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회춘초는 내가 알아서 찾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눴던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북진연은 눈을 감고 턱을 매만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간도 크지. 이렇게 큰 비밀을 제대로 감추지도 않고 말이야.’고요 일행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살폈다.임자부는 북진연의 표정을 살피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왕야, 설마 그분에게 회춘초의 행방을 알아볼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북진연이 질문에 답하지 않자, 임자부는 그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왕야, 병세를 오래 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간을 길게 끌수록 발작의 빈도가 잦아지고 점점 힘들어질 겁니다. 회춘초가 코앞에 있는데 왜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겁니까?”“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단 회춘초만 확보하면 마지막 서홍화만 찾으면 모든 약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왜 주저하시나요?”고요 일행도 임자부의 말에 동의했다.“왕야, 어쨌거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왕야의 치료 아니겠습니까!”북진연은 부하들의 심정을 이해했다.하지만 수월관에 살고 있는 어린 소녀를 생각하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그렇긴 하지만 두 가지 약재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서홍화를 찾지 못하면 쓸모없는 일 아니냐.”그 말에 임자부와 부하들은 입을 다물었다.북진연의 말처럼 백년 자령지와 회춘초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세 번째 약재인 서홍화는 임자부가 선배들이 남긴 고대 의술 서적에서 본 것이었고 그것에 대해 들어보거나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그래서 그들은 줄곧 바다에서 바늘 찾는 식으로 온 나라를 뒤지고 다녔다.“됐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북진연은 기가 푹 죽은 부하들을 보며 담담히 위로를 건넸다.그러자 임자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북진연까지 이렇게 말하는데 더 이상 재촉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한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임자부와 고요가 방
밭을 확인한 그녀는 활짝 웃으며 냇물을 길어 밭에 물을 주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옆에 있던 회춘초에 어느새 꽃봉오리가 피어 있었다.온사는 웃으며 꽃들을 쓰다듬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그녀는 약초를 지날 때마다 약재대전을 꺼내 일일이 대조를 했는데, 그러다가 또 한 약재가 눈에 들어왔다.약재대전에서 다른 약재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있었지만 유독 이 약초만 대략적인 모양과 이름, 출처를 제외하고 효능에 대해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서홍화, 먼 타국에서 나는 약초라….”온사는 재차 대조한 후에야 이 약초가 서홍화가 맞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효능을 알 수 없어 아쉬웠다.‘한번 먹어봐?’온사는 호기심에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독성이 있는지도 모르잖아.’만약에 강한 독성을 가진 약초라면 그걸 먹고 저 세상 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그녀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막수 사부께 여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떴다.며칠 후, 온씨 가문에서 또 사람을 보내왔다.이번에는 온모가 아니었다.그녀도 혼자 온사를 찾아오면 물을 맞거나 매를 맞는 결과밖에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번에는 온자월과 함께 왔다.온장오는 조정에 나가야 하고 온자신은 옥에 있고 온옥지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같이 올 수 있는 사람은 온자월뿐이었다.마침 아침 수업을 하고 있던 온사는 사저의 전갈을 듣고 손을 저으며 사저에게 말했다.“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세요. 기다리기 싫으면 말라고요.”어차피 급한 건 그녀가 아니었다.사저는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두 사람에게 전했다.수월관 밖에서 기다리게 된 온모와 온자월의 표정을 좋지 못했다.기도 의식이 이미 끝났기에 수월관은 대문을 열고 손님을 받고 있었고 산기슭의 흑기군도 철수했다. 손님들과 신도들은 평소처럼 수월관으로 들어와서 참배하고 향을 피울 수 있었다.온자월은 수월관에 와본 횟수가 적어서 거절당한 경험도 거의 없었기에, 기다리라는 말에 짜증스럽게 말했다.“금방 입관한 막내 여승이 무슨 할 일이 그렇게
