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가 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날 좋아하겠어? 게다가 곽승재를 엄청 싫어하잖아. 날 미워하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할 일인데 절대 날 좋아할 리가 없어.”박지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고은서의 말을 반박했다.“널 좋아하지 않는데 널 지금까지 도와줬다고? 그리고 널 좋아하지 않으면 네가 거절했다고 왜 화를 내는 이유가 뭔데?”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언제 거절했다고 그래? 민시후 나한테 고백한 적도 없어.”“고은서, 너 정말 바보 아니야? 좋아하는 감정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거야? 민시후가 그러는 게 고백하는 거랑 마찬가지잖아!”민시후가 그녀를 잘 대해준 건 사실이다. 가끔 알아듣지 못할 의미심장한 말을 할 때도 있었으나 전에도 그렇게 장난을 많이 쳐왔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고은서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지연아, 그만 말해. 나 갑자기 무서워지려고 그래. 소름 돋았어.”“...”박지연은 어이없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한 거야?”고은서가 물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물었다.“어제 하마터면 납치될 뻔했다며? 육현석이 알려줘서 다행이지 나한테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박지연은 그제야 고은서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말했다.“너무 갑작스레 발생한 일이기도 하고 또 오늘 종일 바쁘게 다니다 보니까 미처 너랑 말하지 못했어.”고은서가 미안해하며 대답했다.“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야? 성아연은 왜 갑자기 이런 일을 꾸민 거고? 육현석도 자세한 건 안 알려주던데.”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그러니까 고씨 집안을 망가뜨리려고 했는데 실패했고 또 그 일 때문에 네 숙모한테 시달림을 받았는데 그게 다 네 탓이라고 생각하고 널 해치려 했다는 거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박지연은 성아연이 고은서의 옛 베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몇 번 마주친 적도 있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런데 왜 분명히 백유미랑 손잡고 널 해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
곽승재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고은서, 나 배고파.”‘배고픈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고은서였지만 이내 곽승재에게 오늘 병원에서 그를 돌봐주기로 약속한 것이 생각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사실 고은서 입장에서는 굳이 누군가 옆에서 곽승재를 계속 간호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해준 걸 빌미로 간호를 요구하니 인간적으로 거절할 수 없었다.하여 고은서가 말했다.“알아서 뭐 좀 시켜 먹어. 난 조금 있다 갈게.”곽승재가 물었다.“넌 뭐 먹고 싶어?”곽승재의 속내를 알아차린 고은서가 바로 답했다.“나는 이미 먹었어.”“고은서, 이 이른 시간에 어디서 먹었는데?”곽승재가 태연하게 물었다.“그게...”“어깨 아파서 혼자 못 먹겠어. 이미 먹었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도 몇 시간 후 네가 배고플 때 같이 먹을래.”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오늘 나랑 무조건 밥을 먹어야겠다는 건가...’고은서는 예전 별장에 있을 때 매일 곽승재를 위해 한두 가지 요리를 준비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그녀는 고씨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는 귀한 아가씨였다. 하여 요리를 배우는 동안 수없이 칼에 베이고 불에 데며 고생했지만 곽승재가 좋아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모든 게 가치 있다고 여긴 시절도 있었다.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요리를 준비하여 곽승재가 집에 돌아와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렸지만 음식이 차갑게 식어갈 때까지 곽승재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그런 그가 이제 와서 부상까지 들먹이며 자신과의 식사를 요구하고 있다.‘정말 웃긴 상황이네.’고은서가 답했다.“매운탕, 매운 닭볶음탕, 마라탕 같은 자극적인 음식이 먹고 싶네.”음식에 관해 굉장히 까다로운 곽승재는 강한 맛이나 매운 음식, 냄새나는 음식 그리고 신선하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흥! 나랑 같이 밥 먹고 싶다고? 이 음식들 먹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그녀의 주문에 곽승재는 반박하지 않
