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에 글이 올라온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모두가 알게 되었다.복도를 걸어 가던 성연은 누군가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손가락질을 한 후에는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저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렸다.성연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주 오랜만에 이런 느낌을 받았다.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짙은 혐오감이 가득 차 있는 게 느껴졌다.최근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생각해보니, 저런 혐오의 시선을 받은 건 성연이 처음 이 학교에 와서 송아연에게 모함을 당했을 때였다.성연은 일이 좀 이상하게 됐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그렇게 망연한 표정을 한 채 교실로 돌아왔다.교실 안에서도 성연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당연히 모두 혐오스럽다는 눈빛들이다.성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화가 나서 눈이 빨개진 채 이를 갈며 휴대폰 화면에다 무언가를 맹렬히 두드리고 있는 주연정의 모습이 보였다.옆 자리의 기척에 고개를 든 주연정의 눈에 마침 성연이 보였다.주연정이 성연의 팔을 잡아 끌며 말했다.“성연아, 얘네들 좀 봐, 너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어! 한 마디로 개소리들이야.”성연은 주연정이 말하는 일이 방금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던 일과 관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무슨 일이야?”주연정이 게시판의 글들을 성연에게 보여주었다.“이것 좀 봐!”게시판의 글을 보고서야 성연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났음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무진과의 약혼 소식도 사람들에게 퍼졌다.성연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올린 건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주연정이 이를 갈며 말했다.“사람들이 정말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 네 뛰어난 성적을 보면 부정행위를 할 필요가 아예 없다는 걸 몰라? 평소 네가 쟤네들을 얼마나 도와줬는데, 양심은 모두 팔아먹었는지 저딴 소리나 하고 있어.”함께 성연을 욕하는 아이들 중에 평소 같이 공부하
성연의 뒤에 강 모 대표가 있다는 등의 소문이 학교를 너머 외부에까지 알려지며, 언론 매체들까지 소문의 진위를 취재하겠다고 나섰다.언론 매체에서 학교장에게 직접 인터뷰 요청을 하고 나오자, 학교 측에서도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되었다.학교로서도 더 이상 피하기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학교장이 면담을 위해 성연을 불렀다.송성연은 북성남고가 자랑하는 인재로 평소 선생님들에게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그러나 최근 학교 게시판을 통해 번지기 시작한 소문은 통제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굳은 얼굴로 성연을 바라보던 교장이 입을 열었다.“송성연 학생도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을 테지. 언론까지 나선 상황이야. 그러니 학교의명예를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고민해 보길 바라네.”예로부터 명예를 중시하는 교풍으로 유명한 북성남고는 적지 않은 인재들을 배출한 명문고였다.그렇기에 지금처럼 북성 시를 떠들석하게 만들 정도의 스캔들은 사상 초유라고 할만 했다.소문의 진위 여부를 막론하고 이 일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학교의 명예 또한 훼손될 것이 자명하다.이후 이 사태가 어떻게 발전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그래서 교장은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성연을 불러 협상하려는 것이다.교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성연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그러자 교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일단은 네가 자퇴를 해라. 안 그러면 강 대표가 많이 곤란해진다.”교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내린 판단이었다.교장을 비롯해 학교 교사들은 성연의 학업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두 잘 알고 있다.하지만 가십을 쫓는 사람들은 모를 뿐 아니라 사실 여부는 관심도 없다.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지금 여론이 성연에게 너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선은 성연이 자퇴하도록 한 후 여론이잠잠해지면 다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이것 말고 다른 방법은 교장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성연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
