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근처의 호텔에 짐을 풀어 놓고 미스터 제이슨과 헤어진 소지연은 곧장 WS그룹으로 달려갔다.건물 꼭대기 층 대표 이사실로 가서 무진을 찾았다.소지연을 본 무진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이렇게 빨리? 왜 미리 말 안 했어? 그럼 공항에 마중 나가라고 지시했을 텐데.”소지연은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무진 오빠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귀찮게 해요?”무진도 소지연을 따라 픽 웃었다.몇 마디 인사말을 가볍게 나눈 두 사람은 바로 업무에 관한 주제로 넘어갔다.소지연은 무진에게 해외 지사의 실적에 대해 보고했다.소지연의 관리에 따라 해외 지사의 실적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매 중요한 단계마다 소지연의 관리 능력이 빛을 발휘하였다.무진은 유능한 수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상관이었다. 무진이 소지연을 칭찬하며 말했다.“잘했어. 너에게 지사를 맡기는 게 탁월한 선택이었군.”애초에 소지연의 과감한 추진력과 시장의 흐름에 민감한 감각이 마음에 들었었다.지금의 이런 실적은 무진의 예상을 이미 초월한 것이다.무진의 칭찬에 소지연이 겸손하게 대답했다.“오빠가 잘 키워준 거죠. 무진 오빠가 아니었으면 제가 무슨 능력으로 이렇게 잘할 수 있었겠어요?”지극히 겸손한 말이었다. 만약 소지연에게 능력이 없었다면 무진이 그처럼 중요한 직책을 그녀에게 맡기지도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원래부터 뛰어난 인재였던 소지연은 무진의 조련에 힘입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을 정도로 성장했다.소지연은 무진이 눈치 채지 않도록 슬쩍 무진의 옆모습을 응시했다.바라보는 두 눈에 짙은 애정이 담긴 빛이 스쳐갔다.금세 다시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온 소지연.가방에서 고급 포장지에 둘러싸인 고가의 시계를 꺼냈다.명품 시계 브랜드의 한정판인지라 시장에 몇 나오지 않은 것이어서 소지연 또한 구하기 위해 꽤나 애를 썼었다.“이 시계, 해외에서 어렵게 구한 거예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오빠에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 선물로 준비했어요.” 소
사무실을 나가던 소지연이 고개를 돌린 채 물었다.“무진 오빠 곧 결혼할 거라면서요? 나 아직 예비 신부 얼굴도 못 봤어요.”정말 성연이 궁금하기라도 한 듯이 소지연의 두 눈에는 짙은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사실은 얼마나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는 지는 그녀 자신만 알고 있을 뿐이다.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 나중에 두 사람 소개시켜 줄게.”무진은 소지연과 성연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의 성격은 어떤 면에서 아주 닮았다.자신과 소지연이 가까운 관계인만큼 두 사람을 한 번 만나게 할 때이기도 했다.소지연은 활짝 웃으며 마치 옆집 여동생이 오빠와 새언니를 동경하는 듯한 모습을 가장했다.사실 무진에게 있어서 소지연은 확실히 옆집 여동생 같은 존재가 맞았다.소지연은 정말 무진과 함께 자랐다고 할 수 있었다.오래도록 함께해 온 두 집안의 관계는 그 만큼 예사롭지 않았다. 소지연은 대학 졸업 후에 무진의 회사에 들어가서 차근차근 업무들을 익혀나갔다.그리고 마침내 유럽 지사로 파견되어 실적을 쌓기 시작한 것.세상 물정도 모르던 여자아이가 이제 전략을 세울 줄도 아는 강한 여성으로 자랐다. 그만큼 소지연의 능력은 뛰어났다.“돌아가서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안부 전해 줘. 내일 식사 자리에 좋은 술 한 병 가져다 드리고 사죄 드리겠다는 말씀도 대신 전해 주고.” 강씨 집안과 소씨 집안은 대를 이어 친교를 맺어온 사이.예전에 무진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소씨 집안 부모님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었다.무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겉으로는 두 집안의 교류가 뜸한 듯했으나 보이지 않는 협력 관계는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무진이 어려울 때면 소씨 집안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너무 오랫동안 찾아 뵙지 못한 것은 확실히 무진 자신의 잘못이었다.“무진 오빠가 찾아 뵈면 두 분 모두 기뻐하실 거예요. 예전에 오빠 집안 내 둘째, 셋째 일가와의 일에 대해서는 부모님과 통화할 때 언급하신 적이 있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오
