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온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궁금해요!”북연진은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조정의 대신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재현했다.“그들이 말하기를, 이 나라의 진국공이라는 사람이 이리도 막무가내이고 법도를 무시하며 시건방진 만행을 일삼으니 엄격히 벌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큰 피해가 나올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물론 그 대신들이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북진연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그들이 온자신이 앞으로 나라에 큰 피해를 끼칠 것처럼 상황을 몰아갔기에, 온권승은 미처 방어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리고 탄핵도 탄핵이지만 그의 체면도 무관들의 반발 때문에 완전히 구겨져 버리고 말았다.그렇게 반절이 넘는 대신들이 탄핵의 목소리를 내자 어린 황제도 ‘하는 수 없이’ 섭정왕의 의견을 받아들여 엄벌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결국 온씨 가문 사람들이 온사의 용서를 받아야 온자신의 석방을 그나마 고려해 볼 수 있게 된 상황이 되어, 온권승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어쨌거나 온자신이 먼저 잘못을 한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온사에게 폭력만 가하지 않았어도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보았겠지만 하필이면 불가의 청정구역에서 무력까지 행사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게다가 수월관 사태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온자신이 먼저 무력을 행사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인데, 이런 사람들까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곧 진실이었다.그러니 온자신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울부짖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었을 것이다.온사가 기쁨에 겨워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더 잠자고 있었을 걸 그랬습니다.”일찍 깨어난 것이 못내 아쉬울 정도였다.하지만 아마 소식을 들은 온씨 가문 인간들이 또 찾아올 게 분명했다.그녀는 그 역겨운 면상들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그 상대가 온모라면 더욱. 온자신이 갑자기 수월관에 침입한데는 분명 온모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온자신이 했던
잠깐 쓰러졌다가 일어나 보니 벌써 일주일이 그냥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온사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수많은 기도 경문을 암기해야 하는데 9일은 너무 부족했다.“안 되겠습니다. 어서 수월관으로 돌아가야겠어요.”산처럼 쌓인 경문을 생각하니 온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섭정왕 전하, 혹시 마차를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수문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온사는 조심스레 다시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더듬거리다가 부주의로 북진연의 탄탄한 어깨에 손이 닿고 말았다.옷감을 통해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온사는 순간 당황했다.이 방 안에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으니 상대가 북진연이라는 것을 감지한 순간 불에 데인 것처럼 손끝이 달아올랐다.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지 않습니까.”이어서 북진연의 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필요한 게 있으면 나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수월관으로 돌아가시려는 거라면 지금은 안 됩니다.”그는 단박에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온사가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소인은 기도 의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늦는단 말입니다!”“그 눈을 해가지고, 돌아간다고 해서 대체 무슨 준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정곡을 찌르는 북진연의 몰에 온사는 말문이 막혔다.그랬다. 너무 급해서 지금 실명 상태라는 것마저 잊고 있었다.경문을 암기하더라도 앞이 보여야지 가능한 법이었다. 온사는 순간 침묵에 잠겼다.북진연은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녀를 보고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을 했나 순간 후회가 들었다.그가 못 말린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할 때, 갑자기 고개를 든 온사가 분노한 얼굴로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게 다 온자신 때문입니다!”오래 참았던 서러움이 순식간에 폭발해 버린 것이다.“그 인간은 무력만 쓸 줄 아는 시정잡배예요! 무슨 자격으로 수월관까지 찾아와서 나를 훈계하는 걸까요? 그 인간이 수월관에 침입해서 이상한 헛소
