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야, 전에 동물원도 거절했잖아. 이번만은 네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염주 팔찌를 흔들어 보이면서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나한테 선물도 줬잖아. 그저 주고받는 거라고 생각해.”‘염주 팔찌랑 기업이 어떻게 같아.’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이 빨리 자리 잡기를 원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백씨 집안 기업이 아무리 파산했다고 해도 여전히 아주 성숙된 기업이었는데 인수 절차를 마치기만 하면 많은 업무를 또다른 준비 없이 계속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내 고백도 거절했잖아. 그러니까 이 계약서만은 받아줘. 나도 쾌락을 한 번쯤 느껴 보자.”민시후가 말했다.“그럼 넌 주주로 들어와.”이는 고은서가 고민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아니. 온전히 다 네 거야.”민시후가 단호하게 말했다.고은서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감동 받았다.그녀는 애써 여유로운 척하면서 답했다.“민시후, 후회하기 없기야. 나중에 내가 돈을 벌어도 넌 옆에서 보고 있기만 해야 해.”민시후는 오랜만에 껄렁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내 안광도 좋다는 걸 의미하겠지.”약간 애매하게 와닿는 말이긴 했지만 고은서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아줬다.“민 도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노력할게요.”민시후는 고은서의 발을 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하다가 꾹 참고 소파에 앉은 채 물었다.“아직도 아파? 약은 발랐어?”고은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했다.“그냥 살짝 삐인 것뿐이야. 안 아파. 의사가 며칠 더 쉬는 게 좋다고 해서 나도 이 기회에 집에서 농땡이 좀 부려 보려고.”민시후는 고은서의 장난을 받아주는 대신 그녀의 발을 빤히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일 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고되게 느껴질 줄은 생각도 못 했어.”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마음이 아파왔다.“아버지랑 형이 아직도 계속 널 찾아?”민시후는 쓸쓸함을 애써
민시후가 망설임의 알아차린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너무 급한 일이 아니면 여기서 밥 먹고 가.”처리할 일이 있는 건 맞았으나 너무 오랫동안 고은서를 못 본 탓에 이렇게 떠나기는 아쉬웠다.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고은서가 말을 보태었다.“전에 병원에서 요리를 잘한다고 큰소리쳤잖아. 오늘 요리 실력 좀 보여줘야지 않겠어?”고은서의 도발에 민시후는 남아야겠다는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그는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신이 거짓말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려 했다.그러나 엄연히 따지면 손님이었기에 이미숙은 모든 일을 민시후에게 떠넘기는 대신 그가 제일 잘하는 음식만 손보게 하고 나머지 음식은 자신이 도맡아 했다.얼마 후, 민시후는 자신이 만든 물고기 요리를 들고 나왔다.송민아는 눈치 있게 이미숙을 도우러 부엌으로 들어갔다.노랗게 구워진 물고기 위에는 견과류가 뿌려있었고 옆에는 녹색 잎으로 플레이팅까지 되어 있었다.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의 비주얼이었다.민시후의 기대하는 눈빛 아래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한 입 먹어보았다.오렌지 껍질과 고춧가루 향이 물고기 잡냄새를 잡아준 덕분에 물고기의 특유한 고소한 맛이 미각을 자극했는데 너무 맛있었다.고은서도 전에 곽승재의 관심을 받기 위해 요리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민시후의 요리 솜씨와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며 자랑스럽다는 듯 턱을 치켜올렸다.“내가 말했지. 큰소리친 게 아니라고.”고은서가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었다.“물론이죠. 너무 맛있어요.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우리 민 도련님 실력을 의심했네요. 십 점 만점에 십 점을 드리겠습니다.”바로 그때, 이미숙이 폰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는 바람에 전화 너머에 있는 곽승재는 그 광경을 전부 목격하게 되었다.밥상 위에는 아주 맛있게 생긴 음식이 놓여 있었고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는 것도 까먹은 채 민시후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고 있었는데 민시후는 아주 자랑스러워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은
고은서에게 거절당한 곽승재는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차에 오르기 전, 곽승재는 손에 있는 버블티를 보면서 넋을 잃은 듯 서 있었다.“곽 대표님?”바로 이때, 뒤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고양이를 안고 있는 여시은이었다.“진짜 곽 대표님이었네요.”여시은은 약간 의아해했다.“곽 대표님이 왜 여기에 계세요? 오늘 바쁘다면서 저랑 아빠가 같이 밥 먹자고 초대하는 걸 거절하셨잖아요.”곽승재는 아주 간결하게 답했다.“개인적인 일이에요.”그러자 여시은은 그의 손에 있는 버블티를 빤히 바라보면서 부럽다는 듯 말했다.“와, 곽 대표님도 버블티를 마시나요? 이거 해성에서 엄청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평소에 사려면 줄이 엄청 길던데요.”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리를 뜨려고 했다.“별다른 일 없으시면 먼저 가보겠습니다.”“곽 대표님, 마침 이렇게 만났는데 저랑 얘기 좀 나누시죠?”여시은이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정략결혼 일로 아저씨랑 다툰 걸 저도 알고 있어요. 우리 같이 해결 대책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떤가요?”“저는 정략결혼을 하지 않을 겁니다.”곽승재가 직설적으로 말했다.