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연이 고개를 들자 육현석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바로 박지연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박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온승준의 부모님도 자연스레 육현석을 바라보았다.조수연은 육현석을 알고 있었고 박지연과 그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이미 생각했기에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을 보며 조금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육현석 씨죠? 지연이는 우리 승준이 아내인데 이렇게 손잡는 건 부적절하지 않나요?”육현석이 차분히 답했다.“여사님, 그 말씀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연이는 이미 온 선생님과 이혼했고 이제는 제 여자 친구예요.”여자 친구라는 단어가 나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특히 조수연은 육현석이 박지연을 여자 친구로 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육현석이 부유한 집 아들이기에 단지 박지연을 새로운 맛에 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박지연이 이혼한 걸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연이 체면 좀 살려주려고 그러는 걸 거야.’조수연은 육현석과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박지연에게 충고를 시작했다.“지연아, 너도 승준이랑 2년을 함께 해서 알겠지만 승준이는 한 번도 너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어. 집안일은 전부 네 말에 따르고 간섭도 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승준이는 생활 루틴도 깨끗해. 도박도 하지 않고 여자를 만나지도 않고 접대로 하지 않아. 성격이 조금 둔할 뿐이지. 다른 남자들처럼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헤쳐나가는 생활에서는 승준이처럼 신중한 사람이 더 좋지 않겠니?”조수연이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승준이는 이혼하고 나서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겠대. 지금까지 이렇게 고집부리는 건 처음이야. 승준이랑 재결합해서 살면 우리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온범준도 말을 보탰다.“지연아, 네가 심성이 착한 아이라는 거 우리도 잘 알고 있어. 예전 일은 정말 미안하다. 원하는 보상이나 요구가 있으면 말해보거라. 다 들어줄게.”박지
조수연이 온범준을 뿌리치며 말했다.“나는 신경 쓰지 마. 아들이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걸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재결합을 원하는 거잖아. 내가 빌면 되지. 내가 무릎...”비록 작은 골목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수연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박지연은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조수연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계속해서 온승준과 재혼해달라고 애원했다.슬프게 우는 조수연은 초췌해 보였고 휠체어에 앉아 있기까지 하니 정말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약자처럼 보였다.육현석은 말로만 경고하며 말릴 뿐 손을 댈 수도 없었다.“아버지, 어머니.”박지연과 육현석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사람들 속에서 온승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승준은 예전처럼 아무 표정 없이 그저 무심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돌아가세요.”“승준아, 엄마 지금 지연이한테 사과하고 있어. 해외 가지 않으면 안 될까? 두 사람 재혼하는 거 동의할게. 앞으로도 너희 일에 간섭하지 않을게.”조수연은 박지연을 놓고 온승준을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다.주위 사람들이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려 하자 육현석은 급히 손을 들어 박지연의 얼굴을 가리며 보호했다.온승준은 담담한 말투로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소란 피워서 미안해. 가도 돼.”박지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육현석과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육현석의 차에 오르고 나서야 박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수연의 소동 덕분에 박지연은 외출하거나 쇼핑할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피곤하다고 말하며 일찍 집에 가서 쉬겠다고 했다.육현석도 반대하지 않고 그녀를 라이트문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차 안에서 육현석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조용히 운전만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이트문 아파트에 도착했다.“육현석, 아까는 미안해. 온 선생님 부모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 나 때문에 너까지 휘말리게 했네.”집에 가기 전 박지연이 육현석에게 사과했다.“네 잘못도 아
