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어.”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은서야, 형이 널 찾아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리고 예전부터 너와 내 관계를 오해하도록 내버렸던 것도 내 잘못이야. 그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너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졌어. 모든 게 내 경솔함에서 비롯된 거야.”민시후가 말을 이었다.“널 힘들게 한 점 진심으로 미안해. 우리 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너에게 다시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게. 하지만 은서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괜찮아. 그렇지만 제발 나를 네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진 말아줘.”민시후의 진지한 표정과 간절함이 섞인 목소리에 고은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우리 아직 친구잖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널 어떻게 지워.”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답했다.그 말을 들은 민시후도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네가 부람스러워할까 봐 그런 거야. 차라리 안 보면 편할까 해서.”하지만 그들의 가벼운 대화는 결국 억지로 만들어낸 분위기에 불과했고 대화가 끝난 후에도 분위기는 가벼워지지 않았다.결국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이는 고은서가 민시후와 알고 지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두 사람은 항상 서로 투덕거리거나 웃고 떠들기에 바빴는데 지금의 침묵은 고은서를 어색하게 만들었다.“맞다. 여시은 씨가 너한테 밥 사겠대. 지난번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고은서는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민시후가 고개를 저었다.“여시은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지난번 일은 민시현이 꾸민 일이야.”고은서가 놀라지 않는 것을 보고 민시후가 물었다.“이미 알고 있었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곽승재를 탓했던 일과 곽승재가 이를 조사했던 사실을 민시후에게 이야기했다.민시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차의 머리 받침에 기대며 약간 자조적으로 말했다.“나보다 더 철저히 조사했네. 나는 송민준까지만 알아냈지 민시현까지는 못 알아냈어. 은서야, 네가 날 너무 좋아하지 않는
온승준은 등산을 좋아하는 병원 주임의 권유로 산에 오르게 되었다.원래는 참여할 마음이 없었지만 주임의 무심한 한마디가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온 선생, 맨날 그렇게 무뚝뚝하게 있으면 안 돼요. 가끔 바람도 쐬고 그래야지. 안 그러면 누가 그런 성격 좋아하겠어요.”온승준이 박지연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일은 병원 내에서 이미 퍼져 있었고 주임 역시 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그의 농담 같은 말은 온승준으로 하여금 박지연을 떠올리게 했다.이전 박지연은 그에게 너무 무뚝뚝하다고 가끔 함께 밖으로 나가자고 했던 적도 있었다.L 국에 있을 때는 그녀와 함께 몇 번 외출했었는데 당시 박지연은 그 시간을 무척 즐거워하며 허니문 여행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결국 온승준은 주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러나 산 정상에 오르자마자 박지연이 한 남자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그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부드럽고도 절제된 모습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태양은 이미 떠올라 있었고 산을 오르느라 땀범벅이 되었음에도 온승준은 그 장면을 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온승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키스를 마친 두 사람은 떨어졌고 박지연의 얼굴은 발그레해져 있었다.그녀의 눈은 부끄러움과 기쁨으로 반짝였고 온 신경은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남자 역시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야에는 오직 서로만이 존재하는 듯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온승준 같은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두 사람 사이에 넘치는 사랑이 주변의 모든 것을 그림자처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온승준은 자신이 어떻게 그곳을 떠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저 다리가 납처럼 무겁게 느껴졌고 기계적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을 뿐이었다....다음 날 박지연이 출근했을 때 한 간호사가 그녀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온 선생님 어제 사직서 제출했대요. 국경 없는
저녁이 되어 간신히 손에 쥔 일을 마무리한 박지연은 미리 아래층으로 가 육현석을 기다리기로 했다.병원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마침 온범준이 휠체어에 앉은 조수연을 밀고 오고 있었다.박지연은 두 사람을 마주하고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곧바로 옆길로 발걸음을 돌렸다.“지연아, 잠깐만 기다려줘.”온범준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그리고 이내 온범준은 조수연을 이끌고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지난번 병실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박지연은 지금 상황이 귀찮게 여겼다.“또 저를 괴롭히거나 모욕적인 말씀을 하실 거면 바로 신고할 거예요.”“아니야. 지연아, 오해하지 마. 우리는 너에게 사과하러 왔어.”놀랍게도 조수연은 자세를 낮추었다.“맞아. 지연아. 우리는 정말 너랑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 자리 옮겨서 얘기 좀 할까?”온범준은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자존심을 챙기고 싶었는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걸 원치 않았다.