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박지연이 말했다.“더 할 말 없으면 먼저 가볼게.”“아직 할 말 있어!”온승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그날 내가 술에 취했던 날 밤, 차 안에서 잠들어 버렸어. 유 닥터가 운전기사에게 날 부축해 집으로 올려보내라고 했어. 나는 유 닥터가 돌아가지 않은 줄도 몰랐어. 그저 침대 옆에 앉아 밤을 보냈을 뿐 우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온승준이 드물게 상황을 설명했다.박지연은 지금 이 상황이 우스웠다.“왜 나한테 설명하는 거야? 우리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니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나랑 무슨 상관이야?”온승준은 박지연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끝까지 하고 싶던 말을 이어갔다.“지연아, 네가 우리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혹시라도 널 찾으러 가면 폐를 끼칠까 봐 요즘 너를 찾지 않았어. 하지만 이 일은 꼭 말해주고 싶었어.”온승준은 평소 잘 하지 않던 긴말을 이어가며 다소 급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박지연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온승준, 이미 이혼한 사이에 무슨 해명이야? 이혼 하기 전에는 이런 얘기 하지도 않았잖아. 그때는 내가 오해할지 걱정도 하지 않았지?”온승준이 솔직히 답했다.“내가 그런 부분에 소홀했어. 난 우리가 꽤 잘 지낸다고 생각했어. 네가 그렇게 많은 걸 참고 있었는지는 몰랐어.”“몰랐다고?”박지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따지듯 말했다.“당신 어머니가 유혜린을 집에 부르고 날 불러 요리시켰던 날 내가 손을 데었을 때 당신은 날 병원에 데려다주지도 않고 내 상태를 물어보지도 않았어. 그런데 우리 사이가 원만했다고? 내가 정말 서운하지 않았을 거로 생각한 거야? 온승준, 모든 걸 둔감했던 탓이라고 돌리지 마. 넌 내가 알아서 나을 거로 생각했겠지. 그래서 나에게 시간 쓰는 걸 낭비라고 여긴 거야.”온승준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지연아, 그런 게 아니라 그때 내가 병원에 같이 가겠다고 고집
조수연의 불쾌한 표정을 마주하고도 온승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혜린이 적절한 타이밍에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어머님, 시간이 꽤 늦었네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내일은 굳이 오지 않아도 돼. 어머니를 위해 간병인 구할 거야.”온승준이 바로 말했다.유혜린은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조수연은 몹시 불쾌해하며 말했다.“승준아, 너 도대체 뭐 하는 거니! 혜린이 또 뭘 잘못했다고 그래!”온승준이 싸늘하게 답했다.“예전에 지연이가 밤낮으로 어머니를 돌봤을 때는 한 번도 고맙다는 말 하지 않으셨잖아요.”“뭘 고마워해야 해? 아픈 시어머니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조수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손에 든 건 뭐야? 어디서 났어?”말을 마친 조수연은 온승준 손에 들려있는 선물 상자를 보고 불현듯 깨달았다.“박지연이 다녀갔니? 뭐야, 겨우 볼품없는 물건 가져와 놓고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거야?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가버린 건 양심에 찔려서 그런 거 아니야?”“제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왜?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너 정말 그 애를 지나치게 감싸고 도는구나.”조수연이 화를 냈다.온승준은 조수연과 다투지 않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아버지, 어머니. 오늘 밤 일은 이대로 끝낼 거예요. 저는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을 거고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철회할 생각이에요.”온승준은 두 사람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다시는 집 비밀번호 타인에게 알려주는 일 없도록 하세요. 집 비밀번호 교체하겠습니다. 제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을 겁니다.”“너... 너... 지금 내가 혜린이에게 비밀번호 알려준 거에 불만을 품고 이러는 거야?”화가 난 조수연은 상처가 아파졌다.“박지연 때문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신 너를 혜린이가 착하게도 집에 데려다준 건데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으면 집은 어떻게 들어가? 그리고 혜린