“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 일로 이틀 전에 은서 씨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이 앞에 양꼬치집 꽤 괜찮다고 들어서 오늘 특별히 저녁도 먹지 않고 찾아온 건데 저 밥 한 끼 사주세요. 그리고 자세한 건 먹으면 얘기하도록 하죠.”여시은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두 집안 어른들이 가까이 지내는 데다가 또 사업 파트너이기도 했기에 두 사람은 여러 차례 같은 식사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고은서의 이름을 들은 곽승재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그는 양꼬치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버블티를 기사에게 건네주면서 당부했다.“몇 잔 더 사서 라이트문으로 가져가.”기사는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곽승재는 이내 양꼬치집으로 들어갔다.여시은은 웃으면서 기사 손에 있는 버블티를 힐끔 보고는 쿠아를 안고 곽승재를 따라갔다.양꼬치 집은 환경뿐만이 아
곽승재는 고양이 이름에 관해 아무런 흥취도 없었다.그러나 흥미진진해 하는 여시은을 보며 곽승재는 예의상 궁금한 척했다.“왜죠?”“왜냐하면 당시 만났을 때 고슴도치처럼 털이 곤두서 있었거든요. 그리고 상처를 치료해주려 할 때 저를 향해 쿠아하고 소리 내며 저를 물려고 했어요.”여시은이 말하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곽승재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쿠아 얘기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죄송해요.”갑자기 고은서가 떠오른 곽승재는 정신이 이미 딴 곳으로 가 있었다.‘고은서도 토끼랑 판다 같은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데. 전에 쿠아를 만날 때마다 만져보면서 그랬는데.’“아무래도 우리 여자들의 천성인 것 같아요.”여시은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은서 씨도 동물 좋아하죠? 민시후 씨가 은서 씨를 위해 동물원까지 선물했다고 하던데...”그러나 여시은은 이내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죄송해요.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요.”“다 사실인데 기분 나쁠 일 없어요.”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그가 민시후를 싫어하는 건 맞지만 고은서를 기분 좋게 만드는 일에서만은 민시후가 그보다 훨씬 성공한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바로 이때, 마침 셰프가 식재료를 들고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조용해졌는데 여시은도 눈치 있게 더는 말하지 않았다.철판 위에 올려진 고기는 육즙이 가득 차 보였고 이어 구미를 돋구는 향기가 몰려왔다. 여시은은 당장이라도 침을 흘릴 것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철판 위의 고기를 빤히 쳐다보았고 반면 곽승재는 아무런 흥취가 없는 듯 계속 손목시계만 내려다보았다.이를 본 여시은은 셰프에게 먼저 내려가 보라고 말했다.“곽 대표님, 정략결혼 일로 많은 민폐를 끼쳐 죄송해요. 전에 은서 씨를 찾아가 이 일에 관해 얘기했었는데 은서 씨는 계속 결혼하라고 저를 달래더라고요. 혹시 두 사람 사이의 오해가 아직 덜 풀렸나요?”곽승재는 그
곽승재는 여신은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고 뒤돌아 나갔다....이틀 후, 고은서의 다리는 거의 다 나았고 개업식 날짜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민시후의 견지하에 백씨 집안 기업은 다 유일 투자은행 소유가 되었다.유일이라는 이름은 고은서와 도아름이 긴 고민 끝에 결정한 이름이다.박지연도 듣자마자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유일무이하다. 뜻이 너무 마음에 드는데.”고은서가 다리를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도아름은 그녀를 보러 직접 라이트문까지 찾아왔다.“아름 언니, 별로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힘들게 직접 오지 않아도 되는데. 이미 다 나았는걸요.”고은서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그러자 도아름이 웃으면서 답했다.“난 그저 간단하게 차 한잔하러 온 것뿐이야.”“차 한 잔쯤이야 얼마든지 되죠. 언제든지 환영이에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녀가 도아름과 앉아서 회사 일에 관해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이미숙이 문을 열고 확인해 보니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고은혜였다.“여기까진 웬일이야?”고은서가 약간 의아해하며 물었다.고은혜가 그녀의 주소를 알고 있는 건 맞았지만 직접 찾아온 건 이번에 처음이었다.“엄마 아빠가 언니 상황을 좀 알아봐달라고 해서 온 거야.”고은혜는 찾아온 목적을 숨김없이 다 말했다.“삼촌이랑 숙모가 궁금한 게 있으면 나를 직접 찾아오면 되는데 왜 굳이 널 보낸 거야?”고은서가 약간 어리둥절해 했다.“아마 물어봐도 안 알려줄 거라고 판단해서 날 보낸 게 아닐까? 예를 들어 언니 감정 문제에 관해 엄청 궁금해하는데 대체 곽승재랑 재결합할 생각이야 아니면 민시후랑 사귈 생각이야?”고은혜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회사 개업식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니.”고은혜는 고은서의 답을 듣자마자 입술을 삐죽거리며 약간 난처해하며 말했다.“언니가 회사를 세운 게 다 할아버지 도움을 받아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고은서는 이내 고국성과 단은숙이 자신이 회사를 세우면
