러, 아직 어른이 되기도 전의 모습이었다.멀쩡한 손과 발, 익숙한 방 그리고 이 상처 하나 없는 얼굴……온사는 갑자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추측이 떠올랐다.……설마 다시 태어난 건가?게다가 성년식 날로 돌아간 건가?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온사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미친듯한 표정을 지었다.맞다, 맞아……그녀는 진작 온자월의 검에 베여 죽었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게다가 다시 태어나다니?!하!하늘은 그녀를 농락하는 걸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그녀는 분명 다시는 온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하늘은 그녀를 다시 온씨 가문의 딸로 태어나게 했다.온사는 피가 날 지경으로 입술을 깨물었다.비릿한 피의 맛이 느껴지고 나서야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았지만 시중드는 하녀가 없어 스스로 머리를 빗던 소녀는 뒤돌아 그를 보더니 역겨움을 참고 조용히 말했다.“둘째 오라버니.”방으로 들어온 온자신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온사에게 말했다.“뭐 좀 물어보자, 막내 관복 네가 망가뜨린 것이냐? 왜 그렇게 못된 것이야? 분명 오늘은 막내의 성년식 날이기도 하거늘, 막내 관복을 망가뜨리다니!”흥분한 온자신이 온사에게 묻던 그때, 온사가 뼛속까지 미워하던 사람이 온자신의 뒤에서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내밀었다.“둘째 오라버니, 그만두세요. 제가 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언니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실수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온모는 가녀린 몸과 귀여운 외모로 항상 지켜줘야 할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누구든 그녀의 겁먹은 사슴 같은 눈망울을 본다면 동정심이 생길 것 같았다.그녀도 자신의 강점이 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특히 진국공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온모는 겨우 반년 전에 진국공 저택의 사람이 찾아서 데려왔기 때문이었다.아버지는 그녀가 3살 때 누군가에게 납치당했고, 어렸을 때부터 밖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했다.그래서 온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온모를 안쓰럽게 생각했고, 최대한 보상해 주려고 했다.온사 역시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어쨌든 온모도 그녀의 친동생이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순진한 생각 때문에 전생에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렀다.그런 온모의 얼굴을 다시 보자, 온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었다.“막내야! 너는 어찌 그리 착하게만 구는 것이냐? 분명 다섯째의 잘못인데, 네가 어찌 그리 감싸고도는 것이냐?”“아니라니까요, 아이고, 둘째 오라버니, 어찌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십니까.”온모는 이 말을 하면서 심지어 고개를 돌려 온사에게 사과까지 했다.“언니 미안해. 다 내가 말을 잘 못하여 제대로 설명 못해서 그런 것이야. 둘째 오라버니께 노여움을 풀면 안 될까? 오라버니께서 날 너무
온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온사가 자신도 몰랐던 정곡을 찔렀으니 말이다. 그녀는 독기 어린 눈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온씨 가문에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거야?”온사도 사실 그럴 생각이었지만 온모가 편하게 살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온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상황을 봐야겠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되면 돌아가서 진국공부의 적녀의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적녀라는 두 글짜가 온모의 자존심을 찔렀다.대외적으로 그녀는 온권승이 은인의 딸을 입양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단지 그녀의 어머니가 정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제대로 따지면 온모는 서녀의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비천한 사생아에 불과했다.온사의 어머니인 란자군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우고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써넣지 않는 한은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영원히 온사를 뛰어넘어 진국공부 적녀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전생의 온모가 죽은 온사의 어머니를 괴롭혔던 이유기도 했다.“꿈 깨!”온모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며 잔뜩 분노한 눈으로 온사를 노려보았다.“가문에서 나갔으면 다신 돌아오지 마!”온사의 말은 일부분 사실이었다. 그녀는 온사를 집에 다시 데려다가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기를 원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온사는 이미 예전처럼 그녀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는 것보다는 밖에서 해결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온모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는 등 뒤가 무엇인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돌린 온사의 눈에는 막수 사태와 다른 사태들의 싸늘한 눈동자가 들어왔다.“이곳은 수월관 승려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입니다. 함부로 침입하지 마시지요.”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흉악한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온모는 처음부터 이 여승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그래서 곧바로 표정을 수습하고는 온사에게 미
“수상한 여자?”온사는 멈칫하며 되물었다.“사람들과 같이 오고 있어?”“아니요. 혼자인 것 같았습니다.”온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그럼 넌 일단 숨어 있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예.”추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자취를 감추었다.온사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밖으로 향했다.막 대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손바닥이 그녀의 얼굴을 향했다.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온사는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피하고는 손을 뻗어 상대의 귀뺨을 쳤다.선수를 치려다가 된통 당한 온모는 얼굴을 감싸며 분노해서 소리쳤다.“온사, 네가 감히 나를 쳐?”“그래 쳤다. 그래서 뭐?”온사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정말 머리가 안 좋은 건가. 내가 또 말해줘야 해? 내가 널 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말이야.”“너!”분노한 온모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온사가 더 빨랐다. 그녀는 바로 상대의 손목을 낚아채고 주저없이 귀뺨을 날렸다.짝!방금 전보다 더 찰진 소리가 들려왔다.온모는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매를 맞은 탓에 볼이 빵빵하게 부어올랐다.온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디 다시 쳐봐. 내가 한대라도 맞나?”진작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전에는 기회가 없어서 못했는데, 그럼 지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온사는 몇 대 더 때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그러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온모가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그녀는 힘겨루기로 온사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화제를 돌렸다.“언니, 어떻게 동생한데 이렇게 할 수 있어? 내가 당장 폐하한테 가서 이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위선자 같으니라고! 네 본모습을 폐하한테 다 까발릴 거야!”“동생?”온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웃기지 마. 내 어머니는 내게 여동생을 낳아주지 않으셨어.”“그래. 같은 배에서 나온 게 아닌 건 인정해. 하지만 그래서 뭐?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다들 날 친딸,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챙겨줬어.”온모는 의기양양하게 온사를 도발했다.