“비록 이혼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지연이뿐이야.”온승준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유혜린도 자존심이 있었기에 온승준에게 여러 차례 거절당하자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를 떴다.온승준은 그녀를 쫓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피곤한 모습으로 복도에 앉았다....고은서는 박지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후의 상황을 물었다.육현석이 박지연에게 고백했다는 말을 듣고 고은서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내가 뭐랬어!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요즘 아무것도 안 하고 일에만 집중했을까?”박지연은 육현석이 했던 말을 고은서에게 전했다.고은서도 육현석의 행동에 감동하며 말했다.“정말 대단하다. 모든 걸 다 생각해 놓았잖아. 지연아, 너도 받아들여. 비록 곽승재의 친구이긴 하지만 곽승재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워. 나는 두 사람이 잘되길 응원해.”박지연이 소파에 누우며 답했다.“나는 육현석과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어. 오늘 그 사람 말 듣고 정말 놀랐어. 바로 결정 내리기는 힘들 것 같아.”“왜? 아직 온 선생님께 미련이라도 남았어?”고은서가 묻자 박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오늘 온승준과 있었던 일들도 고은서에게 얘기해 주었다.“생각해 보니 참 슬프더라. 결혼해서 2년 넘게 살았는데 내 억울함을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야. 애먼 사람한테 괜한 기대를 했어.”“지연아, 지금까지 너무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냈잖아. 이제 놓아버리고 새 삶을 맞이해.”고은서가 안타까워하며 격려했다.박지연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 노력할게.”“맞다. 외삼촌 선물은 뭐 샀어? 내일 민시후랑 같이 집에 갈 거라며? 어떻게 소개하려고?”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묻자 고은서가 답했다.“친구라고 평범하게 소개하려고.”“집안 모임에 데려가는데 친구라도 해도 평범한 친구는 아니지 않아?”박지연이 갑자기 기대에 찬 듯 말했다.“민시후가 이 기회에 또 고백하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시간 좀 달라고 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다음날은
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설령 곽승재가 직접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다고 해도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야. 난 이미 아무 감정도 없거든.”민시후는 여전히 불안해하며 말했다.“우리 다른 프로젝트로 바꾸자. 신재생에너지 쪽도 괜찮아 보이잖아.”“신재생에너지도 좋지. 하지만 왜 제인 제약을 포기해야 해?”고은서가 말을 이었다.“네 말대로 곽승재가 나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끼어든 거라면 내가 신재생에너지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끼어들지 않을까? 그럼 우린 매번 다 된 프로젝트를 포기하게?”민시후가 태연하게 답했다.“너를 양보하는 것만 아니라면 프로젝트는 상관없어.”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세상에 소문난 난봉꾼인 민 도련님이 이런 순진한 연애 바보였다니.”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다가가 중점만 잡아내며 말했다.“고은서, 네 말은 우리 사이가 연인 관계라는 거지?”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장난하지 말고 인제 제약 프로젝트는 포기할 수 없어.”고은서가 결정을 내리며 말했다.“송민아한테 계약서와 계획서를 수정하게 하고 내일 투자부 직원들을 모아 회의를 열 거야.”판주 투자은행과 공동투자를 하더라도 제인 제약은 매우 좋은 프로젝트였다. 고은서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민시후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다소 아쉬운 듯 말했다.“그렇다면 내일 회의는 내가 주재할게. 나도 직접 참여해야겠어.”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민시후, 최근에 다쳐서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이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그건 안 돼. 곽승재는 교활한 사람이야.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지.”민시후는 단호히 거절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좋아. 네 말대로 하자. 그럼 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갈게.”고은서가 돌아가려고 하자 민시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만.”“왜?”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이따 네 외삼촌 생일 파티에 가야 하잖아. 옷 좀 골라줘.”민시후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걸
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고은서, 함정 파려고 하지 마. 내가 사기꾼도 아니고 어떻게 널 가르쳐?”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동안 한 직원이 부러워하며 말했다.“대표님, 여자 친구분과 사이가 정말 좋아 보이네요.”“저는...”“말 잘하네. 전부 다 살게.”기분 좋아진 민시후가 큰손다운 기질을 발휘했다. 그 말에 직원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은서는 해명하려 했지만 끼어들 수 없어서 그냥 포기했다.민시후는 그런 고은서를 보며 더욱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옷을 갈아입고 액세서리와 메이크업을 하자 두세 시간이 지나갔다.고은서는 거울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문적인 손길이 그녀의 모든 장점을 부각해 놓았다.민시후는 흰색 정장을 입고 머리를 뒤로 빗어 올린 채 나타났다.