저녁에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가지고 게임을 하던 성연.한창 하고 있던 게임이 중간에 끊겼다. 짜증이 났지만 발신자 표시를 본 성연의 얼굴에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거기에 기대하지 못했던 기쁨도 다소 섞여 있었다.성연은 게임은 내팽개치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너머에서 아주 매력적인 남자 음성이 들렸다. 성연이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상대방이 말했다.“공항에 좀 늦었더니 두 세 시간 여유가 생겼어. 비행기를 바꿔 타고 북성으로 날아갈 거야. 이 틈에 얼굴이나 보자.”성연이 생각해도 확실히 서로 얼굴을 본 지 오래되었다.서로 바빠서 도무지 자리를 함께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성연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따가 내가 갈게. 나를 속이는 거 아니지?”도시 농담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이 사람의 성격으로 봐서 아마 자신을 속이는 건 아닐 것이다.“서로 얼굴 본 지 이렇게 오래 되었는데, 내가 너를 속일 이유가 뭐야?” 상대방의 말투에서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웃음기가 희미하게 묻어났다.성연이 주먹을 쥐고서 한 대 치는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넌 감히 나를 못 속여. 만약 감히 나를 속인다면 어디로 가든지 쫓아가서 단단히 혼구멍을 내 줄 거야.”성연의 말에 휴대폰 저편의 사람이 더 크게 웃었다. “아이고, 바라는 바네요.”흥 가볍게 콧방귀를 뀌는 성연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이로써 이 사람의 전화를 성연이 얼마나 반가워하는 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창가로 가서 바깥 하늘을 잠시 쳐다보았다. 아직 시간이 있는 줄 알았으나 이미 밤이 깊었다.하지만 생각해보니 이 사람은 시간이 두세 시간밖에 없다고 했다.그런데도 일부러 자신에게 전화를 한 것.누가 뭐라 하든, 성연은 꼭 가서 만나야 했다.그래서 성연도 승낙하려 했지만, 미처 성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상대편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여기서 너 기다릴 테니, 나 바람 맞히지 마.”성연이 휴대폰을 향해 눈을 흘겼다.“내가 바람이나 맞히는 사람
성연은 가는 내내 운전 속도를 높여 밤 10시 좀 넘어 공항에 도착했다.휴대폰으로 들어온 메시지에 따라 공항 VIP 실로 향했다.성연이 VIP실로 들어서자, 몸매며 얼굴이며 모두 연예인 보다 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니버설 트레이드 컴퍼니의 대표 고정재.성연의 오랜 친구다.고정재를 본 성연이 눈썹을 휙 치켜세우고는 앞으로 걸어가 고정재의 어깨를 두드렸다.“진짜 이런 일이 다 있네. 공사다망하신 사람이 먼저 만나자고 하다니 너무 황송할 지경이야.”고정재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말했다.“그만 놀려. 바쁜 일만 아니면 난들 너희들과 종일 같이 어울리고 싶지 않겠어?”“됐네요, 됐네요. 대표님이 우리와 같을 수야 없지.” 성연이 저리 가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고정재, 이 인간의 시간은 1분 1초가 수십 억 원에 맞먹을 정도니, 성연도 감히 그의 시간을 헛되게 할 수 없었다.만약 고정재에게 자신들과 같이 놀게 한다면, 어찌 정당한 일이라고 하겠는가?고정재의 얼굴이 다소 진지해지더니 입을 열어 물었다.“성연아, 너 요즘 잘 지내고 있어? 학교에서 있었던 일 다 알고 있어. 너 진짜 유럽으로 유학 갈 생각이야?”평소 무척이나 바쁜 고정재이지만, 성연에 관한 일만큼은 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유럽은 그의 세력 근거지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성연이 정말 그곳에 간다면 더 자주 만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성연을 돌보는 것도 괜찮고.성연은 이미 결정을 내렸기에, 부인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유럽으로 오기만 해. 필요한 모든 것들 미리 다 준비해 놓을 테니. 그냥 가방 들고 입학만 하면 되게 말이야.” 성연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재.하지만 성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성연은 남들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자신과 고정재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어찌 되었든 사람
고정재는 소장하고 있던 향수 한 병을 꺼냈다. 향수는 꽤나 볼륨감 있게 투각을 한 단향목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파스텔 블루의 향수가 케이스 밖으로 보일락말락 하는 것이 무척 예뻤다.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정재의 손에 들린 향수를 보는 성연의 눈에 기쁨이 넘쳤다.성연이 이 향수가 무척 마음에 든 것이 분명했다.고정재가 성연에게 말했다.“이건 네 스승님이 그 해에 남기셨던 배합법에 따라 만든 거야. 사적으로 따로 연구해서 만들라고 회사에 시켰어. 한 번 뿌려 봐. 만약 이 제품이 진짜 생산된다면 유럽의 다른 어떤 명품 향수보다 더 잘 팔릴 거라고 생각해. 나도 이 향수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는데, 결국 똑같이 만족스럽게는 만들지 못 했어.”그래서 고학중의 제자인 성연이에게서 분명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찾아온 터였다.물론 성연과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지만.고정재가 가볍게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던 성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건 향수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케이스에서 꺼낸 향수를 코끝에 대고 향을 맡던 성연은 확실히 스승님이 남긴 배합표에 따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은은하면서도 예스러운 한약 향이 아주 살짝 묻어났지만, 다른 향에 둘러싸여 일반인이라면 맡기 어려웠다.