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태는 말을 마치자마자 후회했다. “다... 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소희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모님이잖아...” 소희는 현태의 쩔쩔매는 모습이 웃겨서 피식 웃었다.암울했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소희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던 현태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소희야, 너 웃는 거 정말 예쁘다.” 소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마치 온 노을이 지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오빠...”“소희야...”현태가 침을 삼켰다. 빵!뒤에서 들려오는 경적을 듣고서야 두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 소희가 어색하게 말했다.“우리가 다른 사람의 갈 길을 막은 것 같아요.”“그래, 그래.”어수룩하게 머리를 쓰다듬은 현태가 길을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옆에서 바라보던 소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소희의 웃음소리를 들은 현태의 기분 역시 좋아지는 듯했다. 두 사람의 가슴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서서히 개었다. ...현태가 결혼식장의 뒷일과 지엽에게 협조하는 일을, 상언이 이서의 해외 생활을 돕는 일을 책임지기로 결정한 후, 모든 사람은 묵묵히 결혼식 날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계획에는 자연스럽게 윤재하 부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원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지만 기억을 잃은 이서가 결혼 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우리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도 완전히 잊었다는 거야?’ ‘자기가 우리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마저도?’ 흥분한 윤재하 부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이서를 만난 두 사람은 다정한 부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은철은 이서와 윤씨 가문의 여러 은혜와 원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온 신경이 지환에게 쏠려 있던 터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물며, 하나 역시 일찍이 이서에게 어떠한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를 일깨워 준 상황이었다. ‘일단 이서와의 기억이 어긋나면 이서는 자극받게 될 거야.’‘이 점에 관
“저는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런데 은철이도 전에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윤재하가 기뻐하며 말했다.“기억이 나지 않아도 괜찮단다. 이 아비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어. 은철이랑 결혼하면 MH그룹도 너한테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게다.” “여자로서 하씨 가문의 아들을 가르치고 있을 테니 말이야. 아마 회사를 경영할 시간 따위는 없을 거야.” “그래서...”윤재하가 이서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한가한 내가 회사를 보살피면 어떨까 싶구나.” 이서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하지만 아빠, 아빠는 윤씨 그룹을 관리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윤재하가 성지영과 눈을 마주쳤다. “아, 윤씨 그룹은 작은 회사니까 잠깐은 부하 직원에게 맡겨도 될 것 같구나.” “하지만, MH 그룹은 정말 큰 회사여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면 해산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윤재하가 말했다.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에서 많은 것이 충돌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빠,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이서가 간신히 그 고통을 억눌렀다.“결혼식이 끝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이서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윤재하 부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 이 이야기는 결혼식이 끝난 후에 하자꾸나. 잘 준비하거라. 엄마 아빠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윤재하가 성지영을 끌고 신부 대기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를 기다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미소를 지으며 이서를 향해 말했다.“신부님, 화장을 시작하겠습니다.”“네.”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모습을 바라보던 이서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 듯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향해 말했다. “맞다, 오늘은 꼭 예쁘게 해주세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북성, 아니, H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드릴게요!” 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H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고 싶지는 않아.’ ‘그저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싶어
결혼식장 무대 위.하은철은 무대 아래의 모든 이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4대 가문의 사람들이었다.은철이 4대 가문의 모든 사람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그의 작은 아버지인 지환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모든 곳을 확실히 검사했는데도 작은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까?” 하은철이 주 집사에게 물었다. “네.”“말도 안 됩니다. 내가 이서랑 결혼하는 걸 뻔히 알면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걸로도 모자라 결혼식에도 나타나질 않는다고요?” 은철의 눈빛이 매우 날카로워졌다.“각 출입구에 더 많은 사람을 배치하세요. 작은 아빠는 오늘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네, 도련님.”주 집사가 자리를 떠나자, 소씨 가문의 가주인 소태성이 소지엽을 데리고 무대 옆으로 가서 하은철에게 인사를 건넸다. “은철아.”하은철이 고개를 돌려 지엽을 바라보았다. 은철은 멍해지는 듯했다. ‘뭐야, 외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 지엽이 손에 든 잔을 들어 올렸다.