다른 사람이 입는다면 소화하기 힘든 스타일을 민시후가 입으니 타고난 고급스러움과 매혹적인 느낌을 발산했다.두 사람은 출발 시간이 되어갈 즘 준비를 끝마쳤다.민시후의 비서는 여러 개의 선물을 들고 그들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고국성의 생일 파티는 오성급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었다.운전기사가 호텔 정문에 차를 세우자 곧 호텔 직원들이 다가와서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린 민시후가 고은서를 향해 팔을 내밀며 팔짱을 끼라는 신호를 보냈다.비록 파티에 걸맞은 행동일 뿐이지만 오늘 파티는 고씨 집안 모든 사람과 친분이 있는 친구들과 고객들이 모이는 자리였다.고은서가 민시후와 팔짱을 끼고 들어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은 뻔했다.“민시후, 오늘 외삼촌 생일이니 그분이 주인공이야. 우리가 주목받는 건 좀 아닌 것 같아.”고은서는 어제 박지연이 흥분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리고 말조심해 줘.”자신이 한 말들이 민시후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걸 안 고은서가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네가 예의를 모른다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어색한 상황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서 그래. 너를 향한 내 마음에 확신이 생긴다면
갑작스러운 힘에 고은서는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갑작스럽게 넓은 품에 안기게 되었다.익숙한 향기가 풍겨오자 고개를 돌린 고은서는 곽승재임을 확인했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것인지 곽승재는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싸늘한 눈빛으로 민시후를 응시하고 있었다.“누구 허락받고 만지는 거야?”곽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민시후도 싸늘한 표정으로 답했다.“무슨 상관인데? 너는 왜 고은서를 당기는데.”그 상황을 본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 민시후 옆으로 서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세심하게 꾸민 고은서는 평소보다 더 빛났다.심플하면서도 정교한 디자인에 몸에 맞는 흰색 드레스는 그녀를 완벽하게 감쌌다.드레스는 무릎까지 내려왔고 그녀의 가냘프고 흰 작은 다리가 드러났다. 그런 고은서의 모습은 마치 요정 같았다.흰색 정장을 입은 민시후와 함께 서 있으니 두 사람은 잘 어울리며 보기 좋았다.하지만 곽승재는 가슴 한편에서 묘한 답답함과 불편함을 느꼈다.“삼촌 생일이라 초대받아서 왔는데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곽승재가 차갑게 말하자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작년에 아직 이혼하지 않았을 때 그녀는 곽승재와 함께 외삼촌 생일 파티에 참석하려 했으나 곽승재는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그런데 이혼하고 나서 곽승재는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되는 곳에 와있었다.정말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웠다.“고은서, 왔으면서 왜 들어오지 않고 여기 서 있어?”그때 고은혜가 연회장에서 나와 고은서에게 인사를 건넸다.동시에 고은혜는 민시후와 곽승재를 발견했다.민시후는 흰색 정장을 입고 굉장히 잘생기고 매혹적인 모습이었고 곽승재는 전형적인 검은색 고급 정장을 입고 차가우면서도 잘 생겼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은혜는 두 사람을 보고 상황을 짐작하고는 조심스럽게 고은서에게 물었다.“둘이 어떻게 같이 온 거야? 싸우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네.”고은서는 고은혜를 흘깃 쳐다
“아니요, 은서 정말 능력 있어요.”“할아버지.”곽승재는 더 이상 듣지 않고 고준석을 부르며 고국성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삼촌, 생신 축하합니다. 제가 준비한 작은 선물인데 받아 ㅜ세요.”곽승재는 고국성에게 자수정 상자를 건넸다.단은숙이 고국성을 대신해 선물을 받아 열어보았고 그것은 고국성이 좋아하는 고급 담배통이었다.고국성도 선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고맙다. 승재야. 마음 많이 써주었구나.”“삼촌이 좋아하실 것 같아 지난번 경매에서 보고 괜찮은 것 같아 바로 사 왔어요.”곽승재도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은서야, 너는 무슨 선물 준비했어?”곽승재가 자연스럽게 고은서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그를 째려보았다.‘일부러 이러는 거야!’그녀가 준비한 선물도 담배통이었는데 백화점에서 산 것이어서 곽승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곽승재가 먼저 선수를 친 상황에서 그녀는 준비한 선물을 자신 있게 꺼내 보일 수 없었다.“저희가 준비한 선물은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기 어려워요.”민시후가 고은서의 기분을 눈치채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민시후가 눈빛을 보내자 운전기사가 선물을 들고 들어왔다.고급 영양제뿐만 아니라 술, 담배 그리고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들어 있었다.고국성은 예술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우아함을 자랑하고 싶어 했고 특히 이런 고급스럽고 보기 드문 그림을 좋아했다.“시후, 안목이 좋네. 이 그림 정말 마음에 들어.”고국성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호칭마저 바꾸며 기쁜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고국성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좋은 선물이구나. 이제 외삼촌한테 효도할 줄도 아네.”고은서는 민시후의 도움에 감사했다.하지만 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고은서가 이런 자리에 민시후를 데려올 줄도 몰랐고 민시후가 이렇게까지 철저히 준비할 줄도 몰랐다.선물 경쟁에서 민시후는 완벽히 승리한 셈이었다.민시후는 고국성에게 그림을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단은숙에게 피부에 좋은 영양제를 고준석에게는 고급 옥돌
