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여전히 소희를 믿고 있었다.‘소희 씨가 그런 일을 벌였을 리 없어!’ “증거요? 아직 모르시나 본데, 경쟁사가 심소희가 복제한 자료를 받았다고 자백했습니다.”“아, 사주를 받은 녀석도 인정했죠, 심소희가 시킨 일이라고요.” “그 녀석에게 큰돈을 입금한 통장의 소유주도 심소희였죠.” “그 증거, 제가 좀 봐도 될까요?”“왜요, 증거를 없애려고요?” 이서는 심지훈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경찰서장을 바라보았다.“물론입니다.”경찰서장이 말했다.“지금 바로 증거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겠습니다.”잠시 후.경찰관이 증거를 가져왔고, 그것을 확인한 이서의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정말 소희 씨의 계좌잖아?’‘더 이상 발뺌할 수 없겠어!’‘조작된 거 같지도 않은데...’‘정말 소희 씨가 벌인 일인 걸까?’이서는 고개를 들어 소희를 바라보다가 경찰서장에게 물었다.“서장님, 저랑 따로 이야기 좀 나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경찰서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사건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래서 그들이 밖에서 소란을 피우지만 않았더라면, 경찰서장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런 일로 온종일 붙잡혀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야 회의를 열고 다른 일을 배치하려던 찰나, 이서가 면담을 요청해 온 것이었다. 서장이 떠나자, 다른 경찰관들은 심지훈 일당을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사무실에는 이서, 소희, 현태만이 남았다. 이서는 먼저 현태의 부상을 살폈다.“괜찮으세요?” “뼈는 안 다쳤어요. 괜찮습니다.”현태는 이서를 바라보다가 소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저는 소희 씨가 걱정입니다.” “보셨죠? 모든 증거가 소희 씨를 가리키고 있어요.”“심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심 대표님의 의견과 상관없이 소희 씨를 쫓아내려고 해요. 도둑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요!” “상관없어요.”소희가 말했다.“그 사람들은 계속 나를 쫓아내려고 했어요. 이제야 그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고요. 쫓겨나면 쫓겨나는
소희가 고개를 들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제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요?” “모든 증거가 완벽해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와도 빈틈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요.”“게다가 심씨 가문 사람들은 이 혼란을 틈타서 저를 쫓아내려고 해요. 이런 상황에서 결백을 증명할 시간이 있을지 걱정된단 말이죠...” 고개를 숙인 이서가 소희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물론이지.”그 순간, 소희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이서 언니, 방법이 있는 거예요? 제가 도울 건 없을까요?”현태도 깜짝 놀라며 말했다.“저도 돕겠습니다.” 이서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소희 씨, 얼른 돌아가서 시간을 끌어.”“오래 끌수록 좋아. 내가 소희 씨를 찾아갈 때까지!”소희는 이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희와 현태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이서는 곧장 하나의 회사로 향하면서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천의 전화도 예외는 아니었다.하나의 회사에 도착했을 무렵, 이서는 이미 수도 없이 많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지환과 이천은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서는 어쩔 수 없이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나야, 너희 회사 아래층에 와 있는데, 잠시 나올 수 있어?” 하나는 조급한 이서의 말투를 듣더니 재빨리 말했다.[응, 지금 바로 내려갈게. 잠시만 기다려.]10여분 후, 이서는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갑자기 우리 회사엔 왜 온 거야? 무슨 일 있어?”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상언 오빠, 어디 있는지 알아?” “글쎄, 어제부터 연락이 안 되던데... 무슨 일이 생긴 거야?”긴장한 그녀가 이서의 손을 덥석 잡으며 불안한 듯 물었다.그 순간, 이서는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나도 잘 모르겠어. 지환 씨랑 이 비서님이 연락이 안 돼.”