박지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두 분이랑 할 얘기 없습니다. 저는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지연아, 미안해!”박지연이 발을 떼기도 전에 조수연이 갑자기 큰 소리로 사과했다.박지연은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수연을 쳐다보았다.조수연은 아첨하는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지연아, 전에는 이 엄마가 잘못했다. 너한테 그렇게 엄하게 굴지 말아야 했어. 그리고 너희 두 사람 일에 지나친 간섭은 하지 말았어야...”“그만하세요!”박지연이 조수연의 말을 끊었다.“조 여사님, 제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호칭 좀 주의해 주세요.”조수연은 비난을 받아도 화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지연아, 네가 많이 참았다는 거 알아. 다 내 잘못이야. 진심으로 사과할게.”온범준이 기침 두 번하며 말했다.“지연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집안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다. 너무 많은 걸 감내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나도 진심으로 사과한다.”박지연은 두 사람의 행동에 혼란스러웠다.‘지금 이게 또 뭐 하는 거
박지연이 고개를 들자 육현석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바로 박지연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박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온승준의 부모님도 자연스레 육현석을 바라보았다.조수연은 육현석을 알고 있었고 박지연과 그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이미 생각했기에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을 보며 조금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육현석 씨죠? 지연이는 우리 승준이 아내인데 이렇게 손잡는 건 부적절하지 않나요?”육현석이 차분히 답했다.“여사님, 그 말씀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연이는 이미 온 선생님과 이혼했고 이제는 제 여자 친구예요.”여자 친구라는 단어가 나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특히 조수연은 육현석이 박지연을 여자 친구로 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육현석이 부유한 집 아들이기에 단지 박지연을 새로운 맛에 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박지연이 이혼한 걸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연이 체면 좀 살려주려고 그러는 걸 거야.’조수연은 육현석과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박지연에게 충고를 시작했다.“지연아, 너도 승준이랑 2년을 함께 해서 알겠지만 승준이는 한 번도 너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어. 집안일은 전부 네 말에 따르고 간섭도 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승준이는 생활 루틴도 깨끗해. 도박도 하지 않고 여자를 만나지도 않고 접대로 하지 않아. 성격이 조금 둔할 뿐이지. 다른 남자들처럼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헤쳐나가는 생활에서는 승준이처럼 신중한 사람이 더 좋지 않겠니?”조수연이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승준이는 이혼하고 나서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겠대. 지금까지 이렇게 고집부리는 건 처음이야. 승준이랑 재결합해서 살면 우리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온범준도 말을 보탰다.“지연아, 네가 심성이 착한 아이라는 거 우리도 잘 알고 있어. 예전 일은 정말 미안하다. 원하는 보상이나 요구가 있으면 말해보거라. 다 들어줄게.”박지
조수연이 온범준을 뿌리치며 말했다.“나는 신경 쓰지 마. 아들이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걸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재결합을 원하는 거잖아. 내가 빌면 되지. 내가 무릎...”비록 작은 골목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수연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박지연은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조수연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계속해서 온승준과 재혼해달라고 애원했다.슬프게 우는 조수연은 초췌해 보였고 휠체어에 앉아 있기까지 하니 정말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약자처럼 보였다.육현석은 말로만 경고하며 말릴 뿐 손을 댈 수도 없었다.“아버지, 어머니.”박지연과 육현석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사람들 속에서 온승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승준은 예전처럼 아무 표정 없이 그저 무심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돌아가세요.”“승준아, 엄마 지금 지연이한테 사과하고 있어. 해외 가지 않으면 안 될까? 두 사람 재혼하는 거 동의할게. 앞으로도 너희 일에 간섭하지 않을게.”조수연은 박지연을 놓고 온승준을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다.주위 사람들이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려 하자 육현석은 급히 손을 들어 박지연의 얼굴을 가리며 보호했다.온승준은 담담한 말투로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소란 피워서 미안해. 가도 돼.”박지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육현석과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육현석의 차에 오르고 나서야 박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수연의 소동 덕분에 박지연은 외출하거나 쇼핑할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피곤하다고 말하며 일찍 집에 가서 쉬겠다고 했다.육현석도 반대하지 않고 그녀를 라이트문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차 안에서 육현석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조용히 운전만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이트문 아파트에 도착했다.“육현석, 아까는 미안해. 온 선생님 부모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 나 때문에 너까지 휘말리게 했네.”집에 가기 전 박지연이 육현석에게 사과했다.“네 잘못도 아