일반 향수보다 더 묵직한 베이스노트가 느껴졌다.그러나 이 향은 다른 사람들이 연구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오직 성연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알아내기 힘들 정도로 아주 미세한 향 몇 개가 섞여 있음을.성연의 진지한 모습을 본 고정재가 말했다.“알아내기 힘들면 억지로 안 해도 돼. 이 향수는 내가 너에게 주는 거야. 천천히 연구해도 돼. 서두를 필요 없어. 물론 연구할 생각 없으면 안 해도 돼. 다만 이 향수, 시장성이 있다고 봐. 만들어 내면 분명 히트할 거야.”“내가 열심히 연구해 볼게.” 성연은 사실 고학중의 제자일 뿐이다.자신은 스승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능력을 이어받았을 뿐이다.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을
성연이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무진은 서재에서 서류들을 보느라 여전히 바빴다.서재를 지나가던 성연은 서재에 아직 불이 켜진 것을 보았다.옷을 갈아입고 나온 성연은 오후에 만들어 두었던 약선탕을 다시 데워서 무진에게 들고 갔다.“이렇게 오래 일했으니 이제 뜨끈한 탕을 좀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해요.” 여름이지만 밤이 되면 여전히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옷도 가볍게 입은 무진이 일에 빠져 있다 보면 냉기가 몸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그러다 무진이 병이라도 날까 성연은 걱정스러웠다.“어, 왔네?” 무진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무진이 성연의 손에 들려 있던 약선탕을 받아 들고 순식간에 다 마셨다.무진은 성연이 늦은 시간에 만나러 나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았다. 오히려 성연이 먼저 설명했다.“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했던 오빠 만나고 왔으니, 오해하지 말아요.”“오해 안 해.”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무진은 속으로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가 기억하기에, 송종철과 진미선이 결혼해서 낳은 첫아이가 성연인데, 어디에서 오빠가 툭 튀어나온 건가 싶었다.성연이 자란 시골 마을의 다른 집 아들이라면 더 이해가 안 된다.마을 사람들의 배경이야 너무나 평범해서, 어떤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그런데 어떻게 성연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지?’‘마을의 이웃집 오빠도 아니라면, 또 어디에서 튀어나온 걸까?”무진의 마음속에 의혹이 겹겹으로 쌓였지만, 성연이 자신을 속이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성연이 오빠라고 부르면 당연히 오빠겠지. 단지 내가 모르고 있을 뿐.’무진이 그에 대해서는 별말 하지 않았다.“돌아왔으니 푹 쉬어.” “무진 씨는 아직 안 잘 거예요?” 성연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예전에는 늘 무진과 같이 잠이 들었다.그러나 지금 무진이 업무로 바빠지면서 잠 드는 시간도 늦어지고 있었다.어쩌면 무진이 침실에 들어왔을 것이다. 자신이 깨지 않고 자는 사이에 다시 또 일어나 나
이튿날, 소지연이 직접 성연을 만나러 찾아왔다.바쁜 무진 대신 성연이 문을 열고 현관문 앞에서 기다렸다.문이 열리며 세련되고 여성스러운 차림의 미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여자의 위기감에 성연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시죠?”그러나 소지연은 아주 친근한 태도로 말했다.“당신이 무진 오빠 약혼녀죠? 저는 소지연이라고 해요. 무진 오빠와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은 사이예요.”무진과 친구 같은 사이라는 말을 듣고 성연은 경계심을 늦추었다.그러나 무진에게서 이런 이성 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친구에게 성연은 아주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성연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송성연입니다.”소지연은 위에서 아래로 성연을 힐끗 훑어보았다.젖비린내 나는 어린 여자애였다. 자신의 눈에는 별로 도전할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자신이 나선다면 송성연의 몫이 있기나 할까?소지연은 활짝 웃으며 성연을 쳐다보았다. 성연이 소지연을 손님으로 집안에 들였다.소지연이 핸드백을 성연에게 건넸다.“새언니를 처음 만나는데,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지 몰라 가방을 하나 골라봤어요. 내 생각엔 분명히 새언니 마음에 들 거예요.”성연은 한 번 쓰윽 훑어보니, 손바닥 만한 핸드백이 명품 브랜드 못지않게 무척 비싼 가격이었다.소지연은 얼굴이 예쁠 뿐 아니라 씀씀이도 무척이나 대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성연은 망설이며 받지 못했다.옆으로 다가온 무진이 입을 열었다.“괜찮아, 내 사람이야. 지연이가 너에게 선물하는 거니 받아 둬.”무진이 말한 이상 성연도 거절하기 어려워 핸드백을 받았다.“감사합니다.”그러나 무진이 자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 소지연이 무진의 심중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분명 낮지 않을 터.성연이 방에 핸드백을 가져다 두고 다시 내려오니, 무진과 소지연이 마침 소파에서 웃고 떠드는 게 눈에 들어왔다.소지연을 대하는 무진의