아쉽게도 그가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막수 사태가 안으로 들어왔다.손에 경문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다가, 온사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급히 달려왔다.“어떻게 된 거니? 어디 아파?!”막수 사태는 경문을 내려놓고 북진연을 밀친 후에 침대에서 울고 있는 온사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투박한 손으로 온사의 온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 “괜찮다, 괜찮아. 내가 봤는데 이마의 상처는 흉이 질 것 같지 않구나. 부상 정도도 그리 심하지 않고 눈도 며칠 후면 다시 볼 수 있을 게야.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온사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듬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문득 아주 어렸을 적 그녀의 어머니가 매번 울 때면 자신을 이렇게 품에 안고 달래주던 것이 떠올랐다.북진연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막수 사태, 무우 사태께서는 잠시 경문을 암기할 수 없어서 차후에 있을 기도 의식이 지체될까 봐 우려하고 계십니다.”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말에 막수 사태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온화한 목소리로 온사에게 말했다.“걱정 말거라. 그래서 기도 의식에 쓰일 경문을 가져왔으니 암기하고 싶거든 내가 읽어주겠다.”그러자 흐릿했던 온사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그래! 그런 방법도 있었지!’다만 사부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하지만 막수 사태는 온사의 머리를 넘겨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민폐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넌 내 제자 중에 가장 막내이며, 후에 중임을 맡고 나라를 위해 기도를 올릴 성녀이니 사부로서 너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다.”온사는 큰 감동을 느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감사합니다, 사부.”막수 사태의 도움이 있으니 온사의 부담도 많이 줄어들었다.막수 사태는 곧이어 북진연을 방에서 쫓아냈고,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같이 경을 읽기 시작했다.막수 사태가 한 구절 읊으면 온사가 따라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밖으로 쫓겨나버린 북진연은 밖에서 안의
복명 성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하필이면 이 시기에 깨어나다니 온권승 부자는 정말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온장온이 피곤한 기색으로 불평을 토로했다.“온사 걔는 정말 사람을 귀찮게 하네요.”그의 입장에서는 하필 이 시점에 깨어난 온사가 얄밉기 그지없었다.만약에 그가 온자신에게 맞아서 중상을 입은 온사를 직접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진작에 깨어났으면서 자신들을 농락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아들의 생각을 읽은 온권승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감히 아비인 나에게 반기를 들다니! 배후에 부추기는 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그러자 온장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누구 말씀이신가요?”“북연진 그 인간 말고 또 누가 있겠어?”온권승은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에 독기를 품으며 말을 이었다.“원래부터 폐하를 등에 업고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날뛰는 인간이었어.”특히나 진국공부를 상대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이번에 우리 가문이 놈의 손에 놀아난 것도 온사 그 계집애 때문이지. 그 애가 없었으면 네 동생이 옥에 갇히는 일도 없었을 게다.”온권승은 온자신이 수월관에 침입한 것 하나만으로도 곤장을 칠 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옥에 갇힐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그는 모든 탓을 온사에게 돌렸다.“둘째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이미 셋째를 시켜서 옥의 간수들에게 쌈짓돈을 좀 보냈으니, 아마 그 안에서 너무 고생하지는 않을 겁니다.”“가혹한 일을 당했어도 그건 그 녀석이 자초한 거야. 어쩔 수 없다.”온권승은 둘째 아들에게도 가차없었다. 비록 온사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온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온권승은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둘째 돌아오면 너는 큰형으로서 제대로 훈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또 있으면 너도 둘째랑 같이 사당으로 가서 무릎 꿇고 있을 줄 알아.”결국 온장온도 아버지의 훈계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아버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온장온이