“너는 참을 수 있다고 해도 네가 곤란해하는 모습 내가 보고 싶지 않아.”박지연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날 점점 더 원망하게 될 네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아. 그때 가서 서로를 원망하며 끝내기보다 지금 끝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박지연의 말을 들은 육현석은 답답해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다고 해서 내가 왜 곤란해야 해? 이혼했다는 사실이 치욕적인 꼬리표가 되어 평생 따라다녀야 해? 지연아, 그런 생각이 애초에 잘못된 거야.”그 말을 들은 박지연은 감동한 한편 씁쓸해졌다.“오는 동안 한마디도 안 한 건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육현석은 체념한 표정으로 박지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화 안 났어. 게다가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박지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뭐가 걱정되는데?”“너 온승준을 정말 사랑했잖아. 만약 그날 레스토랑에서 온승준의 어머니가 널 강제로 데려가지 않았고 집에서 그런 소동을 벌이지 않았다면 넌 이혼을 결심하지 않았을 거야.”박지연도 부정하지 않았다.그날 조수연이 끌고 가서 온승준이 유혜린 때문에 화가 나서 갑작스럽게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박지연은 이혼을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다.“우린 이미 이혼했고 재결합할 생각도 없는데 뭐가 걱정인 거야?”박지연이 묻자 육현석이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으며 말했다.“지연아, 아까 온승준 부모님이 너 꽤 마음에 들었었다고 했잖아. 재결합하면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주고 직장을 그만두지 않아도 괜찮고 앞으로 두 사람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그런 생활은 네가 항상 원하던 거였잖아. 혹시 흔들리지 않았어?”육현석의 눈에 담긴 불안함을 보며 박지연은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깨달았다.행복함이 마음을 채우자 코끝이 시큰거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아직 내가 온승준만큼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너는 항상 온승준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성공한 남자를 좋아해 왔고 나는 그저 집안
두 사람은 장난을 치며 계단을 올라갔다.고은서는 박지연에게서 온승준이 해외로 봉사 의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조금 놀랐다.지난 생에서는 박지연이 실연의 아픔을 겪고 해외로 봉사 간호사를 지원했는데 이번 생에서는 온승준이 같은 길을 밟은 것이다.“무슨 생각해? 왜 그런 표정이야?”박지연이 의아해하며 묻자 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녀는 두 팔을 벌려 박지연을 안았다.“지연아, 좋다. 넌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애교에 당황했지만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가녀린 등을 두드리며 답했다.“우리 다 행복해질 거야. 그런데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고은서가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며 답했다.“바쁘지, 정신없이 바빠. 이제야 초기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어. 허가증만 나오면 바로 개업식을 진행할 수 있어. 오늘은 숨 돌릴 틈이 생겨 일찍 들어온 거고.”“민시후랑 곽승재는 도와주러 안 왔어?”박지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누운 채로 미동도 하지 않는 고은서는 박지연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여력도 없었다.박지연은 고은서가 연애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고 개업식에 관해 물었다.고은서는 그제야 생기를 되찾으며 답했다.“해성 몇몇 기업에 초청장을 보낼 거고 아름 언니도 몇몇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서 커팅식에 도움 줄 거야. 덕분에 조금이나마 우리 회사를 알릴 수 있겠지.”박지연은 피곤하지만 활기 넘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기뻤다.“사업에 대해서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맛있는 음식이라도 만들어줄게.”“고마워, 우리 착한 지연이!”다음 날 고은서는 활기찬 모습으로 새 사무실로 향했다.그녀가 빌린 곳은 이미 인테리어가 완료된 사무실이었고 현재 사무 공간 내부에는 필요한 물품들이 거의 다 갖춰져 있었다.초기 운영을 위해 몇몇 직원을 고용했으며 이제 모든 것이 기본 틀을 갖추어 가고 있었
