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서는 임하나의 터무니없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너 말이야, 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그냥 상담소에서 찾은 사람이야. 하씨 집안과 관계가 없고, 유일하게 엮인 것은 그가 HS 그룹에서 일한다는 거야.”“아.”임하나는 크게 실망했다.“그러니까, 그는 심지어 하은철의 부하다 이거야? 그럼 앞으로 하은철이 너를 괴롭히려고 하면 더욱 쉬운 거 아니야?”윤이서는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아마…… 아닐 거야, 하씨 집안 어르신을 봐서라도 말이야. 게다가 난 이미 결혼했으니 하은철은 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임하나는 약간 안심했다. 그러나 하은철이 한 짓을 생각하면 그녀는 또 참지 못하고 절친을 위해 불평을 품었다.“그때 내가 제대로 손봐줬어야 했는데. 설마 네가 얼마나 지랑 결혼하고 싶어 했는지 모르는 거야?”윤이서는 작은 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하나야, 이미 지나간 일이야. 앞으로 나와 하은철은 각자의 삶을 사는 서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야.”“그럼 그 혼약은…….” 임하나가 물었다.“어르신 쪽은 아직 모르지? 어르신께서 아시면 틀림없이 상심할 거야.”윤이서는 방금 전까지 내려놓은 근심을 다시 걱정하기 시작했다.하은철의 할아버지에 대해 윤이서의 마음속에는 양심의 가책만 남았다.그녀와 하은철의 혼약은 어르신이 직접 정한 것이었다. 윤씨네 집안이 몰락한 후, 모두들 어르신이 그 약속을 회수하며 그녀가 바닥까지 추락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그러나 어르신은 혼약을 취소하기는커녕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그녀만 손자며느리로 인정한다고 밝혔다.심지어 그녀 때문에 어르신은 손자인 하은철과 자주 다투곤 했다.지금 일이 이렇게 되자, 윤이서는 유일하게 미안한 사람이 바로 어르신이었다.“그냥…… 오늘 밤에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윤이서가 말했다.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는 것보다 차라리 그녀가 직접 어르신께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임하나는 걱정을 금치 못했다.“내가 같이 가줄까?”“아니야.” 윤이서는 웃었다.“할아버지
30분 지난 후, 윤이서는 어르신이 준비한 차를 타고 천해 호텔로 갔다.룸 입구에 도착해서야 윤이서는 오늘 밤 하씨네 집안에 환영회가 있다는 것을 집사로부터 들었다.“하은철도 있나요?” 윤이서가 물었다. 그녀는 지금 그가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집사는 그녀의 뜻을 오해하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안심하세요. 도련님은 곧 오실 거예요.”“…….”‘지금 갈까?’그러나 뒤쪽의 문이 열렸다.윤이서는 어쩔 수 없이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님.”“그래!” 어르신은 윤이서를 보며 주름살이 펴질 정도로 웃었다.“우리 이서 왔구나. 자, 얼른 할아버지 옆에 앉거라.”윤이서는 어르신 곁에 자리를 잡았다.그리고 그녀는 앉고 나서야 주변 사람들 아무도 아직 젓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아마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윤이서의 마음을 간파한 듯 하 어르신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오늘 밤은 은철이 둘째 작은아버지가 귀국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란.”비록 하지환이 귀국 소식을 비밀로 할 것을 요구했지만, 어르신은 윤이서를 무척이나 신임했다.그녀는 절대로 이 사실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윤이서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무언가가 생각났다.어르신에게는 형이 하나 더 있었는데, 젊었을 때 외국에 가서 혼자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더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사장직을 맡은 후, 1년도 안 되어 회사를 지역 내 가장 큰 회사로 만들었다고 했었다.다만 그 아들은 무척이나 겸손하여 언론 앞에서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오늘 밤 이 전설적인 인물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윤이서는 은근 기대감이 부풀었다.바로 이때, 문이 다시 열렸다.윤이서는 궁금해하며 바라보았다.그리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그녀는 눈빛이 싸늘해졌다.하은철도 웃음이 굳어졌고 눈빛에서 혐오감이 조성되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윤이서는 그에 대한 원한을 숨긴 채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할아버님 보러 왔지.”하은철은 냉