무진은 성연을 보호하기 위해 학교로 경호 인력을 보냈다.또한 성연 주변의 동향에 예의 주시하라고 지시했다.성연에 관한 가십 기사가 언론 매체에까지 오르내리며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기미를 보이자, 손건호는 곧장 무진에게 보고했다.손건호의 보고를 듣고 있던 무진의 안색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강씨 집안은 북성남고의 최대 주주였다. 애초에 성연의 학교 생활을 잘 돌봐달라고 교장에게 언질을 주기도 했었다.그런데도 이런 불쾌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물론 성연과 자신의 관계가 대중에게 공개된 것 자체는 무진이 늘 바라던 바다그러면 성연이 자신의 여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될 테고, 함부로 성연에게 들이대는 놈도 없을 테니까.그러나 이런 식의 폭로는 결코 무진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악의를 가진 누군가 성연을 노리고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한 것이 분명했다.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성연이 오명을 덮어쓸 게 뻔했다.성연은 그 누구로부터도 오해와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무진이 점점 더 싸늘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비서 손건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무진의 옆에 선 손건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보스,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하라고 지시해 두었는데 아직 보고는 올라오지 않았습니다.”무진이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이런 작은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북성남고 교장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군. 강씨 집안에서 매년 후원하는 금액이 얼마인데, 내 사람을 보호하지 못해 이런 일을 겪게 만들어? 이래서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까닭이 없지.”“네, 그렇죠. 학교의 대처가 상당히 미진해 보입니다.” 손건호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보스 강무진이 정말 화가 났음을, 게다가 쉽게 가라앉을 성질의 화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까닥 잘못하다가는 자신에게 불똥이 튀기 십상이었다.이럴 때는 그저 묵묵히 옆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제일이다.“학교로 가지. 가서 교장이 어떻게 대처하고
사업가로 명석한 두뇌를 가진 강무진은 당연히 교장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러나 자신의 약혼녀 성연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걸 두고 볼 무진이 아니다.평소 손가락 하나 건드리기도 아까운 사람인데 손가락질을 당하게 두고 볼 리가 있겠는가?무진은 교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교장선생님,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식당, 도서관, 건물 내의 냉난방 시설 등 이 학교 시설 중 태반이 강씨 집안의 후원으로 만들어졌죠. 매년 강씨 집안에서 북성남고에 적지 않은 금액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안의 학생, 성연이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렇다면 북성남고는 더 이상 후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교장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무진의 말은 명백한 협박이었다.지금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많은 후원을 해 왔다.그러나 자신의 여자도 보호할 수 없는 학교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그러나 이번에는 교장의 태도가 매우 강경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바로 무진의 말을 받았다.“설령 제가 이 교장 직에서 물러나는 한이 있어도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송성연 학생이 즉시 해명한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일이 너무 너무 빨리 확산되는 바람에 성연을 자퇴시킨다는 교장의 방법 역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그나마 이렇게라도 해야 성연과 강무진 대표를 잠시라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모두들 자연히 알게 될 테지만, 아직 어린 성연이 강무진 대표와 약혼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분명 색안경을 끼고 볼 터였다.게다가 강씨 집안에 돈이 많다는 사실도 학생들이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다.사람들은 성연이 돈을 밝히는 위선자라고 생각할 것이다.여론의 향방이 전부 이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뭐라고 해명한들 소용이 없다.무진이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그럼 화려한 이벤트를 준비해야겠군요!”교장은 무진을 바라보며 말했다.“강 대표님, 잘 아시다시피 송성연 학