한편, 온자신이 수월관에 침입해서 온사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소식을 들은 온모는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다만 그 뒤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폐하께서 온사를 위해 온자신에게 곤장 80대나 칠 줄이야!게다가 온씨 가문은 무조건 온사에게 용서를 받은 후에야 온자신을 풀어주겠다며 으름장을 늘어 놓았다.이 소식을 들은 온모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왜 그렇게까지 하지?”그녀는 폐하께서 드디어 미친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한낱 여승을 위해 진국공부를 적으로 돌리다니, 온모는 생각할수록 황당했다.‘그럼 온사는 무슨 자격으로 폐하의 보호를 받지?’현재의 온사는 진국공부의 적녀도 아니고 한낱 여승에 불과한테 왜 존귀하신 이 나라의 주인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챙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정의 상황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온모는 온사를 두둔하는 사람이 어린 황제 한 명뿐이라고 착각했다.하지만 실제로 조정의 반을 휘어잡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온권승이 서재로 부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온모는 올 게 왔구나라고 생각했다.그렇다면 온사가 수월관에서 한 짓을 까발릴 좋을 기회였기 때문이다.‘그런 더러운 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이 집에서 온사의 편은 없을 거야.’온모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냉소를 지은 후, 말을 전하러 온 하인에게 말했다.“알겠다. 아버지께 옷만 갈아입고 곧 가겠다고 전하거라.”온모는 방으로 돌아가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전에 성인식 때 온사가 소박한 옷을 입고 고아한 자태를 뽐낸 이후로 그녀는 줄곧 질투욕에 불타 있었다.그래서 요즘 그녀는 색감이 연하고 깨끗한 옷을 수두룩하게 사놓기 바빴다.온사도 그런 분위기와 자태를 갖고 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며, 온사처럼 옷을 입고 자신이 그녀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증명할 속셈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온모는 뭐가 자신에게 어울리고 뭐가 안 어울리는지를 전혀 몰랐다. 그녀가 아무리 순수한
“걔는 거기서 대체 뭘 하고 있었단 거지?”온장온은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온모는 잠시 머뭇거리는 척하다가 눈물을 쥐어 짜내며 말했다.“언니가 거기서 한 사내랑… 밀회를 하고 있는 걸 봤어요.”탁!이때, 온장온이 쥐고 있던 찻잔이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막내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니?”온사가 사내랑 밀회를 한다니!그럴 리는 없었다.아무리 온사가 막무가내에 철부지라고 하더라도 그런 발칙한 짓까지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온모가 여전히 울며 말했다.“저도 제 눈을 믿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제 눈으로 직접 보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죠. 언니에게 발각된 후로 저도 이러면 안 된다고 설득하려 했는데 언니가 저를 시냇물에 담그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협박까지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까지 했어요.”그녀의 말이 끝나도록 온권승과 온장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온권승의 얼굴은 음침하게 굳어 있었고 온장온 또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보였다.그가 아는 온사는 말도 잘 안 듣고 철이 없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불경한 짓을 저지를 아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막내를 협박까지 하다니!온권승은 길게 심호흡을 한 후, 온모에게 말했다.“일단 돌아가 보거라.”온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를 행한 후에야 서재를 나갔다.“아버지….”온장온은 착잡한 얼굴로 온권승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저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닌지 싶습니다….”“오해?”온권승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오해인지 아닌지는 불러서 물어보면 확인되겠지.”곧이어 온모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 한 명과 온자신의 처소에서 일하는 남자 시종을 불렀다.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9일 전, 막내 아가씨와 둘째 도련님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고 있느냐?”온자신 처소의 시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날 둘째 도련님은 뜰에서 무공을