온사는 계단에 서서 둘을 내려다보며 되물었다.“그건 내가 당신들에게 물어야 할 질문 같은데요?”“온자신은 저에게 무력을 행사하고 중상을 입힌 죄로 옥에 갇혔습니다. 지금 몸에 멍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와서 풀어주라고 몇 마디 하면 제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온자월과 온모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진국공부의 자녀는 누군가에게 사과를 할 필요가 없었고 밖에서 누구에게 고개를 숙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온사 또한 오라버니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온자신이 괴팍하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라면 온자월은 고고하고 오만한 성격이었다.그는 평등하게 모두를 무시했다.그래서 온자월이 사과하러 왔다고 했을 때부터 그에게 기대 같은 것도 없었다. 이 사람은 사과의 ‘사’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둘째 형님도 그래서 벌을 받았잖니?”온자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곤장 80대를 맞고 그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 정도로 부족해?”“부족하죠.”온사가 주저없이 말하자, 온자월의 눈빛이 음산하게 식었다.“온사야, 형님은 네 오라비이기도 해. 너는 양심도 없어?”“사과하러 왔으면서 성의는 전혀 보이지 않네요. 그렇다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온사는 더 이상 그와 이야기하기 싫어진듯 뒤돌아섰다.“거기 서!”온자월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세웠지만, 온사는 들은 둥 마는 둥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자리를 뜨려는 온사를 보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온자월과 온모는 이를 갈았다.“거기 서!”“온사야, 대체 우리한테 무슨 성의를 바라는 거니?”그 말을 들은 온사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얼굴이 퍼렇게 질린 온자월을 보고 말했다.“걱정 마세요. 제가 원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랍니다. 두 가지 조건만 들어주시면 돼요.”“말해봐.”“첫째, 온자신이 출옥한 후에 수월관 앞으로 찾아와 제게 직접 사과를 하게 하세요.”조금 짜증나는 요구이긴 했지만 형님을 빨리 옥에서 빼내기 위해서
온자월은 다시 싸늘한 목소리로 온사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그렇게까지 막내를 품어주기 싫은 것이냐?”“예. 맞습니다. 저 애가 그 집에 존재하는 한 저는 당신들의 가족이 아닙니다.”온모마저도 온사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자신을 저격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온사가 싸늘하게 한마디 덧붙였다.“내가 원하는 바는 이미 얘기했으니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내일 어머니의 혼수를 전부 가져오세요.”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을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결국 온자월과 온모는 음침한 얼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한편, 진국공 저택.“온사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온장온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온자월과 온모에게 되물었다.온자월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직접 들었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거짓말이라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온장온은 점점 더 온사의 속을 알 수 없어 갑갑했다.“온사가 왜 이렇게까지 막내를 싫어하는 것이지? 막내가 있는 자리에서도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온장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온권승에게 물었다.“아버지, 제가 다시 온사를 찾아가 볼까요? 분명 저희에게 서운한 게 있어서 저러는 것 같습니다.”“그럴 필요 없다.”온권승이 싸늘하게 말했다.“너희들도 그렇게 여러 번 설득하려 했는데도 여전히 제 잘못을 알지를 못하니. 끝까지 소란을 부리겠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그는 다시는 온사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이렇게 불경하고 철없는 딸은 차라리 버리는 게 더 나았다.온장온은 잔뜩 실망한 아버지의 어투에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아버지께선 정말로 온사를 버리려는 것일까?’“아버지, 그럼 온사가 제기한 조건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온자월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정말 어머니의 혼수를 다 그 애한테 가져다 줘야 합니까?”“원한다면 갖다줘.”온권승은 온기 한점 없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줄 때 그 애에게 똑똑히 말해두거라. 그 애가
온모는 순간 멈칫했다. 온자월이 먼저 나서서 큰 형의 말을 듣지 말라고 말할 줄은 몰랐다.그렇다고 해서 덥석 알겠다고 할 수는 없기에 그녀는 머뭇거리는 척을 했다.“하지만 이미 큰 오라버니와 약속했는걸요. 게다가 큰 오라버니의 말씀이 틀린 게 없잖아요. 아버지는 이번에 진심으로 화가 나신 것 같았어요.”“이번엔 진심이길 바라야지.”온자월이 싸늘하게 말했다.“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셋째 오라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온모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온자월은 웃으며 말했다.“막내 너는 너무 순진해서 사람 마음을 잘 몰라. 태어나길 건방지고 천방지축으로 태어난 애니 이번에 크게 교훈을 주지 않으면 걔는 영원히 자기 잘못을 모르고 살아갈 거야. 그래서 난 아버지의 생각이 맞다고 봐.”“온사가 우리와 연을 끊으면 그 애는 진국공부 적녀의 신분이 가져다주는 모든 이익을 잃게 되는 거야. 그리고 곧 알게 되겠지. 그 신분이 없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을.”‘그렇구나.’온모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이 인간은 그래도 이용할 맛이 있네.’