학교 외부에까지 소문이 퍼져 떠들썩하니 진우진 역시 들어 알고 있었다.지금까지 송성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한 번도 부인하지 않았다.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 모두를 뛰어넘을 정도로 송성연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다만 지난번에 고급 외제 승용차에 오르는 송성연의 모습을 본 후 진우진 마음 또한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이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송성연의 친척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번 뉴스는 진우진으로 하여금 지난번 송성연이 고급 외제 승용차에 오르던 장면을 생각나게 했고, 지금 그의 마음은 상당히 불편했다.그래서 진우진은 성연의 반으로 찾아와 성연을 불러냈다. 성연이 진우진을 따라 함께 교실 밖으로 나갔다.“송성연, 조금 전에 너에 관한 소문을 들었어. 별로 좋지 않은 내용이야. 물론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 네가 WS 그룹의 강무진 대표와 약혼했다는 말이 돌던데, 사실이야?” 이 질문을 했을 때만 해도 진우진은 속으로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었다.진우진은 학교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믿지 않고 성연을 찾아와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그러나 성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사실이야.”두 귀로 들었음에도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진우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마음 속에 실망감이 들어서는 동시에 성연을 바라보는 진우진의 눈빛이 변했다.여태 송성연은 실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행동거지가 반듯한 여학생이라고 생각해 왔다.돈을 밝히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건만, 지금 송성연이 자신 앞에서 직접 인정한 것이다.그러자 모든 게 바뀌었다.마침내 진우진은 입술을 깨문 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일이 엄청 커졌어. 학교 밖의 사람들이 너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넌 모를 거야.”정말이지 들어줄 수 없는 비난들이었다. 처음에는 송성연처럼 좋은 여자 아이에게 그런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모든 정황이 자신에게 소문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성연은 진우진의 눈빛과 표정이 나타내
소문이 점점 부풀려지며 언론 매체까지 학교로 찾아와 보도하기 시작했다.이 일이 기사화되어 보도되자 자연히 각 방면의 누리꾼들이 몰렸다.성연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북성남고의 교풍이 안 좋아서그렇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아주 사소한 가십에 불과한 기사에 수만 건의 댓글이 단시간에 붙었다.[약혼이 뭐라고, 만 18세인데 자기 결혼을 결정할 권리도 없어?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이 여자 아이 성적이 좋고, 자제력도 있다고 하던데. 약혼한다고 임신하는 것도 아니잖아. 사람들이 왜 이 일을 이렇게 문제시하는지 잘 모르겠다.][만약 그 여학생이 진짜 실력이 뛰어나다면 다들 인정하겠지. 하지만 그 동안 받았던 상들이 전부 약혼자가 돈으로 산 거라는 말이 있어. 진짜 돈으로 산 거라면 정말 불공평한 거 아냐? 앞으로 자기 아이가 그 여자애와 시합하면서 이런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 봐. 그걸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다들 너무 단편적으로만 본다는 생각이야. 모든 심사위원을 매수할 수는 없는 거잖아? 정직한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니까. 설마 같이 시합에 참가했던 아이가 그 여자애의 실력을 모르겠어? 약혼이 뭔 대수야? 서로 좋아하면 되지.][시골에서 올라온 그 여학생, 시골에서 학교 다닐 때 빵점도 받고 그랬다던데? 근데 어떻게 갑자기 만점을 받아? 또 돈 많은 약혼자까지 튀어나오고? 무슨 램프의 요정이라도 있는 거야? 어쨌거나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잖아. 정말 웃기는 일이야.][내가 볼 때, 학교 내 기강에 문제가 있는 거야. 학교에 가는 거지, 이런 난장판을 만들러 가는 게 아니잖아. 만약 또 저런 아이가 나온다면 분명히 이 애한테 물든 거야! 앞으로 내 아이는 절대 저 학교에 입학시킬 수 없어!]기사 아래에는 다양한 의견의 댓글들이 달렸는데, 개중에는 성연을 비호하는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비난의 글들이었다.성연이처럼 한창 어린 나이에 약혼한 게 사람들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어쨌거
