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데려다줄게.”곽승재가 말했다.“그냥 같은 길이어서 나도 돌아가는 김에 데려다주려는 것뿐이야.”이어 그는 고은서가 거절할까 봐 이유를 더 보태었다.고은서는 오늘 운전하는 대신 서연정이 보낸 기사의 차에 앉아 왔다.‘아마 오늘 거절한다고 해도 전처럼 차를 문 앞에 대기시키고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곽현수는 이미 떠났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전미자는 불교당으로 들어간 듯했다.고은서는 전미자를 찾아가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밤바람 때문에 추위를 느끼기도 전에 누군가가 아직 따뜻한 체온이 가시지 않은 외투를 그녀의 몸에 걸쳐주었다.익숙한 설송향을 맡은 고은서가 거절하려고 할 때 곽승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의 기사는 이미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기사는 뒷문을 열어주면서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전에 곽 대표님을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고은서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외투를 곽승재한테 강제로 돌려주고 조수석에 앉으려고 했다.그러나 마음이 급한 탓인지 땅에 있는 자갈을 못 보고 그대로 넘어지면서 발을 삐어버렸다.“스읍!”고은서는 갑자기 밀려오는 고통에 신음소리를 내면서 땅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고은서 씨, 괜찮으세요?”기사가 그녀를 관심하려던 찰나 뒤에서 인기척에 따라 바람이 느껴지더니 누군가가 힘있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고은서는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나 괜찮으니까 얼른 내려줘.”그러나 곽승재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녀를 뒷좌석에 앉혔다.“병원으로 가.”그가 기사에게 말했다.“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 집에 가서 약 바르면 돼.”고은서가 사양했다.하지만 곽승재는 무시한 채 그녀의 발을 들어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고은서가 발을 뒤로 빼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그는 그녀의 신발을 벗기고 이내 양말을 발목 아래로 벗겼다.발목은 이미 빨갛게 부어올랐고 살짝 다치기만
고은서가 거절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그녀를 안고 병원 응급실로 갔다.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출중한 외모와 키 때문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또 이쁜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는 바람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던 고은서는 고개를 곽승재 쪽으로 돌리면서 그와 더 가까워졌다. 심지어 그의 힘 있는 심장 박동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그녀는 항상 곽승재가 취했을 때만 가까이 다가가 몰래 그의 품에 안겨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지금 자신이 이까짓 상처를 입었다고 긴장해 하는 곽승재를 보며 무언의 짜증이 밀려왔다.이번 생은 아무리 거절한다고 해도 떨쳐낼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조금만 참아. 곧 도착하니까.”고은서가 불편해한다는 걸 감지한 곽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그의 목소리로부터 약간의 이상함을 느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곽승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미간도 찌푸려져 있었다.고은서는 문뜩 곽승재가 T국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은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아무리 상처가 나았다고 해도 몇 달 동안은 이런 힘이 드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나 내려줘. 그냥 부축만 해주면 돼.”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발을 삐었는데 무리하지마. 너한테서 무언갈 바라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곽승재는 그녀가 여전히 난감해하는 것 같아 보이자 이내 말을 보태었다.“곧 개업식이잖아. 설마 절룩거리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고 싶은 거야?”고은서는 당연하게도 개업식을 완벽하게 끝내고 싶었다.“나중에 후유증을 앓으면 내 탓 아니야.”곽승재는 순간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은서야, 지금 날 걱정해주는 거야?”불빛 아래 곽승재의 검은 머리카락은 윤기가 돌고 있었고 그의 이목구비도 더 뚜렷하게 보였다.마치 사랑의 속삭임이라도 들은 듯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그냥 그 핑
기사는 이미 차 문을 열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오른 후, 곽승재는 아주 자연스럽게 고은서의 발을 들어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의사 선생님께서 높이 놓고 있으면 더 빨리 낫는다고 했잖아.“...” 그럼으로써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그와 마주 앉게 되었다.고개를 들 때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계속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고은서는 아예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병원 주차장에서 나와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옆 가로수 길에서 어떤 수상한 남자 한 명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고은서는 이내 온몸이 굳어버렸다.곽승재도 이내 이상함을 감지했다.그가 두려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큰 코트를 입고 음탕하게 웃으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바로 그때, 남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향해 코트를 촤락 열었는데 여자는 이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버렸다.