“너는 참을 수 있다고 해도 네가 곤란해하는 모습 내가 보고 싶지 않아.”박지연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날 점점 더 원망하게 될 네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아. 그때 가서 서로를 원망하며 끝내기보다 지금 끝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박지연의 말을 들은 육현석은 답답해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다고 해서 내가 왜 곤란해야 해? 이혼했다는 사실이 치욕적인 꼬리표가 되어 평생 따라다녀야 해? 지연아, 그런 생각이 애초에 잘못된 거야.”그 말을 들은 박지연은 감동한 한편 씁쓸해졌다.“오는 동안 한마디도 안 한 건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육현석은 체념한 표정으로 박지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화 안 났어. 게다가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박지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뭐가 걱정되는데?”“너 온승준을 정말 사랑했잖아. 만약 그날 레스토랑에서 온승준의 어머니가 널 강제로 데려가지 않았고 집에서 그런 소동을 벌이지 않았다면 넌 이혼을 결심하지 않았을 거야.”박지연도 부정하지 않았다.그날 조수연이 끌고 가서 온승준이 유혜린 때문에 화가 나서 갑작스럽게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박지연은 이혼을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다.“우린 이미 이혼했고 재결합할 생각도 없는데 뭐가 걱정인 거야?”박지연이 묻자 육현석이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으며 말했다.“지연아, 아까 온승준 부모님이 너 꽤 마음에 들었었다고 했잖아. 재결합하면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주고 직장을 그만두지 않아도 괜찮고 앞으로 두 사람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그런 생활은 네가 항상 원하던 거였잖아. 혹시 흔들리지 않았어?”육현석의 눈에 담긴 불안함을 보며 박지연은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깨달았다.행복함이 마음을 채우자 코끝이 시큰거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아직 내가 온승준만큼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너는 항상 온승준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성공한 남자를 좋아해 왔고 나는 그저 집안
두 사람은 장난을 치며 계단을 올라갔다.고은서는 박지연에게서 온승준이 해외로 봉사 의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조금 놀랐다.지난 생에서는 박지연이 실연의 아픔을 겪고 해외로 봉사 간호사를 지원했는데 이번 생에서는 온승준이 같은 길을 밟은 것이다.“무슨 생각해? 왜 그런 표정이야?”박지연이 의아해하며 묻자 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녀는 두 팔을 벌려 박지연을 안았다.“지연아, 좋다. 넌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애교에 당황했지만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가녀린 등을 두드리며 답했다.“우리 다 행복해질 거야. 그런데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고은서가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며 답했다.“바쁘지, 정신없이 바빠. 이제야 초기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어. 허가증만 나오면 바로 개업식을 진행할 수 있어. 오늘은 숨 돌릴 틈이 생겨 일찍 들어온 거고.”“민시후랑 곽승재는 도와주러 안 왔어?”박지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누운 채로 미동도 하지 않는 고은서는 박지연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여력도 없었다.박지연은 고은서가 연애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고 개업식에 관해 물었다.고은서는 그제야 생기를 되찾으며 답했다.“해성 몇몇 기업에 초청장을 보낼 거고 아름 언니도 몇몇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서 커팅식에 도움 줄 거야. 덕분에 조금이나마 우리 회사를 알릴 수 있겠지.”박지연은 피곤하지만 활기 넘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기뻤다.“사업에 대해서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맛있는 음식이라도 만들어줄게.”“고마워, 우리 착한 지연이!”다음 날 고은서는 활기찬 모습으로 새 사무실로 향했다.그녀가 빌린 곳은 이미 인테리어가 완료된 사무실이었고 현재 사무 공간 내부에는 필요한 물품들이 거의 다 갖춰져 있었다.초기 운영을 위해 몇몇 직원을 고용했으며 이제 모든 것이 기본 틀을 갖추어 가고 있었
고은서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무슨 말씀이요?”여시은이 약간 머뭇거리며 말했다.“곽 대표님 아버님이 저랑 대표님의 결혼 문제를 진지하게 논하시는 것 같아요. 최근 곽 대표님을 계속 압박하고 계시고 심지어 몇몇 이사들에게 연락해 대표직을 박탈하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고은서의 손길이 멈칫했다.민시후도 이전에 곽현수가 주주들을 설득해서 곽승재를 견제하려 한다고 했었다.이제 보니 민시후의 분석이 맞았다.곽현수는 대표 자리를 쥐고 곽승재와 여시은의 혼인을 강요하려는 것 같았다.“곽 대표님도 손 놓고 당하기만 하시는 분은 아니에요. 그동안 GS 그룹에서 보여준 성과들이 출중하므로 많은 이사들도 지지하고 있어요. 하지만...”여시은이 잠시 말을 멈췄다.고은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여시은은 그녀가 들은 소문을 이어 말했다.“다만 곽 대표님 아버님을 지지하시는 주주들에게 약점을 잡힌 모양이에요. 그래서 다들 곽 대표님의 능력과 판단을 의심하고 있어요.”쿠아가 고은서의 손을 파고들자 그녀는 아예 쿠아를 안아 들고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어떤 약점을 잡힌 거죠?”“제인 제약 프로젝트 때문인 것 같아요. 원래는 GS 그룹 판주 투자은행의 중요한 프로젝트였죠. 초반에는 곽 대표님이 직접 협상에 나서서 투자 단계에서도 참여했어요. 하지만 뒤에는...”여시은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고은서는 이미 상황을 이해했다.나중에 제인 제약은 약품 대리권을 고은서에게 넘겼고 그녀가 속한 ZY 그룹과 판주 투자은행이 함께 다음 라운드 투자에 참여했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상황을 파악한 것을 눈치채고 다시 말을 이었다.“지금 주주들은 그걸 핑계 삼아 곽 대표님이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있어요. 그룹의 이익을 훼손했다며 GS그룹을 책임질 인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제인 제약 프로젝트에 그녀가 나서지 않았다면 전생에서의 전개대로 백유미와 원지훈의 수중에 들어가 두 사람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겼을 것이었다.그렇게 됐