늦은 오후 하교 시간.학교 정문 앞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줄을 지어 세워져 있었다. 모두 열 대도 넘어 보이는 차들은 모두 장미꽃으로 장식으로 되어 있었다. 또 페일 블루 빛의 테이프로 차체를 휘두르고 있는 게 무척이나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성연의 손을 잡고 교실을 나서는 주연정은 주변 학생들의 시선 따위는 일절 개의치 않았다.그러나 성연이 생각하기에, 이 일은 자신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데다 주연정까지 연루시키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성연이 주연정에게 말했다. “연정아, 너 먼저 가. 나는 뒤에 갈게.”성연의 말에 바로 눈썹을 치켜 세운 주연정은 일부러 사나운 기세로 말했다.“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넌 도대체 나를 친구로 생각하기는 하는 거니?”“너도 알다시피 지금 내 상황이 이렇잖아. 그러니 나한테서 떨어져 있는 게 좋아.” 여러 사람의 공허한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건 성연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자신과 관계된 일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뭐라고 하든 그건 상관없었다.하지만 주연정은 다르다. 그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여론이 조금이라도 주연정을 향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너는 어때? 나는 네가 아주 좋다고 생각해. 성연아, 걱정 마. 내가 너랑 같이 있을 게. 저 사람들이야 자기 입만 믿고 말도 안되는 헛소리들만 하고 있는 거지. 저런 사람들은 보기에도 정말 역겨워.” 주연정은 성연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성연을 비난하는 사람이야 말로 진짜 가증스럽게 느껴졌다.특히나 그 중에는 성연의 도움을 받은 아이들도 있어서 주연정은 더 반감을 느꼈다.성연은 아무리 봐도 잘못한 게 없었다. 성연이 자기 복습하는 시간에 반 아이들을 위해 요점 정리까지 해 주었건만.하지만 얘네들은 조그마한 일만 생겨도 금세 두 눈을 치켜 세운 채 난리를 떤다.정말 한 마디로 양심도 없는 것들이다.정말 모르겠다. 성연에게 도움을 청하던 애들이 눈 깜짝할 새에 이젠 비난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떤 마음을
마침 학생들이 한창 하교는 시간에 이런 장면이 연출되었다.집에 돌아가야 할 학생들이 모두 제자리에 멈춰 선 채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순식간에 주위가 인산인해를 이루며 교문 입구가 막혔다.무엇보다 얼마 전 교내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두 남녀 주인공인 걸 모두 알아차렸다.팝콘각 느낌으로 다들 구경꾼이 되어 두 사람 주위를 빙 둘러섰다.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강무진의 손은 정말 컸다.무진이 꺼낸 것들과 이벤트 모두 수많은 여자아이들 꿈꾸던 장면이다.성연은 다소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강무진을 믿었다.무진이 결코 자신에게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조용히 제자리에 선 채 기다렸다.이런 경험은 처음인지라 무진은 왠지 모르게 긴장한 상태였다.하지만 성연을 보는 순간 무진의 전신에 흐르던 긴장감과 초조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바로 자신의 소녀야 말로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는 믿음 때문이다.무진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성연을 향해 걸어왔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서서히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다.“송성연.”무진의 음성이 떨어지자 성연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오히려 옆에서 난리가 났다.“와, 아니 카리스마 작렬 대표에게 무슨 이런 달콤함이야?”“나 지금 귀가 녹아내렸어. 목소리 들었을 뿐인데 미칠 것 같아.”“성연과 약혼했다던데 이렇게 멋있을 줄은 몰랐어. 연예인 중에도 이렇게 잘 생긴 사람 몇 없을 걸? 송성연은 둘째치고 나라도 넘어가겠다.”당시 사진이 올라왔을 때, WS그룹에서 손을 써서 바로 삭제했었다.그러나 삭제된 사진 위의 기사는 여기저기 전해지면서 모두들 성연이 약혼한 강 대표가 나이 많은 노인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연예인 외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잘 생긴 남자라니.이게 바로 진정한 카리스마 재벌 회장님, 누군들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주위에 둘러선 학생들이 속닥거리는 말을 듣던 성연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그러나 무진이 난처할까 봐 자그마한 소리로 대답했다.“네. 여기 있어요.”“처음 본 순
식사를 마치자 종업원이 디저트를 가지고 왔다.네 사람은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래함은 줄곧 유채연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유채연은 처음에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과시하는 것이 정말 쑥스러워서 손을 빼려고 했다.그러나 나중에는 정말 그래함을 말릴 수가 없어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사형,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외국으로 나갈 거예요?” 성연은 그래함의 기초가 해외에 있으니까 결국 출국할 거라고 생각했다.‘다만 채연 언니가 좀 걱정이야.’‘지금 국내에서의 차이에도 아직 적응하지 못했는데, 만약 외국에 간다면 틀림없이 더 힘들 거야.’해외라는 말을 듣자 유채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래함, 우리 해외로 가야 해?”유채연은 시종 열등감에 빠져 있었다.