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빨간 국물과 위에 떠다니는 각종 향신료를 보며 곽승재는 마라탕이 도대체 어떤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그의 망설임과 싫어하는 기색을 알아챈 고은서가 일부러 재촉했다.“먹어 봐. 왜 안 먹어?”곽승재는 고은서의 재촉에 결국 마라탕을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입가로 가져가자 강렬한 매운 향이 코끝을 찔렀다. 곽승재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됐어.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이건 네가 좋아하는 그런 고급스러운 요리가 아니잖아.”고은서는 말하며 또 한 젓가락을 집어 입에 넣고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곽승재는 꾹 참다가 결국 마라탕을 입에 넣었다.순간 낯선 맛들이 입안에 퍼졌고 그는 식사 예절을 유지하려 애쓰며 간신히 뱉지 않고 견뎠다.고은서가 지켜보는 가운데 억지로 몇 번 씹자 음식물 속에 배어있던 고추기름이 흘러나와 그의 목구멍을 자극했다.갑작스러운 자극에 그는 저도 모르게 기침하기 시작했다.고은서가 근처에 있던 휴지통을 가리키며 말했다.“뱉어. 먹지도 못하면서 왜 억지로 먹으려고 그래?”그 말에 곽승재는 오히려 음식을 꿀꺽 삼켰다.“콜록! 콜록!”음식을 삼키자마자 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고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며 귀 끝까지 빨개졌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병을 열고 급히 물을 들이켰다.물병의 반 이상을 비운 후에야 그는 겨우 기침을 멈췄고 얼굴의 붉은 기운도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목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었다.고은서가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음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다른 것들도 시도해 볼래? 아마 마라탕보다 더 매울걸?”온몸이 불편했던 곽승재는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대체 뭐가 맛있다는 거야? 언제부터 이런 걸 좋아하게 된 거야?”예원 별장에서 그녀는 이런 종류의 음식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다.그의 말에 고은서는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난 처음부터 이런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했어. 하지만 네가 싫어하니까 예원 별장에서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차갑게 말했다.“이러는 거 정말 구질구질해 보여.”“은서야, 내가 어떻게 하면 만족하겠어?”곽승재의 어두운 눈동자에 깊은 음영이 드리워졌다.“왜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다정하면서 나한텐 이렇게 차가워?”고은서가 답했다.“날 존중한다면 제발 내 앞에 자꾸 나타나지 마.”“내가 왜 네 앞에 나타나는 건지는 너도 잘 알잖아.”곽승재의 눈빛은 더 어두워졌다.“은서야, 내가 이혼에 동의했던 건 외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압박 때문은 아니었어. 그저 네가 또다시 위험을 자초할까 봐 걱정돼서였어. 난 이혼 후에 네가 마음의 짐을 덜고 우리의 관계를 좀 더 평온한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길 바랐어. 더 이상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그런데 넌 왜 여전히 날 밀어내는 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싫어?”곽승재의 눈빛에 깃든 고통스러운 감정을 보며 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곽승재, 내가 이혼을 결심한 건 앞으로 너와 어떤 사이로도 엮이고 싶지 않아서야.”“왜 나랑 엮이고 싶지 않은데?”곽승재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쥐며 물었다.“민시후 때문이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이 그렇게 깊어진 거야? 민시후때문에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야?”고은서가 조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곽승재, 네가 이런 말 하는 걸 들으니 내가 더 가엾게 느껴진다.”전생에 8년간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그녀가 몇 달 만에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고 믿는 모습이 너무도 비참했다.‘내가 사랑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믿은 적 없는 건가...’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몸부림쳤지만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놔줘. 안 그러면 약속도 지키지 않을 거야.”곽승재는 싸늘한 그녀의 기운을 느꼈다. 또한 화가 난 그녀가 정말로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품으로 끌어당겨 꽉 껴안으며 낮고