송민아에게 회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고은서는 책상에 앉아 진형서가 준 자료를 펼쳤다.대충 훑어보니 그 안에는 여시은의 기본 정보가 담겨 있었다.여시은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이후 그녀의 아버지인 여재훈이 그녀를 데리고 귀국해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여시은은 오랜 시간 강성에서 생활했으며 가끔 여재훈과 Y 국에 머물기도 했다.생활 반경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고 친구나 동료들 외에도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한 여성이 자주 찾아와 돌봐주곤 했다.여시은과 곽승재가 처음 만난 건 한 사교회 자리였으나 이후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재훈과 곽현수가 Y 국에서 사업적 거래가 있어 여시은은 이미 오래전부터 곽현수를 알고 있었다.자료에서 보면 여시은은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다.대학 시절 가볍게 만난 두 사람이 있었지만 성격 차이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헤어졌다.‘그렇다면 여시은이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핑계였던 걸까? 그녀가 곽승재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곽현수 때문일까?’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송민아가 와서 재촉했고 그녀는 자료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궜다....저녁 무렵 고은서는 업무를 마치고 박지연을 픽업해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오늘은 세 여자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명운 주류가 상장된 이후 도아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비워 나온 만큼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세 사람은 함께 여성 전용 요가 센터로 향했다.센터에서는 요가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거나 꽃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었다.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명상 요가를 한 세션 진행했다.몸을 충분히 이완시킨 후 개방형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시려던 차에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곽승재와 최근 그와 열애설이 난 인플루언서였다.곽승재는 검은색 캐주얼 셔츠를 입고 있었고 외투는 한쪽 팔에 무심하게 걸쳐 있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덕분에
진형서가 말했다.“민 대표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전 여시은이 해성에 오기 전의 상황을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현재 대표님은 해외에 계시고 여시은이 누군지 기억도 못 하고 계십니다. 해성의 일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이 조사 결과를 전해드리지 않았습니다. 고 대표님, 비록 저희 대표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이 자료는 고 대표님을 위해 조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 서류를 고대표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고은서는 기억을 되살렸다.두 사람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민시후는 정말로 여시은을 계속 조사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다음날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고은서는 민시후가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최근에 다른 머리 아픈 일들로 인해 여시은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그녀는 민시후가 조사를 시작하고 진형서가 그 자료를 그녀에게 가져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대표님, 이렇게 오래 끌어서 죄송합니다.”진형서가 사과의 말을 전했다.“제 처지도 좀 곤란한 상황이라서...”고은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형서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진형서는 파일을 그녀에게 건네고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떴다.사무실로 올라가려던 고은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민아를 만났다.“너 출장 가지 않았어? 오늘 돌아온 거야?”송민아는 대답 대신 고은서의 팔을 잡고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닫은 송민아는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야? 곽 대표님이 인플루언서와 밤을 보내고 이제는 결혼하려고 한다던데?”곽승재와 인플루언서의 스캔들이 알려진 후 그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고 GS 그룹에서도 소문을 막지 않았다.네티즌들은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에게 반해 연인 관계로 발전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최근 인터넷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이미 여러 날 된 소식인데 이제야 물어보는 거야?”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까지 나왔겠어