그래함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그래함이 외국에서 유학했다는 것만 알고 있어서, 이제는 돌아왔으니 다시 해외로 나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유채연이 눈썹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그래함은 유채연이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그래함도 유채연이 즉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채연아, 해외로 한 번은 나가야 해.” 해외야말로 그래함이 있어야 할 곳으로 더욱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하지만 나는 영어도 할 줄 모르는데, 해외로 나가면 나는 어떻게 해?” 유채연의 눈에는 곧 출국하게 될 긴장과 당황스러움이 담겨 있었다.‘국내에서는 그래도 다른 사람과 교류라도 할 수 있지만, 출국한다면 비행기 티켓도 못 살 거야.’“채연아,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내가 너하고 여행을 갈 거야. 우리 먼저 국내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 그래함이 유채연을 보고 말했다.유채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하는 거라면 가도 괜찮겠지.’‘그런데...’“일은 안 해도 돼? 일이 바쁘지는 않아?”유채연은 자신 때문에 그래함이 지체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괜찮아. 내가 귀국했을 때 챙겨놓고 왔어. 다른 사람이 처리하니
무진과 성연은 잠시 낮잠에 빠져들었다.저녁이 되자 무진이 예약한 곳으로 가서 그래함과 유채연과 함께 밥을 먹었다.유채연을 본 무진은 정말 미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예쁜 여자들도 많지만.’‘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런 단순함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지.’‘그래서 그래함이 좋아했구나.’무진은 유채연이 수줍게 그래함의 뒤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먼저 유채연에게 인사를 했다.“유채연 씨, 안녕하세요, 저는 성연이 약혼자인 강무진입니다.”유채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안녕하세요.”요리가 곧 나오자 무진이 말했다.“채연 언니, 사양하지 마시고 드시고 싶은 대로 드세요. 모두 친구인데 너무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지요.”성연도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언니. 이 집의 생선 요리는 정말 잘 해요. 비린내도 하나도 없는 데다가 아주 신선해요. 빨리 먹어봐요.”말을 하면서 유채연의 접시에 듬뿍 집어 주었다.유채연은 약간 머뭇거렸다.이제야 자신과 그래함과의 차이를 실감한 것이다.이전에 자신은 넘볼 수 없었던 곳을 그래함은 마음대로 도달할 수 있었다.게다가 유채연은 이런 고급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없어서 다소 불편했다.거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어주는 대로 먹었다.‘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뜨기처럼 행동하면 그래함이 망신을 당하겠지.’그래함은 유채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스테이크를 썰어 유채연의 앞에 주면서 말했다.“당신이 낯선 음식을 잘 먹지 못할까 봐 완전히 익힌 걸로 시켰어. 입맛에 맞는지 먹어봐.”유채연은 다 익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다 먹었는데, 이렇게 비싼 음식은 말할 것도 없어.’고개를 숙이고 먹으려고 할 때, 그래함이 휴지로 유채연의 입을 닦아주면서 낮은 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만약 먹기 싫으면, 먹지 말고 그냥 놔두고 다른 걸 먹어.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어. 나는 단지 당신이 즐겁게 식사하길 바랄 뿐이야.”그래함이
‘그래함과 무진 씨 사이는 썩 괜찮은 것 같아.’성연은 두 사람이 언제 번호를 교환했는지도 몰랐다.‘그런데 사형이 전화를 받는 속도가 꽤 빨랐어.’성연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사형하고 채연 언니는 뭐하고 있대요?”‘채연 언니가 멀미를 했으니까, 사형도 당연히 언니하고 같이 쉬고 있었을 텐데.’‘전화를 그렇게 빨리 받을 수가 없어.’그래서 성연은 약간 궁금해졌다.“두 사람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맞혀 봐?” “뭐 먹고 있었나...?” 성연이 머뭇거리며 답을 말했다.“두 사람은 임신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도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성연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얼굴을 가렸다.‘사형하고 언니는 대낮인데도...’‘하필이면 무진 씨가 들었어.’‘하지만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 호텔에는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바로 불이 붙은 거야.’‘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도 정상일 거야.’말을 하던 무진이 성연에게 바로 키스를 했다.무진의 키스를 받은 성연은 숨을 헐떡이며 무진의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무진의 동작은 갈수록 대담해졌다.성연의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너무 조급하게 그러지 말아요.”‘여긴 집무실이라서 언제든지 사람들이 들어올 거야.’‘문을 잠그더라도 누군가 보고하러 문을 두드릴 거야.’성연은 아직 이런 정도로 개방적이지는 않았다.그리고 아이를 만드는 것도 조급해하지 않았다.‘적어도 결혼식 후에 생각해야지.’‘나는 아직 그렇게 젊은데, 아이가 생기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해.’‘생각만 해도 정말 귀찮아.’“안 돼,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성연이 사무실에서 그러는 걸 원하지 않는 이상, 무진도 개의치 않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곳이라면 조용하고 공간도 넓어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거야.’“무진 씨, 좀 진정해요...”성연은 얼굴을 붉히며 무진의 가슴을 밀어냈다.‘무진 씨는 정말 갈수록 대담해져.’‘누가 강무진을 금욕주의자라고 했어?’‘나를 잡아먹으려고 눈이 벌개져 있는데, 그런