두 사람은 그렇게 룸을 나섰다.룸에서 나오자마자 하은철은 윤이서의 가녀린 목을 졸랐다.“할아버지가 네 편이라고 해서 줄곧 이렇게 날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윤이서는 그 바람에 숨을 쉬지 못했지만 얼굴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힘겹게 또박또박 말했다.“그럼 너도 더 이상 나랑 결혼하고 내 신장을 가져갈 생각하지 마. 일찍 할아버님께 분명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나도 내가 다음에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하은철은 흠칫 놀랐다.눈앞의 윤이서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을 자신도 모르게 조였다.그는 마지막으로 경고했다.“너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파혼은 물론이고, 너의 신장도 수정이에게 줄 수밖에 없어!”말을 마치고 그는 뒤돌아섰다.윤이서는 그가 결연하게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문득 8년 전의 자신이 왜 하은철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후회스럽기만 했다.그녀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몸을 돌려 웨이터에게 하은철의 둘째 작은아버지의 행방을 물어보려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지환을 보았다.그는 어두컴컴한 빛 속에 서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잘 재단된 양복은 그의 완벽한 몸매를 드러냈고, 온몸의 카리스마가 마치 사람을 압도하는 것 같았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윤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천해 호텔은 북성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로서 하씨 집안 사람들만이 이곳을 출입할 수 있었다.그러나 하지환은 윤이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하은철이 윤이서 씨 약혼자였어요?”그는 처음에 확실하지 않았지만, 어르신이 “이서야” 라고 부른 것을 듣고 의심하기 시작했다.그래서 그는 비서에게 윤이서의 신분을 조사하라고 했다.그리고 때 마침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윤이서가 하은철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게 된 이 상황에서 기막힌 타이밍에 나타난 자신의 아내를 하지환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윤이서는 하지환이 자신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반응하여 허둥지둥 윤이서를 밀어내고 수정을 대신해서 죽을 닦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수정은 두피가 찢어질 듯 아파 눈물을 뚝뚝 흘렸다.간병인은 이 상황을 보고 분노하여 윤이서에게 물었다.“당신은 누구죠? 지금 당신이 건드린 사람이 누군지 아냐고요!”윤이서는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아직 파혼하지 않은 하은철의 약혼녀.”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그리고 윤수정을 보는 시선도 점점 변했다.정신이 든 윤수정은 당황하며 설명했다.“그건 오빠가 어렸을 때 약속한 혼인이고, 두 사람은 전혀 감정이 없잖아. 나와 은철 오빠야말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야, 그러니까 언니, 은철 오빠를 내게 줄 순 없어?”많은 사람들은 잇달아 윤이서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윤이서는 코웃음 쳤다.이 여동생은 정말 앙큼한 사람이었다!그녀는 두 팔을 안고 천천히 반박했다.“너희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하은철은 왜 할아버님께 파혼 얘기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설마 널 속이는 건 아니겠지? 그냥 가지고 놀고 있는 건가?”윤수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지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반드시 재벌 집 아가씨의 풍모를 유지해야 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죽어라 입술을 깨물었다.“언니, 나는 언니가 나를 구하기 위해 신장을 기증하라고 하는 것 때문에 매우 괴롭다는 거 알아. 언니가 괴롭지 않기 위해, 나도 이제 더 이상은 살고 싶지 않아!”그녀는 휠체어를 밀고 한쪽 기둥을 향해 머리를 부딪혔다.예전 같았으면 윤이서는 분명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그녀는 여유롭게 말했다.“힘 좀 줘, 그리고 네가 세게 부딪치다 죽으면 나야 너무 좋지. 그때 가서 온 세상이 다 알게 되면, 할아버님도 너와 하은철의 그 추잡한 일을 알게 될 테니까!”윤수정은 동작을 멈췄다.그녀는 하은철을 가장 아끼는 윤이서가 뜻밖에도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일부러 휠체어에서 떨어져 한 걸음 한 걸음 윤이서
이상언은 수술침대와 거리가 있어 위에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고, 하은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세계 최고의 신장 전문의에게 이런 수술은 식은 죽 먹기였다.그가 외국에서 돌아와 이 수술을 맡게 된 것은 하지환의 부탁 때문이었다.“그럼 먼저 갈게요, 여긴 이 선생님에게 맡길게요.”하은철은 또 그에게 몇 마디 인사를 하고서야 몸을 돌려 떠났다.이때.사무소 앞.하지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그는 명품을 입지 않았고, 차도 평범했지만 외모가 출중한 데다 멋지고 완벽한 몸매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만인의 주목을 받고도 하지환은 담담하게 사무소 앞에 서서 손목을 들어 팔근육을 드러냈다.