옆에서 구경만 하면 일이 알아서 잘 풀릴 것을 생각하니 온모는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온자월이 있는 한 온사는 가문과 연을 끊은 후에 가문의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그때 가서 온사의 숨통을 조이고 심연으로 떨어뜨릴 것이다.나중에 온씨 가문이 조사한다고 해도 온모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온모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다.역시 남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걸 구경하는 게 가장 재미 있었다.물론 맞는 상대는 온사 혼자가 될 것이지만 말이다.한편, 수월관에서 이번에는 온사가 가장 빨리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온자월과 온모가 가져온 상자를 본 순간, 눈빛이 살짝 흔들려, 천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막내야!”사저가 그녀의 앞을 막았다.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이 막내를 공격할까 봐 걱정했다.온사는 고개를 돌려 안심하라는 미소를
“예, 알겠습니다. 내일 사람을 데려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안 그러면 어머니의 혼수를 받았다고 해도 풀어주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온사는 상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알아들으셨나요?”온자월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좋아. 아주 잘났구나.”온사는 더 이상 그 말에 응대해 주지 않고 사저들과 함께 상자를 안으로 날랐다.마지막 상자가 들어갈 때까지 그녀는 온자월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고, 온모는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어차피 그녀는 지금 얌전하고 순진한 막냇동생이었기에, 셋째 오라버니가 그러라고 했으니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모든 정리가 끝나자, 온모는 그제야 후련한 느낌을 받았다.돌아가서 온권승에게 사실을 전한 후, 온권승은 바로 다음 날에 온사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워버렸다.온장온은 말리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기분이 좋아진 온모는 온자신을 마중하러 옥으로 갔다.그녀가 오래 못 만난 둘째 오라버니에게 달려가서 애교를 부리려 할 때, 그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무의식적인 동작에 온자신의 얼굴이 수치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러자 온모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죄송해요, 둘째 오라버니. 몸에 부상이 있는 걸 깜빡하고 하마터면 달려들 뻔했네요. 상처가 벌어지면 안 되니까 부축은 안 할게요.”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온자신은 멍청해서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그는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막내야. 마침 몸에 악취도 풍기니 멀리 떨어져서 걸으렴.”온모는 애교 어린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전 오라버니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요!”말은 그렇게 해도 온모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걸었다.마차에 오른 온자신은 이제 드디어 집으로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그런데 창문 가림막을 열어보니 마차가 향하는 방향이 뭔가 석연치 않았다.온자신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셋째야, 막내야, 우리 집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어디 들를 데
“형님, 정말 미쳤어?”온자월이 놀란 눈으로 온자신을 바라보며 물었다.비록 처음부터 온자신을 데리고 가서 사과할 계획이었지만 온자신의 반응은 그의 예상밖이었다.“곤장 80대 맞고 바보가 된 거야? 아니면 옥에 너무 갇혀 지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온자월은 살짝 무시하는 투로 그에게 묻자, 온모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둘째 오라버니, 정말 괜찮은 거 맞죠?”온자신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이 보이는 반응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곧이어 그는 감옥에서 생각한 것들을 그들에게 말해주었다.“사실 그날 온사를 때리고 나도 후회했어…”그동안 그는 매번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당시의 온사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너무도 가슴을 아프게 하는 눈빛이었다.며칠 안 본 사이에 온사는 왜 그렇게 증오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됐을까?그는 산으로 간 목적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온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게 목적이었다.그런데 온사가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심지어 그를 깨물기까지 했으니, 그때는 너무 아파서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온사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물어뜯었다.