무진은 전례 없이 빠른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문을 열고 성연의 뒷모습이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곧장 달려가서 성연을 백허그로 안았다.고개를 돌린 성연이 무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키스를 날렸다.무진은 키스를 잠시 중단하고 대표실 문을 잠궜다.이어서 성연에게는 숨막히고 공격적인 키스가 기다리고 있었다.무진의 손도 슬슬 위험 수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성연도 빨갛게 뺨이 달아올랐지만 무진의 손을 잡고 막았다.“지금은 회사라서 안 돼요.”성연이 불편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려던 무진은 마음속의 욕망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그리고 성연을 품에 꼭 안았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무진의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었다.성연을 껴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그리고 나서야 성연에게 그래함의 일에 대해 물었다.“어떻게 됐어?”성연은 그래함과 유채연의 일을 간단하게 말해주었다.그전의 우여곡절들은 많이 생략했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내용들은 거의 다 말했다.이야기를 듣고 난 무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그래함이 그렇게 다정한 남자인 줄 몰랐네.’‘그래함의 권력과 지위라면 어떤 여자인들 얻지 못하겠어?’‘줄곧 고향의 연인만을 애타게 기다렸다니.’무진의 생각이 지나치다고 탓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그러나 내가 성연과 함께 있을 때 성연의 신분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어.’‘감정이란 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오로지 느낌만 따라야 해.’무진은 유채연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좀 궁금해졌다.‘그래함 같은 대단한 남자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라니.’“무진 씨도 믿기지 않지요?” 성연이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그래.”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좀 믿기 힘든 일이야.’“이전에 사형이 채연 언니를 찾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사형이 예전에 채연 언니가 자신에게 준 증표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채연 언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걸
북성에 도착하자 그래함은 유채연을 데리고 최고급 호텔을 체크인했다.뒤에서 그들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고 있던 성연은 자기도 모르게 무진이 생각났다.‘나도도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 뭐.’‘요 며칠 사형과 채연 언니가 애정을 과시하는 것만 바라보았지.’유채연과 그래함도 성연을 잊지 않았다.유채연이 물었다.“성연아, 너 우선 우리 호텔로 가서 쉬지 않을래? 차를 그렇게 오래 탔는데 힘들었잖아.”유채연은 멀미가 나서 창백한 표정으로 그래함의 품에 기대고 있었다.“됐어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두 사람의 세계를 방해할 수 있겠어요? 저는 먼저 갈게요.” 성연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혼자 차를 타고 떠났다.유채연은 성연이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걱정했다.“성연이 걔가 갈 곳이 있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가 밖에 있으면 얼마나 위험해.”“특히 이런 대도시에서는.”그래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채연아, 성연이는 이곳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 잊었어? 전에 내가 너한테 말했잖아. 성연이에게는 아주 대단한 약혼자가 있다는 거 말이야.”유채연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성연에 대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그래서 약혼자를 찾아간 거야?”“그래, 걱정하지 마. 지금 멀미하지? 힘들면 내가 밖에 나가서 약 좀 사올까?” 그래함은 유채연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유채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좀 자면 돼.”“그럼 그렇게 해.” 그래함도 마음 놓고 유채연을 혼자 둘 수 없었다.‘처음 이곳에 왔는데, 내가 채연이 곁에 없다면 채연이가 불안해할 가능성이 높아.’한편 성연은 바로 무진을 찾아갔다.그러나 자신이 돌아온 걸로 무진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려고 무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성연은 예전에 지문을 입력해 놓아서, 보고 없이 바로 최고층까지 갈 수 있었다.요 며칠 동안 무진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이제 곧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설레는 듯했다.성연이 집무실 입구에 도
