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는 이미 차 문을 열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오른 후, 곽승재는 아주 자연스럽게 고은서의 발을 들어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의사 선생님께서 높이 놓고 있으면 더 빨리 낫는다고 했잖아.“...” 그럼으로써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그와 마주 앉게 되었다.고개를 들 때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계속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고은서는 아예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병원 주차장에서 나와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옆 가로수 길에서 어떤 수상한 남자 한 명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고은서는 이내 온몸이 굳어버렸다.곽승재도 이내 이상함을 감지했다.그가 두려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큰 코트를 입고 음탕하게 웃으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바로 그때, 남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향해 코트를 촤락 열었는데 여자는 이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버렸다.남자는 만족하는 듯 흥분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쫓아가려고 했다.무언갈 떠올린 듯한 곽승재는 얼굴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차 세워.”그는 고은서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다른 타깃을 찾고 있던 변태 남자는 키 크고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그리고 그는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의 발에 차였다.“으악!”변태 남자는 뒤로 넘어지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를 냈다.가로수길에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몇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 그 비명소리를 들었다.곽승재의 기사도 경각심이 높고 호신술을 배웠던 사람인지라 이내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상황을 처리하러 갔다.가로수길에는 신고하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그리고 곽승재를 도와 변태 남자를 제압한 사람들로 가득찼다.반면 고은서는 차에 가만히 앉아있었다.열여덟 살 되던 해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고준석과 함께 연회에 참가한 그녀는 밥
곽승재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그는 절망 속에 빠져있는 고은서를 제때에 구했다.열여덟 살인 고은서는 그를 영웅과 기사로 여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은서야.”허스키한 남자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다시 끌어왔다.“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곽승재가 그녀를 위안했다.“당시에 설 전날까지 경찰서에 갇혀있었는데 정신을 못 차릴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이번에 들어가면 더는 쉽게 나오지 못할 거야.”고은서는 기억 속의 그와 똑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왔다.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는 걸 봐서는 곽승재도 그해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곽승재, 그날 혹시 크리스탈 머리핀 하나 줍지 않았어?”고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그녀는 그제서야 당시 자신이 반달 모양의 크리스탈 머리핀을 끼고 연회에 참가했다는 걸 떠올렸다.그리고 연회에서 돌아온 후부터 그 머리핀을 찾을 수 없었다.그 변태 남자를 피하면서 떨어뜨린 듯했지만 너무 겁먹은 탓에 그런 자세한 것까지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곽승재는 크리스탈 머리핀이란 말을 듣자마자 약간 어색한 기색을 드러냈다.“돌려주려고 했는데 그땐 이미 네가 할아버지랑 떠난 후여서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까먹어버렸어.”‘본가에 서랍에 있던 그 머리핀이 진짜 곽승재가 주은 내 머리핀이었던 거야.’고은서는 순간 코끝이 찡해나면서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사랑과 원망의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랐다.“몇 달 전에 경찰서에서 성아연한테 다른 여자를 좋아한 적도 없고 다른 여자랑 결혼을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하면서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결혼하고서 나한테 그토록 차갑게 굴었던 거야?”눈시울이 빨개진 고은서가 곽승재를 향해 물었다.곽승재는 순간 멈칫하더니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녀는 전과 달리 아주 연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얼굴에는 아주 진실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눈동자 속에는 이성을 잃을
[그날 연회에서 가여운 척하면서 꽤 고생했을 텐데 그래도 곽승재 눈에 들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진짜 잘생겼다. 기품도 말이 아니고. 방금 학교에서도 엄청 많은 여자애들이 곽승재를 몰래 쳐다봤다니까. 확실히 네가 그럴 만도 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훌륭한 남자를 어떻게 얻겠어.]곽승재는 더는 듣지 않고 곧장 도서관 밖으로 나와버렸다.“당시 너한테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너무 나서 머리핀을 서랍 안에 던져둔 이후로 더는 그 일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차 안의 불빛이 어두운 탓에 곽승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가 지금쯤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사실 약간 놀랐다. 그녀는 곽승재가 자신을 찾으러 온 줄도 몰랐고 다른 사람한테서 그런 소식을 전해 들은 적도 없었다.그녀에 관한 일을 꿰뚫고 있으면서 망치려 하는 사람은 베프라고 여겼던 성아연 외에는 더는 없었다.고은서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나를 거짓말하면서 누군갈 해치려 하는 악녀라고 생각한 게 다 그 일 때문이었던 거구나. 그리고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계속 집착하니까 날 더 반감했던 거고.’