온자신은 손에 움푹 패인 상처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그는 온사가 자신을 두려워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가문에 돌아가는 게 두려운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어느 쪽이라고 해도 그는 편히 잠들 수 없었다.온자신은 점점 후회가 됐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큰 형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반년 동안 그는 자주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온사에게 폭력을 썼다. 어쩌면 온사가 그 정도로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자, 동생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누가 뭐래도 그는 온사의 오라버니였으니 말이다.남매 사이는 본디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관계 아닌가. 하물며 온사는 그의 친동생이었다.조금 천방지축에, 말을 잘 안 듣기는 해도 그녀가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그런 생각을
퍽!온자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자신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쳤다.“둘째 오라버니!”그러자 옆에 있던 온모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온사를 위해 온자신이 온자월에게 주먹을 휘두를 줄이야!“양심도 없는 것이라고! 어머니가 임종 때 했던 말을 다 잊었어? 어머니께선 우리한테 여동생을 잘 돌보라고 하셨는데 넌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온사가 예의 없고 철부지라고?”온자월도 몸을 비틀며 온자신에게 주먹을 날렸다.옥에 오랜 시간 갇혀 있고 부상까지 입은 온자신에 비해 온자월의 주먹에 실린 힘이 더 셌다.온자신은 하마터면 그대로 마차 밖으로 튕겨나갈 뻔했다.온자월은 피를 뱉은 뒤에 음산한 얼굴로 온자신에게 말했다.“형님,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난 온사가 아니야. 전에 형님도 온사에게 비슷한 말을 적지 않게 했고 주먹까지 휘둘렀어. 그런데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훈수 두는 거지?!”“그래! 나도 나쁜 놈이야!”온자신은 결국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분을 토했다.“하지만 이제 난 정신을 차렸고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어! 온사는 내 동생이고 그 아이가 어떻게 변했든 우리 사이가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아! 너도 같고 큰 형님, 넷째도 마찬가지야!”“그럼 막내는?”온자월도 언성을 높여 싸늘하게 말했다.“형님은 온사를 선택하고 막내를 버리겠다는 거야?”온모는 곧바로 상심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둘째 오라버니, 저… 저는 오라버니들과 혈연관계가 아니라서 친동생이 아니라는 건가요?”“막내 너도 당연히 우리 동생이지! 온사도 너도 다 내 동생이야!”온자신은 자신의 말이 온모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에 다급히 해명했다.그러자 온모가 울며 말했다.“하지만 어제 언니가 사람들 앞에서 말했단 말이에요. 저를 동생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자기 가족이 아니라고요.”온자신은 순간 누가 찬물을 머리에 끼얹은 기분이었다. 그가 멍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니?”온자월이 싸늘하게 말했다.“그러니까 형님
“좋아.”사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막수 사태가 주저없이 요구를 승낙했다.막수는 고개를 들려 단호한 눈빛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갈 테니 넌 여기 가만히 있어.”온사는 자기가 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상의할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막수 사태의 모습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예, 그렇게 할게요. 조심해요, 사부님.”김사도는 몰래 온사를 힐끗 보고는 짐짓 여유 넘치는 어투로 물었다.“내가 갈까?”사구가 담담히 말했다.“아니, 사칠 네가 가.”눈만 빼고 온몸을 꽁꽁 사맨 사칠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형님.”저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사구는 일당 중에서도 꽤 지위가 있어 보였다.김사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사칠을 힐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길을 비켰다.사칠은 관을 내려놓고 맞은편을 향해 걸어갔다.그와 동시에 막수 사태도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사구는 눈앞의 늙은 여승을 빤히 노려보았다.3일 전 수월관에서 만났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 악취미가 발동해서 상대를 겁주려고 시도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참 재미없었던 거로 인상에 남았다.그런데 그 여승이 성녀의 사부이자 수월관의 주지 사태였을 줄이야.사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한편, 사칠이 다가오자 검은 인영이 온사의 뒤편에 나타났다.추월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칠이 자칫 조금만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당장 죽여버릴 기세였다.거래 과정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사칠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온사는 칼로 온모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옮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그녀는 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관에서 안고 돌아올 때에야 천천히 비수를 내렸다.“아가씨, 가시죠.”사칠의 목소리는 사구보다도 더 흉측했는데 마치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그는 예의고 뭐고 다짜고짜 온모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일행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가자! 빨리 가자!”온모는 허둥지둥 사칠을 따라갔다. 만