이미 9시 10분이 되었는데도 윤이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그는 지각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윤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전화를 걸다 롤스로이스 한 대가 멀지 않은 곳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북성은 한국의 메인 도시로서 고급차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그래서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진정으로 하지환의 주의를 끈 것은 자동차 번호판이었다.[A0XXXXXX]이 번호판을 사용하는 사람은 기필코 하씨네 가문 사람일 것이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가 사무소 입구에서 멈추는 것을 보았다.다음 순간, 차문이 경호원에 의해 열리더니 깔끔한 흰색 양복을 입은 하은철이 의기양양하게 차에서 내렸다.주위 사람들은 하은철이라는 것을 보고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아아아아, 하은철이다!”“우와, HS 그룹의 도련님이 여기에 오다니!”“윤씨 집안 아가씨랑 결혼하는 건가?”“…….”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하은철은 웃으며 말을 하지 않았고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빠른 걸음으로 사무소로 향했다.그리고 이때, 그는 군중 속에 서 있는 하지환을 발견했고, 즉시 놀라서 빠른 걸음으로 하지환 앞으로 걸어갔다.“둘…….”어르신의 당부를 생각하자 하은철은 얼른 말을
“이 선생님.” 윤수정의 주치의는 윤수정에게 눈짓을 하고서야 이상언에게 말했다.“이런 작은 수술까지 선생님께서 직접 손쓰실 필요 없습니다.”이상언은 시선을 돌려 어디서 윤이서를 만났는지 생각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예쁜 여자들은 다 비슷했으니까.그는 정말 긴 시간을 생각했다.그리고 그는 주치의를 보았다.어젯밤 토론이 끝난 후부터 이 주치의는 줄곧 자신이 수술을 하면 된다고 고집했다.그가 이렇게 적극적인 것을 보고 이상언은 동의했다.“그래.”마침내 수긍을 받자 주치의는 긴 숨을 내쉬며 마취사에게 말했다.“빨리 마취 시작해.”마취사는 주사를 들고 윤이서의 팔에 찔렀다.윤이서는 액체가 조금씩 몸 안으로 흘러드는 것을 보며 무기력하게 말했다.“놔…… 놔요…… 날 놓으…….”액체가 흘러들어가며 윤이서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부모님, 하은철, 친구들, 그들 모두 머릿속에서 잠시 멈췄다.그리고-하지환.그가 지금까지도 자신이 이혼하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고, 자신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윤이서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미안해요, 하지환 씨…….”……9시가 넘은 북성은 마침 차가 막히는 출근 타임이었다.길이 막혀서 차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운전석에 앉은 하지환의 얼굴은 음침하기 그지없었다.그는 애가 타며 핸들을 짚었다.먼 곳의 빨간 불은 눈에 거슬렸고, 상상 속 수술실의 모습이 현실과 막 뒤엉켰다.그는 괜히 짜증이 났다.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맑고 억척스러운 소녀의 눈빛이 떠올랐다.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더니 다음 차가 들어오기 전에 그는 방향을 돌려 좁은 골목을 따라 나갔다.차주는 깜짝 놀라 창문을 내려 이미 지나간 차를 향해 소리쳤다.“미쳤어, 죽으려고 작정하는 거야!”차선을 바꾼 하지환은 정말 목숨을 건 듯 필사적으로 경적을 누르면서 앞으로 돌진했다.다른 차주들은 이 상황을 보고 놀란 채 다급히 차를 피했다.바람이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막힌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경호원은 공포감을 느꼈다.“2층, 208.”원하는 소식을 듣고 하지환은 다리를 들어 호출기를 발로 밟아 부순 다음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바닥에 박살난 호출기를 보고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꼼짝도 하지 못 했다.하지환이 엘리베이터로 들어갈 때까지, 그들은 호출기를 꺼내 다른 사람더러 지원하라고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엘리베이터는 곧 2층에 도착했다.하지환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208호 수술실에 켜진 빨간불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그 눈부신 붉은색은 마치 상처를 가르는 칼처럼 하지환의 심장에 꽂혔다.꽉 쥔 주먹은 빠드득 소리를 냈다.문 앞에 이르자 그는 손을 들어 문을 쾅하고 쳤다.견고한 나무문은 너무나 쉽게 부서졌다.수술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란 채 문 앞을 바라보았다.그들은 통제력을 잃은 듯한 하지환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무서운 기운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이상언만이 살짝 놀라더니 그에게로 다가갔다.“지환아, 너 왜 그래?”그의 인상 속, 하지환은 언제나 침착하고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오늘은 왜 통제력을 잃었을까?하지환은 이상언을 밀치고 곧장 수술침대 앞으로 달려갔다.병상에 누워 얼굴이 창백하고 피투성이가 된 윤이서를 보았을 때, 그의 동공은 매서울 정도로 커졌다.“어떻게 된 일이야?”이상언은 하지환의 뒤를 따랐다.“지환아, 여긴 수술실인데…….”“지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잖아.” 순간의 공포가 그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고, 그는 고개를 돌려 엄숙한 눈빛으로 이상언을 쳐다보았다.이상언의 시선은 하지환과 윤이서 사이에서 떠돌다가 그제야 윤이서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해냈다.그녀는 바로 하지환과 결혼한 사람이었다!그러니까…….“이 여자는…….”이상언은 식은땀을 흘렸다.“아직 신장을 꺼내지 않았으니 넌 먼저 나가 있어. 내가 지금 바로 봉합을 진행할게.”하지환은 가만히 서 있었다.이상언은 급해졌다.“빨리 나가.