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온화한 표정을 한 유성준이 서 있었다.“성준 오빠.”고은서가 웃으며 그를 불렀다.유성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시후를 보았다.“이분은 네 친구야?”“네. 민시후예요.”민시후가 유성준을 향해 신사답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유성준도 신사답게 답례하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시후 씨.”두 사람이 잠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고국성이 민시후에게 다가왔다.“시후야,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저기 내 친구도 전문가야. 같이 얘기 나눠 보지 않을래?”고은서는 외삼촌의 이런 제안이 민시후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대신해 거절하려던 찰나 민시후가 답했다.“좋아요.”민시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삼촌께서 제가 너무 문외한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좋습니다. 은서야, 나 먼저 저기 가 있을게. 나중에 다시 올게.”가기 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말하고 유성준을 향해서도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와 고국성이 자리를 뜨자 유성준이 민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저 사람이 지난번에 네가 나한테 말한 사람이지?”고은서는 유성준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씁쓸함을 느끼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성준 오빠, 미안해요.”“바보같이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유성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시후 씨는 잘생기고 품격도 좋고 너를 아껴주는 것 같아. 네가 끌리는 것도 이해가 돼.”“성준 오빠도 좋은 사람이에요. 저를 지켜주려 한 오빠의 마음과 노력에 정말 감사해요.”고은서가 여전히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을 이었다.“더 이상 저에게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다른 여성분을 찾아보세요.”“널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야. 하지만 너에게 부담을 주려는 생각은 없어. MQ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나도 이 마음에 대하여 제대로 고민해 봐야겠지.”고은서가 얼른 답했다.“MQ일은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오빠 마음이 더 중요하죠.”“은서야, 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너를 기다리는 것에 습관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고 드러머의 타격은 천둥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가수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감을 끌어냈다.그 순간, 고은서는 완전히 분위기에 푹 빠져들었다. 마치 처음 밴드를 만났을 때의 설렘이 되살아난 듯, 음악의 리듬에 맞춰 형광봉을 흔들며 몸을 흔들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여유 속에서 고은서는 그저 즐거움에 젖어 들었다.콘서트의 분위기보다 민시후를 더 즐겁게 한 건 고은서가 온전히 음악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고은서가 주위 관중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 민시후는 그녀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공연이 끝나자 고은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민시후가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배고프지? 간장게장 맛집이 있어. 한번 가볼래?”세 시간 가까이 노래를 따라 부른 고은서는 배가 고팠고 간장게장 얘기만 듣고도 침이 고여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생각이야.”사람들이 많아 출입이 불편할까 봐 민시후는 차를 경기장 뒤쪽의 한적한 주차장에 세웠다.밤하늘 아래, 도시의 네온 불빛이 부드럽게 깜빡였고 오래된 수상한 SUV 한 대가 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 그 차는 그림자 속에 숨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은서와 민시후가 차에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눈부신 차 불빛이 켜졌다.두 사람이 반응할 시간도 없이 SUV가 미친 듯이 그들에게 돌진해 왔다!빠른 엔진 소리에 공기까지 진동하는 듯했고 고은서가 피하려는 순간, 차는 이미 눈앞까지 다가왔다!“조심해!”민시후가 소리치며 고은서를 힘껏 옆으로 밀쳤다.고은서는 민시후의 힘에 밀려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민시후는 공중으로 떠오르다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민시후의 머리가 시멘트 기둥에 부딪혔다.“시후 씨!”고은서가 놀란 얼굴로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하얀 후드티의 모자를 빨갛게 물들였다.그때, SUV의 차주는 도망치지 않고 후진한 뒤 다시 악셀을 힘껏 밟아 두 사람을 향해