도아름 입에서 곽승재의 이름을 들은 고은서는 약간 놀라했다.‘난 단 한 번도 대원에서 있었던 일을 곽승재한테 말한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게다가 그땐 아직 백유미를 의심하지 않았을 때인데 왜 날 도와준 거지?’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도아름이 입을 열었다.“나도 처음엔 그저 추측뿐이었어. 그런데 나중에 서인수가 자살해서 병원으로 실려 간 날 곽 대표님한테 직접 물었는데 맞다고 하더라고. 아마 그전부터 백유미를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너한테는 안 알려준 것 같아.”도아름은 이 기회에 숨기고 있던 일을 고은서에게 다 알려주기로 했다.“사실 이 집도 곽 대표님 부탁을 받고 너한테 판 거야.”고은서는 또다시 놀랐다.‘왜 내 집 구조를 익숙히 알고 있나 했더니 곽승재 집이었던 거야?’“그럼 언니가 전에 말했던 친구분도 혹시 곽승재에요?”고은서가 물었다.“곽 대표님께서 직접 나서서 도우면 네가 거절할 거라면서 나한테 도움을 청했던 거야. 그때 집을 여러 개 보고도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 마침 곽 대표님이 연락이 와서 도운 것뿐이야. 일부러 너한테 숨기려 한 거 아니야.”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당시 고은서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집을 찾지 못했었다.그러나 지금 이 집은 인테리어도 깔끔하게 된 데다가 위치도 좋고 가격도 알맞춤해서 단번에 사려고 마음먹었었다.그런데 이 집이 곽승재가 미리 자신을 위해 준비해둔 집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은서야, 당시 GS그룹 파티에서 네가 속상해하는 것 같아서 네 감정 문제에 관해서 단 한 번도 내 의견을 말하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네가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얘기해주는 거야. 곽승재가 한 일은 다 사실이고 용서하든 안 하든 또한 다 네 스스로의 선택일 뿐이야.”도아름이 온화하게 말했다.“얼마 되지 않는 인생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누굴 선택하든 혹은 평생 혼자 살든 다 네 맘이야.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이후 송민준은 몇몇 사업가들에게 이끌려 한쪽으로 가버렸다.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물었다.“송민준은 왜 온 거야? 네가 초대했어?”고은서는 며칠 전 송민준과 송민아와 함께 식사했던 일을 민시후에게 말했다.민시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멀지 않은 곳에서 미소를 띠고 있는 송민준을 바라보았다.“쟤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뭐가 이상한데?”“일부러 너한테 접근하는 것 같아.”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에 놀라 사레가 들려 기침하기 시작했다.민시후는 그녀에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뭘 그렇게 놀라?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송민준은 절대 의미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어. 송민아를 보러 온다는 명목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마주치는 횟수가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아?”물 한 모금 마신 고은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비록 송민준을 자주 마주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어 항상 조심하려고 하고 있었다.“이제 송민아한테 살짝 물어볼게.”고은서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앞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고은서가 바라보니 곽승재가 도착해 있었다.곽승재는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안에는 흰 셔츠를 매칭했다. 서 있는 자세와 긴 다리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사람들은 곽승재와 친해지기 위해 앞다퉈 인사를 건넸다.곽승재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하며 사람들을 능숙하게 상대했다.도아름이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곽승재는 그녀와 인사를 하고는 고은서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은서야, 할아버지도 오셨다면서? 가서 잠시 얘기 나누고 올게.”민시후는 곽승재를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자리에서 불쾌한 일이 생기길 원하지 않았기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곽승재는 곧 고은서 앞에 다가왔다.“축하해.”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마워.”곽승재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 잘 없었기에 곽승재가 먼저 고은서에게 말을 건네자
도아름과 몇몇 정치인들이 여재훈을 맞이하며 자리로 안내했다.그때 한 직원이 다가와 고은서에게 무언가를 물었고 고은서는 그 직원가 함께 옆으로 가려 했다.“고은서! 죽어!”그때 갑자기 한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자신의 품에서 빨간색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고은서에게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상대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고은서는 반응할 시간도 피할 시간도 없었다.“조심해!”액체가 자신의 몸을 덮을 거로 생각한 순간 회색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며 몸으로 막아섰다.퍽!그와 동시에 고은서에게 액체를 뿌리던 남자가 발에 차여 쓰러지며 아픔에 울부짖었고 병은 바닥에 떨어져 큰 소리를 냈다.강한 페인트 냄새가 고은서의 코끝을 찔렀고 그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때야 그녀는 자신을 구한 사람이 바로 송민준임을 알아챘다.페인트가 그의 등 뒤로 튀었고 그의 옷깃과 목 부위에도 붉은 자국이 많이 묻었고 머리와 얼굴에도 페인트가 튀어 다소 난처한 모습이었다.“은서야, 괜찮아?”그때 곽승재와 민시후가 급하게 달려와 고은서를 살폈다.그들 뒤에는 송민아도 있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소란스러운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상황이 악화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괜찮아.”고은서는 빠르게 진정하려 애쓰며 송민아에게 말했다.“민아야, 오빠 데리고 가서 씻게 하고 깨끗한 옷으로 준비해 줘.”고은서는 옆에 있던 두 경호원에게도 지시했다.“이 사람은 사무실로 데려가서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내가 같이 갈게.”민시후가 나서며 말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위해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감사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부탁할게.”고은서의 대처에 곽승재는 그녀가 개업식을 무사히 치르려 한다는 마음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작은 사고가 있긴 했지만 이제 괜찮습니다.”곽승재의 진지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안심했다.소란을 일으켰던 사람도 더 이
