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지켜보던 경호원이 즉시 다리를 들어 지엽의 손에 있는 마취총을 걷어차려 했다. 하지만 지엽은 일찌감치 상대방의 의도를 예상했다는 듯 손목을 돌렸고,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마취총을 고쳐 잡았다. 이 장면을 본 주 집사가 즉시 다른 경호원에게 말했다.“집합!”경호원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가장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이 풀썩 쓰러졌다. 이는 즉시 주 집사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여러 사람이 손에 마취총을 든 채, 그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발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한둘이 아니잖아.”주 집사가 무전기를 꺼냈다.“여기는 신부 대기실 앞이다. 즉시 지원 바란다.” 이서는 손에 마취총을 든 사람들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힘껏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고로 경호원들이 힘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이서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일까.이서는 마침내 경호원들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성을 잃은 이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도망치려다 지엽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따라오세요!”이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지엽을 따라 총알이 빗발치는 것을 피해 문어귀 방향으로 뛰어갔다. 계단을 내려오는 두 사람의 눈에 출구가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활짝 열렸던 출구가 닫히고, 빛도 차단되고 말았다.마치 온 세상이 단번에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순간, 이서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공포에 떨며 에스컬레이터를 꽉 붙잡았다. 팍!스위치가 올라가고, 마침내 어둠 속에 한 줄기의 빛이 들어왔다. 이서는 그 희미한 불빛을 빌어 문어귀에 서 있는 하은철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뒤에는 빽빽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서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서야, 정말 가려고?”은철이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널 데리러 온 사람이 작은 아빠가 아니라 소지엽일 줄은 몰랐지 뭐야?”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머릿
“설마 네 행동이 정겹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정신 차려, 기껏해야 유치한 행동이니까.”“장난감을 빼앗겼으니 되찾아오겠다는 어린아이 같은 유치함!” 하은철의 두 눈이 마치 통제력을 잃은 짐승처럼 붉어졌다. 그가 지엽을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뭘 알아?! 나랑 이서의 일은 너 따위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이서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대치 중이던 두 사람은 이 소리에 깜짝 놀란 듯했다. 사람들이 분분히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는 엄청난 자극을 받은 듯,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아파... 머리가 너무 아파. 하지환... 하지환이 대체 누구야?!” 상황을 지켜보던 지엽이 이서를 안은 채 은철을 밀치고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은철이 두 사람의 앞길을 막아 세웠다. “내려와!”은철이 지엽의 품속에서 고통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지엽이 격노하며 말했다.“하은철, 네가 사람이야? 이서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도 계속 몰아 붙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거냐고!” “당장 내려오라고!”하은철이 한 글자 한 글자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엽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붉게 상기되었다.“하은철!” “내려와, 당장!”은철이 말하는 동안,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지엽을 에워쌌다. 결국, 아랫입술을 깨문 지엽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이서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지엽의 품에서 내려온 이서는 자리에 설 힘조차 없는 듯했다. 그녀는 마치 뇌전증 환자처럼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누워 괴로워했다. 이서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엽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들어 올렸고, 은철을 향해 세차게 내리쳤다. 방심했던 은철은 정확히 코를 한 대 얻어맞았다. 그는 고통에 차가운 숨을 들이마셨으며, 연거푸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경호원이 즉시 은철을 향해 달려오려고 했으
하은철은 소지엽의 허리를 거세게 잡고 있었으나, 눈으로는 이서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너져버린 출구가 점점 이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은철 머릿속의 양심과 충동의 대립 또한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놓을까, 말까?’은철조차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듯했다.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얻을 수 없으면 망쳐버려!’“하은철!”지엽이 주먹을 들어 은철의 아랫배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나 은철의 손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지엽을 꽉 붙잡고 있었다.통증이 복부에서 온몸으로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은철은 결코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던 찰나, 번개와같이 빠른 속도로 나타난 한 사람이 이서를 안고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사람이 바닥에 발뒤꿈치를 디딜 즈음, 뒤쪽에 있던 출구가 와르르 무너져 격렬한 소리를 냈고, 사방으로 흩어진 유리가 온 홀을 가득 채웠다.