남자는 만족하는 듯 흥분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쫓아가려고 했다.무언갈 떠올린 듯한 곽승재는 얼굴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차 세워.”그는 고은서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다른 타깃을 찾고 있던 변태 남자는 키 크고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그리고 그는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의 발에 차였다.“으악!”변태 남자는 뒤로 넘어지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를 냈다.가로수길에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몇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 그 비명소리를 들었다.곽승재의 기사도 경각심이 높고 호신술을 배웠던 사람인지라 이내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상황을 처리하러 갔다.가로수길에는 신고하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그리고 곽승재를 도와 변태 남자를 제압한 사람들로 가득찼다.반면 고은서는 차에 가만히 앉아있었다.열여덟 살 되던 해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고준석과 함께 연회에 참가한 그녀는 밥
곽승재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그는 절망 속에 빠져있는 고은서를 제때에 구했다.열여덟 살인 고은서는 그를 영웅과 기사로 여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은서야.”허스키한 남자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다시 끌어왔다.“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곽승재가 그녀를 위안했다.“당시에 설 전날까지 경찰서에 갇혀있었는데 정신을 못 차릴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이번에 들어가면 더는 쉽게 나오지 못할 거야.”고은서는 기억 속의 그와 똑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왔다.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는 걸 봐서는 곽승재도 그해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곽승재, 그날 혹시 크리스탈 머리핀 하나 줍지 않았어?”고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그녀는 그제서야 당시 자신이 반달 모양의 크리스탈 머리핀을 끼고 연회에 참가했다는 걸 떠올렸다.그리고 연회에서 돌아온 후부터 그 머리핀을 찾을 수 없었다.그 변태 남자를 피하면서 떨어뜨린 듯했지만 너무 겁먹은 탓에 그런 자세한 것까지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곽승재는 크리스탈 머리핀이란 말을 듣자마자 약간 어색한 기색을 드러냈다.“돌려주려고 했는데 그땐 이미 네가 할아버지랑 떠난 후여서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까먹어버렸어.”‘본가에 서랍에 있던 그 머리핀이 진짜 곽승재가 주은 내 머리핀이었던 거야.’고은서는 순간 코끝이 찡해나면서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사랑과 원망의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랐다.“몇 달 전에 경찰서에서 성아연한테 다른 여자를 좋아한 적도 없고 다른 여자랑 결혼을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하면서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결혼하고서 나한테 그토록 차갑게 굴었던 거야?”눈시울이 빨개진 고은서가 곽승재를 향해 물었다.곽승재는 순간 멈칫하더니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녀는 전과 달리 아주 연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얼굴에는 아주 진실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눈동자 속에는 이성을 잃을
[그날 연회에서 가여운 척하면서 꽤 고생했을 텐데 그래도 곽승재 눈에 들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진짜 잘생겼다. 기품도 말이 아니고. 방금 학교에서도 엄청 많은 여자애들이 곽승재를 몰래 쳐다봤다니까. 확실히 네가 그럴 만도 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훌륭한 남자를 어떻게 얻겠어.]곽승재는 더는 듣지 않고 곧장 도서관 밖으로 나와버렸다.“당시 너한테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너무 나서 머리핀을 서랍 안에 던져둔 이후로 더는 그 일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차 안의 불빛이 어두운 탓에 곽승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가 지금쯤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사실 약간 놀랐다. 그녀는 곽승재가 자신을 찾으러 온 줄도 몰랐고 다른 사람한테서 그런 소식을 전해 들은 적도 없었다.그녀에 관한 일을 꿰뚫고 있으면서 망치려 하는 사람은 베프라고 여겼던 성아연 외에는 더는 없었다.고은서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나를 거짓말하면서 누군갈 해치려 하는 악녀라고 생각한 게 다 그 일 때문이었던 거구나. 그리고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계속 집착하니까 날 더 반감했던 거고.’“은서야, 어떻든 다 내 잘못이야. 너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의 말을 함부로 믿었던 내 탓이야.”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미안함이 느껴졌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열여덟 살 때의 기억 때문에 북받쳐 오른 감정이 점차 사그라들면서 그녀의 마음도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전생에 팔 년 동안 곽승재가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그토록 증오하는지도 모른 채 집착했었는데 지금 그 답을 알고 난 후로 몹시 흥분해 할 것 같았지만 도리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녀가 몇 년 동안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부으면서 애써 그의 사랑을 추구하고 또 이년이라는 결혼생활을 함께 해왔지만 끝내는 그의 편견을 깨부수지 못했다.“은서야, 다 내 일방적인 생각 때문에 너한테 그 많은 상처를 입혔던 거야.”곽승재가