죽을 먹은 곽승재는 노트북을 꺼내 일을 보기 시작했다.고은서도 데이터를 확인한 후 졸음이 몰려와 옆에 있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고른 숨소리를 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수중의 일을 멈췄다조명 아래 그녀의 작은 얼굴은 깨끗하고 뽀얗게 빛났다.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그녀는 입술을 살짝 내민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곽승재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의 찡그린 미간을 살짝 매만져 주려다 그녀가 자신을 꺼리는 것을 떠올리고는 이불을 걷으려던 손을 멈췄다....다음 날 고은서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곽승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였다.‘정말 잘도 잤네. 그것도 병실에서 곽승재가 있는데...’고은서는 기지개를 켜고 세면을 마친 뒤 간호사에게 곽승재가 퇴원 절차를 밟았는지 물었다.“그분 상태로 퇴원이라니요?”간호사가 답했다.“어젯밤에 급성 장염으로 응급실에 들어갔어요. 최소 이틀은 더 입원해야 할 겁니다!”고은서가 깜짝 놀라 물었다.“급성 장염이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간호사는 자극적인 음식을 섭취해 장에 자극이 간 것 같다고 설명을 덧붙였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곽승재가 억지로 삼킨 마라탕을 떠올렸다.‘설마 그것 때문인가? 곽승재 장은 정말 여리구나...’고은서는 어제 차려진 음식을 배불리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작 마라탕 한입에 장염이라니... 난 왜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거지? 너무 깊이 잠들었나?’고은서는 간호사에게 병실을 물어 찾아갔다.노크한 후 병실에 들어서니 곽승재가 병상에 누워 있었다.제대로 수지 못한 탓인지 그의 안색은 어젯밤보다 더 초췌해 보였다.하지만 병실 안에는 곽승재뿐만 아니라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전미자와 과일을 깎고 있는 장순이도 있었다.고은서가 노크하자 모든 시선에 그녀에게 쏠렸다.곽승재의 눈빛은 한층 밝아진 듯했다.고은서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반가운 마음으로 전미자를 불렀다.“할머니!”“은서야, 깼어?”전미자가 웃으며 물었다.
전미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자책하지 않아도 돼.”전미자는 그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듯 말했다.“승재가 말하길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먹었더니 장염에 걸렸다고 하더구나. 쟤는 어릴 때부터 장이 좋지 않았어. 스스로 조심하지 않은 탓이니 너랑은 상관없단다.”전미자는 상황을 짐작하고도 그녀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했다.고은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는 곽승재가 단순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줄 알았지 어릴 적부터 위장이 약한 줄은 몰랐다.전미자까지 병원에 온 걸 보면 곽승재의 상태가 꽤 심각한 듯했다.“아침에 할머니께서 전화가 왔는데 우연히 의사와 대화하는 소리를 들으셨어. 제대로 묻지도 않으시고 그대로 병원으로 오신 것뿐이야.”곽승재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무심하게 덧붙였다.“별일 아니야. 링거만 조금 맞으면 괜찮아 질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어젯밤엔 왜 안 불렀어?”곽승재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그만큼 나약하지 않아. 이런 작은 일은 혼자서도 충분해.”고은서는 직접 경험한 적은 없었지만 박지연에게 들은 적은 있었다.장염은 보통 급성으로 발병하며 통증이 극심해서 땀범벅이 되는 건 경증이고 심할 경우 실신하거나 쇼크 하기도 한다고 했다.‘가볍게 말해서 넘기는 건 날 배려하려고 그러는 거겠지...’“은서야, 승재는 여기서 쉬게 놔두고 바쁘지 않으면 나랑 햇볕이나 쬐러 갈까?”전미자가 제안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좋아요.”장순이는 병실에서 곽승재를 돌보겠다며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고은서가 전미자를 부축하며 병동 아래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은서야, 몸은 괜찮아?”전미자가 다정하게 물었다.고은서는 전미자가 이전에 옥상에서 뛰어내려 다친 일을 묻는다는 것을 알고 답했다.“할머니,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사실 크게 다치지도 않았어요.”“너 정말...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일 하면 안 돼! 생명보다 소중한 건 없어. 넌 아직 젊고 널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잖니. 네 목