하지만 빨간 국물과 위에 떠다니는 각종 향신료를 보며 곽승재는 마라탕이 도대체 어떤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그의 망설임과 싫어하는 기색을 알아챈 고은서가 일부러 재촉했다.“먹어 봐. 왜 안 먹어?”곽승재는 고은서의 재촉에 결국 마라탕을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입가로 가져가자 강렬한 매운 향이 코끝을 찔렀다. 곽승재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됐어.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이건 네가 좋아하는 그런 고급스러운 요리가 아니잖아.”고은서는 말하며 또 한 젓가락을 집어 입에 넣고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곽승재는 꾹 참다가 결국 마라탕을 입에 넣었다.순간 낯선 맛들이 입안에 퍼졌고 그는 식사 예절을 유지하려 애쓰며 간신히 뱉지 않고 견뎠다.고은서가 지켜보는 가운데 억지로 몇 번 씹자 음식물 속에 배어있던 고추기름이 흘러나와 그의 목구멍을 자극했다.갑작스러운 자극에 그는 저도 모르게 기침하기 시작했다.고은서가 근처에 있던 휴지통을 가리키며 말했다.“뱉어. 먹지도 못하면서 왜 억지로 먹으려고 그래?”그 말에 곽승재는 오히려 음식을 꿀꺽 삼켰다.“콜록! 콜록!”음식을 삼키자마자 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고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며 귀 끝까지 빨개졌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병을 열고 급히 물을 들이켰다.물병의 반 이상을 비운 후에야 그는 겨우 기침을 멈췄고 얼굴의 붉은 기운도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목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었다.고은서가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음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다른 것들도 시도해 볼래? 아마 마라탕보다 더 매울걸?”온몸이 불편했던 곽승재는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대체 뭐가 맛있다는 거야? 언제부터 이런 걸 좋아하게 된 거야?”예원 별장에서 그녀는 이런 종류의 음식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다.그의 말에 고은서는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난 처음부터 이런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했어. 하지만 네가 싫어하니까 예원 별장에서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차갑게 말했다.“이러는 거 정말 구질구질해 보여.”“은서야, 내가 어떻게 하면 만족하겠어?”곽승재의 어두운 눈동자에 깊은 음영이 드리워졌다.“왜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다정하면서 나한텐 이렇게 차가워?”고은서가 답했다.“날 존중한다면 제발 내 앞에 자꾸 나타나지 마.”“내가 왜 네 앞에 나타나는 건지는 너도 잘 알잖아.”곽승재의 눈빛은 더 어두워졌다.“은서야, 내가 이혼에 동의했던 건 외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압박 때문은 아니었어. 그저 네가 또다시 위험을 자초할까 봐 걱정돼서였어. 난 이혼 후에 네가 마음의 짐을 덜고 우리의 관계를 좀 더 평온한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길 바랐어. 더 이상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그런데 넌 왜 여전히 날 밀어내는 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싫어?”곽승재의 눈빛에 깃든 고통스러운 감정을 보며 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곽승재, 내가 이혼을 결심한 건 앞으로 너와 어떤 사이로도 엮이고 싶지 않아서야.”“왜 나랑 엮이고 싶지 않은데?”곽승재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쥐며 물었다.“민시후 때문이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이 그렇게 깊어진 거야? 민시후때문에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야?”고은서가 조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곽승재, 네가 이런 말 하는 걸 들으니 내가 더 가엾게 느껴진다.”전생에 8년간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그녀가 몇 달 만에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고 믿는 모습이 너무도 비참했다.‘내가 사랑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믿은 적 없는 건가...’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몸부림쳤지만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놔줘. 안 그러면 약속도 지키지 않을 거야.”곽승재는 싸늘한 그녀의 기운을 느꼈다. 또한 화가 난 그녀가 정말로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품으로 끌어당겨 꽉 껴안으며 낮고
죽을 먹은 곽승재는 노트북을 꺼내 일을 보기 시작했다.고은서도 데이터를 확인한 후 졸음이 몰려와 옆에 있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고른 숨소리를 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수중의 일을 멈췄다조명 아래 그녀의 작은 얼굴은 깨끗하고 뽀얗게 빛났다.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그녀는 입술을 살짝 내민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곽승재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의 찡그린 미간을 살짝 매만져 주려다 그녀가 자신을 꺼리는 것을 떠올리고는 이불을 걷으려던 손을 멈췄다....다음 날 고은서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곽승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였다.‘정말 잘도 잤네. 그것도 병실에서 곽승재가 있는데...’고은서는 기지개를 켜고 세면을 마친 뒤 간호사에게 곽승재가 퇴원 절차를 밟았는지 물었다.“그분 상태로 퇴원이라니요?”간호사가 답했다.“어젯밤에 급성 장염으로 응급실에 들어갔어요. 최소 이틀은 더 입원해야 할 겁니다!”