맞은편 도로의 차량 불빛이 곽승재의 얼굴을 비추면서 그의 쓸쓸한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차가 지나가면서 고은서도 따라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과거의 일은 더는 원망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어. 하지만 나에겐 이미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고 너랑 다시 시작할 생각도 없어. 난 새로운 인생을 살 거야.”가로수 길은 어느새 다시 조용한 모습으로 돌아갔고 고은서의 담담한 목소리가 차 안에서 울려 퍼졌다.“여시은 씨한테서 네 근황에 관해 들었는데 정략결혼 하기에 맞춤한 상대인 것 같아. 몇 년 동안 나한테 편견을 가지고 살았는데 그만큼 내가 중요하지도 않다는 걸 의미하겠지. 아무튼 이젠 이혼도 했거니와 사랑을 추구하겠거든 상대를 여시은 씨로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아. 여재훈 씨도 널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너만 원한다면 행복한 결혼생활과 크나큰 재부를 동시에 얻을 수 있어.”겉으론 부드럽게 들리는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곽승재의 마음에 꽂혔다.곽승재는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고은서와 계속 말을 이어가 보았자 그녀의 기분만 더 망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조금 이따 또다시 얼음찜질을 해야 하니까 내가 데려다줄게.”...반 시간 후, 곽승재는 고은서를 라이트문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박지연은 육현석과 데이트 하러 나간 후로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또 고은서는 발이 삐인 탓에 혼자 걸을 수가 없었기에 곽승재가 그녀를 집까지 부축해주기로 했다.원래는 직접 안아서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고은서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저 부축만 해주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후 고은서가 지문을 누르면서 문을 열고 곽승재는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그리고 이내 냉장에서 얼음팩을 가져와 고은서를 위해 얼음찜질을 해주었다.고은서는 자신의 집 구조를 아주 익숙히 알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약간 의아해했다.“난 방금 부엌이 어딘지 알려준 적이 없는
고은서는 소파에 앉은 채 다리를 높게 올려놓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일인 소파에 앉은 곽승재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폰을 들고 통화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사업보고를 듣는 듯했다.분위기는 아주 기괴했는데 위화감이 느껴지는가 하면 또 말할 수 없는 조화로움도 느껴졌다.인기척을 들은 곽승재는 전화를 끊고 박지연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지연 씨.”“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은서가 발을 삐어서 집까지 부축해준 거예요.”곽승재가 설명했다.박지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고은서는 확실히 발에 압력 붕대를 감고 있었다.“왜 나한테 안 알려줬어? 알려줬으면 더 일찍 돌아왔을 텐데.”그녀가 고은서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괜찮아. 별로 큰일도 아닌데.”고은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은서야, 지연 씨도 돌아왔는데 나도 이만 가볼게.”곽승재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박지연을 보며 말했다.“은서 잘 부탁해요.”말하는 속도, 표정, 말투 모든 게 다 알맞춤했는데 너무 열정적이지도 않고 너무 서먹하지도 않았다.박지연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곽승재는 왜 여기로 들인 거야? 게다가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어?”T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고은서는 곽승재를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은 상태였다. 그에 관한 얘기를 꺼낸 적도 없었고 들었다고 해도 모른 척하면서 그를 낯선 사람 취급을 했었다.심지어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까지 하고 있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태연한 모습으로 쫓겨나지도 않고 집에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곽씨 가문 본가에서 발목을 삐어서 날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또 집까지 부축해줬어. 그리고 혹시나 더 다치기라도 할까봐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해서 여기에 있는 거야.”“정말이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말을 의심했다.“그렇다니까.”박지연은 고은서를 아래 우로 훑어보았다,‘표정은 정상인데 그래도 어딘가 이상한 것
고은서는 협조적으로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빅뉴스인데?”“한 번 맞춰 봐.”박지연이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했다.“육현석이 너한테 프러포즈했어?”고은서가 물었다.“커헙!”박지연은 순간 자신의 침에 사레가 들렸다.“왜 상상력이 갑자기 그쪽으로 넘어가는 거야?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웬 프러포즈야.”“다른 빅뉴스가 떠오르지 않는 걸 어떡해.”박지연은 더는 뜸을 들이지 않고 고은서에게 아침에 육현석한테서 전해 들은 소식을 알려줬다.다름 아닌 백유미가 요 며칠 고열에 시달려 검사해 본 결과 성병에 걸렸다는 것이다.“그 소식을 전해 들은 범가온이 백유미를 찾아가 한바탕 비아냥거렸는데 끝까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없애는 걸 반대 했다지 뭐야. 백승엽이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대.”‘약간 의외이긴 하지만 너무 놀라운 일은 아니네. T국에서 만난 그 남자들 처음부터 별로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성병을 앓고 있는 것도 너무 희귀한 일은 아니야.’“그런데 이 상황에 태아는 건강하대?”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일부 성병은 사 개월 안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면 태아가 감염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고 그녀에게 알려줬다.