고은서는 전미자가 갑자기 곽승재 부모의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물론 그녀도 궁금하긴 했지만 이는 어쨌든 어른들의 일이라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었다.전미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자 고은서도 솔직히 답했다.“네, 잘 이해되지 않아요.”서연정은 작은 딸을 데리고 해외로 떠날지언정 곽현수와 이혼하지 않았다.“연정이는 의리가 깊은 사람이야. 옛날에 승재 할아버지에게 큰 도움을 받았거든. 승재 아빠와 결혼한 것도 그녀의 아버지가 원했던 일이었어. 연정이는 아버지께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래서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도 끝까지 약속을 지키려 했던 거야. 지금까지 걔는 이혼 얘기를 꺼낸 적도 없어.”전미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지난번 네 일로 연정이가 한국에 왔을 때 네가 단호하게 이혼하는 걸 보고 연정이한테 말했어. 더 이상 약속 지킬 필요 없으니 현수와 이혼해도 괜찮다고 했지. 아무도 탓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거절하더구나. 지금 삶이 괜찮다며 이혼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구나.”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조금 놀랐다.‘아버님이 강압적인 힘을 써서 어머니가 이혼하지 못하도록 막은 줄 알았는데 어머니께서 이혼을 원하시지 않으셨던 거구나.’“은서야, 승재 부모의 사이가 승재에게 큰 영향을 끼쳤어. 그래서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야.”전미자가 고은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미안하다, 은서야. 너와 승재를 결혼시킨 건 내 욕심이었어. 처음부터 네가 승재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알고 너라면 승재가 결혼에 관한 생각을 바꿀 줄 알았어. 너랑 혼인신고 했을 때 난 정말 기뻤단다. 이제 의미 없는 말들이겠지만 그래도 말해주고 싶구나. 너희의 결혼이 표면적으로는 내 제안이었지만 승재가 너에게 전혀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니야.”전미자는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어제 곽승재도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하지만 고은서는 이제 그런 말들에 연연하지 않았다.“할머니, 승재와 저는 이제 이혼했어요. 감정이 있든 없든 이혼
카페 2층은 한적하니 사람이 없었다.2층으로 올라간 고은서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원지훈을 보았다.원지훈은 예전의 자신만만하고 거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후드티를 입은 채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마치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보였다.그럴 만도 한 것이 회사는 이미 파산 상태에 이르러 그를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사람도 많아진 것이다. 그로 인해 원지훈은 더 이상 과시하며 행동할 여유가 없었다.“여기.”그녀를 보자 원지훈이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고은서는 천천히 다가가 자리에 앉아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후 물었다.“무슨 일로 보자 한 거야? 백유미 쪽은 어떻게 됐어?”원지훈은 기분 나쁜 듯한 어조로 말했다.“핸드폰 프로젝트와 관련해 횡령한 사실을 알아챘어요. 욕하면서 받은 돈을 토해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더라고요. 체면도 내려놓고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하겠다고 빌면서 백유미 말을 듣겠다고 했더니 겨우 화를 풀더라고요.”프로젝트와 뇌물 수수 사건은 고은서가 꾸민 일이었으니 원지훈이 기분 나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은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하여 물었다.“그다음은? 백유미가 지훈 씨한테 무슨 요구를 했어?”원지훈은 테이블 위의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말했다.“고은혜를 손에 넣으면 이 일은 그냥 넘어가 주겠대요.”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곽승재와 이혼했는데 왜 백유미는 고씨 가문에 집착하는 걸까? 왜 계속 원지훈을 통해 고씨 가문에 접근하려는 거지? 대체 속셈이 뭘까?’“백유미도 고은혜가 지훈 씨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걸 알 텐데 어떻게 손에 넣겠다는 거야?”원지훈이 테이블에 놓인 생수를 마시고 돌려 말했다.“당연히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긴 하죠.”고은서가 미간을 더 깊이 찌푸리며 물었다.“백마 탄 왕자 놀이라도 하게?”그 수법은 원지훈이 전에 사용했던 것이었다.원지훈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설명했다.“고은혜가 옆 도시에서 디자인 전시에 참가 중이잖아요. 저녁이