‘사구? 사구가 왔어! 드디어 날 구하러 온 거야!’‘온사 이 망할 년! 넌 이제 죽었어!’온모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온사에게 붙잡혀 있는 신세가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사구에게 달려가고 싶었다.“온사 네 이년!”사구 일행은 처참한 모습의 온모를 확인하고 분노를 터뜨렸다.물론 김사도는 예외였다.그는 세 사람 중 유일하게 이 광경을 통쾌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물론 동료가 보고 있으니 안 그런 척은 해야 했다.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짐짓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어찌 우리 아가씨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지금 저 꼴을 봐! 대체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뭔지 모르지만 아주 잘했어!’온사도 그의 눈빛에 숨은 찬탄과 희열을 알아보았다.그녀는 한심한 눈으로 김사도를 바라본 뒤, 담담히 말했다.“난 약속 지켰어. 너와 약속한 이후로는 얘 털끝 하나 안 건드렸으니까.”“그럼 저 상처들은 대체 어떻게 난 거야!”김사도의 목소리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앙칼졌다.온사는 그를 무시하고 음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니 누가 늦게 오래? 뭐 너무 늦은 건 아니지만. 하루만 더 늦게 찾아왔으면 아마 온모의 시신을 마주했을 텐데 말이야.”적나라한 협박에 사구와 그의 동료는 이를 갈았다.사구는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성녀, 네 어머니의 시신이 우리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마. 넌 우릴 자극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온사는 냉소를 짓고는 온모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리고 김사도의 충격 어린 눈빛을 무시한 채, 사구를 협박했다.“어디 해봐. 내 어머니의 시신에 손이라도 대는 날엔 나도 너희의 아가씨를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악! 뭐 하는 거야!”온사는 그대로 칼을 빼들어 온모의 목을 겨누었다.“해볼래, 사구?”위협적인 온사의 말투에 온모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눈을 가린 천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지
너무 동생이 그리웠던 온자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을 뒤쫓아갔다. 그는 뒤늦게야 온사가 경성 방향이 아닌 근처의 마을로 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한참 후, 앞에 정자 하나가 나타났다.온자신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피월정이잖아? 여긴 왜 온 거지?”그가 의혹에 빠져 중얼거릴 때, 이상한 복장을 입은 세 명의 사내가 피월정에 나타났다.온자신은 인상을 찌푸리고 걸음을 멈추었다.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그쪽을 주시했다.“온자신이 따라왔어.”막수는 뒤쪽을 힐끗 보고는 온사에게 말했다.온사는 그쪽에 시선도 주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상관없어요. 이따가 제가 하는 일을 방해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막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둘은 전방에서 다가오는 사구 일행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들 중에는 김사도도 있었다.나머지 한명은 온사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얼굴을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서 눈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등에 관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온사 어머니의 관이었다.이들은 도굴할 때 관까지 통째로 가져갔던 것이다.온사는 주먹을 꽉 쥐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성녀 전하, 이건 우리가 3일 전에 했던 약속과 얘기가 다르잖아?”사구는 온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식간에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지금 약속을 번복하는 건가?”온사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너희 아가씨는 이곳에 있어. 다만 내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한 후에야 만나게 해줄 수 있어. 너희가 어머니 시신에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그녀는 어머니의 시신이 온전한지, 아니면 이들에 의해 훼손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똑같이 돌려줄 것이다.사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걱정 마, 성녀 전하. 네 어머니의 시신은 아주 온전한 상태니까.”말을 마친 그는 장풍으로 관 뚜껑을 열었다.이미 그들이 한번 열었어서 그런지 뚜껑은 아주 쉽게 열렸다.