그리고 범가온이 아들을 잃었는데 손주까지 잃을 수 없다면서 아이가 배 속에서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서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고집부리고 있다면서 상황 설명을 보태었다.“악행에는 악과가 따른다고 다 백유미 업보야.”박지연이 통쾌하다는 듯이 말했다.고은서도 이 모든 게 백유미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다.‘만약 그날 내가 원지훈을 설복하는 데 실패했다면 지금쯤 성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내가 되겠지.’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발을 삐인 탓에 이틀 동안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급히 처리해야 할 일은 송민아가 직접 들고 라이트문으로 찾아오곤 했다.이미숙도 이틀 동안 라이트문에 머물면서 집안일을 도와주며 어떻게 달래도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다행히
송민아에게 회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고은서는 책상에 앉아 진형서가 준 자료를 펼쳤다.대충 훑어보니 그 안에는 여시은의 기본 정보가 담겨 있었다.여시은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이후 그녀의 아버지인 여재훈이 그녀를 데리고 귀국해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여시은은 오랜 시간 강성에서 생활했으며 가끔 여재훈과 Y 국에 머물기도 했다.생활 반경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고 친구나 동료들 외에도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한 여성이 자주 찾아와 돌봐주곤 했다.여시은과 곽승재가 처음 만난 건 한 사교회 자리였으나 이후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재훈과 곽현수가 Y 국에서 사업적 거래가 있어 여시은은 이미 오래전부터 곽현수를 알고 있었다.자료에서 보면 여시은은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다.대학 시절 가볍게 만난 두 사람이 있었지만 성격 차이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헤어졌다.‘그렇다면 여시은이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핑계였던 걸까? 그녀가 곽승재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곽현수 때문일까?’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송민아가 와서 재촉했고 그녀는 자료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궜다....저녁 무렵 고은서는 업무를 마치고 박지연을 픽업해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오늘은 세 여자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명운 주류가 상장된 이후 도아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비워 나온 만큼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세 사람은 함께 여성 전용 요가 센터로 향했다.센터에서는 요가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거나 꽃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었다.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명상 요가를 한 세션 진행했다.몸을 충분히 이완시킨 후 개방형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시려던 차에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곽승재와 최근 그와 열애설이 난 인플루언서였다.곽승재는 검은색 캐주얼 셔츠를 입고 있었고 외투는 한쪽 팔에 무심하게 걸쳐 있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덕분에
진형서가 말했다.“민 대표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전 여시은이 해성에 오기 전의 상황을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현재 대표님은 해외에 계시고 여시은이 누군지 기억도 못 하고 계십니다. 해성의 일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이 조사 결과를 전해드리지 않았습니다. 고 대표님, 비록 저희 대표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이 자료는 고 대표님을 위해 조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 서류를 고대표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고은서는 기억을 되살렸다.두 사람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민시후는 정말로 여시은을 계속 조사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다음날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고은서는 민시후가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최근에 다른 머리 아픈 일들로 인해 여시은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그녀는 민시후가 조사를 시작하고 진형서가 그 자료를 그녀에게 가져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대표님, 이렇게 오래 끌어서 죄송합니다.”진형서가 사과의 말을 전했다.“제 처지도 좀 곤란한 상황이라서...”고은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형서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진형서는 파일을 그녀에게 건네고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떴다.사무실로 올라가려던 고은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민아를 만났다.“너 출장 가지 않았어? 오늘 돌아온 거야?”송민아는 대답 대신 고은서의 팔을 잡고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닫은 송민아는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야? 곽 대표님이 인플루언서와 밤을 보내고 이제는 결혼하려고 한다던데?”곽승재와 인플루언서의 스캔들이 알려진 후 그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고 GS 그룹에서도 소문을 막지 않았다.네티즌들은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에게 반해 연인 관계로 발전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최근 인터넷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이미 여러 날 된 소식인데 이제야 물어보는 거야?”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까지 나왔겠어