고은서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무슨 말씀이요?”여시은이 약간 머뭇거리며 말했다.“곽 대표님 아버님이 저랑 대표님의 결혼 문제를 진지하게 논하시는 것 같아요. 최근 곽 대표님을 계속 압박하고 계시고 심지어 몇몇 이사들에게 연락해 대표직을 박탈하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고은서의 손길이 멈칫했다.민시후도 이전에 곽현수가 주주들을 설득해서 곽승재를 견제하려 한다고 했었다.이제 보니 민시후의 분석이 맞았다.곽현수는 대표 자리를 쥐고 곽승재와 여시은의 혼인을 강요하려는 것 같았다.“곽 대표님도 손 놓고 당하기만 하시는 분은 아니에요. 그동안 GS 그룹에서 보여준 성과들이 출중하므로 많은 이사들도 지지하고 있어요. 하지만...”여시은이 잠시 말을 멈췄다.고은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여시은은 그녀가 들은 소문을 이어 말했다.“다만 곽 대표님 아버님을 지지하시는 주주들에게 약점을 잡힌 모양이에요. 그래서 다들 곽 대표님의 능력과 판단을 의심하고 있어요.”쿠아가 고은서의 손을 파고들자 그녀는 아예 쿠아를 안아 들고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어떤 약점을 잡힌 거죠?”“제인 제약 프로젝트 때문인 것 같아요. 원래는 GS 그룹 판주 투자은행의 중요한 프로젝트였죠. 초반에는 곽 대표님이 직접 협상에 나서서 투자 단계에서도 참여했어요. 하지만 뒤에는...”여시은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고은서는 이미 상황을 이해했다.나중에 제인 제약은 약품 대리권을 고은서에게 넘겼고 그녀가 속한 ZY 그룹과 판주 투자은행이 함께 다음 라운드 투자에 참여했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상황을 파악한 것을 눈치채고 다시 말을 이었다.“지금 주주들은 그걸 핑계 삼아 곽 대표님이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있어요. 그룹의 이익을 훼손했다며 GS그룹을 책임질 인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제인 제약 프로젝트에 그녀가 나서지 않았다면 전생에서의 전개대로 백유미와 원지훈의 수중에 들어가 두 사람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겼을 것이었다.그렇게 됐
‘지난번 집들이 파티에서 나를 그렇게 배려했던 것도 같은 맥락일까?’어쨌든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이 심어지면 상대를 100% 신뢰하기란 쉽지 않았다.고은서는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시은 씨, 제가 했던 일은 그저 작은 도움에 불과했어요. 그렇게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제 일이나 곽승재와 관련된 일에 관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알겠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여시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한 뒤 물었다.“은서 씨, 지난번 민 대표님 일도 아직 신경이 쓰여요.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직 소식이 없더라고요.”“특별히 사과할 필요 없다고 했어요. 요즘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답한다는 걸 잊었네요.”“혹시 민 대표님과 그 일 때문에 오해라도 생기셨나요?”여시은이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올라올 때 1층에서 민 대표님을 만났어요. 같이 올라가실 거냐고 물었더니 바쁜 일이 있다며 먼저 가셨어요.”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잠시 멈칫했다.최근 민시후는 그녀와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지난번 ZY 그룹에서 업무 인수인계를 할 때도 민시후는 직접 나서지 않고 대신 담당자를 보냈었다.하루는 저녁에 통화를 한 적도 있었지만 제인 제약과 관련된 이야기만 간단히 나누고 금세 전화를 끊었다.‘오늘 왜 왔을까?’“은서 씨, 정말 민 대표님과 다투신 거예요?”여시은이 난감해하며 말을 이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너무 많은 사람을 초대하지 말았던 걸 그랬어요.”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시은 씨랑은 상관없어요. 제 개인적인 문제예요.”이후 여시은은 고은서의 새 사무실을 둘러보며 칭찬을 건네며 개업식에 꼭 참석하고 싶으니 초대장을 보내달라고도 했다.약 한 시간 후 여시은이 쿠아를 안고 사무실을 떠났다.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다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벨이 몇 번 울리고 민시후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무슨 일이야?”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시은 씨가 말하길 사무실 아래에서