북진연이 떠난 후, 온사도 공간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온모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삼일 후가 약속한 날이니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특히나 사구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완벽히 준비하고 가는 게 맞았다.독은 사부가 더 뛰어나다고 하지만 상대는 뱀을 부릴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었다.게다가 전부 다 강한 독성을 가진 독사였다.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그들은 수동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뱀에게 물릴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게 싫었다.온사는 2층 연금대로 바로 갔다.이곳에는 독성이 강한 약재들 외에도 독벌레도 있었다.불개미와 독거미, 지네도 있었다.온사는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맨 마지막에 전갈에게 시선이 갔다.오독 중에 가장 독한 것이 전갈 독이라고 했다.독성도 강할 뿐만 아니라 전갈 자체가 아주 흉포한 벌레였다.온사는 사구를 상대하려면 전갈이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했다.그런데 아직은 체형이 너무 작고 독성이 약했다.온사는 3일 안에 이 전갈을 제대로 육성하기로 마음먹었다.공간에 영수는 넘쳐나고 가진 독약까지 합치면 대왕 전갈을 육성해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삼일 간 온사는 공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그 기간에 막수가 찾아왔지만 추월이 나서서 응대했다.시간은 어느덧 흘러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그날 아침, 온사는 아침 일찍 공간에서 나왔다.3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았지만 워낙 공간 안에 농후한 영기로 가득찼기에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정원을 나가자 막수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준비는 다 됐니?”온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예, 가시죠.”막수는 의아한 얼굴로 온사의 등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온모는 어디 있니?”“데리고 가는 중이니 걱정 마세요, 사부.”그 말을 들은 막수는 온사가 추월에게 맡긴 줄로만 알고 더 캐묻지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당나귀를 끌고 산을 내려갔다.막수는 당나귀 따위를 타기 싫었기에 온사를 위에 태우고 자신은 고삐를 잡고 앞에서 걸었다.남산 산기슭에 다다랐을
그는 혹시라도 막수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해명을 덧붙였다.하지만 그럴수록 막수의 눈에는 더 수상해 보일 뿐이었다.온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랬군요. 어서 앉으세요. 제가 차를 내오죠.”그녀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고 북진연과 막수만 정원에 남았다.막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섭정왕 전하의 마음이 너무 티가 납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다 보일 정도예요. 무우는 현재 우리 수월관 사람이니 전하께서 이럴수록 무우의 수행을 망치는 것입니다.”북진연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서신을 받은 후,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온 그였다.수월관에 도착하고 막수와 부딪쳤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위가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밤중에 여인의 처소로 달려오다니, 다른 사람이 봤으면 온사의 명성에 큰 누를 끼칠 것이다.북진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군. 사태,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다음엔 더 주의하겠습니다.”막수는 다음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북진연을 노려보았다.이때, 온사가 뜨거운 차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세 사람은 정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사는 북진연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막수와 아까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했다.“사부님, 독사의 사체는 어디에 쓰려고 남기라고 한 건가요?”온사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구석 쪽을 바라보았다.북진연은 그제야 구석진 곳에 쌓인 피 묻은 보따리를 발견했다.살짝 풀어진 틈새로 독사의 머리가 보였다.비취색의 영롱한 색상을 보고 북진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독성이 매우 강한 독사인데다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보따리의 형태로 봐서 적어도 열 마리는 될 것 같았다.이게 모두 온사의 정원에서 나왔고 오늘 온사가 하마터면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고 생각하니 북진연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이미 죽은 녀석들이고 좋은 약재로 쓰일 수 있어. 마침 3일 후에 그 사구라는 인간을 만나야 하니 그 전에 이것들로 좋은 선물을 준비할