“은철아, 오랜만이네.” “그러게, 왜 돌아온 거야?” 은철이 아무렇게나 물었다. “이서가 결혼한다길래 일부러 귀국했지.”지엽이 은철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은철이 사방을 살피던 눈빛을 거두고 지엽을 바라보았다. 지엽의 두 눈에서는 명확한 흠모가 드러나고 있었다.안색이 변한 은철이 눈을 가늘게 떴으나, 그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지엽이한테 이서는...’ 하지만 은철은 곧 석연해졌다. ‘저 녀석 따위는 내가 두려워할 것이 못 돼.’ ‘그래봤자 소씨 가문의 사생아일 뿐이잖아? 사생아 따위가 무슨 물보라를 일으킬 수 있겠어.’ “정말? 큰마음을 먹었네.” 은철이 손을 내밀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지엽 역시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은근히 힘을 겨루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소태성은 두 사람의 기 싸움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환하게 웃으며 은철을 향해 말했다. “은철아, 앞으로 우리 지엽이 좀 잘 부
“이서야, 조급해할 거 없어.”윤재하가 이서의 손등을 두드렸다.“곧 결혼식이 시작될 게다. 조금만 기다리면...” 윤재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서는 깜짝 놀랐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스태프 옷을 입은 남자가 손에 마취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랑 함께 가시죠.” 그 남자가 이서에게 말했다. 이서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당신은... H선생님이 아니잖아요.” ‘H선생님과 완전히 다른 목소리야.’ 지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들은 대로네요.” “뭐라고요?”“저는 H선생님이 아니에요.” 지엽이 말했다.“당신이 기다리는 H선생님이 오늘 당신을 데리러 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이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지엽이 못 말린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이것마저도 예상했던 반응이네요.” “못 믿겠으면 직접 H선생님께 전화해 보세요.”이서가 반신반의하며 휴대전화를 꺼내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즉시 연결되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는 조급하고 엄숙했다. “그 사람을 따라 가요.” 지환은 이 말을 마친 후,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서가 고개를 들자,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엽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믿으시겠어요?”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지엽의 눈동자에 상처가 스쳤다.“정말이지... 갑시다.” 이서가 드레스 자락을 들고 물었다.“어디로 가는 거예요?” 지엽이 동쪽 뱡향을 가리켰다.“저쪽으로요.” 지엽이 동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자, 하이힐을 벗어 던진 이서도 맨발로 지엽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은 가로막히고 말았다. 사방이 모두 사람이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여러 사람을 헤치고 이서의 앞에 다다른 주 집사가 물었다. 이서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으나, 이미 뒤쪽에도 하은철의 사람이 배치된 상황이
상황을 지켜보던 경호원이 즉시 다리를 들어 지엽의 손에 있는 마취총을 걷어차려 했다. 하지만 지엽은 일찌감치 상대방의 의도를 예상했다는 듯 손목을 돌렸고,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마취총을 고쳐 잡았다. 이 장면을 본 주 집사가 즉시 다른 경호원에게 말했다.“집합!”경호원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가장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이 풀썩 쓰러졌다. 이는 즉시 주 집사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여러 사람이 손에 마취총을 든 채, 그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발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한둘이 아니잖아.”주 집사가 무전기를 꺼냈다.“여기는 신부 대기실 앞이다. 즉시 지원 바란다.” 이서는 손에 마취총을 든 사람들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힘껏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고로 경호원들이 힘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이서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일까.이서는 마침내 경호원들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성을 잃은 이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도망치려다 지엽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따라오세요!”이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지엽을 따라 총알이 빗발치는 것을 피해 문어귀 방향으로 뛰어갔다. 계단을 내려오는 두 사람의 눈에 출구가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활짝 열렸던 출구가 닫히고, 빛도 차단되고 말았다.마치 온 세상이 단번에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순간, 이서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공포에 떨며 에스컬레이터를 꽉 붙잡았다. 팍!스위치가 올라가고, 마침내 어둠 속에 한 줄기의 빛이 들어왔다. 이서는 그 희미한 불빛을 빌어 문어귀에 서 있는 하은철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뒤에는 빽빽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서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서야, 정말 가려고?”은철이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널 데리러 온 사람이 작은 아빠가 아니라 소지엽일 줄은 몰랐지 뭐야?”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머릿