“은서야, 지금 곽승재 편을 든 거야?”박지연은 뒤늦게 반응하며 물었다.“육현석 말로는 엊그제 같이 곽승재를 만나러 갔었다며? 걔는 네가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하더라. 아니다.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와 호텔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니 미련은 없겠다.”박지연은 바로 스스로 부정했다.박지연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볼일 봐. 퇴근 후에 다시 얘기하자.”박지연은 알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고은서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지연아.”“왜?”고은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기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했다.“아니야. 그냥 밖에 나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이제 시간 나면 우리 같이 놀러 가자.”“그게 다야? 깜짝 놀랐잖아.”박지연이 투덜댔다.“됐어. 가서 일해.”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동네 약국에서 긴급 피임약을 주문했다.비록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전을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라고 해도 놓치는 것보다는 낫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한 번으로 충분해.’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른 약품들도 몇 가지 골랐다.약을 고르던 중 이미숙이 노크했다.“사모님, 배 안 고프세요? 뭐 좀 만들어 드릴까요?”고은서는 승낙했다.세수하고 간단히 식사를 마치니 고국성에게서 연락이 왔다.“오미나가 수술비와 위자료를 요구하며 돈만 주면 수술을 받을 거라고 하더구나.”‘그래도 약속은 지키네.’“은서야, 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났다던데 사실이야?”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를 좋아하던 고국성은 곽승재의 상황을 알고 걱정했다.고은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삼촌, 사실이든 아니든 저랑 다시는 곽승재를 찾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 어기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예요.”고국성은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고국성은 고은서가 능력도 갖추고 오미나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해결했으니 이제 그녀의
곽승재의 손아귀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고 그의 표정도 매우 차가웠다.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인지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에는 뚜렷한 핏발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잠시 멍해졌다.어젯밤의 희미한 장면들 속에서 그녀의 눈앞을 스쳤던 것도 이렇게 광적이고 핏빛이 감도는 눈이었던 것 같다“왜 말이 없어?”곽승재는 맹수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고은서는 턱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알고 싶은 건 다 알았잖아. 내가 뭘 더 말해야 해?”“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저녁을 먹자고 한 게 날 함정에 빠뜨리고 여자를 침대에 보내려고 그랬던 거야?”곽승재는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턱 통증은 완화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맞아.”“그래서 내가 다른 여자랑 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고은서는 마음을 다잡고 냉소를 지었다.“아니면?”그녀의 대답에 곽승재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그의 눈가에는 실망으로 가득 찼다.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쓸쓸함이 차올랐다.곽현수에게 이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녀는 이미 곽승재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었다.만약 곽승재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비슷한 일을 꾸몄다면 그녀 역시 충격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을 것이었다.“곽승재, 여러 번 말했잖아. 난 이미 너를 내려놓았다고. 이쯤이면 그만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다시 한번 기름을 부었다.‘끝내려면 완전히 끝내야 해. 이러면 곽현수도 더 안심하겠지.’곽승재는 싸늘하게 웃었고 눈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고은서까지 태워버릴 듯했다.“알았어. 고은서, 후회하지 마.”말을 마친 곽승재는 그녀를 내팽개친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떴다.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제자리에 멈춰선 고은서는 머릿속도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은서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혹시 누군가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직원은 그녀의 객실 문은 밤새 열리지 않았다고 확답했다.‘곽승재는 취한 상태에서 약까지 먹었으니 이 방에 올 리가 없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물에다 약을 너무 많이 타서 약효가 강해서 그런 꿈을 꾼 건가? 목에 남은 자국은 병 자국에 눌린 흔적일까? 사지의 뻐근함은 단순한 숙취의 후유증?’충분히 말이 되는 설명이긴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기분이 찝찝했다.고은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때도 몸의 감각은 확실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정말 꿈이라고? 아니면... 그 남자는 곽승재였을까?