고은서가 깜짝 놀라 물었다.“급성 장염이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간호사는 자극적인 음식을 섭취해 장에 자극이 간 것 같다고 설명을 덧붙였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곽승재가 억지로 삼킨 마라탕을 떠올렸다.‘설마 그것 때문인가? 곽승재 장은 정말 여리구나...’고은서는 어제 차려진 음식을 배불리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작 마라탕 한입에 장염이라니... 난 왜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거지? 너무 깊이 잠들었나?’고은서는 간호사에게 병실을 물어 찾아갔다.노크한 후 병실에 들어서니 곽승재가 병상에 누워 있었다.제대로 수지 못한 탓인지 그의 안색은 어젯밤보다 더 초췌해 보였다.하지만 병실 안에는 곽승재뿐만 아니라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전미자와 과일을 깎고 있는 장순이도 있었다.고은서가 노크하자 모든 시선에 그녀에게 쏠렸다.곽승재의 눈빛은 한층 밝아진 듯했다.고은서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반가운 마음으로 전미자를 불렀다.“할머니!”“은서야, 깼어?”전미자가 웃으며 물었다.
전미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자책하지 않아도 돼.”전미자는 그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듯 말했다.“승재가 말하길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먹었더니 장염에 걸렸다고 하더구나. 쟤는 어릴 때부터 장이 좋지 않았어. 스스로 조심하지 않은 탓이니 너랑은 상관없단다.”전미자는 상황을 짐작하고도 그녀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했다.고은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는 곽승재가 단순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줄 알았지 어릴 적부터 위장이 약한 줄은 몰랐다.전미자까지 병원에 온 걸 보면 곽승재의 상태가 꽤 심각한 듯했다.“아침에 할머니께서 전화가 왔는데 우연히 의사와 대화하는 소리를 들으셨어. 제대로 묻지도 않으시고 그대로 병원으로 오신 것뿐이야.”곽승재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무심하게 덧붙였다.“별일 아니야. 링거만 조금 맞으면 괜찮아 질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어젯밤엔 왜 안 불렀어?”곽승재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그만큼 나약하지 않아. 이런 작은 일은 혼자서도 충분해.”고은서는 직접 경험한 적은 없었지만 박지연에게 들은 적은 있었다.장염은 보통 급성으로 발병하며 통증이 극심해서 땀범벅이 되는 건 경증이고 심할 경우 실신하거나 쇼크 하기도 한다고 했다.‘가볍게 말해서 넘기는 건 날 배려하려고 그러는 거겠지...’“은서야, 승재는 여기서 쉬게 놔두고 바쁘지 않으면 나랑 햇볕이나 쬐러 갈까?”전미자가 제안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좋아요.”장순이는 병실에서 곽승재를 돌보겠다며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고은서가 전미자를 부축하며 병동 아래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은서야, 몸은 괜찮아?”전미자가 다정하게 물었다.고은서는 전미자가 이전에 옥상에서 뛰어내려 다친 일을 묻는다는 것을 알고 답했다.“할머니,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사실 크게 다치지도 않았어요.”“너 정말...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일 하면 안 돼! 생명보다 소중한 건 없어. 넌 아직 젊고 널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잖니. 네 목
고은서는 전미자가 갑자기 곽승재 부모의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물론 그녀도 궁금하긴 했지만 이는 어쨌든 어른들의 일이라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었다.전미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자 고은서도 솔직히 답했다.“네, 잘 이해되지 않아요.”서연정은 작은 딸을 데리고 해외로 떠날지언정 곽현수와 이혼하지 않았다.“연정이는 의리가 깊은 사람이야. 옛날에 승재 할아버지에게 큰 도움을 받았거든. 승재 아빠와 결혼한 것도 그녀의 아버지가 원했던 일이었어. 연정이는 아버지께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래서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도 끝까지 약속을 지키려 했던 거야. 지금까지 걔는 이혼 얘기를 꺼낸 적도 없어.”전미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지난번 네 일로 연정이가 한국에 왔을 때 네가 단호하게 이혼하는 걸 보고 연정이한테 말했어. 더 이상 약속 지킬 필요 없으니 현수와 이혼해도 괜찮다고 했지. 아무도 탓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거절하더구나. 지금 삶이 괜찮다며 이혼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구나.”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조금 놀랐다.‘아버님이 강압적인 힘을 써서 어머니가 이혼하지 못하도록 막은 줄 알았는데 어머니께서 이혼을 원하시지 않으셨던 거구나.’“은서야, 승재 부모의 사이가 승재에게 큰 영향을 끼쳤어. 그래서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야.”전미자가 고은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미안하다, 은서야. 너와 승재를 결혼시킨 건 내 욕심이었어. 처음부터 네가 승재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알고 너라면 승재가 결혼에 관한 생각을 바꿀 줄 알았어. 너랑 혼인신고 했을 때 난 정말 기뻤단다. 이제 의미 없는 말들이겠지만 그래도 말해주고 싶구나. 너희의 결혼이 표면적으로는 내 제안이었지만 승재가 너에게 전혀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니야.”전미자는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어제 곽승재도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하지만 고은서는 이제 그런 말들에 연연하지 않았다.“할머니, 승재와 저는 이제 이혼했어요. 감정이 있든 없든 이혼