위태롭다는 말에 하지환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리고 싸늘한 살기가 맴돌았다.간호사는 하지환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장면을 떠올리며 벌벌 떨었다.그녀는 그가 주먹으로 갑자기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웠다.다행히도 하지환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가버렸다.“당장 혈액은행에 연락해.” 하지환은 휴대전화를 쥐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저쪽의 비서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대표님은 돌아오셨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으신 거 아니었습니까…….”“즉시 처리해!”“예.” 비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서둘러 그가 시킨대로 했다.전화를 끊자 하지환은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가슴에 맺힌 분노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그가 다시 병실 입구로 돌아왔을 때, 빨간 등은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30분 후.이상언은 피곤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큰 문제는 없어, 아마 저녁쯤 깨어날 수 있을 거야.”하지환의 걱정스럽던 얼굴은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고생했어.”이상언은 고개를 저으며 또 좌우를 살피더니 하지환을 구석으로 끌고 갔다.“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말해.”하지환의 시선은 수술실 쪽에 머물렀다.이상언은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큰 출혈이 나타날 리가 없어. 게다가 주치의는 경험이 많아서 이렇게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할리 없고.”하지환의 시선은 이상언에게 향했고 그의 눈빛은 무언가 복잡했다.“주치의가 일부러 그 여자를 죽이려고 한다는 거야?”“실수인지 고의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려워.”“알았어.”하지환은 간호사가 데리고 나온 윤이서를 보고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황급히 따라갔다.이상언은 친구의 뒷모습을 보고 눈썹을 들었다.“이 결혼은 아마 끝낼 수 없을 걸.”간호사는 윤이서를 병실로 보내고 바로 떠났다.엄청 큰 VIP 병실에는 오직 하지환과 윤이서만 남았다.침대에 핏기 하나 없이 누워 있는 윤이서를 보며 하지환의 미간은 일직선으로 꼬
운전기사는 놀라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이서는 잠시나마 그 남자의 눈동자를 응시했다.‘날 노리는 거구나.’ 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어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뼈를 깎는 고통이 밀려오자, 이서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커다란 손을 뻗어 이서의 눈을 가렸다.“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나도 너처럼 보기 드문 미인을 죽여야 하는 게 너무 안타깝거든?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내 임무인걸. 임무는...”이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선혈이 자기 얼굴과 목, 그리고 온몸에 튀는 것을 느꼈다. 그 선혈은 뜨겁고 끈적거리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분명히 이서의 피는 아니었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쿵!잠시 후, 그 남자가 굉음을 내며 그녀의 곁에 쓰러졌다. 이서는 그제야 남자의 손을 떨쳐내고 세상의 빛을 마주했다. 차량 지붕에는 굽은 칼을 현란하게 돌리고 있는 어둠의 호리병이 있었다. 그가 쥔 칼에 검붉은 선혈이 묻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이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당신이 죽인 거예요?!”이서는 자신이 보기에도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하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개의치 않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왜요, 문제 있어요?” 이서는 재빨리 좌우를 살폈는데,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그녀는 어둠의 호리병을 보며 말했다.“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라고요!!” 어둠의 호리병은 의외라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처리해 본 적이 있는 겁니까?”이서가 말했다.“그럴 리가요.”“아주 능숙해 보이는데요?”어둠의 호리병은 이서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라는 말, 정말입니까?”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다만, 이번에는 망설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 연결음이 이어지던 찰나