오늘의 온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태어나기를 성녀로 태어났다고 감탄하며, 앞으로 본분을 다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성녀로 존중해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온사 본인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진짜 성녀로 거듭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삼촌, 보세요. 짐이 선택한 성녀 괜찮지요?”한편, 어린 황제는 조정의 대신들과 백성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그는 점점 더 온사가 마음에 들었다.처음에는 그저 기회를 준 것뿐이었지만, 그녀가 지금 보여준 모습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폐하의 안목이 참 탁월하십니다.”북연진도 어린 황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동안 온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북연진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기도 의식에 필요한 경문은 총 아홉 장,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전부 암기해서 읊어야 했다.이것이 온사가 급하게 수월관으로 돌아온 이유이기도 했다.다행히도 남은 며칠 동안 막수 사태의 도움으로 그녀는 결국 기도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아홉 장절의 경문을 모두 암기하는데 성공했다.“그런데 나보다 나이도 많은 영감탱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어요.”어린 황제는 피식 웃으며 온씨 가문 일행을 힐끗 바라보았다.온자신을 제외한 온씨 가문의 모두가 무대 아래에서 행사를 참여했지만, 온권승은 그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관망대에 올라간 딸을 바라볼 뿐이었다.온장온과 다른 형제들의 표정은 착잡했다. 지금도 그들은 여동생이 성녀이자 여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리고 온사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눈빛 한번 안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분명 가족인데도 그녀는 그들을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대하고 있었다.“온사 쟤는 정말 저렇게까지 우리랑 멀어지고 싶은 걸까?”하지만 온장온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그건 아닐 겁니다.”옆에 있던 온자월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집에서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먹으면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온사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사부님이… 독왕이셨다고요? 귀의라고 불리는 독왕이요?”막수 사태가 눈썹을 찡긋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대명 왕조에는 두 명의 유명한 의술 천재가 있었다.한명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의성 임자부, 그리고 또 한명은 의술과 독학을 겸비한 귀의 독왕이었다.그들의 명성은 안방에서 곱게 자란 온사마저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중 신출귀몰하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귀의 독왕이었는데, 소문에 지금까지 귀의 독왕의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그런데 오늘 온사가 그런 인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신비에 둘러싸인 귀의 독왕이 여승들만 사는 허름한 사찰의 주지 사태인 줄을 누가 알았을까?“그럼 사부님, 정말 저에게 독학을 가르쳐 주신다는 말씀인가요?”“왜? 싫으냐?”“그럴 리 없잖아요!”온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냥 제가 이렇게 큰 행운을 가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요.”안 그래도 직전에 북진연이 믿을만한 스승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일깨워 줬었는데 독왕이 바로 신변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게다가 그렇게 대단한 분이 자신의 사부라니!온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지금 기뻐하긴 일러. 독학을 배워주는데 있어서 만큼은 나도 아주 엄격할 거니까.”막수는 온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니 지금은 먼저 날 따라서 의술부터 배우겠다고 맹세하렴.”“무슨 맹세요?”막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불가에서 해서는 안 될 것 중에 하나가 살생이야. 독을 배우겠다면 그 독으로 절대 살인을 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그러자 온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그녀는 한참의 고민 끝에 막수에게 말했다.“걱정 마세요, 사부. 비록 독을 이용해서 복수할 생각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제 신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녀는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는 이유로 가문을 떠났고 나라를 위해 기도