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거지? 갈 때는 어떻게 나가고? 줄곧 날 잡고 싶다고 말했으니 우리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면 계속 남아있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머리가 복잡해진 고은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때 갑자기 방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순간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떠올린 고은서는 재빨리 옷을 걸쳐 입고 문 쪽으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아니나 다를까 복도에는 수많은 연예부 기자가 곽승재의 객실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그들은 사진을 찍고 질문을 퍼부으며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주민기가 경호원들과 함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끈질긴 기자들은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그 혼란 속에서 어두운 표정을 한 곽승재가 고은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그가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곽승재는 이미 어젯밤 일이 그녀의 계획이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그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고은서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 곽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원하시는 대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세요.]답장은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어떻게 곽승재를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고은서는 지금까지 극도의 긴장 속에 있었기에 자신의 상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긴장이 풀리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입안이 바짝 마르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감각이 몰려왔다.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고은서는 휘청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가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낸 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자자. 자면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모든 폭풍은 내일 다시 맞서면 돼.’자신을 그렇게 세뇌하듯 다독인 고은서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하지만 꿈속에서도 그녀는 더위에 시달렸다.그 뜨거움은 단순한 체온 상승이 아닌 몸속 혈액에서부터 느껴지는 타오르는 듯한 열기였다.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로 설정하고 심지어 차가운 물병을 목에 대어 보아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피부의 모든 세포가 시원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그렇게 혼란스러운 열기 속에서 고은서는 갑자기 무언가 뜨겁고 묵직한 존재가 자신의 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무게감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가왔고 순간적으로 그녀의 호흡을 앗아갔다.남자의 낮고 거친 숨소리가 술 냄새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그리고 익숙한 남성의 향기가 그녀를 감쌌다.그 향기는 고은서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호흡이 교차하고 서로의 몸이 닿자 고은서는 더 뜨거워졌고 마음속에서부터 강렬한 욕망이 치솟았다.그녀는 지금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별할 여유도 정력도 없었다.약과 술의 작용하에 고은서는 몸이 반응하는 대로 손을 뻗었다.객실 안 에어컨 바람이 천천히 방안을 맴돌았다.낮은 온도로 설정된 냉기 속에서도 방 안의 온도는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은은한 조명이 커다란 침대 위에서 단단히 엉켜 있는 두 개의 실루엣을 비췄다.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열기에 가득 찬 입맞춤을 그녀의 입술에서부터 목으로 옮겨갔다.방 안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찼다.그 향기는 마치 봄의 미풍에 섞인 향처럼 감각을 부드럽게 자극했다.밤은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곽승재를 한 번 힐끔 바라본 뒤 재빨리 가방에서 숨겨둔 약을 꺼내어 물에 녹였다.긴장감 속에서 약은 빠르게 물속에 녹아들었고 고은서는 조심스럽게 그 물을 침대 옆으로 가져갔다.큰 키를 가진 곽승재가 침대에 평평히 누워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굳게 감겨 있었고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얼굴은 방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고은서가 조심스럽게 곽승재의 뺨을 건드리자 곽승재는 비몽사몽 눈을 뜨며 붉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은서야...”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 울림은 그대로 고은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고은서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술 많이 마셔서 목마르지? 물 좀 마셔.”곽승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은서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고은서는 술에 취한 곽승재가 얼마나 고집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괜히 반박하는 것보다는 빨리 물을 마시게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이었다.“안 마실 거야?”“마실 거야.”곽승재는 요구를 덧붙였다.“근데 네가 직접 먹여 줘.”