“뭐라고? 돌아갔다니?!”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또 온사를 만나지 못했다.모든 걸 알고 왔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황궁에 도착하자 온사가 수월관으로 돌아갔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내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성녀께서는 며칠 후에 있을 기도 의식을 걱정하시어 깨어나자마자 수월관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셨습니다.”하지만 온권승의 얼굴이 분노로 퍼렇게 질린 뒤였다.단단히 따지러 준비하고 왔는데 수월관으로 돌아갔다니.만약 그녀가 황궁에 계속 있었다면 만날 핑계라도 있었을 텐지만, 이미 수월관으로 돌아갔다면 그들은 대문에 발조차 들일 수 없게 된다.‘이것도 북진연의 꿍꿍이인가?’온권승은 의심이 들었지만, 이것은 북진연이 꾸민 꿍꿍이 따위가 아니었다.온사는 온권승이 찾아올 것을 미리 예견하고 시력이 돌아온 후에 막수 사태와 함께 바로 수월관으로 돌아갔다.온권승을 만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닌, 기도 의식 준비를 마친 후에 그들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온자신이 이렇게 빨리 옥에서 나오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기분이 풀릴 때까지 옥에 가둘 생각이었다.온권승과 온장온은 그렇게 남산 산기슭까지 쫓아갔지만 그곳에는 이미 흑기군이 진을 치고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성녀를 보호하고 침입자를 엄벌한다며 진국공부의 마차를 막아섰다.그리고 온씨 성을 가진 사람은 그 누구도 산에 발을 들일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이 광경에 온권승은 순식간에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모두의 존중을 받던 진국공에게 이런 홀대와 수치는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원흉이 철없는 딸 때문이라니 더 기가 막힌 것이었다.집으로 돌아간 온권승은 적어도 기도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온사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직감했다.그리하여 화를 진정시킨 후, 이 일을 장남에게 떠맡겼다.“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우리의 태도야. 요 며칠 너희들은 번갈아가며 남산을 방문해. 만나면 좋겠지만, 못 만나더라도 폐하께 우리가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온장온은
목소리를 들은 온사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칠호는 키도 꽤 큰 편이며 온몸을 꽁꽁 감싼 복장을 하고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특이점이 없어서 긴가민가 했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인이었기 때문이다.“섭정왕 전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온사 역시 귀족가에서 나고 자랐기에 권세가문, 특히나 황족들이 그림자 호위를 옆에 두고 육성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았다.진국공부 역시 마찬가지였다.온권승의 신변에는 그림자 호위가 있었는데, 어릴 때 아버지의 신변에서 그들을 본 것 같았는데 칠호 역시 그들이 주었던 느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보내신 그림자 호위입니다. 원래는 황실에만 속한 자들이었지만 당신은 이 나라의 유일한 성녀이고 나라를 위해 관내에서 기도를 올리고 계시니 제가 폐하와 상의 후에 전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적당한 녀석을 선별하여 데려왔습니다.”북진연은 칠호의 신분패를 온사에게 건넸다.“앞으로 성녀는 이 아이의 주인입니다. 아무리 폐하라도 성녀를 제치고 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명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온사는 북진연이 이렇게 큰 선물을 준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칠호를 신변에 두면 앞으로 온자신 일행이 또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려 할 때 그녀에게도 반격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이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다.그저 폐하가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는 말했지만, 북진연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가 아니었으면 아무리 폐하라도 이렇게 쉽게 황실의 그림자 호위를 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잠깐의 고민 후에 온사는 결정을 내렸고, 곧이어 추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너를 추월이라고 부르겠다. 관내에는 사람이 적고 조용하니 나를 따르면 조금 따분하고 무료할 수 있다.”추월이 답했다.“이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소인 주인님의 곁에 남고 싶습니다.”“그러면 그 호칭부터 바꿔야겠구나.”온사가 웃으며 말했다.“나는 출가인이니, 주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