점심부터 마음이 흐트러져 있던 이서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사무실을 나섰다.부하 직원들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윤 대표님이요,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네요.”“그러게요, 데이트 가시는 건 아니겠죠?”“데이트는 무슨요, 대표님은 이미 결혼하셨잖아요.” “결혼이라뇨, 이미 이혼한 것 같던데요? 그렇지 않으면, 윤 대표님의 남편분이 이렇게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을 리 없잖아요.” “참, 요즘 윤 대표님의 컨디션이 정말 안 좋아 보였잖아요. 어쩌면 정말 이혼을 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지 않을까요? 윤 대표님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지셨잖아요.” “지금도 평범한 직장인과 어울리는 건, 윤 대표님께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말도 마세요.”“생각 좀 해보세요, 누가 대표님의 남편분이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비아냥댄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한창 열띤 이야기가 오가던 찰나,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뭐가 기분 나쁘다는 거죠? 어차피 윤 대표님은 조만간 그분을 본인과 같은 위치로 올려놓으실 텐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고이서였는데,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고 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표님께서 남편 분을 도와 회사를 차리게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고이서는 영문을 모르는 바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부러워하기 시작했다.“와, 윤 대표님의 남편분이 정말 부러워요. 가진 것도 없이 돈줄과 결혼해서 인생이 편 거잖아요.” “그러게요, 윤 대표님께서 회사를 차려주신다니, 그야말로 인생 역전이네요!”“저도 그런 와이프를 얻고 싶습니다!” “...”고이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욱 우스워졌고, 이미 차에 오른 이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곧 숨길 수 없는 광기가 드러났다.‘다 내가 가져야 했던 것들이야!’ ‘네 것이 아닌 내 것!’‘저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고이서를 바라보았다.“저는 단지... 고 팀장님, 아무래도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넋이 나간 고이서는 그제야 자신의 반응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급히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면 다행이네요. 외국에서 만난 대부분의 상사분은 개인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거든요.”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에는 반감을 보이기도 하셨어요.”“죄송합니다. 윤 대표님, 제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하신다면, 언제든지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저는 고 팀장님이 다정히 대해주시는 게 정말 좋다고 생각해요. 인간미 있어 보이잖아요.”이서의 표정에 확실히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고이서는 그제야 몰래 한숨을 돌리고 살짝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나섰다.하지만 이서는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순간 생각에 잠겼고, 사무실로 돌아온 후에 다시금 고이서의 자료를 살폈다.하지만 그 어떠한 문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까 그 표정은...’‘그 당황한 표정은 절대 꾸며낼 수 없는 거였어.’‘왜 그렇게 당황한 거지?’ 이서는 하루 종일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느라 소희가 걸어온 전화를 못 받을 뻔했다.“나한테 밥을 사주겠다고?”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심 대표님이 윤씨 그룹의 대표인 나와 결탁했다고 오해할까 봐 두렵진 않아? 다른 심씨 가문 사람들의 귀에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 사람들은 형부가 YS 그룹의 대표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절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어요. 오히려 매일 같이 언니가 찾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고요.][게다가 저희 아빠는 언니가 우리를 도와줬다고, 언니와 형부가 아니었으면 제가 얄짤없이 심씨 가문에서 쫓겨났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두 분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으시대요.]“이제야 호칭을 바꿨구나.”이서가 웃으며 물었다.“어때, 새 부모님을 받아들인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소희는 다소 쑥스러워했다.[예전에는 왜 저를 잃어버렸는지 원망했었는데, 지금