“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상언은 곧 지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이제 겨우 며칠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서가 보고 싶은 거야?”“조금만 참아, 내일까지 어둠의 호리병을 잡기만 하면, 이서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거야.” “아니, 난 이서가 보고 싶은 게 아니야.”상언이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야,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 줄 알아? 이서를 생각하는 거 맞잖아.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고?” “그런 거 아니라고.”지환의 표정이 매우 엄숙해졌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서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아.” “말도 안 돼, 이서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게 뭐 있어?”상언은 생각지도 않고 부인했다.“지환아, 우리 사이에 뭘 숨기는 거야. 우리 앞에서는 이서가 보고 싶다고 엄살을 좀 부려도 돼.” “음, 네가 하도 그러니까...”그도 핸드폰을 꺼냈다.“나도 하나 씨가 보고 싶네. 하나 씨는 날 생각하고 있을까?” 이천은 그저 부러워하며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대표님, 이 선생님, 어둠의 호리병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잘 생각해 보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언이 불쾌하다는 듯 그를 한번 보고는 말했다.“아직 하루 남았잖아요. 만약 이번에 그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지환아, 정말 방법이 없는 거야?”그렇다, 지환에게는 방법이 없었다.어둠의 호리병은 아주 교활했는데, 도시 전체를 범위로 정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말라고 요구했다. 바로 이것이 그동안 그들의 핸드폰이 꺼져 있던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을 가장 짜증 나게 한 것은, 어둠의 호리병이 어둠 속에 숨어 자신들이 머리 없는 파리처럼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을 즐기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여전히 방법이 없어 그가 던져놓은 단서를 따라 동분서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환이 또 다시 침묵에 빠지자, 상언이 말했다.“아무래도 우리를 갖고 노는 것 같아.” “어린애도 아닌데 말이죠.”이천이 맞장구쳤다.바로 이때,
두 차량이 부딪치려던 순간, 지환의 차는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갑자기 옆으로 비켜 갔다. 무언가를 깨달은 어둠의 호리병은 즉시 차의 방향을 돌렸지만, 주변에 있던 차들이 빠르게 몰려들어 빽빽한 야수 떼처럼 그의 차 양쪽을 압박해 왔다. 도망갈 공간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한 어둠의 호리병이 차 지붕을 한 번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흥.’‘이렇게 하면 나를 잡을 수 있을 줄 알고? 순진하긴!’ 어둠의 호리병은 핸들을 풀고 벌떡 일어났고, 곧장 지붕을 뚫고 나갔다.하지만 그는 단 1초도 기세등등하지 못한 채, 하늘에서 날아온 그물에 뒤엉켜야만 했다.당황한 어둠의 호리병은 앞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 사기꾼들아!!” 지환이 어둠의 호리병을 찾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를 속이려던 것이었다.그야말로 고도로 계산된 수법이었던 것.어둠의 호리병은 큰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엉킬 뿐이었다.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힘 좀 아끼시지 그래요?”상언이 서서히 어둠의 호리병의 앞으로 다가섰다,“H국 최고의 장인을 불러서 밤새 그물을 만든 보람이 있네요. 그건 가장 날카로운 칼날로도 자를 수 없는 그물이에요. 즉, 빠져나갈 수 없단 뜻이죠.” 어둠의 호리병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몇 번 더 발버둥 쳤다. 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답답한 표정으로 지환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웃기 시작했다.“그래요, 지금은 빠져나갈 수 없겠네요. 하지만 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제가 그랬죠? 3일의 시간을 주겠다고. 제가 오늘 자정까지 도망가기만 하면, 당신들이 지는 거잖아요?” 보다 못한 상언이 말했다.“억지를 부리는 겁니까?”“억지라뇨? 규칙을 정할 때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당신들 잘못이죠.” 상언과 이천은 이를 갈기 시작했다.‘우리 잘못이라고?’ ‘애초에 우리한테는 기회를 주지 않았잖아!’ 이 내