민시후가 이미 아래층에 도착했다는 말에 고은서는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민시후는 오늘 좀 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흰색 후드티와 편안한 바지를 입은 그는 평소보다 더욱 잘생기고 매력적인 모습이었다.고은서도 편안함을 위해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이거 커플 룩 아니야?”민시후의 장난에 고은서가 그를 흘겼다.“말이라도 못 하면.”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근처에서 간단히 간식을 먹은 후 해성 공연장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고은서가 어젯밤에 민시현이 그를 찾아간 일에 대해 묻자 민시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말했다.“전에 했던 얘기랑 똑같아. 내가 반응 없으니까 형도 지루해져서 그냥 갔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민시현은 그렇게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고 민시후는 아마도 형한테 큰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고은서는 민시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바꿀 수 없었고 민시후에게 자신에 대한 감정을 접으라고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곧 공연장에 도착했다.밴드의 팬층은 유명 가수들에 비해 적었지만 여전히 많은 젊은 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포스터를 들거나 형광봉을 흔들며 들떠 있었고 어떤 팬들은 얼굴에 밴드 이름까지 그려 넣었다. 모두 오늘 밤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형광봉을 보고 있던 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물었다.“우리도 저런 거 하나 살까?”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렇게 흥분되거나 설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좋아!”두 사람은 형광봉과 손목띠를 고른 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LED 미키 머리띠를 골라줬다.“이건 너무 유치하지 않아?”고은서가 질색하며 거절했지만 민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띠를 그녀의 머리에 씌워버렸다.“유치하긴, 내 눈엔 예쁜데!”“정말? 그럼 시후 씨가 한번 써볼래?”고은서가 머리띠를 그에게 건넸다.민시후는 당연히 써볼 생각이 없었고 고은서는 강제로 그에게 씌우려 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웃으며 장난
퀸이 케이지를 할퀴자 고은서는 퀸을 안아 올려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돌볼 시간이 없으면 승연이에게 줘. 마침 심리 상담사가 승연이한테 온순한 반려동물을 키우라고 권했어.”“승연이한테는 다른 애를 선물할 거야. 퀸은 내 것이니까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거야.”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곽승재가 내 것이라고 말할 때 묘하게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퀸을 다시 케이지 안에 넣으며 물었다.“그래서 무슨 일이야?”곽승재가 공연 티켓을 내밀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청풍 밴드 좋아한다면서? 내일 해성에서 공연이 있는데 시간 되면 같이 보러 갈래?”그가 내민 티켓을 본 순간 고은서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전생에서도 그녀는 청풍 밴드의 공연 티켓을 산 적이 있었다.당시 고은서는 백유미와 곽승재의 관계가 질투나 자주 울고 떼를 쓰며 곽승재를 다그쳤고 그로 인해 둘 사이는 점점 냉랭해졌다.청풍 밴드가 해성에서 공연할 때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곽승재를 보지 못해 몹시 그리워했다.마침 두 사람이 할머니 댁에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생겨 그녀는 먼저 사과하며 공연을 함께 보러 가자고 제안했었다.전미자가 자리에 있어서일까, 곽승재는 예상과 달리 거절하지 않고 그날 밤 그녀와 함께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들뜬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공연 볼 준비에 열을 올리며 입을 옷을 골랐고 응원용 스티커와 도구도 샀으며 세심하게 물과 간식까지 준비했다.마침내 저녁이 되었고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출발하느냐고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회의가 있다며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그녀는 곽승재가 바쁘다는 것을 알았기에 신이 나서 먼저 공연장으로 향해 그를 기다렸다.저녁 6시 공연이 시작될 때부터 입장이 마감될 때까지 그리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만 곽승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집으로