밭을 확인한 그녀는 활짝 웃으며 냇물을 길어 밭에 물을 주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옆에 있던 회춘초에 어느새 꽃봉오리가 피어 있었다.온사는 웃으며 꽃들을 쓰다듬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그녀는 약초를 지날 때마다 약재대전을 꺼내 일일이 대조를 했는데, 그러다가 또 한 약재가 눈에 들어왔다.약재대전에서 다른 약재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있었지만 유독 이 약초만 대략적인 모양과 이름, 출처를 제외하고 효능에 대해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서홍화, 먼 타국에서 나는 약초라….”온사는 재차 대조한 후에야 이 약초가 서홍화가 맞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효능을 알 수 없어 아쉬웠다.‘한번 먹어봐?’온사는 호기심에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독성이 있는지도 모르잖아.’만약에 강한 독성을 가진 약초라면 그걸 먹고 저 세상 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그녀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막수 사부께 여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떴다.며칠 후, 온씨 가문에서 또 사람을 보내왔다.이번에는 온모가 아니었다.그녀도 혼자 온사를 찾아오면 물을 맞거나 매를 맞는 결과밖에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번에는 온자월과 함께 왔다.온장오는 조정에 나가야 하고 온자신은 옥에 있고 온옥지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같이 올 수 있는 사람은 온자월뿐이었다.마침 아침 수업을 하고 있던 온사는 사저의 전갈을 듣고 손을 저으며 사저에게 말했다.“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세요. 기다리기 싫으면 말라고요.”어차피 급한 건 그녀가 아니었다.사저는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두 사람에게 전했다.수월관 밖에서 기다리게 된 온모와 온자월의 표정을 좋지 못했다.기도 의식이 이미 끝났기에 수월관은 대문을 열고 손님을 받고 있었고 산기슭의 흑기군도 철수했다. 손님들과 신도들은 평소처럼 수월관으로 들어와서 참배하고 향을 피울 수 있었다.온자월은 수월관에 와본 횟수가 적어서 거절당한 경험도 거의 없었기에, 기다리라는 말에 짜증스럽게 말했다.“금방 입관한 막내 여승이 무슨 할 일이 그렇게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회춘초는 내가 알아서 찾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눴던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북진연은 눈을 감고 턱을 매만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간도 크지. 이렇게 큰 비밀을 제대로 감추지도 않고 말이야.’고요 일행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살폈다.임자부는 북진연의 표정을 살피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왕야, 설마 그분에게 회춘초의 행방을 알아볼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북진연이 질문에 답하지 않자, 임자부는 그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왕야, 병세를 오래 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간을 길게 끌수록 발작의 빈도가 잦아지고 점점 힘들어질 겁니다. 회춘초가 코앞에 있는데 왜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겁니까?”“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단 회춘초만 확보하면 마지막 서홍화만 찾으면 모든 약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왜 주저하시나요?”고요 일행도 임자부의 말에 동의했다.“왕야, 어쨌거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왕야의 치료 아니겠습니까!”북진연은 부하들의 심정을 이해했다.하지만 수월관에 살고 있는 어린 소녀를 생각하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그렇긴 하지만 두 가지 약재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서홍화를 찾지 못하면 쓸모없는 일 아니냐.”그 말에 임자부와 부하들은 입을 다물었다.북진연의 말처럼 백년 자령지와 회춘초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세 번째 약재인 서홍화는 임자부가 선배들이 남긴 고대 의술 서적에서 본 것이었고 그것에 대해 들어보거나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그래서 그들은 줄곧 바다에서 바늘 찾는 식으로 온 나라를 뒤지고 다녔다.“됐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북진연은 기가 푹 죽은 부하들을 보며 담담히 위로를 건넸다.그러자 임자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북진연까지 이렇게 말하는데 더 이상 재촉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한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임자부와 고요가 방