“이건 섭정왕 전하께 드리는 저의 답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 드리는 거예요. 귀찮으시겠지만 섭정왕 전하께서 소인을 대신해 폐하께 전해주셨으면 합니다.”북진연은 나무 상자를 건네받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렇게 북진연이 돌아간 후, 온사는 다시 경문을 베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사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바로 막수 사태였다! “무우야.”막수 사태는 진지하게 경문을 필사하는 온사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사부님?”온사가 이내 붓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섭정왕 전하께서 그림자 호위 한 명을 데려왔다지?”“예. 감사히 받았습니다. 제가 추월이라는 이름도 지어줬어요! 그 아이를 만나보시렵니까?”사람을 수월관에 들이는 일은 막수 사태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럴 필요까지 없다. 네 사람이니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막수는 손사래를 치고는 온사가 건넨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아 보거라. 내가 너한테 긴히 물어볼 게 있으니.”온사는 찻잔을 내려놓고 사부의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무슨 일입니까?”막수는 온순한 그녀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너… 최근에 독약을 연구하고 있었니?”온사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다급히 해독약을 그녀에게 먹여준 사람이 바로 사부였으니 말이다.“예.”온사는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막수 사태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불가에 발을 들인 제자는 독을 연구하면 안 되는 겁니까?”막수 사태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아니다. 독이라도 잘 쓰면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거니까.”온사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막수 사태가 말을 이었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몰래 독을 연구하는 것은 안 된다.”막수는 엄중한 표정으로 온사를 바라보았다.“그날 자칫 잘못했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어.”“하지만 사부님, 저 이미 독경을 손에 넣은걸
목소리를 들은 온사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칠호는 키도 꽤 큰 편이며 온몸을 꽁꽁 감싼 복장을 하고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특이점이 없어서 긴가민가 했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인이었기 때문이다.“섭정왕 전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온사 역시 귀족가에서 나고 자랐기에 권세가문, 특히나 황족들이 그림자 호위를 옆에 두고 육성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았다.진국공부 역시 마찬가지였다.온권승의 신변에는 그림자 호위가 있었는데, 어릴 때 아버지의 신변에서 그들을 본 것 같았는데 칠호 역시 그들이 주었던 느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보내신 그림자 호위입니다. 원래는 황실에만 속한 자들이었지만 당신은 이 나라의 유일한 성녀이고 나라를 위해 관내에서 기도를 올리고 계시니 제가 폐하와 상의 후에 전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적당한 녀석을 선별하여 데려왔습니다.”북진연은 칠호의 신분패를 온사에게 건넸다.“앞으로 성녀는 이 아이의 주인입니다. 아무리 폐하라도 성녀를 제치고 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명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온사는 북진연이 이렇게 큰 선물을 준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칠호를 신변에 두면 앞으로 온자신 일행이 또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려 할 때 그녀에게도 반격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이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다.그저 폐하가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는 말했지만, 북진연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가 아니었으면 아무리 폐하라도 이렇게 쉽게 황실의 그림자 호위를 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잠깐의 고민 후에 온사는 결정을 내렸고, 곧이어 추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너를 추월이라고 부르겠다. 관내에는 사람이 적고 조용하니 나를 따르면 조금 따분하고 무료할 수 있다.”추월이 답했다.“이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소인 주인님의 곁에 남고 싶습니다.”“그러면 그 호칭부터 바꿔야겠구나.”온사가 웃으며 말했다.“나는 출가인이니, 주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
“뭐라고? 돌아갔다니?!”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또 온사를 만나지 못했다.모든 걸 알고 왔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황궁에 도착하자 온사가 수월관으로 돌아갔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내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성녀께서는 며칠 후에 있을 기도 의식을 걱정하시어 깨어나자마자 수월관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셨습니다.”하지만 온권승의 얼굴이 분노로 퍼렇게 질린 뒤였다.단단히 따지러 준비하고 왔는데 수월관으로 돌아갔다니.만약 그녀가 황궁에 계속 있었다면 만날 핑계라도 있었을 텐지만, 이미 수월관으로 돌아갔다면 그들은 대문에 발조차 들일 수 없게 된다.‘이것도 북진연의 꿍꿍이인가?’온권승은 의심이 들었지만, 이것은 북진연이 꾸민 꿍꿍이 따위가 아니었다.온사는 온권승이 찾아올 것을 미리 예견하고 시력이 돌아온 후에 막수 사태와 함께 바로 수월관으로 돌아갔다.온권승을 만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닌, 기도 의식 준비를 마친 후에 그들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온자신이 이렇게 빨리 옥에서 나오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기분이 풀릴 때까지 옥에 가둘 생각이었다.온권승과 온장온은 그렇게 남산 산기슭까지 쫓아갔지만 그곳에는 이미 흑기군이 진을 치고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성녀를 보호하고 침입자를 엄벌한다며 진국공부의 마차를 막아섰다.그리고 온씨 성을 가진 사람은 그 누구도 산에 발을 들일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이 광경에 온권승은 순식간에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모두의 존중을 받던 진국공에게 이런 홀대와 수치는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원흉이 철없는 딸 때문이라니 더 기가 막힌 것이었다.집으로 돌아간 온권승은 적어도 기도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온사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직감했다.그리하여 화를 진정시킨 후, 이 일을 장남에게 떠맡겼다.“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우리의 태도야. 요 며칠 너희들은 번갈아가며 남산을 방문해. 만나면 좋겠지만, 못 만나더라도 폐하께 우리가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온장온은