범가온은 원래 이기적이고 거칠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아들을 잃고 희망이 사라진 그녀가 이제는 손자마저 잃었으니 얼마나 미쳐 날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은서가 박지연에게 물었다.“백유미 지금 상태는 어때?”“유산도 했고 가위에 찔려서 과다 출혈로 응급실로 실려 갔어. 치료가 늦어지면 목숨도 위험할 거야. 백승엽이 곽승재한테 찾아가 백유미를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고 의사도 바꿔 달라고 부탁했는데 곽승재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대. 아마 곽승재 아버지한테 가서도 부탁하겠지. 그쪽에서 신경 써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곽현수는 백유미가 자기 일을 대신 처리해 준 적이 있으니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터였다.게다가 백승엽과의 오랜 신뢰 관계도 있으니 백유미가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아마 백유미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은서는 박지연과 몇 마디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민시후는 백유미의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백유미가 비참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기에 그는 따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대신 그는 고은서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너 전에 청풍이라는 밴드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내일 그 밴드가 해성에서 공연한데. 같이 보러 가자.”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형 만나야 하잖아. 내일도 나랑 연락할 수 있을까?”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아무리 형이라도 나를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어. 맨날 상사처럼 나한테 훈계질이야. 듣기 싫어 죽겠어. 그러니까 그냥 내일 저녁 같이 밥 먹고 공연 보러 가는 걸로 하자.”“네 형은 더더욱 내가 너한테 나쁜 영향을 준다고 확신하겠네.”“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민시후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을 빨리 인정하면 내 연애를 막아보겠다는 헛된 꿈도 빨리 포기하겠지.”“나 거절해도 돼?”“안 돼!”결국 고은서는 민시후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한편으로는 민시후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
두 사람은 음식을 주문한 후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요리가 나오자 두 사람은 식사를 즐겼고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민시후가 입을 열었다.“이번 출장에서 유일 투자은행을 대신해 백씨 가문 산업에 있던 고객들과 접촉했어. 유일 투자은행이 가진 능력을 확인한 후 그쪽에서 협력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으니까 직원들에게 후속 조치를 하라고 하면 돼.”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순간 얼어붙었다.‘출장을 다녀온 게 나를 돕기 위해서였어?’“그냥 겸사겸사 진행한 거야. 미래 투자은행에도 진행할 프로젝트가 있었거든.”민시후는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그리고 백유미 말인데. 우리 쪽에서 한 의사를 찾아냈어. 그 사람이 당시 정신 감정이 조작된 거라고 증언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게 감옥에 갇혀 있는 것보다 나을 거야. 그러니까 이 증거는 당장 쓰지 말고 필요할 때 꺼내 써.”고은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밀려왔다.“민시후, 고마워.”“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민시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겉으로 보면 내가 널 돕는 것 같지만 사실 나를 돕는 거야. 네가 돈을 많이 벌어야 나랑 제대로 연애할 생각이 들지.”고은서는 그런 민시후를 바라보았다.평소에 보내오는 시선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되지 않았는데 눈동자까지 반짝이며 말하는 그를 보자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그래도 고마워.”고은서가 말을 마치자 핸드폰이 울렸다.박지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박지연은 다른 도시에 다녀오느라 휴가를 냈었는데 요즘 그 휴가로 인한 당직을 서느라 바빴다.시간이 나도 육현석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이렇게 연락 오는 일은 드물었다.“지연아, 무슨 일이야?”“은서야, 방금 육현석이 알려줬는데 백유미가 애를 지웠대!”