무심코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본 고은서는 파일을 쥐고 있는 송민아와 우아한 자태로 서 있는 송민준을 발견했다.사무실 문이 열려 있어 그녀가 통화 중이라는 것을 본 두 사람은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고개를 든 순간 고은서는 송민준의 눈빛에서 아주 희미한 냉기를 본 것 같았다.하지만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송민준의 눈빛은 온화하고 차분했다.그녀는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민시후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었다.“방해한 거 아니지?”송민아가 안으로 들어서며 손에 든 파일을 그녀에게 건넸다.“이번 개업식 참석자 명단이야. 한번 확인해 봐.”고은서가 파일을 받아 들며 송민준에게 예의를 갖춰 물었다.“송민준 씨는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송민준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민아가 은서 씨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마침 시간이 나서 들렀어요. 참석자 명단을 전하러 간다길래 인사나 드릴 겸 같이 왔어요.”고은서가 송민아를 바라보다 송민준에게 말했다.“민아는 정말 유능해요. 많은 도움 받고 있어요.”송민아가 우쭐해하며 말했다.“당연하지. 나는 할 거면 제대로 하고 그게 아니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다고.”고은서가 웃으며 맞장구쳤다.“맞아. 네가 최고야.”그때 밖에서 누군가 송민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서둘러 나갔다.“오빠, 은서랑 얘기하고 있어. 금방 다시 올게.”고은서는 송민준을 소파에 안내하고 그가 차를 좋아하는 걸 알기에 직접 차를 준비해 주었다.“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평범한 차뿐이네요. 이해해 주세요.”“은서 씨, 너무 격식 차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송민준은 차를 받아 들며 온화하게 칭찬했다.“은서 씨 대단하네요. 배치가 정말 잘 되어 있어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송민준 씨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그래도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두 사람은 별 의미 없는 칭찬을 주고받았다.송민아가 다시 돌아와서 송민준에게 자신을 위해 한턱내라고 요구하며 고은서도 같이 가자고 권했다.송민준은 흔쾌히 동의했고
“안 되겠어. 당장 매니저 찾아서 현실화시켜야겠어.”송민아는 그렇게 말하며 매니저 찾으러 나섰고 고은서와 송민준만이 방에 남았다.고은서는 어색해하며 말했다.“송민준 씨, 죄송해요. 괜히 폐만 끼쳤네요.”송민준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은서 씨, 그런 소원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민아가 은서 씨랑 일하며 아주 즐거워하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많이 밝아지고 자신감도 생겼어요. 이제는 예전처럼 성질부리거나 자기 생각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도 알게 되었어요. 다 은서 씨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답했다.“민아가 워낙 뛰어난 덕분이에요. 그동안 주변에서 민아를 어린아이로만 봐서 그런 점을 발견하지 못했던 거겠죠.”송민준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쩐지 민아가 은서 씨를 많이 좋아하더라고요. 정말 진솔한 분이시네요.”“비슷한 사람끼리 글리기 마련이죠. 민아도 진솔한 사람이라는 말이죠.”“은서 씨는 견해가 독특하네요.”그 후의 식사 시간은 꽤 유쾌하게 흘러갔다.송민아는 최근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이나 어려운 일을 이야기했고 고은서는 틈틈이 농담을 건넸다. 송민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사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다.식사 내내 고은서는 송민준이 자신에게 불쾌한 기색을 비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 들어왔을 때 느낀 그 싸늘한 시선은 단순한 착각이었을까?’식사가 끝난 후 고은서와 송민아는 사무실로 돌아왔다.“오빠가 나한테 초대장을 달래. 우리를 위해 몇몇 중요한 분들도 데려올 계획이라더라.”고은서는 송민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괜히 부담 주지 말자. 아름 언니가 이미 몇몇 주요 인사들과 연락했으니 그분들로도 충분해.”송민아는 더 고집하지 않았다.“사람을 더 부르지 않아도 괜찮지만 초대장은 줘야 해. 오빠도 유명한 사업가야. 비록 제일 뛰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맥이니 놓칠 수 없어.”다음 날 고은서는 회사에서 하루 종일 바쁘게 지냈다.저녁 무렵 곽승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