송민아에게 회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고은서는 책상에 앉아 진형서가 준 자료를 펼쳤다.대충 훑어보니 그 안에는 여시은의 기본 정보가 담겨 있었다.여시은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이후 그녀의 아버지인 여재훈이 그녀를 데리고 귀국해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여시은은 오랜 시간 강성에서 생활했으며 가끔 여재훈과 Y 국에 머물기도 했다.생활 반경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고 친구나 동료들 외에도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한 여성이 자주 찾아와 돌봐주곤 했다.여시은과 곽승재가 처음 만난 건 한 사교회 자리였으나 이후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재훈과 곽현수가 Y 국에서 사업적 거래가 있어 여시은은 이미 오래전부터 곽현수를 알고 있었다.자료에서 보면 여시은은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다.대학 시절 가볍게 만난 두 사람이 있었지만 성격 차이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헤어졌다.‘그렇다면 여시은이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핑계였던 걸까? 그녀가 곽승재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곽현수 때문일까?’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송민아가 와서 재촉했고 그녀는 자료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궜다....저녁 무렵 고은서는 업무를 마치고 박지연을 픽업해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오늘은 세 여자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명운 주류가 상장된 이후 도아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비워 나온 만큼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세 사람은 함께 여성 전용 요가 센터로 향했다.센터에서는 요가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거나 꽃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었다.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명상 요가를 한 세션 진행했다.몸을 충분히 이완시킨 후 개방형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시려던 차에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곽승재와 최근 그와 열애설이 난 인플루언서였다.곽승재는 검은색 캐주얼 셔츠를 입고 있었고 외투는 한쪽 팔에 무심하게 걸쳐 있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덕분에
진형서가 말했다.“민 대표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전 여시은이 해성에 오기 전의 상황을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현재 대표님은 해외에 계시고 여시은이 누군지 기억도 못 하고 계십니다. 해성의 일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이 조사 결과를 전해드리지 않았습니다. 고 대표님, 비록 저희 대표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이 자료는 고 대표님을 위해 조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 서류를 고대표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고은서는 기억을 되살렸다.두 사람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민시후는 정말로 여시은을 계속 조사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다음날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고은서는 민시후가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최근에 다른 머리 아픈 일들로 인해 여시은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그녀는 민시후가 조사를 시작하고 진형서가 그 자료를 그녀에게 가져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대표님, 이렇게 오래 끌어서 죄송합니다.”진형서가 사과의 말을 전했다.“제 처지도 좀 곤란한 상황이라서...”고은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형서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진형서는 파일을 그녀에게 건네고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떴다.사무실로 올라가려던 고은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민아를 만났다.“너 출장 가지 않았어? 오늘 돌아온 거야?”송민아는 대답 대신 고은서의 팔을 잡고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닫은 송민아는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야? 곽 대표님이 인플루언서와 밤을 보내고 이제는 결혼하려고 한다던데?”곽승재와 인플루언서의 스캔들이 알려진 후 그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고 GS 그룹에서도 소문을 막지 않았다.네티즌들은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에게 반해 연인 관계로 발전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최근 인터넷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이미 여러 날 된 소식인데 이제야 물어보는 거야?”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까지 나왔겠어