“걔는 거기서 대체 뭘 하고 있었단 거지?”온장온은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온모는 잠시 머뭇거리는 척하다가 눈물을 쥐어 짜내며 말했다.“언니가 거기서 한 사내랑… 밀회를 하고 있는 걸 봤어요.”탁!이때, 온장온이 쥐고 있던 찻잔이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막내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니?”온사가 사내랑 밀회를 한다니!그럴 리는 없었다.아무리 온사가 막무가내에 철부지라고 하더라도 그런 발칙한 짓까지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온모가 여전히 울며 말했다.“저도 제 눈을 믿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제 눈으로 직접 보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죠. 언니에게 발각된 후로 저도 이러면 안 된다고 설득하려 했는데 언니가 저를 시냇물에 담그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협박까지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까지 했어요.”그녀의 말이 끝나도록 온권승과 온장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온권승의 얼굴은 음침하게 굳어 있었고 온장온 또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보였다.그가 아는 온사는 말도 잘 안 듣고 철이 없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불경한 짓을 저지를 아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막내를 협박까지 하다니!온권승은 길게 심호흡을 한 후, 온모에게 말했다.“일단 돌아가 보거라.”온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를 행한 후에야 서재를 나갔다.“아버지….”온장온은 착잡한 얼굴로 온권승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저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닌지 싶습니다….”“오해?”온권승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오해인지 아닌지는 불러서 물어보면 확인되겠지.”곧이어 온모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 한 명과 온자신의 처소에서 일하는 남자 시종을 불렀다.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9일 전, 막내 아가씨와 둘째 도련님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고 있느냐?”온자신 처소의 시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날 둘째 도련님은 뜰에서 무공을
한편, 온자신이 수월관에 침입해서 온사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소식을 들은 온모는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다만 그 뒤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폐하께서 온사를 위해 온자신에게 곤장 80대나 칠 줄이야!게다가 온씨 가문은 무조건 온사에게 용서를 받은 후에야 온자신을 풀어주겠다며 으름장을 늘어 놓았다.이 소식을 들은 온모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왜 그렇게까지 하지?”그녀는 폐하께서 드디어 미친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한낱 여승을 위해 진국공부를 적으로 돌리다니, 온모는 생각할수록 황당했다.‘그럼 온사는 무슨 자격으로 폐하의 보호를 받지?’현재의 온사는 진국공부의 적녀도 아니고 한낱 여승에 불과한테 왜 존귀하신 이 나라의 주인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챙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정의 상황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온모는 온사를 두둔하는 사람이 어린 황제 한 명뿐이라고 착각했다.하지만 실제로 조정의 반을 휘어잡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온권승이 서재로 부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온모는 올 게 왔구나라고 생각했다.그렇다면 온사가 수월관에서 한 짓을 까발릴 좋을 기회였기 때문이다.‘그런 더러운 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이 집에서 온사의 편은 없을 거야.’온모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냉소를 지은 후, 말을 전하러 온 하인에게 말했다.“알겠다. 아버지께 옷만 갈아입고 곧 가겠다고 전하거라.”온모는 방으로 돌아가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전에 성인식 때 온사가 소박한 옷을 입고 고아한 자태를 뽐낸 이후로 그녀는 줄곧 질투욕에 불타 있었다.그래서 요즘 그녀는 색감이 연하고 깨끗한 옷을 수두룩하게 사놓기 바빴다.온사도 그런 분위기와 자태를 갖고 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며, 온사처럼 옷을 입고 자신이 그녀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증명할 속셈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온모는 뭐가 자신에게 어울리고 뭐가 안 어울리는지를 전혀 몰랐다. 그녀가 아무리 순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