박지연의 목소리가 컸던 탓에 옆에 있던 민시후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민시후와 시선을 마주한 고은서가 다시 박지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송민준은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싸울 듯한 두 형제를 바라보며 적절히 나서서 민시현을 말렸다.“형, 같은 가족끼리 싸우지 말고 시후랑 따로 시간 잡아서 얘기 나누시는 게 좋겠어요.”민시현도 지금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민시후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저녁에 집으로 갈게.”하지만 민시후는 그를 무시한 채 고은서의 손을 잡고 곧장 그들 앞을 지나쳤다.주차장으로 돌아와서도 민시후는 여전히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괜히 기분만 잡쳤네. 멀쩡히 잘 있다가 저 두 사람을 만날 줄이야...”반면 고은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민씨 일가 사람들이 원래부터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테니 말이다.“저녁에 형이 찾아온다는데 제발 싸우지 좀 마. 네 형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잖아.”그녀는 오히려 민시후를 위로하듯 장난스럽게 말했다.“재벌 집 도련님이 주변에 수많은 훌륭한 여자들을 두고 굳이 곽승재의 전처를 좋아한다면 나라도 나서서 반대했을걸?”“넌 왜 너를 그렇게 낮춰서 말해?”민시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날 낮추는 건 아니야. 다만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지. 난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신분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은서야, 그만해.”민시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 얘기는 수도 없이 했어. 넌 날 설득 못 해. 네가 날 덜 좋아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더 많이 좋아하면 되니까. 자, 밥 먹으러 가자.”가는 길에 민시후는 여시은을 떠봤던 결과를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 소득 없었어. 여시은이 곽승재를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겠어.”“여자들 직감이 그렇게 예리하다면서 너는 직감이 고장 난 거 아냐?”민시후가 놀리듯 말했다.고은서도 자신이 둔감해졌다고 느꼈다. 예전의 그녀라면 곽승재 주변에 작은 변화만 있어도 곧바로 경계 태세를 갖췄을 텐데 지금은 그냥 그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마음뿐
노을의 황금빛이 호수 위로 내려앉으며 물결이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났다.장난기가 발동한 고은서가 두 손을 벋어 저 멀리 호수 위의 부서진 다이아몬드 조각과 햇살을 한데 모아 손안에 담으려는 듯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차에서 내리던 민시후가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고은서는 고풍스러운 회랑 위에 흰색 니트에 연한 색의 롱스커트를 입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가녀린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잡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저녁노을이 드리운 호수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주황빛 석양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물들여 그녀의 존재 자체가 빛을 머금은 듯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그 순간 민시후는 먼 훗날 이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여전히 설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민시후, 거기서 뭐 해?”앞쪽에서 들려온 고은서의 청아한 목소리에 민시후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미안, 늦었지.”“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은서야, 손을 뻗어서 잡은 게 뭐야? 나도 좀 나눠 줄래?”고은서는 민시후의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아까 허공에 손을 뻗었던 모습을 떠올렸다.순간 얼굴이 뜨거워진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눈을 흘겼다.“공기야. 줄까?”그러자 민시후는 두 손을 공손히 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고은서는 어이없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시후야, 은서 씨?”그 순간 회랑 너머에서 익숙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자 송민준의 옆에는 강한 위압감을 풍기는 민시현도 함께 있었다.그들 뒤로는 레스토랑 직원들과 비서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고은서가 반응할 틈도 없이 민시후는 재빠르게 고은서를 등 뒤로 감쌌다.“여긴 무슨 일이야?”민시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레스토랑으로 예약할걸. 좋던 분위기 다 깨졌네.’민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민준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자리를 뜨라고 제스처를 보낸 뒤