“하지만, 1위와 2위는 오랫동안 주문을 받지 못했어.”지환이 말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이서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녀는 모처럼 지환과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지환은 이 기회를 틈타 허튼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 사람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 이서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전설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고요? 하지환 씨는 다른 사람의 소문을 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요.” 지환이 어색하게 헛기침했다.“어쨌든 전설적인 인물들이잖아. 어때, 들어볼래?” 이서도 지환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환은 표정을 풀고 이야기를 엮기 시작했다.“다크웹의 1등과 2등은 부부 사이이고, 어린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냈대. 하지만 어렸을 때 집안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결국은 도둑질에 발을 들인 거야.”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고, 남자는 반죽음이 되어 목숨까지 잃을 뻔했대.”“그 후에 강해져야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훈련을 시작한 거래.” “결국은 다크웹의 거물급 인물이 돼서 소문만으로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게 된 거지.”이서가 이 말을 듣고 잠이 밀려오는 듯했다.“아, 그래요? 진부한 무협 이야기 같은데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낀 지환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미안해.”“사실 내가 지어낸 이야기야. 이서야,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어.” 그 순간, 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환은 고개를 한쪽으로 치우친 채 두 눈을 꼭 감은 이서를 보자, 긴장된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그는 손을 들어 이서의 뺨에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럼에도 이서가 눈을 뜨지 않자, 그제야 안심한 지환은 그녀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익숙한 촉감에 지환은 심장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다음날.잠에서 깨어난 이서는 자신이 병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서가 말했다.“저야 모르죠. 오빠가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상언은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역시 훌륭한 여동생이라니까.”상언이 떠나자, 어둠의 호리병이 말했다.“저도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네요. 이미 약속한 이상, 의사를 번복하진 않을게요.”의문을 표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를 마주한 어둠의 호리병은 조급해했다.“약속한 건 지킬 건데, 그 표정은 뭡니까? 과연 부부답네요. 표정까지 똑같으니까요.” 이서와 지환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어둠의 호리병이 비아냥대기 시작했다.“보세요, 얼굴색은 물론이고, 표정까지 똑같잖아요.” “됐어요, 됐어.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네요. 여기에 더 있다가는 눈칫밥만 먹을 것 같다고요.” “저희는...”이서가 막 입을 열었는데, 어둠의 호리병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참, 하 대표님, 보수는 두둑이 챙겨주실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충분한 값을 드릴 테니까요.”지환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어둠의 호리병은 대답을 듣고서야 만족하며 떠났다.별장 안에는 이제 이서와 지환만 남았다. 이서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무엇이든 말하지 않고 가버리면 지환에게 항복하는 것 같아서 계속 망설였다. “먼... 먼저 가볼게요.”이서가 움찔거리며 입을 열었다.“이서야.”지환이 이서를 부르자,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날의 일은 내가 잘못했어.”지환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용서해 줘.”이서는 고개를 돌렸으나, 지환을 쳐다보지는 못했다.“언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네가 소지태를 만났던 날 말이야. 내 질투로 네가 상처받게 해서 미안해. 나는 몇 번이고 너한테 내 진짜 신분을 말할 기회가 있었어. 내가 올바른 판단을 했다면, 우리 사이도 오늘처럼 되진 않았을 거야.”“하지만...” “내 분노마저 너한테 풀었으니, 나는 용서받을 수 없겠지.” 그 순간, 이서가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게다가 그 일에는 하지환 씨뿐만 아니라,