성연이 하하 웃었다. 소지연이 한 말들에 대해 정말이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것.소지연은 정말 대화의 고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이런 사람을 처음 접해 본 성연은 다소 허둥지둥하는 느낌이었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연과 소지연이 서로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터.무슨 말을 해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성연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소지연은 자기말만 계속 했다. 대답을 듣지 못해도 낙담하지 않고 완벽한 웃음을 유지했다. 그래서 왠지 가짜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처음 만나서 서로의 성격도 잘 모르기에 지나치게 평가를 논하기도 어려웠다.한참을 말한 뒤에 소지연이 말했다.“성연 씨, 우리 같이 쇼핑하러 가요. 방금 귀국해서 아직 북성을 제대로 구경 못 했어요.”성연이 개의치 않겠다고 하니, 소지연도 호칭을 바꾸었다.어차피 어떤 호칭이든 자신에게는 똑같았다.“죄송해요, 나는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같이 쇼핑하러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성연은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웃으며 소지연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절했다.자신이 소지연에게서 계속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그리고 성연의 육감이 소지연과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성연은 자신의 느낌을 따르기로 했다.소지연은 좀 아쉬워하는 어투로 말했다.“아, 그렇군요. 그럼 우리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만나요.”“네, 기회가 있으면 다시 얘기해요. 오늘은 내가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어요.” 성연도 소지연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세 사람이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심 때가 되었다. 무진이 회사에 가려고 일어섰다.그러자 소지연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무진 오빠, 마침 잘 됐어요. 가는 길에 좀 데려다 줘요. 안 그러면 성연 씨를 너무 귀찮게 하겠어요.”무진이 없으면 성연도 소지연을 응대할 방법이 없다.성연은 입을 열어 만류하지 않고 그냥 또 오라고 인사했다.“시간이 나면 다시 놀러 와도 돼요
식사를 마치자 종업원이 디저트를 가지고 왔다.네 사람은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래함은 줄곧 유채연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유채연은 처음에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과시하는 것이 정말 쑥스러워서 손을 빼려고 했다.그러나 나중에는 정말 그래함을 말릴 수가 없어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사형,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외국으로 나갈 거예요?” 성연은 그래함의 기초가 해외에 있으니까 결국 출국할 거라고 생각했다.‘다만 채연 언니가 좀 걱정이야.’‘지금 국내에서의 차이에도 아직 적응하지 못했는데, 만약 외국에 간다면 틀림없이 더 힘들 거야.’해외라는 말을 듣자 유채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래함, 우리 해외로 가야 해?”유채연은 시종 열등감에 빠져 있었다.그래함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그래함이 외국에서 유학했다는 것만 알고 있어서, 이제는 돌아왔으니 다시 해외로 나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유채연이 눈썹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그래함은 유채연이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그래함도 유채연이 즉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채연아, 해외로 한 번은 나가야 해.” 해외야말로 그래함이 있어야 할 곳으로 더욱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하지만 나는 영어도 할 줄 모르는데, 해외로 나가면 나는 어떻게 해?” 유채연의 눈에는 곧 출국하게 될 긴장과 당황스러움이 담겨 있었다.‘국내에서는 그래도 다른 사람과 교류라도 할 수 있지만, 출국한다면 비행기 티켓도 못 살 거야.’“채연아,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내가 너하고 여행을 갈 거야. 우리 먼저 국내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 그래함이 유채연을 보고 말했다.유채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하는 거라면 가도 괜찮겠지.’‘그런데...’“일은 안 해도 돼? 일이 바쁘지는 않아?”유채연은 자신 때문에 그래함이 지체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괜찮아. 내가 귀국했을 때 챙겨놓고 왔어. 다른 사람이 처리하니