서연정의 질문에 고은서는 왠지 모르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어제 그 남자는 분명 서연정을 향해 호감을 보였고 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그 장면을 보고 불필요한 오해를 할까 봐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죄송해요, 어머니.”서연정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널 탓하는 건 아니야. 넌 착한 아이니 나랑 승재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혹시 불필요한 오해로 갈등이 깊어질까 봐 말하지 않은 거겠지.”서연정이 말을 이었다.“어제 그 친구와는 꽤 오랜 인연이 있어. 예전에 Y 국에서 일했는데 최근에야 귀국했어.”서연정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 남자가 서연정 때문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눈치챘다.담담하면서도 온화한 서연정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머니, 그분 혹시 어머니 좋아하시나요?”서연정은 가볍게 웃었다.“우리 나이쯤 되면 좋아한다는 감정에 그리 열정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아. 그 사람은 젊을 때 우리 아버지의 신세를 졌고 오랜 세월 나를 가족처럼 생각해 왔어.”고은서는 순간 곽현수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또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게 그 사람 때문인지도 묻고 싶었지만 고은서는 궁금증을 꾹 참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서연정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승재 아버지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랑 상관없어.”고은서도 두 사람의 갈등이 단순한 오해나 제삼자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훨씬 깊고 복잡한 문제 같았다.그때 곽승연이 다가오며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전시회 관람을 마치자 이미 오후였다.서연정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할 때 마침 고은서의 전화가 울렸다.민시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은서야, 나 출장 끝나고 돌아왔어.”민시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리고 네게 전할 소식이 하나 있어.”“무슨 소식인데?”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궁금하면 시간 내서 이 도련님이랑 밥이
그 말에 서연정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고 담담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다음 날 일요일 아침 고은서는 서연정의 연락을 받았다.그녀는 해성에서 그림 전시회가 열리는데 곽승연을 데려가 보고 싶다며 함께 갈 시간이 있는지 물어왔다.서연정이 곽승연을 데리고 호원 저택으로 옮긴 이후로 고은서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서연정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여서 고은서는 함께 가기로 했다.고은서가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서연정과 곽승연은 이미 와 있었다.“언니!”오랜만에 만난 곽승연은 그녀를 보자 기뻐했다.“승연아, 어머니.”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언니! 이거 제가 그린 그림인데 선물로 줄게요.”곽승연은 그림을 내밀었다.고은서가 받아 보니 그것은 지난번 본가에서 자신이 드럼을 치던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비록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당당한 그녀의 자태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고마워, 승연아. 정말 잘 그렸네. 너무 마음에 들어.”고은서는 그림을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갖고 싶은 선물 있으면 언니가 사줄게.”곽승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그냥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언니처럼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고은서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승연아, 금방 좋아질 거야. 우리 들어가서 전시회 보자.”그림을 좋아하는 곽승연은 난해해 보이는 예술 작품도 깊이 빠져들어 감상했다.그녀가 몰입해서 감상하는 동안 고은서와 서연정은 휴게 공간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은서야, 승재 통해 보낸 캔들 잘 받았어. 고마워.”서연정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네가 요즘 바쁜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어.”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어머니, 방해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두 사람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고은서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은서야, 혹시 지난번 고양이 행사에 갔었어?”서연정이 갑자기 묻자 고은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