“은서야, 지금 곽승재 편을 든 거야?”박지연은 뒤늦게 반응하며 물었다.“육현석 말로는 엊그제 같이 곽승재를 만나러 갔었다며? 걔는 네가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하더라. 아니다.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와 호텔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니 미련은 없겠다.”박지연은 바로 스스로 부정했다.박지연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볼일 봐. 퇴근 후에 다시 얘기하자.”박지연은 알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고은서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지연아.”“왜?”고은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기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했다.“아니야. 그냥 밖에 나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이제 시간 나면 우리 같이 놀러 가자.”“그게 다야? 깜짝 놀랐잖아.”박지연이 투덜댔다.“됐어. 가서 일해.”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동네 약국에서 긴급 피임약을 주문했다.비록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전을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라고 해도 놓치는 것보다는 낫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한 번으로 충분해.’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른 약품들도 몇 가지 골랐다.약을 고르던 중 이미숙이 노크했다.“사모님, 배 안 고프세요? 뭐 좀 만들어 드릴까요?”고은서는 승낙했다.세수하고 간단히 식사를 마치니 고국성에게서 연락이 왔다.“오미나가 수술비와 위자료를 요구하며 돈만 주면 수술을 받을 거라고 하더구나.”‘그래도 약속은 지키네.’“은서야, 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났다던데 사실이야?”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를 좋아하던 고국성은 곽승재의 상황을 알고 걱정했다.고은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삼촌, 사실이든 아니든 저랑 다시는 곽승재를 찾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 어기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예요.”고국성은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고국성은 고은서가 능력도 갖추고 오미나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해결했으니 이제 그녀의
곽승재의 손아귀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고 그의 표정도 매우 차가웠다.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인지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에는 뚜렷한 핏발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잠시 멍해졌다.어젯밤의 희미한 장면들 속에서 그녀의 눈앞을 스쳤던 것도 이렇게 광적이고 핏빛이 감도는 눈이었던 것 같다“왜 말이 없어?”곽승재는 맹수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고은서는 턱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알고 싶은 건 다 알았잖아. 내가 뭘 더 말해야 해?”“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저녁을 먹자고 한 게 날 함정에 빠뜨리고 여자를 침대에 보내려고 그랬던 거야?”곽승재는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턱 통증은 완화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맞아.”“그래서 내가 다른 여자랑 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고은서는 마음을 다잡고 냉소를 지었다.“아니면?”그녀의 대답에 곽승재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그의 눈가에는 실망으로 가득 찼다.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쓸쓸함이 차올랐다.곽현수에게 이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녀는 이미 곽승재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었다.만약 곽승재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비슷한 일을 꾸몄다면 그녀 역시 충격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을 것이었다.“곽승재, 여러 번 말했잖아. 난 이미 너를 내려놓았다고. 이쯤이면 그만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다시 한번 기름을 부었다.‘끝내려면 완전히 끝내야 해. 이러면 곽현수도 더 안심하겠지.’곽승재는 싸늘하게 웃었고 눈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고은서까지 태워버릴 듯했다.“알았어. 고은서, 후회하지 마.”말을 마친 곽승재는 그녀를 내팽개친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떴다.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제자리에 멈춰선 고은서는 머릿속도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은서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혹시 누군가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직원은 그녀의 객실 문은 밤새 열리지 않았다고 확답했다.‘곽승재는 취한 상태에서 약까지 먹었으니 이 방에 올 리가 없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물에다 약을 너무 많이 타서 약효가 강해서 그런 꿈을 꾼 건가? 목에 남은 자국은 병 자국에 눌린 흔적일까? 사지의 뻐근함은 단순한 숙취의 후유증?’충분히 말이 되는 설명이긴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기분이 찝찝했다.고은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때도 몸의 감각은 확실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정말 꿈이라고? 아니면... 그 남자는 곽승재였을까?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거지? 갈 때는 어떻게 나가고? 