무진과 성연은 잠시 낮잠에 빠져들었다.저녁이 되자 무진이 예약한 곳으로 가서 그래함과 유채연과 함께 밥을 먹었다.유채연을 본 무진은 정말 미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예쁜 여자들도 많지만.’‘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런 단순함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지.’‘그래서 그래함이 좋아했구나.’무진은 유채연이 수줍게 그래함의 뒤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먼저 유채연에게 인사를 했다.“유채연 씨, 안녕하세요, 저는 성연이 약혼자인 강무진입니다.”유채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안녕하세요.”요리가 곧 나오자 무진이 말했다.“채연 언니, 사양하지 마시고 드시고 싶은 대로 드세요. 모두 친구인데 너무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지요.”성연도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언니. 이 집의 생선 요리는 정말 잘 해요. 비린내도 하나도 없는 데다가 아주 신선해요. 빨리 먹어봐요.”말을 하면서 유채연의 접시에 듬뿍 집어 주었다.유채연은 약간 머뭇거렸다.이제야 자신과 그래함과의 차이를 실감한 것이다.이전에 자신은 넘볼 수 없었던 곳을 그래함은 마음대로 도달할 수 있었다.게다가 유채연은 이런 고급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없어서 다소 불편했다.거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어주는 대로 먹었다.‘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뜨기처럼 행동하면 그래함이 망신을 당하겠지.’그래함은 유채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스테이크를 썰어 유채연의 앞에 주면서 말했다.“당신이 낯선 음식을 잘 먹지 못할까 봐 완전히 익힌 걸로 시켰어. 입맛에 맞는지 먹어봐.”유채연은 다 익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다 먹었는데, 이렇게 비싼 음식은 말할 것도 없어.’고개를 숙이고 먹으려고 할 때, 그래함이 휴지로 유채연의 입을 닦아주면서 낮은 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만약 먹기 싫으면, 먹지 말고 그냥 놔두고 다른 걸 먹어.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어. 나는 단지 당신이 즐겁게 식사하길 바랄 뿐이야.”그래함이
‘그래함과 무진 씨 사이는 썩 괜찮은 것 같아.’성연은 두 사람이 언제 번호를 교환했는지도 몰랐다.‘그런데 사형이 전화를 받는 속도가 꽤 빨랐어.’성연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사형하고 채연 언니는 뭐하고 있대요?”‘채연 언니가 멀미를 했으니까, 사형도 당연히 언니하고 같이 쉬고 있었을 텐데.’‘전화를 그렇게 빨리 받을 수가 없어.’그래서 성연은 약간 궁금해졌다.“두 사람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맞혀 봐?” “뭐 먹고 있었나...?” 성연이 머뭇거리며 답을 말했다.“두 사람은 임신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도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성연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얼굴을 가렸다.‘사형하고 언니는 대낮인데도...’‘하필이면 무진 씨가 들었어.’‘하지만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 호텔에는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바로 불이 붙은 거야.’‘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도 정상일 거야.’말을 하던 무진이 성연에게 바로 키스를 했다.무진의 키스를 받은 성연은 숨을 헐떡이며 무진의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무진의 동작은 갈수록 대담해졌다.성연의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너무 조급하게 그러지 말아요.”‘여긴 집무실이라서 언제든지 사람들이 들어올 거야.’‘문을 잠그더라도 누군가 보고하러 문을 두드릴 거야.’성연은 아직 이런 정도로 개방적이지는 않았다.그리고 아이를 만드는 것도 조급해하지 않았다.‘적어도 결혼식 후에 생각해야지.’‘나는 아직 그렇게 젊은데, 아이가 생기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해.’‘생각만 해도 정말 귀찮아.’“안 돼,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성연이 사무실에서 그러는 걸 원하지 않는 이상, 무진도 개의치 않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곳이라면 조용하고 공간도 넓어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거야.’“무진 씨, 좀 진정해요...”성연은 얼굴을 붉히며 무진의 가슴을 밀어냈다.‘무진 씨는 정말 갈수록 대담해져.’‘누가 강무진을 금욕주의자라고 했어?’‘나를 잡아먹으려고 눈이 벌개져 있는데, 그런