외삼촌은 다가가서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부축했다.여전히 울고 있던 유채연이 일어나자, 그래함이 어깨를 감싸고 위로했다.“얼른 가거라.” 외삼촌도 울먹이는 목소리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함은 외삼촌을 한 번 본 뒤 유채연이 차에 타도록 부축해 주었다.유채연은 외삼촌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성연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외삼촌이 몸을 돌릴 때 눈물이 땅에 떨어지는 걸 봤지만, 유채연이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이 옆에서 따라서 소리쳤다.“외삼촌, 제가 채연 언니하고 자주 돌아올 게요. 저는 외삼촌 가게 하드가 좋아요.”그제야 서둘러 눈물을 닦은 외삼촌이 몸을 돌려서 말했다. “그래,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마.”차가 천천히 시동을 걸자, 창밖의 장면도 빠르게 바뀌었다.차에 앉아서도 유채연은 여전히 훌쩍거렸다.그래함은 유채연을 꼭 안고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채연아, 외삼촌이 보고싶으면 앞으로 자주 돌아와서 볼 수 있어. 내가 같이 올게.”“정말?” 그래함을 바라보는 유채연의 눈은 마치 토끼의 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물론이지,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다 해 줄게.” 예전에는 그래함도 뭘 해도 혼자였다.하지만 이제 유채연이 있으니 모두 달라졌다.그래함은 틀림없이 유채연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어쩌면 유채연을 위해 정말 국내로 이주할 수도.“그런데 내가 없는데 외삼촌은 어떡하지? 자기 몸을 잘 추스릴까?” ‘예전에는 집안의 모든 일을 내가 책임졌지.’‘지금 내가 떠났으니 외삼촌은 잘 수습할 수 있을지 몰라.’성연은 조수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성연은 일부러 그 자리에 앉아서 유채연과 그래함에게 공간을 내주었다.그 말을 듣고 성연이 웃으며 말했다.“채연 언니, 외삼촌은 마음이 그렇게 섬세한 분이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떠날 때 그래함은 외삼촌에게 체크카드를 남겨 두었다. 비밀번호도 쪽지에 써 두었다. 그 돈이면 외삼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생 편안하게
이런 유채연의 모습을 보고 외삼촌은 또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정말 재수 없게 징징거리고 있지. 꼴이 그게 뭐야? 나는 상관하지 말고 빨리 가. 나한테 돈도 있고 차도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는 말할 것도 없어. 너는 나한테 짐만 될 뿐이야!”유채연은 외삼촌이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다.대부분 외삼촌은 그저 입으로만 모질게 굴었을 뿐이다.사실 자신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애초에 집에 그렇게 많은 일이 생기자 친척들마다 모두 양보하면서 피했다.외삼촌만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모두들 유채연이 흉악한 외삼촌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좋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그러나 그동안 삶의 질이 좀 떨어진 걸 제외하면, 외삼촌은 진심으로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가게에 온 손님 중에 간혹 유채연의 예쁜 모습을 보고 희롱하려고 했지만, 모두 외삼촌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이전의 여러 일들을 생각하자, 유채연은 외삼촌이 자신에게 그렇게 잘해 준 걸 알게 되었다.유채연이 갑자기 털썩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외삼촌, 그동안 거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옆에서 그 모습을 본 그래함도 유채연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외숙부님, 채연이의 부모님이 안 계시니 외숙부님이 채연이 아버님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무릎을 꿇고 맹세하겠습니다.”“저희는 곧 결혼하게 되면 반드시 읍내에서 잔치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채연이를 보고 비웃지 못하게 할 테니, 채연이를 제게 주시면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채연이에게 정말 잘 하겠습니다.”남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엄성이다.그러나 그래함은 유채연을 위해 외삼촌 앞에 무릎을 꿇었다.이 역시 그래함의 성의를 충분히 드러낸 것이다.두 사람의 감정을 외삼촌은 더욱 눈에 새겨 두었다.‘채연이가 그래함과 함께 있으면서 미소도 눈에 많이 많아졌어.’“너희들 빨리 일어나!” 외삼촌은 유채연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었다.입으로는 듣기 싫은 말을 하지면, 개를 길러도 이