그의 속셈을 꿰뚫어본 북진연이 담담히 말했다.“그 사람이 의술을 배우는 중인 건 맞지만 진짜 배우고 싶은 건 독이야. 영감은 독학에 대해 알아?”“독이요… 제 전문은 아니지만요, 조금은 알죠?”독 얘기가 나오자 임자부는 금세 시무룩해졌다.비록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소문난 의술의 성자이긴 하지만 독은 그의 전문이 아니었다.“독을 잘 쓰는 사람이라면 귀의 독왕 그 녀석이 있겠군요.”독왕과 의술을 비긴다면 그가 이길지 몰라도 독은 아니었다.“안 그래도 최근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귀의 독왕 그 녀석이 경성에 있다고 하더군요.”임자부는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듯 무심코 한마디 했다.그러자 북진연이 물었다.“그자와 연락이 닿을 방법은 있고?”“저 그 녀석이랑 안 친합니다.”북진연이 물었다.“그럼 전에 의술 시합은 어떻게 했지?”“제가 도전장을 써서 거리에 붙여 놓았는데 마침 귀의가 그걸 보고 일년 안에 누가 사람을 더 많이 살리는지 내기하기로 했지요. 결국 제가 상대보다 열 명을 더 살렸고요.”“도전장이라...”잠시 고민하던 북진연은 이내 고요 일행에게 지시했다.“사람을 보내 귀의 독왕의 행방을 알아보거라. 못 찾겠거든 임자부의 명의로 도전장을 써서 붙여.”“예, 알겠습니다!”“저는 반대예요! 제 동의도 안 받으셨잖습니까!”“항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북진연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말했다.임자부는 홧김에 그를 향해 눈을 한번 부릅뜨고는 백년 자령지에 시선을 돌렸다.그런데 이때, 자령지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던 임자부의 표정이 순간 급변했다.“잠시만요!”문턱을 나서던 고요 일행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임자부는 자령지를 코에 대고 계속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는데, 북진연이 짜증을 내려던 순간, 그가 갑자기 흥분의 비명을 질렀다.“회춘초입니다! 여기에 회춘초의 향기가 묻어 있어요!”백년 자령지도 진귀한 약초지만 그것에서 두 번째로 찾고 있던 진귀한 약재의 향을 맡았을 때 임자부는 더욱 더 흥분을
“아이고 이른 아침부터 대체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정신 차리고 이것부터 좀 봐주세요!”새벽에 섭정왕부의 하인에 의해 끌려온 임자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나무 상자 안의 물건을 확인하고는 잠이 확 깨기라도 한듯 놀라했다. “세상에나! 이건 자영지 아닙니까!”그러자 임자부는 곧바로 조심스럽게 영지를 꺼내들었다.“최상급 품질이네요!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해왔답니까?”임자부는 자영지를 가까이 들이대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만 감탄하고 이 자영지가 백년짜리인지나 좀 봐주쇼!”다급해진 고요가 옆에서 재촉했지만, 유독 자리에 앉은 북진연만 덤덤한 표정이었다.임자부는 주저없이 답했다.“당연하지요! 이 크기를 좀 보십시오! 백년 자영지가 틀림없습니다!”“너무 잘됐네요!”그러자 고요와 부하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왕야! 이것이 정말 백년 자영지가 맞답니다!”“이제 다 됐네요. 왕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했던 세 가지 약재 중에 한 가지를 찾은 것 아닙니까!”“게다가 이렇게 쉽게 구하다니!”북진연은 살짝 놀란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그는 빈 상자를 빤히 보다가 그날 담담하게 선물을 건네던 온사를 떠올렸다. 그녀에게서 이런 큰 선물을 받게 될 줄이야!임자부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북진연에게 물었다.“왕야, 이 백년 자영지는 누구한테서 받은 것입니까? 신선한 정도를 보니 금방 딴 게 분명합니다.”임자부는 북진연의 부하가 캐왔다고 생각해, 만약 약재를 캔 장소만 알아낸다면 어쩌면 횡재할 수 있겠다고 기대하며 손을 비볐다.“꿈 깨. 그건 내 부하가 캔 것이 아니다.”그러자 북진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임자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예? 그럼 누가 캔 겁니까?”임자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북진연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누가 나에게 선물로 주더군.”“선물이요?”임자부는 순간 아쉬운듯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기에 이런 보물을 선물한답니까!”본디