무진은 전례 없이 빠른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문을 열고 성연의 뒷모습이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곧장 달려가서 성연을 백허그로 안았다.고개를 돌린 성연이 무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키스를 날렸다.무진은 키스를 잠시 중단하고 대표실 문을 잠궜다.이어서 성연에게는 숨막히고 공격적인 키스가 기다리고 있었다.무진의 손도 슬슬 위험 수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성연도 빨갛게 뺨이 달아올랐지만 무진의 손을 잡고 막았다.“지금은 회사라서 안 돼요.”성연이 불편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려던 무진은 마음속의 욕망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그리고 성연을 품에 꼭 안았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무진의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었다.성연을 껴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그리고 나서야 성연에게 그래함의 일에 대해 물었다.“어떻게 됐어?”성연은 그래함과 유채연의 일을 간단하게 말해주었다.그전의 우여곡절들은 많이 생략했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내용들은 거의 다 말했다.이야기를 듣고 난 무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그래함이 그렇게 다정한 남자인 줄 몰랐네.’‘그래함의 권력과 지위라면 어떤 여자인들 얻지 못하겠어?’‘줄곧 고향의 연인만을 애타게 기다렸다니.’무진의 생각이 지나치다고 탓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그러나 내가 성연과 함께 있을 때 성연의 신분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어.’‘감정이란 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오로지 느낌만 따라야 해.’무진은 유채연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좀 궁금해졌다.‘그래함 같은 대단한 남자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라니.’“무진 씨도 믿기지 않지요?” 성연이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그래.”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좀 믿기 힘든 일이야.’“이전에 사형이 채연 언니를 찾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사형이 예전에 채연 언니가 자신에게 준 증표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채연 언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걸
북성에 도착하자 그래함은 유채연을 데리고 최고급 호텔을 체크인했다.뒤에서 그들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고 있던 성연은 자기도 모르게 무진이 생각났다.‘나도도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 뭐.’‘요 며칠 사형과 채연 언니가 애정을 과시하는 것만 바라보았지.’유채연과 그래함도 성연을 잊지 않았다.유채연이 물었다.“성연아, 너 우선 우리 호텔로 가서 쉬지 않을래? 차를 그렇게 오래 탔는데 힘들었잖아.”유채연은 멀미가 나서 창백한 표정으로 그래함의 품에 기대고 있었다.“됐어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두 사람의 세계를 방해할 수 있겠어요? 저는 먼저 갈게요.” 성연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혼자 차를 타고 떠났다.유채연은 성연이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걱정했다.“성연이 걔가 갈 곳이 있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가 밖에 있으면 얼마나 위험해.”“특히 이런 대도시에서는.”그래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채연아, 성연이는 이곳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 잊었어? 전에 내가 너한테 말했잖아. 성연이에게는 아주 대단한 약혼자가 있다는 거 말이야.”유채연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성연에 대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그래서 약혼자를 찾아간 거야?”“그래, 걱정하지 마. 지금 멀미하지? 힘들면 내가 밖에 나가서 약 좀 사올까?” 그래함은 유채연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유채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좀 자면 돼.”“그럼 그렇게 해.” 그래함도 마음 놓고 유채연을 혼자 둘 수 없었다.‘처음 이곳에 왔는데, 내가 채연이 곁에 없다면 채연이가 불안해할 가능성이 높아.’한편 성연은 바로 무진을 찾아갔다.그러나 자신이 돌아온 걸로 무진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려고 무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성연은 예전에 지문을 입력해 놓아서, 보고 없이 바로 최고층까지 갈 수 있었다.요 며칠 동안 무진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이제 곧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설레는 듯했다.성연이 집무실 입구에 도