“은서야, 어떻든 다 내 잘못이야. 너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의 말을 함부로 믿었던 내 탓이야.”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미안함이 느껴졌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열여덟 살 때의 기억 때문에 북받쳐 오른 감정이 점차 사그라들면서 그녀의 마음도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전생에 팔 년 동안 곽승재가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그토록 증오하는지도 모른 채 집착했었는데 지금 그 답을 알고 난 후로 몹시 흥분해 할 것 같았지만 도리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녀가 몇 년 동안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부으면서 애써 그의 사랑을 추구하고 또 이년이라는 결혼생활을 함께 해왔지만 끝내는 그의 편견을 깨부수지 못했다.“은서야, 다 내 일방적인 생각 때문에 너한테 그 많은 상처를 입혔던 거야.”곽승재가
맞은편 도로의 차량 불빛이 곽승재의 얼굴을 비추면서 그의 쓸쓸한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차가 지나가면서 고은서도 따라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과거의 일은 더는 원망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어. 하지만 나에겐 이미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고 너랑 다시 시작할 생각도 없어. 난 새로운 인생을 살 거야.”가로수 길은 어느새 다시 조용한 모습으로 돌아갔고 고은서의 담담한 목소리가 차 안에서 울려 퍼졌다.“여시은 씨한테서 네 근황에 관해 들었는데 정략결혼 하기에 맞춤한 상대인 것 같아. 몇 년 동안 나한테 편견을 가지고 살았는데 그만큼 내가 중요하지도 않다는 걸 의미하겠지. 아무튼 이젠 이혼도 했거니와 사랑을 추구하겠거든 상대를 여시은 씨로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아. 여재훈 씨도 널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너만 원한다면 행복한 결혼생활과 크나큰 재부를 동시에 얻을 수 있어.”겉으론 부드럽게 들리는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곽승재의 마음에 꽂혔다.곽승재는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고은서와 계속 말을 이어가 보았자 그녀의 기분만 더 망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조금 이따 또다시 얼음찜질을 해야 하니까 내가 데려다줄게.”...반 시간 후, 곽승재는 고은서를 라이트문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박지연은 육현석과 데이트 하러 나간 후로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또 고은서는 발이 삐인 탓에 혼자 걸을 수가 없었기에 곽승재가 그녀를 집까지 부축해주기로 했다.원래는 직접 안아서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고은서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저 부축만 해주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후 고은서가 지문을 누르면서 문을 열고 곽승재는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그리고 이내 냉장에서 얼음팩을 가져와 고은서를 위해 얼음찜질을 해주었다.고은서는 자신의 집 구조를 아주 익숙히 알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약간 의아해했다.“난 방금 부엌이 어딘지 알려준 적이 없는
고은서는 소파에 앉은 채 다리를 높게 올려놓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일인 소파에 앉은 곽승재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폰을 들고 통화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사업보고를 듣는 듯했다.분위기는 아주 기괴했는데 위화감이 느껴지는가 하면 또 말할 수 없는 조화로움도 느껴졌다.인기척을 들은 곽승재는 전화를 끊고 박지연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지연 씨.”“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은서가 발을 삐어서 집까지 부축해준 거예요.”곽승재가 설명했다.박지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고은서는 확실히 발에 압력 붕대를 감고 있었다.“왜 나한테 안 알려줬어? 알려줬으면 더 일찍 돌아왔을 텐데.”그녀가 고은서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괜찮아. 별로 큰일도 아닌데.”고은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은서야, 지연 씨도 돌아왔는데 나도 이만 가볼게.”곽승재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박지연을 보며 말했다.“은서 잘 부탁해요.”말하는 속도, 표정, 말투 모든 게 다 알맞춤했는데 너무 열정적이지도 않고 너무 서먹하지도 않았다.박지연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곽승재는 왜 여기로 들인 거야? 게다가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어?”T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고은서는 곽승재를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은 상태였다. 그에 관한 얘기를 꺼낸 적도 없었고 들었다고 해도 모른 척하면서 그를 낯선 사람 취급을 했었다.심지어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까지 하고 있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태연한 모습으로 쫓겨나지도 않고 집에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곽씨 가문 본가에서 발목을 삐어서 날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또 집까지 부축해줬어. 그리고 혹시나 더 다치기라도 할까봐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해서 여기에 있는 거야.”“정말이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말을 의심했다.“그렇다니까.”박지연은 고은서를 아래 우로 훑어보았다,‘표정은 정상인데 그래도 어딘가 이상한 것