어지러움을 느끼던 이서는 그제야 자신이 밤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음식을 좀 먹었더니 체력이 회복되는 것 같아.’이서가 하나에게 물었다.“현태 씨는 소식이 없어?” “아직 없어. 그런데 심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사당에 모였다고 하더라? 아마 소희를 심씨 가문에서 쫓아내려고 마음을 굳힌 것 같아.” 하나가 이서의 곁에 앉았다.“이서야, 정 안 되면, 소희가 심씨 가문에서 나오게 하자. 심씨 가문 사람들은 소희를 전혀 좋아하지 않잖아. 계속 심씨 가문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다른 이유를 찾아서 소희를 쫓아내려 할 거야.” 이서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지금은 심씨 가문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하도훈이 소희 씨까지 끌어들일지도 모르니까.” 하나가 잠시 말없이 조용히 있었다.“형부가 나서기만 하면, 심씨 가문 사람들은 더 이상 소희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텐데...”“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왜 이런 시점에 모습을 감춘 걸까?” 이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었다. ‘지환 씨와 이 비서님, 그리고 상언 오빠까지 모습을 감췄어. 이게 과연 우연일까?’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든 감정을 억누른 이서가 몸을 일으켰다.“일단 지환 씨 쪽은 신경 쓰지 말고 심씨 가문의 사당으로 가자. 심씨 가문이라면... 정말 이 일로 소희 씨를 쫓아내려 할 거야. 우리는... 반드시 소희 씨를 도와야 해.”“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봐야지.”사실 이서도 자신이 없었다.두 사람이 심씨 가문으로 출발할 때는 이미 6시가 넘어 있었다. 어둠으로 뒤덮인 심씨 가문의 사당에서는 표현 못할 기괴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사당 정문에는 심근영 부부와 소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이서와 하나가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왜 여기서 무릎을 꿇고 계세요?”하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어쨌든 심 대표님은 심씨 가문의 가주야. 그런데 사당
이서가 이지숙을 부축하며 심근영을 향해 말했다.“심 대표님.”“들어가도 될까요?” “윤 대표...”심근영은 이서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하지만 이서는 그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심씨 가문이 소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이유 중 하나는 심씨 가문으로 복귀한 소희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강점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소희와 이서의 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두 사람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심씨 가문은 소희를 그렇게 겨냥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서가 사당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서가 말했다.“물론 이번 일이 심씨 가문의 일이라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심씨 가문이 알아야 할 일이 있어요.”심근영 부부의 시선이 이서에게 쏠렸다. 그러자 그녀가 담담한 눈빛으로 말했다.“그 일은... 소희 씨가 심씨 가문에 남도록 도울 가능성이 커요.” 이지숙이 동그란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심근영도 약간 동요되는 듯했지만, 곧 고통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불가능해. 윤 대표가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한, 소희는 누명을 벗을 수 없을 테니까.” “네,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어요.” 이 말이 끝나는 순간, 심근영 부부의 눈 밑에 타오르던 한 줄기의 희망이 말끔히 사그라들었다. “물론...”“증거는 없지만, 그 사실은 증거보다 훨씬 유용할지도 몰라요.”심근영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듯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제가 사당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두 분도 알게 되실 거예요.” 현장에 있던 네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국, 심근영은 이지숙의 애원에 못 이겨 이서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에 동의했다.사당에 있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이서가 나타나자 곧바로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나가요, 여기는 심씨 가문의 사당인데, 외부인이 무슨 자격으로 들어와요?!” “그러게, 당장 나가!