외삼촌은 다가가서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부축했다.여전히 울고 있던 유채연이 일어나자, 그래함이 어깨를 감싸고 위로했다.“얼른 가거라.” 외삼촌도 울먹이는 목소리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함은 외삼촌을 한 번 본 뒤 유채연이 차에 타도록 부축해 주었다.유채연은 외삼촌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성연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외삼촌이 몸을 돌릴 때 눈물이 땅에 떨어지는 걸 봤지만, 유채연이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이 옆에서 따라서 소리쳤다.“외삼촌, 제가 채연 언니하고 자주 돌아올 게요. 저는 외삼촌 가게 하드가 좋아요.”그제야 서둘러 눈물을 닦은 외삼촌이 몸을 돌려서 말했다. “그래,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마.”차가 천천히 시동을 걸자, 창밖의 장면도 빠르게 바뀌었다.차에 앉아서도 유채연은 여전히 훌쩍거렸다.그래함은 유채연을 꼭 안고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채연아, 외삼촌이 보고싶으면 앞으로 자주 돌아와서 볼 수 있어. 내가 같이 올게.”“정말?” 그래함을 바라보는 유채연의 눈은 마치 토끼의 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물론이지,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다 해 줄게.” 예전에는 그래함도 뭘 해도 혼자였다.하지만 이제 유채연이 있으니 모두 달라졌다.그래함은 틀림없이 유채연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어쩌면 유채연을 위해 정말 국내로 이주할 수도.“그런데 내가 없는데 외삼촌은 어떡하지? 자기 몸을 잘 추스릴까?” ‘예전에는 집안의 모든 일을 내가 책임졌지.’‘지금 내가 떠났으니 외삼촌은 잘 수습할 수 있을지 몰라.’성연은 조수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성연은 일부러 그 자리에 앉아서 유채연과 그래함에게 공간을 내주었다.그 말을 듣고 성연이 웃으며 말했다.“채연 언니, 외삼촌은 마음이 그렇게 섬세한 분이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떠날 때 그래함은 외삼촌에게 체크카드를 남겨 두었다. 비밀번호도 쪽지에 써 두었다. 그 돈이면 외삼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생 편안하게
이런 유채연의 모습을 보고 외삼촌은 또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정말 재수 없게 징징거리고 있지. 꼴이 그게 뭐야? 나는 상관하지 말고 빨리 가. 나한테 돈도 있고 차도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는 말할 것도 없어. 너는 나한테 짐만 될 뿐이야!”유채연은 외삼촌이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다.대부분 외삼촌은 그저 입으로만 모질게 굴었을 뿐이다.사실 자신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애초에 집에 그렇게 많은 일이 생기자 친척들마다 모두 양보하면서 피했다.외삼촌만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모두들 유채연이 흉악한 외삼촌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좋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그러나 그동안 삶의 질이 좀 떨어진 걸 제외하면, 외삼촌은 진심으로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가게에 온 손님 중에 간혹 유채연의 예쁜 모습을 보고 희롱하려고 했지만, 모두 외삼촌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이전의 여러 일들을 생각하자, 유채연은 외삼촌이 자신에게 그렇게 잘해 준 걸 알게 되었다.유채연이 갑자기 털썩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외삼촌, 그동안 거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옆에서 그 모습을 본 그래함도 유채연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외숙부님, 채연이의 부모님이 안 계시니 외숙부님이 채연이 아버님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무릎을 꿇고 맹세하겠습니다.”“저희는 곧 결혼하게 되면 반드시 읍내에서 잔치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채연이를 보고 비웃지 못하게 할 테니, 채연이를 제게 주시면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채연이에게 정말 잘 하겠습니다.”남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엄성이다.그러나 그래함은 유채연을 위해 외삼촌 앞에 무릎을 꿇었다.이 역시 그래함의 성의를 충분히 드러낸 것이다.두 사람의 감정을 외삼촌은 더욱 눈에 새겨 두었다.‘채연이가 그래함과 함께 있으면서 미소도 눈에 많이 많아졌어.’“너희들 빨리 일어나!” 외삼촌은 유채연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었다.입으로는 듣기 싫은 말을 하지면, 개를 길러도 이