“은서야, 지금 곽승재 편을 든 거야?”박지연은 뒤늦게 반응하며 물었다.“육현석 말로는 엊그제 같이 곽승재를 만나러 갔었다며? 걔는 네가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하더라. 아니다.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와 호텔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니 미련은 없겠다.”박지연은 바로 스스로 부정했다.박지연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볼일 봐. 퇴근 후에 다시 얘기하자.”박지연은 알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고은서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지연아.”“왜?”고은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기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했다.“아니야. 그냥 밖에 나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이제 시간 나면 우리 같이 놀러 가자.”“그게 다야? 깜짝 놀랐잖아.”박지연이 투덜댔다.“됐어. 가서 일해.”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동네 약국에서 긴급 피임약을 주문했다.비록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전을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라고 해도 놓치는 것보다는 낫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한 번으로 충분해.’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른 약품들도 몇 가지 골랐다.약을 고르던 중 이미숙이 노크했다.“사모님, 배 안 고프세요? 뭐 좀 만들어 드릴까요?”고은서는 승낙했다.세수하고 간단히 식사를 마치니 고국성에게서 연락이 왔다.“오미나가 수술비와 위자료를 요구하며 돈만 주면 수술을 받을 거라고 하더구나.”‘그래도 약속은 지키네.’“은서야, 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났다던데 사실이야?”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를 좋아하던 고국성은 곽승재의 상황을 알고 걱정했다.고은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삼촌, 사실이든 아니든 저랑 다시는 곽승재를 찾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 어기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예요.”고국성은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고국성은 고은서가 능력도 갖추고 오미나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해결했으니 이제 그녀의
곽승재의 손아귀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고 그의 표정도 매우 차가웠다.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인지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에는 뚜렷한 핏발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잠시 멍해졌다.어젯밤의 희미한 장면들 속에서 그녀의 눈앞을 스쳤던 것도 이렇게 광적이고 핏빛이 감도는 눈이었던 것 같다“왜 말이 없어?”곽승재는 맹수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고은서는 턱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알고 싶은 건 다 알았잖아. 내가 뭘 더 말해야 해?”“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저녁을 먹자고 한 게 날 함정에 빠뜨리고 여자를 침대에 보내려고 그랬던 거야?”곽승재는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턱 통증은 완화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맞아.”“그래서 내가 다른 여자랑 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고은서는 마음을 다잡고 냉소를 지었다.“아니면?”그녀의 대답에 곽승재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그의 눈가에는 실망으로 가득 찼다.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쓸쓸함이 차올랐다.곽현수에게 이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녀는 이미 곽승재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었다.만약 곽승재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비슷한 일을 꾸몄다면 그녀 역시 충격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을 것이었다.“곽승재, 여러 번 말했잖아. 난 이미 너를 내려놓았다고. 이쯤이면 그만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다시 한번 기름을 부었다.‘끝내려면 완전히 끝내야 해. 이러면 곽현수도 더 안심하겠지.’곽승재는 싸늘하게 웃었고 눈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고은서까지 태워버릴 듯했다.“알았어. 고은서, 후회하지 마.”말을 마친 곽승재는 그녀를 내팽개친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떴다.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제자리에 멈춰선 고은서는 머릿속도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은서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혹시 누군가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직원은 그녀의 객실 문은 밤새 열리지 않았다고 확답했다.‘곽승재는 취한 상태에서 약까지 먹었으니 이 방에 올 리가 없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물에다 약을 너무 많이 타서 약효가 강해서 그런 꿈을 꾼 건가? 목에 남은 자국은 병 자국에 눌린 흔적일까? 사지의 뻐근함은 단순한 숙취의 후유증?’충분히 말이 되는 설명이긴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기분이 찝찝했다.고은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때도 몸의 감각은 확실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정말 꿈이라고? 