그 일은 가문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이었다.게다가 정당한 사유가 있었으니, 심근영이 동의하지 않는 것은 가족 전체와 맞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그런 용기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행을 즐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목적을 달성한 어르신이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심 대표, 자네의 심정은 잘 알겠어.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도리니까. 하지만 심소희는 잘못을 저지른 이상 벌을 받아야 해.”“우리가 이대로 심소희를 내버려둔다면, 외부에서 뭐라고 생각하겠나?” “설마 심소희 한 사람 때문에 우리 심씨 가문 전체의 명예를 망치려는 건 아니지?” “소희는 그런 일을 벌일 아이가 아닙니다...”심근영은 또 한 번 큰 소리로 외쳤다.“소희는 그런 일을 벌일 아이가 아니라고요! 우리 소희는 마음씨가 착한 아이입니다. 절대 심씨 가문의 이익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소희가 심근영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심씨 가문에 있는 동안, 그녀와 심근영의 접촉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심근영이 신비롭고 커다란 산처럼 느껴지던 참이었다. 심지어 때로는 이지숙이 심근영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하지만 지금 자기 앞에 서서 자기를 보호하는 심근영을 보자 하니, 소희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의 사랑은 겉으로 드러나거나 섬세한 것이 아니며, 중요한 순간에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르신이 눈살을 찌푸렸다.“심 대표! 증거가 아주 확실해! 설마 경찰이 심소희를 모함했다는 겐가?” “계속 이렇게 억지를 부린다면, 우리는 심씨 가문의 가주를 다시 선출할 수밖에 없네!!” “자녀만 바라보는 사람이 나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과 함께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우니 말이야!!” 어르신들은 ‘심씨 가문 가주’ 자리를 가지고 심근영을 위협하면, 그가 꼬리를 내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조
“허, 심 대표가?”어르신이 웃기 시작했다.“심 대표는 고작 자식을 위해 가문의 이익을 돌보지 않았어. 게다가 경솔하게 하씨 가문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제 자식의 도둑질마저 방임했지!”“대체 어느 부분이 심씨 가문을 위했다는 거지?” “이대로라면, 심씨 가문은 파국을 맞이하고 말 거야!”어르신이 말했다.“그래요?”이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심씨 가문이 왜 하씨 가문과의 협력을 멈추었는지는 알고 계신가요?” “심소희가 심씨 가문으로 돌아온 게 못마땅했겠지!”어르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허, 당당한 줄 알았던 윤 대표가 고작 이 정도라니.” “아...”이서가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소희 씨, 내 배후의 사람이 누구인지 말씀드려.” 소희가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괜찮아, 비밀도 아닌데, 뭐.” “네...”소희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말했다.“애초에 심씨 가문과 윤씨 그룹이 계속 맞서지 못한 건, 이서 언니의 남편 때문이었어요.” 이 말이 나오자, 곳곳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하하!” “하하, 윤 대표의 남편? 하하, 심소희, 우리를 바보로 아는 모양인데, 윤 대표의 남편은 별 볼 것 없는 사람이야. 우리 심씨 가문이 왜 그런 남자를 두려워해야 하지?”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도 똑똑해야 가능한 일이야. 그런 말을 내뱉는다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저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하다니, 우리 수준을 바닥으로 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 아니에요!”소희가 눈살을 찌푸렸다.“다 사실이라고요. 이서 언니의 남편은 YS그룹의 대표예요. 그분의 미움을 사고 싶은 거예요?” 이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이내 더욱 과장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하하, 하하하! 웃겨 죽겠네요. 모두 심소희가 뭐라고 하는지 들으셨어요?” “YS그룹의 대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 H국의 어떤 바보가 YS그룹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한 모양이군.”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이지숙이 꽤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어머, 내 정신 좀 봐.”“나는 윤 대표더러 소희를 설득해 달라는 의미였어. 오해하지는 마.” 이서는 이미 고개를 돌려 심근영과 대화를 이어가던 지환을 흘겨보다가 이지숙을 향해 말했다.“알맞은 상대를 찾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지숙이 말했다.“그거야 그렇지만... 윤 대표는 우리 소희의 친구잖아. 그러면 소희와 가치관이 잘 맞는다는 뜻이지 않겠어? 어쩌면 이 중에 두 사람 마음에 다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소희를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 씨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받고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서는 구실을 찾아 소희와 함께 룸을 나섰다.“소희 씨, 왜 현태 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야?” 소희가 말했다.“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현태 오빠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요.”“만약 반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희의 긴장한 모습을 본 이서가 웃기 시작했다.“두 분이 현태 씨를 반대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현태 씨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네?” “이서 언니!”“그래, 인제 그만 웃을게.”“나는 두 분이 현태 씨의 출신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두 분에게는 현태 씨의 출신보다, 소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물론, 두 분이 소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현태 씨의 출신을 더 중요히 여기시겠지.”“그럼 소희 씨도 두 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언니 말이 맞아요.”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이지숙이 다시금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희는 이서를 힐끗 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 사실... 제겐 남자 친구가 있어요.”놀란 이지숙은 대답도 잊은 채 소희를 바