약속 시간을 잡은 사구는 그 길로 뒤돌아섰다.그렇게 온사의 정원을 지나던 그는 뭔가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늙은 여승이 있었다.사구는 그 여승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그가 옷소매를 휘두르자 뱀들이 소매에서 기어나와 여승이 있는 곳을 향해 기어갔다.사구는 그걸 본 여승이 겁에 질려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흥미가 사라진 사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길로 수월관을 벗어났다.사구가 떠난 후, 추월은 정원 안팎을 꼼꼼히 확인했다.그리고 정원 곳곳에서 십여 마리의 뱀을 잡아냈다.“사구 놈이 다녀간 후로 내 처소가 뱀 소굴이 다 되었네.”독사를 전부 처치한 추월은 굳은 표정으로 뱀의 사체를 한곳에 모아 불사르려 했다.그리고 이때, 막수의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잠깐, 그 독사들은 그대로 둬.”고개를 돌린 온사가 물었다.“사부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내가 안 왔으면 네가 나 몰래 이렇게 큰 일을 치르고 있을 줄도 몰랐잖니.”막수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사를 쏘아보았고 온사는 괜히 찔려서 어깨를 움츠렸다.사부는 밖에서 그녀와 사구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온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사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작정하고 숨긴 게 아니라 확실해지면 사부님께 말하려고 했어요!”“정말이니?”막수 사태는 못 믿겠다는 어투로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온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저도 출가인입니다, 사부님!”“하, 말은 잘해.”막수는 냉소를 지으며 온사에게 말했다.“일단은 믿어주도록 하마. 허나 삼일 후 나도 너와 같이 가겠다.”“그건 안 돼요, 사부님!”온사는 당황하며 막수를 말렸다.“아주 위험한 상황이란 말이에요. 상대가 몇이나 데리고 나올지도 모르고 그쪽에서 만약 사람이 많이 오면 한바탕 피바다가 될 거예요. 사부님은 출가인인데 어찌 그런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겠어요?”“그럼 넌 출가인이 아니고?”
미리 대비를 해두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그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나에 대한 정보를 대체 누가 줬을까?”중년 사내는 위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 배신자는 빨리 제거해야 해서 말이야.”온사는 당연히 이 시점에 김사도를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주인이 워낙 겁쟁이라 좀 겁만 줬을 뿐인데 전부 말하더라고. 그걸 꼭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알아?”“쯧,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사구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참 궁금하단 말이야. 고결하신 성녀 전하는 대체 우리 아가씨한테 어떤 식으로 겁을 줬을까?”능글맞게 웃는 그의 눈매에서 위협이 느껴졌다.하지만 온사에게는 저런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내가 할 줄 아는 게 하도 많아서 말이야. 궁금하면 너도 경험하게 해줄 수 있어.”말을 마친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됐어. 난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고. 성녀 전하의 시련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 그러니 본론부터 얘기하지.”사구는 손을 뻗더니 소매 안에서 고급 소재의 헝겊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성녀 전하, 이게 뭔지는 알고 있지?”온사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것은 사망하신 어머니께서 입관할 때 입었던 옷이었다.온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좋아. 어디 네 얘기 한번 들어보지.”그녀는 소매를 만지는 척하며 공간 안에서 뭔가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피 묻은 머리카락이었다. 딱 봐도 억지로 잡아당겨 뽑은 것으로 보였다.사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내 어머니의 물건으로 날 협박하려 하지 마. 네가 어머니를 완전한 상태로 돌려준다면 너희의 아가씨도 무사할 테니까.”물론 지금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그래도 사지 멀쩡하고 손발가락 그대로 붙어 있으니 완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사구는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호통쳤다.“이런 식으로 나에게 협박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어!”“그건 예전이고 지