카페 2층은 한적하니 사람이 없었다.2층으로 올라간 고은서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원지훈을 보았다.원지훈은 예전의 자신만만하고 거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후드티를 입은 채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마치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보였다.그럴 만도 한 것이 회사는 이미 파산 상태에 이르러 그를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사람도 많아진 것이다. 그로 인해 원지훈은 더 이상 과시하며 행동할 여유가 없었다.“여기.”그녀를 보자 원지훈이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고은서는 천천히 다가가 자리에 앉아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후 물었다.“무슨 일로 보자 한 거야? 백유미 쪽은 어떻게 됐어?”원지훈은 기분 나쁜 듯한 어조로 말했다.“핸드폰 프로젝트와 관련해 횡령한 사실을 알아챘어요. 욕하면서 받은 돈을 토해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더라고요. 체면도 내려놓고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하겠다고 빌면서 백유미 말을 듣겠다고 했더니 겨우 화를 풀더라고요.”프로젝트와 뇌물 수수 사건은 고은서가 꾸민 일이었으니 원지훈이 기분 나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은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하여 물었다.“그다음은? 백유미가 지훈 씨한테 무슨 요구를 했어?”원지훈은 테이블 위의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말했다.“고은혜를 손에 넣으면 이 일은 그냥 넘어가 주겠대요.”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곽승재와 이혼했는데 왜 백유미는 고씨 가문에 집착하는 걸까? 왜 계속 원지훈을 통해 고씨 가문에 접근하려는 거지? 대체 속셈이 뭘까?’“백유미도 고은혜가 지훈 씨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걸 알 텐데 어떻게 손에 넣겠다는 거야?”원지훈이 테이블에 놓인 생수를 마시고 돌려 말했다.“당연히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긴 하죠.”고은서가 미간을 더 깊이 찌푸리며 물었다.“백마 탄 왕자 놀이라도 하게?”그 수법은 원지훈이 전에 사용했던 것이었다.원지훈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설명했다.“고은혜가 옆 도시에서 디자인 전시에 참가 중이잖아요. 저녁이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
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또 우리 형 들먹이네? 곽승재, 너도 이 수밖에 안 되냐? 설마 나만 쫓아내면 은서 씨가 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민시후의 말은 곽승재의 정곡을 찔렀고 그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곽승재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마침 손을 씻고 다가온 고은서는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저 곽승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안 먹을 거면 아주머니한테 국만 싸달라고 해서 가져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으며 대답했다.“먹고 갈 거야.”고은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미숙은 주방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세 사람은 어색하지 않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피곤한 모습의 고은서를 본 민시후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나가기 전에 곽승재까지 데리고 떠났다.다음 날 오전, 고은서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어젯밤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던 두 노숙자의 혈액 검사 결과, 불법 약물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그 약물은 뇌를 자극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은서를 덮치려 한 것이었다.문제는 그 약물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였다. 조사 결과, 노숙자들이 먹은 음식과 술에서 검출되었고 누군가 일부러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고은서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회의실에는 송민아가 있었고 접견실 소파에는 송민준이 앉아 있었다.그날 개업식 이후, 고은서는 송민준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개업식에서 송민준의 정장을 엉망으로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린 고은서는 송민아에게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얼마였는지 물어봤었다. 그러나 송민아는 단칼에 보상을 거절했다.“겨우 정장 한 벌일 뿐인데 무슨 보상이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오빠도