이서의 심장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은근한 기대가 피어올랐다.그 순간,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이 많이 차갑네. 평소에 신경 좀 써.’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5분이 흐른 후였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은 이미 옅어졌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다시 운전석에 앉은 지환의 모습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이자, 이서는 방금 욕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환 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떨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이서와 지환은 마침에 호텔에 다다랐다.심근영 부부와 소희는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게다가 심근영은 이 기회를 틈타 지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하 대표님, 저희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그의 행동 스타일을 일찌감치 들은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서와 악수를 하려 했다.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환이 이를 저지했다.“늦게 왔는데, 주문부터 하시죠.”심근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소희에게 두 사람의 일을 들은 상태였다.‘참,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 했었지?’‘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곧 화해하겠는걸?’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근영이 지환에게 메뉴를 건넸고, 지환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 이서는 모두의 권유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주문한 요리는 모두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심근영과 지환은 사업상의 일을 이야기했으며, 이지숙과 소희, 그리고 이서는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었다.“소희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곧 결혼해야 해.” “...엄마, 서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거야?’‘맞는 말이었잖아.’‘당신들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다고!’한편, 차에 오른 이서가 지환에게 물었다.“소희 씨한테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할까요?” 지환이 시계를 힐끗 보았다.“안 늦었어.”“안 늦었다고요? 하지만 나는...” 차가 갑자기 멈추자,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왜 그래요?”“도착했어.” 이서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집을 보고는 멍해졌다.순간, 지난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했다.‘여긴... 우리가 전에 살던 곳이잖아?’이서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익숙한 감정이 불쑥 다가와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여기서... 내 인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냈었지.’“어서 들어가.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자연스럽게 욕실로 들어가 몸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냈다.하지만 옷에 묻은 핏자국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참, 이 집에도 옷이 있을 텐데...’잠시 머뭇거리던 이서는 욕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지환 씨는... 거실에 없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까치발을 들고 2층으로 향했다.하지만 계단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지환과 맞닥뜨렸다.이서는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목욕 수건만 두른 상태였고, 한 손은 가슴 위에 얹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던 지환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그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지자, 이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비... 비켜요. 옷 가지러 갈 거라고요...!”지환은 힘겹게 시선을 돌려 2층을 바라보았다.“내가 가져다줄게. 너는 욕실로 돌아가.”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쏜살같이 욕실로 돌아갔다.그녀는 눈앞의 위기를 해결하느라, 이후의 어색함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한창 샤워하던 이서는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문
운전기사는 놀라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이서는 잠시나마 그 남자의 눈동자를 응시했다.‘날 노리는 거구나.’ 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어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뼈를 깎는 고통이 밀려오자, 이서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커다란 손을 뻗어 이서의 눈을 가렸다.“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나도 너처럼 보기 드문 미인을 죽여야 하는 게 너무 안타깝거든?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내 임무인걸. 임무는...”이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선혈이 자기 얼굴과 목, 그리고 온몸에 튀는 것을 느꼈다. 그 선혈은 뜨겁고 끈적거리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분명히 이서의 피는 아니었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쿵!잠시 후, 그 남자가 굉음을 내며 그녀의 곁에 쓰러졌다. 이서는 그제야 남자의 손을 떨쳐내고 세상의 빛을 마주했다. 차량 지붕에는 굽은 칼을 현란하게 돌리고 있는 어둠의 호리병이 있었다. 그가 쥔 칼에 검붉은 선혈이 묻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이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당신이 죽인 거예요?!”이서는 자신이 보기에도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하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개의치 않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왜요, 문제 있어요?” 이서는 재빨리 좌우를 살폈는데,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그녀는 어둠의 호리병을 보며 말했다.“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라고요!!” 어둠의 호리병은 의외라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처리해 본 적이 있는 겁니까?”이서가 말했다.“그럴 리가요.”“아주 능숙해 보이는데요?”어둠의 호리병은 이서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라는 말, 정말입니까?”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다만, 이번에는 망설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 연결음이 이어지던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