온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온사가 자신도 몰랐던 정곡을 찔렀으니 말이다. 그녀는 독기 어린 눈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온씨 가문에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거야?”온사도 사실 그럴 생각이었지만 온모가 편하게 살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온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상황을 봐야겠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되면 돌아가서 진국공부의 적녀의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적녀라는 두 글짜가 온모의 자존심을 찔렀다.대외적으로 그녀는 온권승이 은인의 딸을 입양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단지 그녀의 어머니가 정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제대로 따지면 온모는 서녀의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비천한 사생아에 불과했다.온사의 어머니인 란자군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우고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써넣지 않는 한은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영원히 온사를 뛰어넘어 진국공부 적녀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전생의 온모가 죽은 온사의 어머니를 괴롭혔던 이유기도 했다.“꿈 깨!”온모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며 잔뜩 분노한 눈으로 온사를 노려보았다.“가문에서 나갔으면 다신 돌아오지 마!”온사의 말은 일부분 사실이었다. 그녀는 온사를 집에 다시 데려다가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기를 원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온사는 이미 예전처럼 그녀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는 것보다는 밖에서 해결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온모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는 등 뒤가 무엇인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돌린 온사의 눈에는 막수 사태와 다른 사태들의 싸늘한 눈동자가 들어왔다.“이곳은 수월관 승려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입니다. 함부로 침입하지 마시지요.”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흉악한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온모는 처음부터 이 여승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그래서 곧바로 표정을 수습하고는 온사에게 미
“수상한 여자?”온사는 멈칫하며 되물었다.“사람들과 같이 오고 있어?”“아니요. 혼자인 것 같았습니다.”온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그럼 넌 일단 숨어 있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예.”추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자취를 감추었다.온사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밖으로 향했다.막 대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손바닥이 그녀의 얼굴을 향했다.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온사는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피하고는 손을 뻗어 상대의 귀뺨을 쳤다.선수를 치려다가 된통 당한 온모는 얼굴을 감싸며 분노해서 소리쳤다.“온사, 네가 감히 나를 쳐?”“그래 쳤다. 그래서 뭐?”온사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정말 머리가 안 좋은 건가. 내가 또 말해줘야 해? 내가 널 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말이야.”“너!”분노한 온모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온사가 더 빨랐다. 그녀는 바로 상대의 손목을 낚아채고 주저없이 귀뺨을 날렸다.짝!방금 전보다 더 찰진 소리가 들려왔다.온모는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매를 맞은 탓에 볼이 빵빵하게 부어올랐다.온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디 다시 쳐봐. 내가 한대라도 맞나?”진작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전에는 기회가 없어서 못했는데, 그럼 지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온사는 몇 대 더 때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그러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온모가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그녀는 힘겨루기로 온사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화제를 돌렸다.“언니, 어떻게 동생한데 이렇게 할 수 있어? 내가 당장 폐하한테 가서 이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위선자 같으니라고! 네 본모습을 폐하한테 다 까발릴 거야!”“동생?”온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웃기지 마. 내 어머니는 내게 여동생을 낳아주지 않으셨어.”“그래. 같은 배에서 나온 게 아닌 건 인정해. 하지만 그래서 뭐?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다들 날 친딸,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챙겨줬어.”온모는 의기양양하게 온사를 도발했다.