“뭐라고?”온자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는 그런 그를 싸늘히 노려보고는 말했다.“거래 안 한다고. 알아들었어? 내가 다시 말해줘?”“온사, 너!”온자월이 온사의 이름을 부른 그 순간, 검은 인영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놀란 온자월은 품에 간직한 비수를 꺼내려 했다.하지만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추월의 주먹에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곧이어 추월은 주먹으로 온자월의 얼굴을 쳤다.퍽!온자월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그가 일어나서 반격하기도 전에 추월은 그의 복부를 걷어차 멀리 날려버렸다.“너… 넌 누구야? 감히 진국공가의 공자에게 무력을 휘두르다니!”온자월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신분으로 추월에게 겁을 주려 했다.온사는 그런 그들에게 한발 한발 다가갔다. 추월이 고개를 숙이고 온사의 뒤에 섰을 때에야 온자월은 상황을 눈치챘다.“이 아이는 내 사람이야. 뭐, 불만 있어?”온사는 바닥에 쓰러져서도 소중히 연을 감싸고 있는 온자월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아들이 원수의 딸을 구한답시고 친히 만들어준 연을 거래 조건으로 들고 나온 걸 어머니가 아시면 참 후회하실 거야.”“원수의 딸이라니! 또 무슨 헛소리야!”온자월은 바닥에 쓰러져 몸도 못 일으키면서도 언성을 높여 말했다.“참, 내 정신 좀 봐. 또 쓸데없는 얘기를 했네.”온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니는 생전에 우리를 무척 사랑하셨어. 네가 불효자인 걸 아셨어도 후회는 없으셨을 거야.”말을 마친 온사는 온자월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온자월 너는 후회 안 해?”온자월은 주먹을 꽉 쥐고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 넌 나와 막내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어. 하지만 착각하지 마. 혈연을 떠나서 막내는 내 동생이야!”“그래?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도 그 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랄게.”그 말을 끝으로 온사는 수월관으로 돌아가 버렸다.그녀는 더 이상 온자월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그가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온사는 그가 뭐 하러 온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온자월이 대체 뭘 갖고 왔을지 궁금했다.밖으로 나가서 온자월이 들고 있는 연을 보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연까지 가지고 왔네?”온자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 연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나도 쓸데없는 말 안 할게. 너 어머니의 물건을 원하잖아? 이 연을 너에게 줄게. 당장 막내를 풀어줘.”온사는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온모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줄이야. 걔를 위해서 어머니까지 버릴 생각이야?”“어머니를 버린 게 아니야!”그 말을 들은 온자월은 곧바로 반박했다.“네가 막내를 납치하지 않았으면 내가 어머니의 물건을 꺼낼 일도 없었어!”온사는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넌 결국 어머니와 외부인 둘 중에 외부인을 택했다는 거잖아!”“헛소리하지 마!”온자월은 격앙된 목소리로 호통쳤다.“막내는 외부인이 아니야. 외부인은 너지! 잊지 마, 넌 이미 진국공가의 딸이 아니야. 진국공가의 딸은 막내 한 명뿐이야. 걔가 내 동생이라고!”“그래! 양심도 없는 놈. 역시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끼리 잘 어울리네. 원래부터 너희가 일가족이었나 봐!”온사는 눈을 부릅뜨고 온자월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지금 누굴 욕한 거야?”온자월도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 내가 너한테 주먹을 못 휘두른다고 함부로 막내 욕하지 마!”온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나한테 주먹을 휘둘러? 참 대단하네. 경성의 사내들 중에 여자한테 주먹을 휘두르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너!”온자월은 발끈하며 온사에게 다가가려다가 손에 든 연을 놓칠 뻔했다. 그는 뒤늦게 연이 괜찮은지 살펴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온사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연을 외부인인 나에게 갖고 와서 거래를 하자는 사람이 뭘 그렇게 긴장해?”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설마 내가 이걸 소중히 보관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