어둠의 호리병은 계속해서 땅에 발을 굴렸다.어엿한 어른이지만,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지환아, 네가 어서 방법 좀 생각해 봐. 나는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는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거실에는 곧 지환과 이서만이 남았고, 어둠의 호리병의 시선이 이서에게 떨어졌다. “하하, 그쪽이 바로 윤이서 씨? 그쪽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는 덕분에 제가 내기에서 이겼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 대표님을 물러나게 할 방법은 없었을 거예요. 당신은 제 은인입니다.” 이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계속해서 어둠의 호리병을 쳐다보았다.어둠의 호리병은 그녀의 눈빛에 눈살을 찌푸렸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죠?”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어둠의 호리병이 지환에게 물었다.“어디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저를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죠?” “설마, 저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겠죠?”어둠의 호리병은 점점 더 과장되게 말했다.지환이 눈썹을 찌푸리고 막 앞으로 나아가려던 찰나, 이서가 몸을 곧게 펴며 외쳤다.“이제 알겠네요!” 지환과 어둠의 호리병은 이해하지 못한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그러자 그녀가 말했다.“왜 억지를 부리시는지 알겠다고요. 하도훈 쪽에 대단한 고수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해서, 하지환 씨와 협력하고 싶지 않으신 거죠?” “뭐라고요?!”어둠의 호리병은 화가 나서 몸에 묶인 그물을 풀어냈다.지환은 이 장면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이서의 앞을 막아섰다.“벗어날 수 있었군요?”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헛소리! 내가 누군데, 하도훈이 고용한 그 고수들을 두려워한다는 겁니까?” “저는 다크웹의 3위를 차지하는 킬러라고요!” “허세는 누구나 부릴 수 있어요. 저도 제가 다크웹의 1위를 차지하는 고수라고 말할 수 있다고요!”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당신!”어둠의 호리병은 이서의 말에 분노하며 피를 토할 뻔했다.“됐습니다, 더
‘만약 그 일의 배후가, 조작된 증거를 만든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심씨 가문에서 쫓겨나는 사람은 우리 모녀가 될 거야!’강경숙의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녀는 심씨 가문에서 의지할 데가 없었다.만약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면, 아무도 그녀를 지켜주지 않을 터.소희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강경숙은 마음이 불안해졌다.“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입니다.”어르신이 지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모처럼 심씨 가문을 방문해 주셨지만, 지금 저희 상황이...” 어르신이 시계를 한 번 보았다.“10시 반이네요. 하 대표님, 남아서 식사라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환도 시계를 힐끗 보더니 표정을 굳혔다.“이천, 여기 남아서 상황을 수습해.”“대표님...”지환은 이천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리를 떠났다.“대체 왜...”어르신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천은 어르신의 말에 대답하기 귀찮아 빠른 걸음으로 지환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아직 몇 걸음을 떼지도 않았을 때, 한 그림자가 그보다 빨리 지환에게 향하는 것이 보였다. 이천은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이서라는 것을 확인하고 멍해졌다.한편, 이미 입구에 도착한 지환도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쫓는 것을 느꼈다.발걸음을 멈춘 그는 이서를 보고 잠시 넋을 놓았다. “빨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서는 지환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고, 직접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지환은 그제야 시간을 한 번 보았다.‘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그도 이내 차 안으로 들어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도중에 두 사람은 모두 말을 하지 않았는데, 차는 곧 한 별장 앞에서 멈추었다.지환이 차에서 내리자, 이서도 따라 내렸다. 