아니면... 그 남자는 곽승재였을까?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거지? 갈 때는 어떻게 나가고? 줄곧 날 잡고 싶다고 말했으니 우리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면 계속 남아있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머리가 복잡해진 고은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때 갑자기 방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순간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떠올린 고은서는 재빨리 옷을 걸쳐 입고 문 쪽으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아니나 다를까 복도에는 수많은 연예부 기자가 곽승재의 객실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그들은 사진을 찍고 질문을 퍼부으며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주민기가 경호원들과 함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끈질긴 기자들은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그 혼란 속에서 어두운 표정을 한 곽승재가 고은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그가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곽승재는 이미 어젯밤 일이 그녀의 계획이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그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고은서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 곽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원하시는 대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세요.]답장은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어떻게 곽승재를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고은서는 지금까지 극도의 긴장 속에 있었기에 자신의 상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긴장이 풀리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입안이 바짝 마르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감각이 몰려왔다.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고은서는 휘청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가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낸 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자자. 자면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모든 폭풍은 내일 다시 맞서면 돼.’자신을 그렇게 세뇌하듯 다독인 고은서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하지만 꿈속에서도 그녀는 더위에 시달렸다.그 뜨거움은 단순한 체온 상승이 아닌 몸속 혈액에서부터 느껴지는 타오르는 듯한 열기였다.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로 설정하고 심지어 차가운 물병을 목에 대어 보아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피부의 모든 세포가 시원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그렇게 혼란스러운 열기 속에서 고은서는 갑자기 무언가 뜨겁고 묵직한 존재가 자신의 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무게감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가왔고 순간적으로 그녀의 호흡을 앗아갔다.남자의 낮고 거친 숨소리가 술 냄새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그리고 익숙한 남성의 향기가 그녀를 감쌌다.그 향기는 고은서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호흡이 교차하고 서로의 몸이 닿자 고은서는 더 뜨거워졌고 마음속에서부터 강렬한 욕망이 치솟았다.그녀는 지금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별할 여유도 정력도 없었다.약과 술의 작용하에 고은서는 몸이 반응하는 대로 손을 뻗었다.객실 안 에어컨 바람이 천천히 방안을 맴돌았다.낮은 온도로 설정된 냉기 속에서도 방 안의 온도는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은은한 조명이 커다란 침대 위에서 단단히 엉켜 있는 두 개의 실루엣을 비췄다.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열기에 가득 찬 입맞춤을 그녀의 입술에서부터 목으로 옮겨갔다.방 안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찼다.그 향기는 마치 봄의 미풍에 섞인 향처럼 감각을 부드럽게 자극했다.밤은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곽승재를 한 번 힐끔 바라본 뒤 재빨리 가방에서 숨겨둔 약을 꺼내어 물에 녹였다.긴장감 속에서 약은 빠르게 물속에 녹아들었고 고은서는 조심스럽게 그 물을 침대 옆으로 가져갔다.큰 키를 가진 곽승재가 침대에 평평히 누워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굳게 감겨 있었고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얼굴은 방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고은서가 조심스럽게 곽승재의 뺨을 건드리자 곽승재는 비몽사몽 눈을 뜨며 붉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은서야...”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 울림은 그대로 고은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고은서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술 많이 마셔서 목마르지? 물 좀 마셔.”곽승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은서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고은서는 술에 취한 곽승재가 얼마나 고집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괜히 반박하는 것보다는 빨리 물을 마시게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이었다.“안 마실 거야?”“마실 거야.”곽승재는 요구를 덧붙였다.“근데 네가 직접 먹여 줘.”