고은서는 원지훈이 돈을 요구하고 있음을 한 번에 알아차렸다.‘역시 욕심이 많네. 두 번이나 줬는데 또 요구하다니...’고은서가 답했다.“돈은 부족하지 않게 줄 테니 일이나 제대로 처리해. 모든 과정을 보고하고 백유미의 신임을 얻은 후엔 즉시 내가 말한 일을 처리해야 해.”원지훈의 얼굴에는 다시금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떠올랐다.“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지훈 씨 어머니 쪽은 어때? 무슨 이유로 백유미네 가정부로 들어가게?”고은서가 물었다.원지훈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백유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라고 했어요. 백유미가 매일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 걸 보고 음식 해주고 청소 해주면서 도와주겠다고 하면 돼요. 안 그래도 백유미는 엄마로 저를 통제하고 싶어 했으니 분명 동의할 거예요.”원지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좋네. 백유미가 월급을 주지 않으면 내가 줄게. 두 사람이 헛수고하게 할 수는 없잖아.”그 말을 들은 원지훈은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역시 누나! 시원시원하네요. 백유미는 돈도 짜게 주면서 줄 때마다 생색내거든요. 가끔은 우리가 무릎 꿇고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분위기에요.”원지훈의 아첨에도 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럼 난 먼저 갈게. 바로 은혜한테 연락할 테니 시시각각 보고해 줘.”말을 마친 고은혜가 카페를 나섰다.차에 올라탄 고은서는 먼저 박지연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고은혜의 번호를 눌렀다.“무슨 일이야?”고은혜가 물었다.“며칠이나 있었는데 전시는 아직도 안 끝난 거야?”“거의 끝났어. 여기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고 몇몇 디자이너들과 연락처도 주고받아서 조금 더 교류하고 배우고 싶어서.”고은서가 계속 물었다.“아직도 밤마다 술집 가서 놀아?”잠시 멈칫하며 당황한 고은혜가 곧 화를 냈다.“고은서! 무슨 뜻이야? 나한테 사람이라도 붙인 거야?”고은서는 고은혜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원지훈을 통해 알게 된 일과 그가 계획 중인 일을 설명했다.
고은서는 지금 당장 고은혜에게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는 고은혜를 설득할 수 없었다.‘은혜도 이제 스무 살이니 가문에 대한 책임도 얼마간 져야지.’그래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원지훈을 이용해 고씨 가문에 침투해 가문을 몰락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고은혜에게 털어놓았다.성아연이 백유미의 협력자라는 사실도 함께 말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혜는 충격에 휩싸였다.그녀를 놀라게 한 건 성아연이 아니었다. 성아연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단은숙에게서 들은 적이 있던 터라 인성에 문제 있는 사람이 매수당하는 일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오히려 고은혜를 충격에 빠뜨린 건 백유미의 계획이었다.고은서가 몇 번이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적 있다 보니 고은혜도 자연스럽게 백유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고은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곽승재 같은 고고한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을 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설마 백유미가 곽승재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까지 손을 뻗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고은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이미 이혼 했잖아. 그런데 왜 백유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고은서가 답했다.“나도 그 점이 이해가 안 돼. 곽승재가 여전히 나에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 가문을 무너뜨려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르지. 어쨌든 너는 이 일만 미리 알고 있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원지훈한테도 경계심은 늦추지 말고. 절대 원지훈이 하는 말에 넘어가서는 안 돼. 그놈은 인성만 나쁜 게 아니라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범죄 기록까지 있어.”고은서는 전생에 고은혜가 원지훈의 말에 속아 넘어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이번 생에서는 조금 더 경계심을 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원지훈이 또 다른 수를 쓰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고은서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불쾌한 듯 말했다.“그런 사람한테 속아 넘어갈 리가 있겠어? 네가 한 얘기만 들어도 역겹고 무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