많은 사람이 유리에 찔려 다치기도 했으나, 오직 그 남자의 품에 안긴 이서만이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기절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었다. 이날 이곳에, H선생님이 왔었다는 사실을. “작은 아빠?”은철이 짧은 충격 끝에 정신을 차렸다. 놀란 지엽이 불가사의하게 지환을 바라보았다. ‘하 대표님이 베일에 싸여있던 하은철의 작은 아버지라니!’천천히 이서를 내려놓은 지환은 현태에게 그녀를 부탁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 한 걸음 한 걸음 은철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더 이상 기질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고,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옥에서 온 악마와 같은 모습이었다. 은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환이 하은철의 앞에 다다랐다. 하은철보다 훨씬 큰 키를 가지고 있었던 지환이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은철이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여긴 H국이지 M국이 아니에요. 작은
지환이 시동을 걸려던 찰나,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그가 멈춘 1초 동안, 소지엽이 기세를 몰아 차에 올랐다. 지환은 그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곧장 차를 몰아 마이클 천의 진료소로 향했다.지엽이 수시로 고개를 돌려 뒷좌석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 괜찮겠죠?”운전대를 붙잡고 있는 지환의 팔에 핏줄이 솟아올랐다.“괜찮을 거야!” 상황을 지켜보던 지엽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고, 묵묵히 이서를 주시할 뿐이었다. 지환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차를 몰았다. 지엽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팔걸이를 꽉 부여잡아야 했다. 세 사람은 마침내 마이클 천의 진료소에 도착했다. 지환의 품에 안긴 이서를 본 마이클 천이 대뜸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지환이 지엽을 바라보았다. 지엽은 망설이지 않았고, 하은철이 이서의 앞에서 지환의 일을 언급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그가 말을 뱉어낼 때마다 지환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지엽이 말을 다 끝낼 때쯤, 그의 얼굴은 짙은 먹물보다도 더 검어져 있었다. “대표님, 지금 바로 치료해야 합니다.” 이 말을 마친 마이클 천은 즉시 이서를 부축하여 떠났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한참 억눌렀던 지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벽을 세차게 내리쳤다. 금세 그의 손에서 선혈이 솟구쳐 올랐고, 지엽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지환이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그가 얼른 지환의 걸음을 따라잡으며 물었다.“어디 가세요?” “하은철을 찾으러.”지엽이 얼른 지환의 앞을 막아섰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하은철을 찾으러 가시겠다고요?” “내가 여기에 남으면 뭘 할 수 있는데?” 지환이 차가운 눈으로 지엽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투는 대단히 차가워서 전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엽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지엽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이서의 곁에는 대표님이 계셔주셔야죠.” “이서가 정신을 잃은 이 시간 동안이라도” “이서를 보
두 시간은 지환에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는 1분 1초도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가능하다면, 많은 돈을 써서라도 이 두 시간을 무한히 연장하고 싶어.’ 애석하게도,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지환도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금세 두 시간이 흘렀고, 그는 이서가 깨어나기 전에 병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병실을 나선 지환이 어느새 도착한 이상언과 임하나, 그리고... 떠나지 않은 지엽을 바라보았다. 상언의 속뜻을 짐작하고 있던 지엽이 지환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하 대표님, 너그럽지 못하시네요.” “분명 이서를 데려가라고 하셨으면서” “하 대표님의 친구분을 배치하셨으니까요.” 지환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나랑 합작하기 전까지는 이서를 데려갈 수 없다는 걸 잊지 마.”“그때는 제가 하 대표님께서 하은철의 작은 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지 않습니까. 만약 그때 대표님의 신분을 알았더라면, 절대 대표님과 합작하겠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환이 지엽을 향해 다가갔다.“얼마면 되겠어?” 지엽의 안색이 변했다.“지금 돈으로 제 진심을 모욕하려는 겁니까?” “아니, 보답하려는 거야, 이서의 남편으로서.” 지엽의 표정이 다소 음울해졌다.“하 대표님, 진심으로 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으신 거라면, 돈으로 저를 모욕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저도 하 대표님과 마찬가지로 이서가 하은철이랑 결혼하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이서를 돕는 이유는 이서를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서가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지엽이 말했다. 지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는 것을 본 상언이 얼른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곧 이서 씨가 깨어날 겁니다. 여기서 계속 싸우다가 이서 씨가 지환이를 보고 또다시 자극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이러는 겁니까?” 두 사람은 상언의 말을 듣자마자 말다툼을 멈추었다. “나 먼저 가볼게.”지환은 이 말을 던지고 문을 향해 무거운 발