줄곧 날 잡고 싶다고 말했으니 우리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면 계속 남아있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머리가 복잡해진 고은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때 갑자기 방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순간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떠올린 고은서는 재빨리 옷을 걸쳐 입고 문 쪽으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아니나 다를까 복도에는 수많은 연예부 기자가 곽승재의 객실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그들은 사진을 찍고 질문을 퍼부으며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주민기가 경호원들과 함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끈질긴 기자들은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그 혼란 속에서 어두운 표정을 한 곽승재가 고은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그가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곽승재는 이미 어젯밤 일이 그녀의 계획이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그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고은서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 곽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원하시는 대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세요.]답장은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어떻게 곽승재를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고은서는 지금까지 극도의 긴장 속에 있었기에 자신의 상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긴장이 풀리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입안이 바짝 마르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감각이 몰려왔다.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고은서는 휘청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가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낸 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자자. 자면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모든 폭풍은 내일 다시 맞서면 돼.’자신을 그렇게 세뇌하듯 다독인 고은서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하지만 꿈속에서도 그녀는 더위에 시달렸다.그 뜨거움은 단순한 체온 상승이 아닌 몸속 혈액에서부터 느껴지는 타오르는 듯한 열기였다.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로 설정하고 심지어 차가운 물병을 목에 대어 보아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피부의 모든 세포가 시원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그렇게 혼란스러운 열기 속에서 고은서는 갑자기 무언가 뜨겁고 묵직한 존재가 자신의 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무게감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가왔고 순간적으로 그녀의 호흡을 앗아갔다.남자의 낮고 거친 숨소리가 술 냄새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그리고 익숙한 남성의 향기가 그녀를 감쌌다.그 향기는 고은서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호흡이 교차하고 서로의 몸이 닿자 고은서는 더 뜨거워졌고 마음속에서부터 강렬한 욕망이 치솟았다.그녀는 지금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별할 여유도 정력도 없었다.약과 술의 작용하에 고은서는 몸이 반응하는 대로 손을 뻗었다.객실 안 에어컨 바람이 천천히 방안을 맴돌았다.낮은 온도로 설정된 냉기 속에서도 방 안의 온도는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은은한 조명이 커다란 침대 위에서 단단히 엉켜 있는 두 개의 실루엣을 비췄다.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열기에 가득 찬 입맞춤을 그녀의 입술에서부터 목으로 옮겨갔다.방 안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찼다.그 향기는 마치 봄의 미풍에 섞인 향처럼 감각을 부드럽게 자극했다.밤은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곽승재를 한 번 힐끔 바라본 뒤 재빨리 가방에서 숨겨둔 약을 꺼내어 물에 녹였다.긴장감 속에서 약은 빠르게 물속에 녹아들었고 고은서는 조심스럽게 그 물을 침대 옆으로 가져갔다.큰 키를 가진 곽승재가 침대에 평평히 누워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굳게 감겨 있었고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얼굴은 방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고은서가 조심스럽게 곽승재의 뺨을 건드리자 곽승재는 비몽사몽 눈을 뜨며 붉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은서야...”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 울림은 그대로 고은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고은서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술 많이 마셔서 목마르지? 물 좀 마셔.”곽승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은서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고은서는 술에 취한 곽승재가 얼마나 고집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괜히 반박하는 것보다는 빨리 물을 마시게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이었다.“안 마실 거야?”“마실 거야.”곽승재는 요구를 덧붙였다.“근데 네가 직접 먹여 줘.”고은서는 긴장하며 최대한 빨리 물을 마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반쯤 일으켜 세운 뒤 조심스레 컵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하지만 곽승재는 한 모금 마시더니 뜨겁다며 굳이 고은서도 마셔보라고 했다.