두 사람은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별장으로 걸어갔다.이서는 별장 안에서 득의양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하하, 제가 그랬죠? 절대 돌아올 수 없을 거라고. 보세요, 12시까지 30초밖에 안 남았는데...”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어르신들께서 제 딸을 쫓아내려고 한다면, 저는 심씨 가문의 가주 자리를 포기하겠다고요!” 어르신은 그제야 소희의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재빨리 말했다.“심 대표, 방금 있었던 모든 일은... 다 농담이었어, 농담. 소희가 윤 대표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하 대표님인 걸 알고 우리를 도왔으니, 우리 심씨 가문의 훌륭한 딸인 셈이야. 그런 아이를 어떻게 내쫓을 수 있겠나?”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강경숙과 심유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맞아요, 맞아요, 다 오해였어요!” 소희는 그 와중에도 군중 속에 숨어 있는 강경숙과 심유인을 노려보았다.두 사람은 이를 갈며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소희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강경숙은 곧장 안색을 바꾸고 웃음을 띠었다. 게다가 곁에 있는 심유인의 팔을 꼬집으며 표정 관리에 집중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소희는 차갑게 웃으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어르신과 눈을 마주쳤다.“오해요? 이전의 일은 확실히 오해였지만, 제가 게임 회사의 기밀을 훔친 일은요? 그건 증거가 확실한 일이었어요. 경찰조차도 제가 벌인 짓이라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어르신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그... 그것도 오해야...”“무슨 오해요?”“그... 그건...” “증거가 경찰서에 떡하니 있는데, 저와 이서 언니의 관계 때문에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시려는 건 아니겠죠? 제 생각엔, 제가 스스로 심씨 가문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 말이 끝나자, 소희는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어갔다.이지숙은 이 모습을 보자마자 소희를 붙잡으려 했지만,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심근영에게 가로막혔다. 그녀가 의아해하던 찰나, 심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소희를 가로막는 것이 보였다. “소희야, 이러지 마. 우리는 너를 믿어. 너는 절대 회사의 기밀을 훔치지 않
“당신은...” 지환의 카리스마에 어르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본 것처럼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지환 씨.”이서는 곧장 지환에게 시선을 고정했고, 그는 이서에게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심씨 가문의 어르신에게 시선을 옮겼다. “당신이 하지환 대표님...?”어떤 사람은 승복할 수 없는 듯했다.“당신이 하지환 대표님이라면, 나는 옥황상제일 겁니다!”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람을 찢어 죽일 듯한 지환의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환 대표님이 맞습니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심근영이었다.이 말을 들은 어떤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그 말을 믿을 줄 알고?”“제가 하 대표님을 만난 적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심근영이 지환을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소씨 가문도 함께였습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소씨 가문의 가주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지요!” ‘하긴, 심 대표가 하 대표님을 만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는 엄청나게 흥분했었지.’어떤 이는 지환의 외모에 호기심을 느끼고 약속 장소에 찾아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수는 없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이서는 진작에 지환의 진짜 신분을 알 수 있었을 터였다.옛일을 다시 꺼내니,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생각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윤 대표의 남편이 YS그룹의 대표인 데다가, 하은철의 둘째 삼촌일 줄은 누가 알았겠어?’“그러면 하은철은... 정말로 세상을 떠난 겁니까?”어르신은 다른 사람이 묻고 싶은 말을 뱉어냈다. “못 믿겠다는 겁니까?”지환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어르신은 그 눈빛에 덜덜 떨며 말했다.“나는...”“애초에 심씨 가문이 하씨 가문과의 협력을 중단한 건, 제가 나서서 벌인 일입니다.”“불만이 있다면 제게 오시면 될 일이지, 어린 여자를 상대로 할 필요는 없는 일이죠.”“아, 그저 윤씨 그룹을 적대시하고, 제 아내를 적대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