“설마 네 행동이 정겹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정신 차려, 기껏해야 유치한 행동이니까.”“장난감을 빼앗겼으니 되찾아오겠다는 어린아이 같은 유치함!” 하은철의 두 눈이 마치 통제력을 잃은 짐승처럼 붉어졌다. 그가 지엽을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뭘 알아?! 나랑 이서의 일은 너 따위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이서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대치 중이던 두 사람은 이 소리에 깜짝 놀란 듯했다. 사람들이 분분히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는 엄청난 자극을 받은 듯,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아파... 머리가 너무 아파. 하지환... 하지환이 대체 누구야?!” 상황을 지켜보던 지엽이 이서를 안은 채 은철을 밀치고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은철이 두 사람의 앞길을 막아 세웠다. “내려와!”은철이 지엽의 품속에서 고통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지엽이 격노하며 말했다.“하은철, 네가 사람이야? 이서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도 계속 몰아 붙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거냐고!” “당장 내려오라고!”하은철이 한 글자 한 글자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엽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붉게 상기되었다.“하은철!” “내려와, 당장!”은철이 말하는 동안,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지엽을 에워쌌다. 결국, 아랫입술을 깨문 지엽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이서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지엽의 품에서 내려온 이서는 자리에 설 힘조차 없는 듯했다. 그녀는 마치 뇌전증 환자처럼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누워 괴로워했다. 이서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엽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들어 올렸고, 은철을 향해 세차게 내리쳤다. 방심했던 은철은 정확히 코를 한 대 얻어맞았다. 그는 고통에 차가운 숨을 들이마셨으며, 연거푸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경호원이 즉시 은철을 향해 달려오려고 했으
하은철은 소지엽의 허리를 거세게 잡고 있었으나, 눈으로는 이서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너져버린 출구가 점점 이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은철 머릿속의 양심과 충동의 대립 또한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놓을까, 말까?’은철조차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듯했다.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얻을 수 없으면 망쳐버려!’“하은철!”지엽이 주먹을 들어 은철의 아랫배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나 은철의 손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지엽을 꽉 붙잡고 있었다.통증이 복부에서 온몸으로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은철은 결코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던 찰나, 번개와같이 빠른 속도로 나타난 한 사람이 이서를 안고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사람이 바닥에 발뒤꿈치를 디딜 즈음, 뒤쪽에 있던 출구가 와르르 무너져 격렬한 소리를 냈고, 사방으로 흩어진 유리가 온 홀을 가득 채웠다.많은 사람이 유리에 찔려 다치기도 했으나, 오직 그 남자의 품에 안긴 이서만이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기절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었다. 이날 이곳에, H선생님이 왔었다는 사실을. “작은 아빠?”은철이 짧은 충격 끝에 정신을 차렸다. 놀란 지엽이 불가사의하게 지환을 바라보았다. ‘하 대표님이 베일에 싸여있던 하은철의 작은 아버지라니!’천천히 이서를 내려놓은 지환은 현태에게 그녀를 부탁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 한 걸음 한 걸음 은철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더 이상 기질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고,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옥에서 온 악마와 같은 모습이었다. 은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환이 하은철의 앞에 다다랐다. 하은철보다 훨씬 큰 키를 가지고 있었던 지환이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은철이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여긴 H국이지 M국이 아니에요. 작은
지환이 시동을 걸려던 찰나,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그가 멈춘 1초 동안, 소지엽이 기세를 몰아 차에 올랐다. 지환은 그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곧장 차를 몰아 마이클 천의 진료소로 향했다.지엽이 수시로 고개를 돌려 뒷좌석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 괜찮겠죠?”운전대를 붙잡고 있는 지환의 팔에 핏줄이 솟아올랐다.“괜찮을 거야!” 상황을 지켜보던 지엽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고, 묵묵히 이서를 주시할 뿐이었다. 지환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차를 몰았다. 지엽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팔걸이를 꽉 부여잡아야 했다. 세 사람은 마침내 마이클 천의 진료소에 도착했다. 지환의 품에 안긴 이서를 본 마이클 천이 대뜸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지환이 지엽을 바라보았다. 지엽은 망설이지 않았고, 하은철이 이서의 앞에서 지환의 일을 언급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그가 말을 뱉어낼 때마다 지환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지엽이 말을 다 끝낼 때쯤, 그의 얼굴은 짙은 먹물보다도 더 검어져 있었다. “대표님, 지금 바로 치료해야 합니다.” 이 말을 마친 마이클 천은 즉시 이서를 부축하여 떠났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한참 억눌렀던 지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벽을 세차게 내리쳤다. 금세 그의 손에서 선혈이 솟구쳐 올랐고, 지엽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지환이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그가 얼른 지환의 걸음을 따라잡으며 물었다.“어디 가세요?” “하은철을 찾으러.”지엽이 얼른 지환의 앞을 막아섰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하은철을 찾으러 가시겠다고요?” “내가 여기에 남으면 뭘 할 수 있는데?” 지환이 차가운 눈으로 지엽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투는 대단히 차가워서 전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엽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지엽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이서의 곁에는 대표님이 계셔주셔야죠.” “이서가 정신을 잃은 이 시간 동안이라도” “이서를 보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