오늘의 온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태어나기를 성녀로 태어났다고 감탄하며, 앞으로 본분을 다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성녀로 존중해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온사 본인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진짜 성녀로 거듭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삼촌, 보세요. 짐이 선택한 성녀 괜찮지요?”한편, 어린 황제는 조정의 대신들과 백성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그는 점점 더 온사가 마음에 들었다.처음에는 그저 기회를 준 것뿐이었지만, 그녀가 지금 보여준 모습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폐하의 안목이 참 탁월하십니다.”북연진도 어린 황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동안 온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북연진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기도 의식에 필요한 경문은 총 아홉 장,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전부 암기해서 읊어야 했다.이것이 온사가 급하게 수월관으로 돌아온 이유이기도 했다.다행히도 남은 며칠 동안 막수 사태의 도움으로 그녀는 결국 기도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아홉 장절의 경문을 모두 암기하는데 성공했다.“그런데 나보다 나이도 많은 영감탱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어요.”어린 황제는 피식 웃으며 온씨 가문 일행을 힐끗 바라보았다.온자신을 제외한 온씨 가문의 모두가 무대 아래에서 행사를 참여했지만, 온권승은 그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관망대에 올라간 딸을 바라볼 뿐이었다.온장온과 다른 형제들의 표정은 착잡했다. 지금도 그들은 여동생이 성녀이자 여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리고 온사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눈빛 한번 안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분명 가족인데도 그녀는 그들을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대하고 있었다.“온사 쟤는 정말 저렇게까지 우리랑 멀어지고 싶은 걸까?”하지만 온장온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그건 아닐 겁니다.”옆에 있던 온자월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집에서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먹으면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온사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사부님이… 독왕이셨다고요? 귀의라고 불리는 독왕이요?”막수 사태가 눈썹을 찡긋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대명 왕조에는 두 명의 유명한 의술 천재가 있었다.한명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의성 임자부, 그리고 또 한명은 의술과 독학을 겸비한 귀의 독왕이었다.그들의 명성은 안방에서 곱게 자란 온사마저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중 신출귀몰하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귀의 독왕이었는데, 소문에 지금까지 귀의 독왕의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그런데 오늘 온사가 그런 인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신비에 둘러싸인 귀의 독왕이 여승들만 사는 허름한 사찰의 주지 사태인 줄을 누가 알았을까?“그럼 사부님, 정말 저에게 독학을 가르쳐 주신다는 말씀인가요?”“왜? 싫으냐?”“그럴 리 없잖아요!”온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냥 제가 이렇게 큰 행운을 가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요.”안 그래도 직전에 북진연이 믿을만한 스승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일깨워 줬었는데 독왕이 바로 신변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게다가 그렇게 대단한 분이 자신의 사부라니!온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지금 기뻐하긴 일러. 독학을 배워주는데 있어서 만큼은 나도 아주 엄격할 거니까.”막수는 온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니 지금은 먼저 날 따라서 의술부터 배우겠다고 맹세하렴.”“무슨 맹세요?”막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불가에서 해서는 안 될 것 중에 하나가 살생이야. 독을 배우겠다면 그 독으로 절대 살인을 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그러자 온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그녀는 한참의 고민 끝에 막수에게 말했다.“걱정 마세요, 사부. 비록 독을 이용해서 복수할 생각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제 신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녀는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는 이유로 가문을 떠났고 나라를 위해 기도
“이건 섭정왕 전하께 드리는 저의 답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 드리는 거예요. 귀찮으시겠지만 섭정왕 전하께서 소인을 대신해 폐하께 전해주셨으면 합니다.”북진연은 나무 상자를 건네받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렇게 북진연이 돌아간 후, 온사는 다시 경문을 베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사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바로 막수 사태였다! “무우야.”막수 사태는 진지하게 경문을 필사하는 온사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사부님?”온사가 이내 붓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섭정왕 전하께서 그림자 호위 한 명을 데려왔다지?”“예. 감사히 받았습니다. 제가 추월이라는 이름도 지어줬어요! 그 아이를 만나보시렵니까?”사람을 수월관에 들이는 일은 막수 사태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럴 필요까지 없다. 네 사람이니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막수는 손사래를 치고는 온사가 건넨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아 보거라. 내가 너한테 긴히 물어볼 게 있으니.”온사는 찻잔을 내려놓고 사부의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무슨 일입니까?”막수는 온순한 그녀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너… 최근에 독약을 연구하고 있었니?”온사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다급히 해독약을 그녀에게 먹여준 사람이 바로 사부였으니 말이다.“예.”온사는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막수 사태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불가에 발을 들인 제자는 독을 연구하면 안 되는 겁니까?”막수 사태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아니다. 독이라도 잘 쓰면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거니까.”온사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막수 사태가 말을 이었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몰래 독을 연구하는 것은 안 된다.”막수는 엄중한 표정으로 온사를 바라보았다.“그날 자칫 잘못했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어.”“하지만 사부님, 저 이미 독경을 손에 넣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