고은서는 긴장하며 최대한 빨리 물을 마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반쯤 일으켜 세운 뒤 조심스레 컵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하지만 곽승재는 한 모금 마시더니 뜨겁다며 굳이 고은서도 마셔보라고 했다.술에 취한 채 그녀가 안 마시면 자신도 안 마시겠다는 완강한 태도에 고은서는 순간 물을 그대로 그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녀는 꾹 참고 단순히 상황을 빨리 정리하기 위해서 대충 물을 두 모금 마신 뒤 컵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이제 됐지?”곽승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손을 감싸며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그리고 그는 이전의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커다란 늑대처럼 그녀의 팔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은서야, 나 등 아파. 약 좀 발라줘.”고은서는 빨리 방을 나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계
고국성은 이내 다가가 그와 악수하면서 인사했고 단은숙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유독 고은혜만은 입을 꾹 다문 채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곽승재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눈길을 고은서 쪽으로 돌렸다.그는 무언갈 억누르고 있는 듯한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승재야, 네 자리 남겨뒀으니까 얼른 앉아.”고국성은 고은서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여서 앉을 수 있는 곳이 남아돌았는데 고국성은 하 곽승재를 고은서 옆에 앉히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속셈이 너무 선명했다.아무튼 고은서가 먼저 밥 먹자고 말을 꺼낸 거였기에 그가 어디에 앉든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곽승재는 덤덤한 표정을 한 채 고은서 옆에 앉았다.너무 가까운 탓인지 그의 특유한 설송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이어 차를 따라주는 웨이터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고은서는 이 기회에 찻잔을 대신 들어주면서 슬쩍 옆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곽승재도 손을 뻗으면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그의 체온이 피부결을 통해 뜨겁게 느껴지면서 고은서는 손을 확 거두어들였다.반면 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찻잔을 웨이터에게 건네주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고은혜는 두 사람이 행여나 어색해할까 봐 다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음식이 다 오른 후 고국성은 자신이 소장해 둔 진귀한 술을 가져오라고 웨이터를 시켰다.고은서는 레스토랑에 오기 전부터 고국성한테 밥만 먹으면 어색할 수도 있으니 술이라도 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암시했었다.아니나 다를까 고국성은 별 의심 없이 그녀의 말대로 행동했다.“승재야, 평소에 너무 바빠서 별로 모일 시간도 없었는데 이 좋은 기회에 우리 실컷 마셔보자고.”고국성은 웨이터를 다시 내보내고 직접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기쁜 날인데 다 같이 마셔야죠.”곽승재가 제안했다.고국성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그래. 가족끼리 떠들썩하게 재밌게 보내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고은서는 고국성 집에 들렀다.고국성은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고은혜는 상을 찌푸리고 폰을 놀고 있었다.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싸했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그녀 옆으로 다급히 걸어오며 말했다.“언니, 엄마가 방문을 잠그고 계속 나오지 않으면서 아빠랑 이혼한다고 변호사까지 찾았어.”기자 회견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성이 오미나와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시에 단은숙은 오미나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아이가 생겼다는 건 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맺었다는 걸 의미했고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고은혜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고국성 앞으로 다가가 일은 자신이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오미나가 아이를 없애겠대?”고국성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동의할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정말이야? 엄마한테 이 소식을 알려줘야지.”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그러나 고국성은 낙관적인 고은혜와 달리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동의하지 않았단 얘기야?”고은서는 고국성 옆에 앉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삼촌, MQ를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MQ를 더 크게 이끌고 나가려거든 다른 사람한테 너무 의지해서도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이후부터 곽승재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그만 하세요. 이 또한 제가 이번 일을 처리해주는 대신 삼촌이 들어줘야 할 조건이기도 해요.”고은서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고국성은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곽승재를 찾아간 건 어떻게 안 거지? 분명히 유승준도 모르게 몰래 찾아갔는데.’그는 결연한 태도의 고은서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계에서 곽승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게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