“아닌가? 꿈을 꾼 것만 같아.”말하면 할수록 이서의 머릿속은 혼잡해지는 듯했다. 그녀가 고통스럽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나도 몰라... 어지러워, 너무 어지러워...” “그래, 괜찮아, 괜찮아.”하나가 이서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이서야, 모든 걸 기억해 내려고 노력할 필요 없어. 이것만 기억해. 누군가가 너를 구했고, 너는 하은철과 결혼하지 않아도 돼.” 하나를 바라보던 이서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럼... 혹시...”하나가 상언을 끌어당겼으나, 그와 눈을 맞추지는 않았다.“이 선생님이랑 외국으로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 “이 선생님?”‘분명 본 적이 있는 사람이야.’ “이서야.”다른 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의 시선이 금세 그에게 향했다. 그는 바로 지엽이었다. 지엽은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야, 나 기억해?”이서가 눈을 깜빡거렸다.‘확실히 낯이 익은 사람이야.’“혹시 저를 구하러 오셨던 분이세요?” 난감함을 느낀 지엽이 쓴웃음을 지었다.“나야, 소지엽. 기억 안 나?”이서가 문득 깨달은 기색을 드러냈다.“지엽이었구나, 너... 정말 많이 변했다. 아니, 정말 많이 커버렸어.” ‘이서의 기억 속에 나는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구나.’지엽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듯했다. “이서야.”지엽이 갑자기 엄숙해졌다.“나랑 외국으로 갈래, 아니면 이 선생님이랑 외국으로 갈래?” 이서가 물었다.”두 개의 선택지에 무슨 차이가 있는데?” “나랑 외국으로 가면 나의 보살핌을 받게 될 거고, 이 선생님과 외국으로 가면 H선생님의 보살핌을 받게 될 거야.” 지엽이 대답했다. “H선생님?!”이서는 깜짝 놀라 상언을 쳐다보았다.“H선생님의 사람이세요?”“그렇다고 할 수 있죠.”고개를 끄덕인 상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엽을 바라보았다. ‘만약 지엽 도련님이 진심으로 이서 아가씨와 함께 외국에 가길 바라셨다면, 굳이 내가 하 대표님의 사람이라는
이상이 없다는 검사 결과를 받은 이서가 이상언과 함께 비행기에 오르기로 결심했다.“하나야, 정말 나랑 같이 안 가는 거야?” 이서가 임하나의 손을 잡고 아쉬워했다. 하나가 상언을 한 번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돌린 상언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서야, 기회가 있으면 널 보러 갈게. 외국에서 잘 치료하고 있어야 해, 알았지?” 하나의 말을 들은 이서는 그녀가 자신과 함께 외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서는 크나큰 실의에 빠진 듯했다.“응, 잘 치료할게. 너도 잘 지내야 해.” “응, 꼭 그럴게.”하나의 아련한 시선이 상언에게 향했다. 잠시 후, 그녀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 선생님, 저랑 따로 이야기 좀 하시죠.” 다른 방법이 없었던 상언은 고개를 돌려 하나를 마주해야 했다.눈빛의 모든 정서를 거둔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요.”몸을 일으킨 두 사람이 복도를 따라 다른 방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는 순간, 하나가 상언을 껴안았다. 상언은 정신이 멍해졌으나, 공허했던 심장은 서서히 채워지는 듯했다.“이 선생님.”“네.”“선생님도 꼭 잘 지내셔야 해요.”이는 수많은 감정을 대변하는 한마디였다. 상언의 떨리는 손이 하나의 부드러운 머릿결로 향했다. “그래요. 하나 씨, 내가 없어도 잘 지내세요. 그리고...” 상언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하나를 바라보았다.“가끔은 날 생각해 줘요.”하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 그럴게요.” 하나의 대답을 들은 상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약속한 거예요.”“네.”하나가 상언의 손을 잡았고, 상언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었다. 같은 시각, 비행기 옆.스웨터 한 벌을 품에 안은 심소희가 숨을 헐떡이며 온몸이 피투성이인 임현태의 앞에 서 있었다.그녀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많이 다친 거예요?소희가 다정하게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현태의 시선이 소희의 품에 안긴 스웨터로 향했다.그가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나한테 주
박예솔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 “비행기 안에 있을 겁니다.”하은철이 냉소를 지으며 소파에 대자로 널브러졌다. 그의 심장부는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으며, 가볍게 숨을 내쉬는 것조차 통증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틀림없이 외국으로 갔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은철 씨와 한배를 탄 이상, 난 반드시 약속을 지킬 테니까요.] [잊지 마세요, 내가 하지환 씨와의 결혼을 꿈꾸는 사람이라는 걸요.] 하지만 은철은 그녀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되찾을 수 없는 듯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겁니까?” [살아있는 한 기회는 있어요. 설마 이렇게 빨리 포기하려는 거예요?] 은철은 서서히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래요, 죽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있겠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실 필요 없어요. 윤이서 씨가 외국으로 간 이상, 제가 책임질 테니까요. 하은철 씨의 도움이 필요할 때 다시 연락드리죠.]“네.”짧게 대답한 하은철이 또 갑자기 물었다.“우리도 이제 아는 사이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당신의 정체를 밝힐 때도 되지 않았나요?”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은철이 말을 이어 나갔다.“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습니까?” [박예솔이에요.]예솔이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은철은 즉시 멍해졌다. “작은 아빠를 쫓아다닌다는 그 여자라는 겁니까?” 은철은 예솔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지환의 동네에서 예솔은 너무도 유명했다. 심지어 거의 모든 이가 그녀가 지환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지환과 몇 번의 만남을 가졌던 은철 역시 예솔의 존재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서와 마찬가지로 결과를 따지지 않는 직진형이었기 때문에, 은철은 그녀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여자가 작은 아빠를 쫓고 있을 때, 이서가 날 버리고 떠나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