술에 취한 채 그녀가 안 마시면 자신도 안 마시겠다는 완강한 태도에 고은서는 순간 물을 그대로 그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녀는 꾹 참고 단순히 상황을 빨리 정리하기 위해서 대충 물을 두 모금 마신 뒤 컵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이제 됐지?”곽승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손을 감싸며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그리고 그는 이전의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커다란 늑대처럼 그녀의 팔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은서야, 나 등 아파. 약 좀 발라줘.”고은서는 빨리 방을 나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계
고국성은 이내 다가가 그와 악수하면서 인사했고 단은숙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유독 고은혜만은 입을 꾹 다문 채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곽승재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눈길을 고은서 쪽으로 돌렸다.그는 무언갈 억누르고 있는 듯한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승재야, 네 자리 남겨뒀으니까 얼른 앉아.”고국성은 고은서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여서 앉을 수 있는 곳이 남아돌았는데 고국성은 하 곽승재를 고은서 옆에 앉히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속셈이 너무 선명했다.아무튼 고은서가 먼저 밥 먹자고 말을 꺼낸 거였기에 그가 어디에 앉든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곽승재는 덤덤한 표정을 한 채 고은서 옆에 앉았다.너무 가까운 탓인지 그의 특유한 설송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이어 차를 따라주는 웨이터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고은서는 이 기회에 찻잔을 대신 들어주면서 슬쩍 옆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곽승재도 손을 뻗으면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그의 체온이 피부결을 통해 뜨겁게 느껴지면서 고은서는 손을 확 거두어들였다.반면 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찻잔을 웨이터에게 건네주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고은혜는 두 사람이 행여나 어색해할까 봐 다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음식이 다 오른 후 고국성은 자신이 소장해 둔 진귀한 술을 가져오라고 웨이터를 시켰다.고은서는 레스토랑에 오기 전부터 고국성한테 밥만 먹으면 어색할 수도 있으니 술이라도 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암시했었다.아니나 다를까 고국성은 별 의심 없이 그녀의 말대로 행동했다.“승재야, 평소에 너무 바빠서 별로 모일 시간도 없었는데 이 좋은 기회에 우리 실컷 마셔보자고.”고국성은 웨이터를 다시 내보내고 직접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기쁜 날인데 다 같이 마셔야죠.”곽승재가 제안했다.고국성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그래. 가족끼리 떠들썩하게 재밌게 보내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고은서는 고국성 집에 들렀다.고국성은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고은혜는 상을 찌푸리고 폰을 놀고 있었다.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싸했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그녀 옆으로 다급히 걸어오며 말했다.“언니, 엄마가 방문을 잠그고 계속 나오지 않으면서 아빠랑 이혼한다고 변호사까지 찾았어.”기자 회견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성이 오미나와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시에 단은숙은 오미나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아이가 생겼다는 건 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맺었다는 걸 의미했고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고은혜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고국성 앞으로 다가가 일은 자신이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오미나가 아이를 없애겠대?”고국성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동의할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정말이야? 엄마한테 이 소식을 알려줘야지.”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그러나 고국성은 낙관적인 고은혜와 달리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동의하지 않았단 얘기야?”고은서는 고국성 옆에 앉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삼촌, MQ를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MQ를 더 크게 이끌고 나가려거든 다른 사람한테 너무 의지해서도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이후부터 곽승재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그만 하세요. 이 또한 제가 이번 일을 처리해주는 대신 삼촌이 들어줘야 할 조건이기도 해요.”고은서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고국성은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곽승재를 찾아간 건 어떻게 안 거지? 분명히 유승준도 모르게 몰래 찾아갔는데.’그는 결연한 태도의 고은서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계에서 곽승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게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