고은서는 협조적으로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빅뉴스인데?”“한 번 맞춰 봐.”박지연이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했다.“육현석이 너한테 프러포즈했어?”고은서가 물었다.“커헙!”박지연은 순간 자신의 침에 사레가 들렸다.“왜 상상력이 갑자기 그쪽으로 넘어가는 거야?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웬 프러포즈야.”“다른 빅뉴스가 떠오르지 않는 걸 어떡해.”박지연은 더는 뜸을 들이지 않고 고은서에게 아침에 육현석한테서 전해 들은 소식을 알려줬다.다름 아닌 백유미가 요 며칠 고열에 시달려 검사해 본 결과 성병에 걸렸다는 것이다.“그 소식을 전해 들은 범가온이 백유미를 찾아가 한바탕 비아냥거렸는데 끝까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없애는 걸 반대 했다지 뭐야. 백승엽이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대.”‘약간 의외이긴 하지만 너무 놀라운 일은 아니네. T국에서 만난 그 남자들 처음부터 별로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성병을 앓고 있는 것도 너무 희귀한 일은 아니야.’“그런데 이 상황에 태아는 건강하대?”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일부 성병은 사 개월 안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면 태아가 감염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고 그녀에게 알려줬다.그리고 범가온이 아들을 잃었는데 손주까지 잃을 수 없다면서 아이가 배 속에서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서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고집부리고 있다면서 상황 설명을 보태었다.“악행에는 악과가 따른다고 다 백유미 업보야.”박지연이 통쾌하다는 듯이 말했다.고은서도 이 모든 게 백유미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다.‘만약 그날 내가 원지훈을 설복하는 데 실패했다면 지금쯤 성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내가 되겠지.’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발을 삐인 탓에 이틀 동안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급히 처리해야 할 일은 송민아가 직접 들고 라이트문으로 찾아오곤 했다.이미숙도 이틀 동안 라이트문에 머물면서 집안일을 도와주며 어떻게 달래도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다행히
“은서야, 전에 동물원도 거절했잖아. 이번만은 네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염주 팔찌를 흔들어 보이면서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나한테 선물도 줬잖아. 그저 주고받는 거라고 생각해.”‘염주 팔찌랑 기업이 어떻게 같아.’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이 빨리 자리 잡기를 원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백씨 집안 기업이 아무리 파산했다고 해도 여전히 아주 성숙된 기업이었는데 인수 절차를 마치기만 하면 많은 업무를 또다른 준비 없이 계속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내 고백도 거절했잖아. 그러니까 이 계약서만은 받아줘. 나도 쾌락을 한 번쯤 느껴 보자.”민시후가 말했다.“그럼 넌 주주로 들어와.”이는 고은서가 고민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아니. 온전히 다 네 거야.”민시후가 단호하게 말했다.고은서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감동 받았다.그녀는 애써 여유로운 척하면서 답했다.“민시후, 후회하기 없기야. 나중에 내가 돈을 벌어도 넌 옆에서 보고 있기만 해야 해.”민시후는 오랜만에 껄렁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내 안광도 좋다는 걸 의미하겠지.”약간 애매하게 와닿는 말이긴 했지만 고은서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아줬다.“민 도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노력할게요.”민시후는 고은서의 발을 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하다가 꾹 참고 소파에 앉은 채 물었다.“아직도 아파? 약은 발랐어?”고은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했다.“그냥 살짝 삐인 것뿐이야. 안 아파. 의사가 며칠 더 쉬는 게 좋다고 해서 나도 이 기회에 집에서 농땡이 좀 부려 보려고.”민시후는 고은서의 장난을 받아주는 대신 그녀의 발을 빤히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일 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고되게 느껴질 줄은 생각도 못 했어.”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마음이 아파왔다.“아버지랑 형이 아직도 계속 널 찾아?”민시후는 쓸쓸함을 애써
민시후가 망설임의 알아차린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너무 급한 일이 아니면 여기서 밥 먹고 가.”처리할 일이 있는 건 맞았으나 너무 오랫동안 고은서를 못 본 탓에 이렇게 떠나기는 아쉬웠다.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고은서가 말을 보태었다.“전에 병원에서 요리를 잘한다고 큰소리쳤잖아. 오늘 요리 실력 좀 보여줘야지 않겠어?”고은서의 도발에 민시후는 남아야겠다는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그는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신이 거짓말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려 했다.그러나 엄연히 따지면 손님이었기에 이미숙은 모든 일을 민시후에게 떠넘기는 대신 그가 제일 잘하는 음식만 손보게 하고 나머지 음식은 자신이 도맡아 했다.얼마 후, 민시후는 자신이 만든 물고기 요리를 들고 나왔다.송민아는 눈치 있게 이미숙을 도우러 부엌으로 들어갔다.노랗게 구워진 물고기 위에는 견과류가 뿌려있었고 옆에는 녹색 잎으로 플레이팅까지 되어 있었다.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의 비주얼이었다.민시후의 기대하는 눈빛 아래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한 입 먹어보았다.오렌지 껍질과 고춧가루 향이 물고기 잡냄새를 잡아준 덕분에 물고기의 특유한 고소한 맛이 미각을 자극했는데 너무 맛있었다.고은서도 전에 곽승재의 관심을 받기 위해 요리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민시후의 요리 솜씨와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며 자랑스럽다는 듯 턱을 치켜올렸다.“내가 말했지. 큰소리친 게 아니라고.”고은서가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었다.“물론이죠. 너무 맛있어요.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우리 민 도련님 실력을 의심했네요. 십 점 만점에 십 점을 드리겠습니다.”바로 그때, 이미숙이 폰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는 바람에 전화 너머에 있는 곽승재는 그 광경을 전부 목격하게 되었다.밥상 위에는 아주 맛있게 생긴 음식이 놓여 있었고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는 것도 까먹은 채 민시후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고 있었는데 민시후는 아주 자랑스러워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은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