이전에 유채연이 입었던 옷은 전부 그래함과 성연이 함께 골라준 옷으로 교체되었다.유채연은 트렁크를 사서 물건을 다 넣었다.곧 떠나야 할 때, 유채연이 외삼촌과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내가 같이 갈게.” 유채연을 도와 트렁크를 닫고서 그래함이 일어났다.“그래도 나 혼자 갈래...” 유채연은 망설였다.“채연아, 이제는 우리 둘이 같이 있잖아. 외삼촌은 우리 관계의 증인이자 네 유일한 가족이야. 내가 널 데리고 갔다가,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함이 유채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요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유채연은 자연스럽게 그래함과 더 가까워졌다.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그래함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만약 외삼촌이 그래함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 마음이 더 괴로울 거야.’“그래, 같이 가자.”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두 사람이 함께 문을 나섰다.나오다가 마침 두 사람을 찾으려던 성연과 마주쳤다.“성연아, 우리 외삼촌 보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유채연은 요 며칠 성연과 계속 붙어 있어서, 성연에 대한 감정도 이미 예전처럼 좋았다.어디를 가든지 성연을 데리고 가야 해서, 그래함이 한바탕 질투하기도 했다.“출발하기 전에 외삼촌과 작별인사 하러 가는 거예요?”성연이 물었다.“그래.”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도 함께 갈게요.” 눈치 빠른 성연은 유채연의 손을 잡지 않고 뒤에서 따라갔다.‘채연 언니하고 그래함 사형이 나란히 다정하게 가는 모습을 보면, 외삼촌이 좀 안심할 수 있겠지.’유채연과 그래함은 앞에서 함께 걸어갔다.유채연의 마음은 여전히 좀 불안했다.‘예전에 외삼촌이 못마땅했을 때는 여기를 탈출하겠다는 생각도 했지.’그러나 정말로 외삼촌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유채연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비록 그다지 내 생각대로 지내지는 못했지만.’‘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내 유일한 피난처였지.’“걱정 마, 외삼촌은 좋은 분이니까 이해해 주실 거야.”
그 말을 듣자, 유채연은 코가 시큰거리면서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꽉 쥐었지만 뜬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지금처럼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은 없었다.유채연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걸 보자, 가볍게 한숨을 쉰 그래함이 휴지로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그렇게 울기를 좋아해? 앞으로 나하고 있으면서 내가 잘 해줄 테니까 이렇게 울면 안 돼. 네가 눈물을 흘리는 게 안타까워.”그래함의 부드러운 말을 들으면서 유채연의 감정도 점차 가라앉았다.감정이 진정되자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맛보았다.아주 달았다. 이 달콤함이 유채연의 마음속에 스며들면서 마음을 천천히 따뜻하게 했다.“고마워, 그래함.” 유채연은 코를 훌쩍이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내가 너에게 고마워해야지. 그렇게 오래 되었는데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잖아. 내가 좀 일찍 너를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함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우리는 지금이 좋아.” 유채연은 그래함의 이런 의기소침한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그래, 이제 네가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는 더 좋아질 거야.”그래함이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성연은 어느새 감정이 없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그러나 계속 뒤를 따라 가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성연은 정말 기뻤다.자신도 그런 분위기가 달콤하게 느껴졌다.예전에는 그저 단순하게 그래함 사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그러나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자, 정말 두터운 그래함의 깊은 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성연은 두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처음에 굳어 있던 두 사람이 점차 풀어질 때까지 이미 정말 잘 지나왔어.’“두 분, 연애하면서 여동생도 잊어버렸지요? 나 너무 배가 고파요. 밥 먹으러 가고 싶어요.” 성연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게에서 별로 먹지 않고 이렇게 오래 걸었더니 벌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그 말을 들은 유채연이 바로 뒤돌아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