고은서는 긴장하며 최대한 빨리 물을 마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반쯤 일으켜 세운 뒤 조심스레 컵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하지만 곽승재는 한 모금 마시더니 뜨겁다며 굳이 고은서도 마셔보라고 했다.술에 취한 채 그녀가 안 마시면 자신도 안 마시겠다는 완강한 태도에 고은서는 순간 물을 그대로 그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녀는 꾹 참고 단순히 상황을 빨리 정리하기 위해서 대충 물을 두 모금 마신 뒤 컵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이제 됐지?”곽승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손을 감싸며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그리고 그는 이전의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커다란 늑대처럼 그녀의 팔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은서야, 나 등 아파. 약 좀 발라줘.”고은서는 빨리 방을 나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계
고국성은 이내 다가가 그와 악수하면서 인사했고 단은숙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유독 고은혜만은 입을 꾹 다문 채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곽승재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눈길을 고은서 쪽으로 돌렸다.그는 무언갈 억누르고 있는 듯한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승재야, 네 자리 남겨뒀으니까 얼른 앉아.”고국성은 고은서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여서 앉을 수 있는 곳이 남아돌았는데 고국성은 하 곽승재를 고은서 옆에 앉히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속셈이 너무 선명했다.아무튼 고은서가 먼저 밥 먹자고 말을 꺼낸 거였기에 그가 어디에 앉든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곽승재는 덤덤한 표정을 한 채 고은서 옆에 앉았다.너무 가까운 탓인지 그의 특유한 설송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이어 차를 따라주는 웨이터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고은서는 이 기회에 찻잔을 대신 들어주면서 슬쩍 옆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곽승재도 손을 뻗으면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그의 체온이 피부결을 통해 뜨겁게 느껴지면서 고은서는 손을 확 거두어들였다.반면 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찻잔을 웨이터에게 건네주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고은혜는 두 사람이 행여나 어색해할까 봐 다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음식이 다 오른 후 고국성은 자신이 소장해 둔 진귀한 술을 가져오라고 웨이터를 시켰다.고은서는 레스토랑에 오기 전부터 고국성한테 밥만 먹으면 어색할 수도 있으니 술이라도 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암시했었다.아니나 다를까 고국성은 별 의심 없이 그녀의 말대로 행동했다.“승재야, 평소에 너무 바빠서 별로 모일 시간도 없었는데 이 좋은 기회에 우리 실컷 마셔보자고.”고국성은 웨이터를 다시 내보내고 직접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기쁜 날인데 다 같이 마셔야죠.”곽승재가 제안했다.고국성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그래. 가족끼리 떠들썩하게 재밌게 보내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고은서는 고국성 집에 들렀다.고국성은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고은혜는 상을 찌푸리고 폰을 놀고 있었다.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싸했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그녀 옆으로 다급히 걸어오며 말했다.“언니, 엄마가 방문을 잠그고 계속 나오지 않으면서 아빠랑 이혼한다고 변호사까지 찾았어.”기자 회견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성이 오미나와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시에 단은숙은 오미나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아이가 생겼다는 건 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맺었다는 걸 의미했고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고은혜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고국성 앞으로 다가가 일은 자신이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오미나가 아이를 없애겠대?”고국성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동의할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정말이야? 엄마한테 이 소식을 알려줘야지.”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그러나 고국성은 낙관적인 고은혜와 달리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동의하지 않았단 얘기야?”고은서는 고국성 옆에 앉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삼촌, MQ를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MQ를 더 크게 이끌고 나가려거든 다른 사람한테 너무 의지해서도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이후부터 곽승재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그만 하세요. 이 또한 제가 이번 일을 처리해주는 대신 삼촌이 들어줘야 할 조건이기도 해요.”고은서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고국성은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곽승재를 찾아간 건 어떻게 안 거지? 분명히 유승준도 모르게 몰래 찾아갔는데.’그는 결연한 태도의 고은서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계에서 곽승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게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