이전에 유채연이 입었던 옷은 전부 그래함과 성연이 함께 골라준 옷으로 교체되었다.유채연은 트렁크를 사서 물건을 다 넣었다.곧 떠나야 할 때, 유채연이 외삼촌과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내가 같이 갈게.” 유채연을 도와 트렁크를 닫고서 그래함이 일어났다.“그래도 나 혼자 갈래...” 유채연은 망설였다.“채연아, 이제는 우리 둘이 같이 있잖아. 외삼촌은 우리 관계의 증인이자 네 유일한 가족이야. 내가 널 데리고 갔다가,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함이 유채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요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유채연은 자연스럽게 그래함과 더 가까워졌다.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그래함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만약 외삼촌이 그래함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 마음이 더 괴로울 거야.’“그래, 같이 가자.”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두 사람이 함께 문을 나섰다.나오다가 마침 두 사람을 찾으려던 성연과 마주쳤다.“성연아, 우리 외삼촌 보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유채연은 요 며칠 성연과 계속 붙어 있어서, 성연에 대한 감정도 이미 예전처럼 좋았다.어디를 가든지 성연을 데리고 가야 해서, 그래함이 한바탕 질투하기도 했다.“출발하기 전에 외삼촌과 작별인사 하러 가는 거예요?”성연이 물었다.“그래.”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도 함께 갈게요.” 눈치 빠른 성연은 유채연의 손을 잡지 않고 뒤에서 따라갔다.‘채연 언니하고 그래함 사형이 나란히 다정하게 가는 모습을 보면, 외삼촌이 좀 안심할 수 있겠지.’유채연과 그래함은 앞에서 함께 걸어갔다.유채연의 마음은 여전히 좀 불안했다.‘예전에 외삼촌이 못마땅했을 때는 여기를 탈출하겠다는 생각도 했지.’그러나 정말로 외삼촌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유채연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비록 그다지 내 생각대로 지내지는 못했지만.’‘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내 유일한 피난처였지.’“걱정 마, 외삼촌은 좋은 분이니까 이해해 주실 거야.”
그 말을 듣자, 유채연은 코가 시큰거리면서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꽉 쥐었지만 뜬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지금처럼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은 없었다.유채연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걸 보자, 가볍게 한숨을 쉰 그래함이 휴지로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그렇게 울기를 좋아해? 앞으로 나하고 있으면서 내가 잘 해줄 테니까 이렇게 울면 안 돼. 네가 눈물을 흘리는 게 안타까워.”그래함의 부드러운 말을 들으면서 유채연의 감정도 점차 가라앉았다.감정이 진정되자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맛보았다.아주 달았다. 이 달콤함이 유채연의 마음속에 스며들면서 마음을 천천히 따뜻하게 했다.“고마워, 그래함.” 유채연은 코를 훌쩍이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내가 너에게 고마워해야지. 그렇게 오래 되었는데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잖아. 내가 좀 일찍 너를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함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우리는 지금이 좋아.” 유채연은 그래함의 이런 의기소침한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그래, 이제 네가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는 더 좋아질 거야.”그래함이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성연은 어느새 감정이 없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그러나 계속 뒤를 따라 가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성연은 정말 기뻤다.자신도 그런 분위기가 달콤하게 느껴졌다.예전에는 그저 단순하게 그래함 사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그러나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자, 정말 두터운 그래함의 깊은 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성연은 두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처음에 굳어 있던 두 사람이 점차 풀어질 때까지 이미 정말 잘 지나왔어.’“두 분, 연애하면서 여동생도 잊어버렸지요? 나 너무 배가 고파요. 밥 먹으러 가고 싶어요.” 성연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게에서 별로 먹지 않고 이렇게 오래 걸었더니 벌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그 말을 들은 유채연이 바로 뒤돌아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