“나 마침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려던 참이야.”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국을 끓였다고 하더라. 나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했어.”원래 기분이 좋지 않던 민시후는 곽승재가 고은서네 가정부를 핑계 삼아 온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그래도 곽 대표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그리고 이어 고은서를 향해 투정 부렸다.“나도 배고픈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뜨끈한 국 한 그릇 먹어도 될까?”민시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 해.”그리하여 곽승재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고은서는 민시후의 차에 올랐다.민시후의 차가 점점 멀어져갔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주민기는 밤바람 속에서 쓸쓸해 보이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안쓰러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애써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곽승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하아... 대표님의 아내 되찾기 여정은 끝도 없이 험난하구나.’주민기가 속으로 한탄하던 중, 갑자기 곽승재의 시선이 그를 스쳤다.주민기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대표님, 그래도 가시겠습니까?”곽승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고가 났던 골목에 CCTV 설치해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실력 좋은 운전사를 붙이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주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막 올라가려는데 저쪽에서 막 도착한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접 운전해서 온 듯했고, 비서는 곁에 없었다.민시후는 그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고은서는 곽승재를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사모님, 곽 대표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안 오셨나요?”
고은서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후 씨,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재벌가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시후 씨가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 아버님과 형도 그냥 이성 친구라 생각하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그녀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포기하기를 원하는 거야?”고은서는 다소 수척해진 민시후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사실 시후 씨도 잘 알잖아. 1년이 지나도 가족분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민씨 가문에선 나와 곽 씨 집안의 혼인 관계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만약 고은서가 예전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민씨 가문에서도 그걸 덮을 수 있었겠지만 곽승재의 전처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큰 문제였다.민씨 가문 같은 재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기에 그녀가 며느리가 되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은서 씨, 아직도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야?”민시후의 눈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아니, 시후 씨 마음을 알아. 문제는 나야.”고은서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내가 정말 시후 씨를 사랑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시후 씨 가족의 태도나 외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만큼 시후 씨에 대한 감정이 부족해. 그래서 시후 씨 가족분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부적인 이유도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는...”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급하게 말했다.“그러지 마,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잖아.”고은서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살며시 민시후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걸 시후 씨도 알 거야. 그러니 그런 고집은 의미가 없어.”민시후는 여전히 고은서를 끌어안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